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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불대27기 원문보기 글쓴이: 연봉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天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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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결사문’ 지은 뛰어난 문장가
백련사(白蓮社) 2세 사주인 정명국사 천인과 함께 출가하여 동문수학한 법형제로서 만덕산 백련사 제4세 사주(社主)가 되어 원묘국사 요세(1163~1245)가 창도한 천태종의 대중불교 운동을 계승 발전시킨 이는 진정국사(眞靜國師) 천책()이다. 그는 국사의 지위에까지 오른 고승일 뿐 아니라 특히 문장이 뛰어나서 조선 말기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신라와 고려의 명 문장가로서 최치원, 천책, 이규보의 3인을 꼽기도 하였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글만 익히던 천책은 사람의 왕래가 드물고 궁벽한 곳에서 밭일도 하고 경전을 읽고 풀이하기도 하면서 도업을 닦아나갔다. 4년 뒤인 임진년(1232)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스승인 요세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처음으로 열면서 천책에게 그 시작을 알리는 글인 ‘보현도량기시소(普賢道場起始疏)’를 쓰도록 하였다. 보현도량이란 〈법화경〉을 수지하는 사람을 보호하겠다는 보현보살의 서원에 의지하여 일정한 기간 동안 〈법화경〉을 읽고 실천하는 수행처이다. 이 도량에 참여하면 매일 여섯 차례 예불을 드리고 육근(六根)을 참회하며 독경과 참선을 하는 용맹정진을 실천한다. 그러면 상아가 여섯 개인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3ㆍ7일 안에 현전하게 된다고 한다. 천책도 물론 대중들과 함께 요세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성실하게 수행을 마쳤다.
이로부터 다시 4년 뒤에 천책은 요세의 명에 의하여 ‘백련결사문(白蓮結社文)’을 지었다. 요세는 희종 4년(1208) 약사난야에서 천태를 알려야 할 자신의 책무를 통감한 뒤부터 독경, 참회, 정토행 등 법화 원교(圓敎)에 의거한 대중불교 운동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백련결사문을 반포함으로써 자신이 이끄는 수행단체의 명칭과 실천 내용을 내외에 분명하게 밝히게 된 것이다. 승속이 함께 모여 수행정진을 하는 백련결사 운동은 비록 남쪽 끝의 외진 곳에서 전개된 것이지만 적지 않은 대중들이 참석하였고 천책은 요세를 보필하면서 이 운동을 훌륭하게 이끌어 나갔다. 출가 후 오로지 요세를 보필하면서 수행에만 매진하던 천책은 법랍이 10년을 넘자 조금씩 타지를 다니면서 외부인들과 교유를 시작하였다. 관리들과 시문을 주고받기도 하고 선사들과 문답을 하여 남종선과 북종선의 특징을 살피기도 하였다. 화엄과 기신론 유식과 계율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공부하였다. 고종 28년에는 영흥산(靈興山)의 보현사(普賢社)에서 안거하였다고 하는데 정확한 전후 사정은 알 수가 없다. 고종 30년(1243) 상주목사 최자가 공덕산(功德山)에 미면사(米麵寺)를 중수하고 임금께 청하여 천책을 주지로 초빙하였다. 미면사는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는데 원효대사가 〈법화경〉 설할 때의 상서로운 일로 인해 백련사라고도 불리던 절이다. 또한 공덕산은 신라 진평왕 시절 사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 사방 1장 남짓한 큰 바위가 공중에서 떨어졌기 때문에 사불산(四佛山)이라고도 부르며 당시 이를 기이하게 여긴 왕에 의해 대승사(大乘寺)가 건축되었다고 한다. 미면사와 대승사 모두 신기하고도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찰이지만 당시에는 거의 폐사 상태였는데 최자에 의해 미면사가 60칸 규모로 복원된 것이다. 최자는 원래 천인을 이곳 주지로 초빙하려 하였으나 백련결사의 주맹을 천인에게 잇게 하려는 요세의 뜻에 따라 천책이 주석하게 되었다. 천책은 중수된 미면사와 대승사를 둘러보고 이러한 유래를 적은 ‘유사불산기(遊四佛山記)’를 썼는데 지금까지 전해지는 명문이다. 현재 미면사는 폐사가 되어 절터만 남아있으나 대승사는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현재 직지사의 말사로서 보존되고 있다. 천책은 다음해 8월 두세 명의 도반과 함께 미면사에 도착하여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대중들을 모아 요세가 펼친 방식 그대로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이로부터 이곳은 동백련(東白蓮), 만덕산은 남백련(南白蓮)이라 부르게 되었다. 다음해인 을사년(1245)에 스승인 요세가 입적하고 남백련의 사주(社主)는 법형인 천인이 계승하였다. 2년 뒤에는 몽고가 침입해 옴에 따라 남해의 한 암자로 가서 난을 피하였다. 다시 1년 뒤인 무신년(1248) 8월에는 천인이 백련사 주맹을 제자인 원환(圓晥)에게 맡기고 입적하였다. 하지만 원환은 무슨 이유인지 백련사를 오래 이끌어 가지 못하였다. 천책이 만덕산에 돌아가서 제4세 사주로서 백련결사 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대중들과 함께 참선과 독경 등을 계속하는 틈틈이 여러 가지 글을 썼다. 1264년에 ‘법화경수품찬(法華經隨品讚)’을 썼고 1268년에는 용혈암(龍穴庵)에 머물며 임계일(林桂一) 등 여러 명의 관리들과 시문을 주고받았다. 1270년에는 〈해동법화전홍록(海東法華傳弘錄)〉을 탈고하였다. 이 책은 〈법화경〉을 신행하면서 일어난 영험담을 모은 4권짜리 저술이지만 지금은 전하지 않고 내용의 일부가 고려 말 천태종 승려 요원(了圓)이 편찬한 〈법화영험전〉에 전해지고 있다. 〈해동법화전홍록〉을 저술한 곳도 용혈암인데 천책은 만년에는 백련사 주맹을 다른 이에게 부촉하고 이곳에 옮겨 오래 은거한 듯하다. 만덕산 남쪽의 부속 암자인 용혈암은 천인도 입적을 앞두고 머문 곳이었다. 천책이 이곳에 오래 머물자 사람들은 그를 용혈대존숙(龍穴大尊宿)이라고 불렀다. 천책이 입산한 동기와 출가 초기의 활동은 자신이 쓴 글을 통해 상당히 상세하게 알려졌으나 말년의 활동이나 입적시기와 관련해서는 모호한 점이 많다. 1270년 무렵 고려는 몽고에 굴복하였고 1272년까지 3년간 가까운 진도에서는 삼별초(三別抄)의 항몽이 3년간 이어졌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의 글들을 모은 시문집인 〈호산록(湖山錄)〉이 완성된다. 그리고 진정(眞靜)이라는 시호와 함께 국사로 봉해진 것도 이 무렵인 듯하다. 이 이후 1293년에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3권을 썼고 〈선문강요집(禪文剛要集)〉 1권도 남아 있으나 이 둘은 다른 사람의 저술이라는 견해도 있다. 조선 후기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다산 정약용은 백련사의 옛 전통을 전해 듣고는 해마다 한 번씩 용혈암에 찾아가 천책을 생각하면서 그의 뛰어난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제자들을 서울로 보내 자료를 모으게 하고 자신이 감수한 〈만덕사지(萬德寺志)〉를 편찬하였는데 ‘만덕사는 고려 8국사의 도량’이라는 글로 첫 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그로 인해 현재 천태종에서 펼친 백련사 대중불교 운동의 모습이 일부나마 전해지고 있으니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