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천수 1학기 화요시조 창작 교실 강의 자료

[채천수]

대구시조 창작 교실 (채천수 강사 원고)

1. 좋은 시조란

가. 독자(소비자)의 입장에서

1)낭송을 했을 때 개인적 정서에 즐거움과 재미를 주며 자기 삶에 의미 있는 파문을 그릴 때

2)주어진 시의 내용이 담고 있는 어떤 대상(사실)이나 혹은 대상과 대상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이나 원리 법칙이 미학적으로 새로운 발견을 줄 때

나. 시인(생산자)의 입장에서

1) 시대정신이 배어있는 사회 현상을 언어 미학적으로 잘 녹였는가?

내 머리에 맞는 모자는 어떤 가게에도 없다/더욱 슬픈 일은 이 머리통이 그걸 잊고 /멋있는 모자를 보면 쓸려고 하는 것이다.//봄날 문무학 형과 문학기행을 같이 갔는데 /교감된 기념으로 모자를 하나 사주신다며/모자를 다섯 번씩이나 씌워보더니 포기했다. //너는 신의 실수라는 형의 웃음 섞인 말에/머리가 사양한다며 한참 같이 웃었지만/준다고 다 받느냐며/요 머리통이 중얼대네!    -채천수「요 머리통!」전문

면 소재지 도로 가에 낡은 현수막 하나

이곳과 그곳이 저렇듯 함께 아픈 표현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

 017-×××-××××

어휴, 미안해서 누굴 어떻게 골라요

어머니 모시면서 농사짓고 살면 돼요

베트남 예비신부도 그 말뜻 알았으리.

들꽃끼리 모여 사는 어느 골짝 하늘 아래

소외와 가난도 일구고 보듬으면

사랑은 산도라지 꽃

절로 피고 진다고.   -채천수 「베트남 처녀와 결혼하세요」전문

2) 지성에서 영성으로 향하는 영원성이 내포 되어 있는가?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하나 둘 떼 지어 빠져 나갑니다  

                                                   -정호승「하늘의 그물」전문

3) 적용된 가락과 운율이 시의 내용을 살렸는가?

 모든 詩의 어미는 노래다.

ꡐ 가락ꡑ은 정서적으로 긴장과 풀림을 대표로 하는 음의 흐름 아닌가? 그리고ꡐ운율ꡑ이란 가락이 詩文에서 음성적 형식을 빌려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일 터. 

  詩에서 이런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데 1900년 이후로 시조처럼 정형이란 형식의 옷을 빌려 입은 詩와는 그 형식미가 사뭇 다른 자유시가 오늘날 양적으로 팽배하다보니 詩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던 언어 호흡인 가락의 律格이 부서지면서 散文에 견주어 볼 때 詩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절제성과 균제미, 함축을 통한 여백의 울림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기존문화의 부정이나 비판에서 새로운 문화가 창출된다는 설익은 인식이 범한 오류였다. 혁신이나 실험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문화의 먼지나 폐습은 당연히 혁신과 실험의 철퇴를 맞아야 하지만 詩가 품고 있는 본질적 品格을 그르치는 것은 분명 문화를 퇴보시키는 것이다.

  시조라는 문학 장르가 전통을 그냥 고수하는 것처럼 일반 독자나 자유시인들이 인식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시각이다. 시의 내용이ꡐ가락과 운율ꡑ에 힘입어야 올곧은 시대정신을 더 훌륭히 구현할 수 있을 때 쓰는 詩가 시조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조는 정형에 갇힌 詩가 아니라 정형의 필연성을 갖춘 시로서 그 가치가 빛을 발한다.  

아직도  안동정류장까지는 30분이나 남았는데

친구 결혼식에서 마신 술이 탈이었다

손가락을 쿡쿡 눌러 신경도 옮겨보지만

온몸에 소름이 돋는 진퇴양난 안절부절

속에서 하는 욕을 잘 받아 달래면서

별짓을 다 하다가 실수 없이 다 온 순간

체면은 다 내팽개치고 날 살려라 내달렸지

경찰이 소매치기로 알고 그때 같이 달렸다나. 

-채천수 「이십 년이 넘었네!」전문   

4) 대상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새롭고 실험정신이 작품으로 성공했는가?

모래를 치는 金氏

                               채 천 수

막일에 서툰 金氏 모래를 체로 친다

가차 없이 거부당한 체 눈보다 굵은 모래

金氏를 체로 친 사회

좁

은

문

이

보

인

다.

5) 보고 듣고 쓴 시조가 아닌 겪고 발견하여 쓴 것으로 독자의 상상력을 키우는 시조인가?

턱턱 갈라터진 소나무 껍질 같은/옆집 할아버지 온몸에 저승꽃이 폈다/그 누가 뿌린 씨앗인가 비로소 만개했다.//내 때수건이 팔순의 이 꽃잎들을 어루만지다/굽은 등 능선에 오면/ 육신은 서정소설 /단청을 다 벗겨버린 비바람이 묻어난다.//이제 자네 등도 한번 내 봐 하실 때는 /썩 친하진 않아도 그 쩌릿한 한마디에/불현듯 몸과 몸 사이 환한 등이 켜진다.

                                  -채천수「목욕탕에서」전문

6) 퓨전을 통해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던지는가?

경주박물관 앞마당/봉숭아도 맨드라미도 피어 있는 화단가/목 잘린 돌부처들 나란히 앉아/햇살에 눈부시다//여름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조르르 관광버스에서 내려/머리 없는 돌부처들한테 다가가/자기 머리를 얹어본다//소년 부처다/누구나 일생에 한 번씩은/부처가 되어보라고/부처님들 일찍이 자기 목을 잘랐구나

                                  -정호승「소년 부처」전문

2.관찰과 성찰의 문제

가. 觀察(새로움이나 법칙의 발견)

 가령 그냥 돌이 하나 있다고 보면 그것은 사실의 눈이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좀더 자세히 관찰해서 그 돌의 일부가 흙에 묻혀있고, 나머지 부분은 드러난 돌부리로 있다는 것을 보았다면 그것은 존재들의 상태에 대한 현상의 눈이 작용한 것이다. 그 후ꡐ흙은 돌을 안는다.ꡑ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두 사물이 성질대로 서로 관계 맺고 작용하는 원리의 눈을 얻은 상태다. 한 발 더 나아가 ꡐ부드러운 것은 딱딱한 것을 감싸고 위로한다.ꡑ라는 법칙을 발견했다면 대상에 대한 인문학적 인식의 깊이가 한껏 가닿았다고 본다.

 또 이런 인식의 깊이가 다시 군락을 이루어 서로 통섭(統攝)하고 상생하거나 반대로 길항하며 상극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까지 체험으로 증득(證得)될 때  만물의 변화에 대한 총체적인 뼈와 살을 논해 학문의 최고 정수라 할 수 있는 周易

이나 詩의 寶庫라 할 수 있는 종교 經典들의 가까운 발치에서 미학적으로도 훌륭한 삶을 꿈꾸게 되리라.

ꡐ觀! 너는 판단을 세우는 과녁이요 마음도 뚫어내는 화살이다.ꡑ

해인사 장경각이/날 모시고 받든다만 //네 안에 내 있어?/네 안에 내 없으면//너와 난/고깃덩어리/그저 나무 판때기.

-채천수「고깃덩어리와 나무 판때기」전문

나. 반성적 省察

ꡐ반성적 성찰ꡑ이 ꡐ반가사유상ꡑ으로 자꾸 읽힌다.

  존재를 가두는 감옥인 육신?  죽음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삶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시인들은 모든 욕망의 소멸과 함께 우주적 존재를 꿈꾼다. 자신이 우주의 일부로 회귀하는 것이다. 물의 자유로운 순환처럼 이승의 유한한 형상에서 풀려나는 진정한 자유로움의 성취!  인식의 자유로움을 위해 부단한 노력으로 나를 가두는 대상들에 대한 철저한 인식과 그것들의 실체를 파헤쳐 관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시정신이여! 벌떡 일어나라.

혼 수(婚需)

                          채 천 수

편지 쓰고

기

다

리

다

석 달 봄 다 보낸 사람

먼 훗날 여자의 길 가슴 저밀 일 있을지

아내는

일곱 살 딸에게

가야금을 안겼다.

 틈은 희망이나 절망의 출입구다. 그래서 틈은 비워둔 만큼 그 인식의 깊이를 요구하는지 모른다. 3장 6구 12음보 시조의 형식도 알고 보면 이 땅에 면면히 내려온 민족정서가 밴 언어 결이요, 틈이다.

틈

                            채 천 수

연초록 나뭇가지에

오래 눈이 머문다

둥지가 된 머리 속은 까치들로 부산하다

까치가 

사는 머릿속

그 참 귀한 집이다.

3. 왜, 구어체인가?

시의 어미가 노래이고 보니. 정형시인 시조에 온전히 살아남은 가락과 운율은 당연히 시적 음악성을 발휘한다. 낭송시로 성공한 작품들의 면면을 보더라도 그 내용과 형식의 반복이 가져오는 표현 전략이 독자들의 정서를 바짝 집중시키고 당겨오듯이  문어체로 쓴 것보다 말하듯이 구술하는 쪽이 율격의 자연스러움을 살리고  호응을 얻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다. 

그저 오는 사람들 피곤과 때를 돌보며/때밀이를 한 지도 벌써 20년이네/내 청춘 비눗갑에 갇혀 /비누 거품 다 됐어.//속 때는 못 벗기고 겉 때만 벗기지만/단골이 아니라도/대충 몸을 보면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내 눈에도 더러 보여.//사는 일과 몸뚱이는 무슨 등식이 있나 봐 /굽은 노인 등이/벼랑으로 보일 때가 /내 나이 쉰 조금 넘어 큰 수술한 뒤였지. -채천수 「목욕탕 孫氏」전문

①여긴 길도 모두 물 속에서 잡아땡기는지 낚시꾼이 나댕기는 외줄기 길만 빤해 ②이런 것두 경력이 될라능가 몰라두 중학 2학년 적부터 낚싯대를 잡았으니 햇수로 치믄 하마 쉰 해도 넘었네/ ③낚시를 왜 허냐고? ④그냥 허지 고기가 물어도 그만 안 물어도 그만 그냥 앉아서 세월을 낚는 겨 ⑤물만 들여다보고 있으믄 쓸데없는 생각들이 다 달라빼니까 ⑥ 돈? 돈이 암만 있으믄 뭣해 늙는 것 못 막는데…⑦누구도 세월 앞엔 장사가 없다카이/⑧나, 다신 세상 쪽으로 안 나가 ⑨이 물가에 앉았다 그냥 갈 텨

-박기섭「낚시를 왜 허냐고?-류승하(68)」전문

 위 작품에서 일반적으로 류승하(68) 같은 낚시꾼이 할 수 있는 말로는 ①,②중 “중학 2학년 적부터 낚싯대를 잡았으니 햇수로 치믄 하마 쉰 해도 넘었네” ,④,⑤,⑦정도가 될 것이고 여기에 시인이 보탠 상상력의 말이라면 ②중“이런 것두 경력이 될라능가 몰라두”,③,⑧,⑨정도가 될 것이다. 설사 작품에 등장하는 실명 주인공들에게 이야기를 좀 들었다 해도 그 자체로는 시조가 되지도 않고 대충의 심정만 전달될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즉 다시 말하면 이런 류의 시조를 쓰기 위해 충실하게 기초 자료를 수집한 뒤 그 내용을 대폭 수정하면서 시인 자신의 상상력을 많이 보태어 각색하였지만  등장하는 주인공이 마치 다 말하는 형식을 빌리는 노련함을 독자들이 놓쳐선 곤란하다는 것이다.

4. 소재가 왜  일상이어야 하나?

-독자들이 공감할 뿐 아니라 시대정신의 기저를 알 수 있다

-일상은 겪는 일이다.(사실) 그곳에 상상을 불어 넣어보자.(감각)

양파

양파를 까서 잘랐다, 반찬이 마땅찮아.

문득 그 단면이 상형문자로 읽힌다

사랑은 안고 또 안는

내면 깊은 괄호라고…

가두면 구속이고 감싸면 사랑이라고

보듬어 안아 거둔  얼개를 벗기면서

절묘한 사랑의 안팎

톡 쏘는 단맛을 본다.

다섯 살의 행진

애들이 조선 천지에 밥만 먹고 어디 커나

나무 타는 다람쥐들처럼 어미 속을 들랑날랑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눈 뺏길 때 좀 많아

귀 아플 일은 또 어떻고 하루에도 수십 번 더

웬걸 밥만 먹고 있나 애들이 조선 천지에

참나무 딱따구리처럼 어미 속을 다 파먹지

낮잠은 벼슬이야 발 갈 곳은 묻지도 마 

어미 속에 풍덩풍덩 어디로 뛸 개구린지

애들이 조선 천지에 밥만 먹고 그냥 사나. 

[대구시조]

 화요시조창작 교실(09.06.23)

                                                         강사     채천수

1.爲己之學, 爲人之學 -甲과 乙

-ꡐ 뭐, 날 보고 李氏!ꡑ

 이영조 교수, 그는 연세대학교 음대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다 국립 한국예술영재교육원 원장을 지내신 분이다. 두 해 전 자연인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그 고향이란 게 자기를 받아주는 방식에 크게 놀라고 깨우친바가 있었다. 내용인즉슨 동네 촌로 몇 사람이 그에게 다짜고짜 찾아와서 하는 말

ꡒ어이, 李氏 집에 있소?ꡓ

ꡐ뭐 날 보고 李氏!ꡑ

ꡐ가만 있어봐…, 내가 李氏 맞잖아.ꡑ

ꡒ어이, 李氏! 고향에서 살려면 동네 노인정에 와서 인사도 하고, 길흉사에 참석도 해야지.ꡓ

 그는 완전하고 편안한 李氏가 되는데 꼬박 2년이 걸렸다며 내가 듣는 강의에서 실토를 했다.

2. 작품과 작품을 이렇게 비교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가. 내용 구조가 비슷한 시 읽기

혈관이 막혔는지 몸속에 불도 많고/압축된/기 눌림이/한으로 뭉쳐져서/뿔 대신 높다란 굴뚝을 감정 곁에 달았더니.//비상구를 찾지 못한 봉인된 고통들이/흰 연기로/올올 풀려/신경을 흩는 바람/언짢게 내연한 일도 보드라운 재가 된다. (채천수「굴뚝」전문)

해묵은 목골 흙벽 젖은 살을 말린다/ 쇠꽃이 창살만큼씩 작아지는 가을 햇빛/ 나는 또 햇빛만큼씩 작아지고 있었다// 여름내 비워 두었던 고래에 불 들이며/ 미장된 가슴 속의 물기가 걷힌 자리/ 그득히 차오르리라 먹기와빛 바람 소리// 연통을 빠져 나간 자욱한 슬픔들이/ 유릿가루 묻어 있는 밤하늘 별이 되듯이/ 축축한 우리 한 생애 젖은 살을 말린다. (박권숙의「객토」전문)

 두 시에 사용된 재료 ‘굴뚝’과 ‘연통’은 공통적으로 그 시들이 포함하고 있는 문제(시인의 문제)인 ‘봉인된 고통’과 ‘자욱한 슬픔’을 배출시키는 내외적 구조로 작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서로 좀 다른 부분을 살핀다면 채천수의 연기는 배설하기 힘든 현실의 긴장과 스트레스 등 문제 자체를 연소시켜 ‘보드라운 재’를 지상에 남긴다면 박권숙의 연기는 ‘유릿가루 묻어 있는 밤하늘 별’이 되어 하늘에 뜬 맑은 이미지의 시로 승화된다. 그리고 ‘고래’를 통해 지나가는 불을 지피는 행위는 그녀의 ‘한 생애 젖은 살’을 따뜻하게 데우는 치열한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애착일터. 한 마디 덧붙인다면 전자는 감정을 소화하는 집을 만들어 가는 詩고, 후자는 지어진 집이지만 어떤 연유(건강이나 마음의 상처?)로 비워둔(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집을 원활하게 가동하는 詩다. (채천수)

나. 3개 풍경 소리의 무늬

뎅그렁 바람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만등이 꺼진 산에/풍경이 웁니다// 받아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김제현 「풍경(風磬)」전문)

시인은 용케 남이 보아내지 못한 독특하고도 비밀한 의미를 보아내고 있다.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라는 결구를 보라. 이 얼마나 오묘하고도 절절한 발견이란 말인가! 물론 풍경에 마음이 있을리 없고, 또한 마음이 없으니 적막이 깃들리 없다. 그런데도 마음이 있고, 그 마음에 적막이 깃든다고 한다. 그렇다면 풍경(風磬)은 그냥 사물이 아니라 한 사람이다. 겉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미소도 흘리지만 깊은 마음 속에 ‘슬픔의 그늘(적막)’을 간직한 그런 인물 말이다. 그래서 긴긴밤 별빛과 함께 깨어 뎅그렁뎅그렁 마냥 흐느낀다. (조동화)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해 너는 넘어진다/저녁 풀숲을 헤치고 나온 달을 밀어내며/예리한 서슬이 앉은 소리를 떨어뜨린다// 낙하의 거리에 숨은 그대의 눈이 빛날 무렵/양철 쇠 지느러미에 닿는 고요의 거친 살결/ 하얗게 넘어진 채로 벗겨지고 있었다. (박권숙 「풍경소리」전문)

세속의 보이는 것들에 대한 욕망과 집착에 시달리던 마음이 홀연히 ‘보이지 않는 것들 향해’ 나아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리라. 이 때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란 존재의 본질을 밝혀 주는 세계, 죽음을 관통하는 시선으로만 파악해 볼 수 있는 세계의 상태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향해 너는 넘어진다” 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넘어지다니! 어떤 의미일까. 나로서는 그 낱말의 의미가 보이는 것들에 속한 세계를 과감하게 포기하는 마음가짐을 표현한 것으로 읽힌다. 왜냐하면 풍경소리가 환기시켜 주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자연의 가장 고요하고 아름다운 “달을 밀어내”기 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까지 밀어내고 싶은 마음, 그것이야말로 삶과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집착마저 끊어버리는 마음일 것이다. 그렇기에 시인은 그 마음을 “예리한 서슬”이라고 표현해 놓은 것이다. 풍경소리의 잔잔한 듯하면서도 높은 음조는 그렇듯 삶에 집착하고 안주하려는 마음가짐을 베어내 버리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예리한 서슬이 앉은 소리를 떨어뜨린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시인의 이번 시집 중에서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정신의 가장 지극하고 가열한 경지를 간결하면서도 참신한 감각으로 표현해 놓은 대표 작품으로 꼽을 수가 있을 것이다. 고요한 자연의 모습을 배경으로 울려 나오는 그의 소리는 단조로운 듯 하면서도 섬뜩할 정도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하여 독자들은 그녀의 작품을 천천히 곱씹어야 한다. (이경호)

睡蓮은 졸아도// 절은 졸지 말라고//파적삼아 딸랑딸랑// 물고기 한 마리가// 불영사 처마끝에서 //귀고리로 살고 있다. (채천수 「귀고리」전문)

위 두 수의 시조가 연시조라면 이 시조는 단시조의 형식을 하고 있다. 내용적으로는 시적 화자의 내면을 담기보다는 풍경(風磬)이 외적으로 위치한 형태를 귀고리 같다는 즉물적인 비교에 의존하여 시의 깊이가 없어 보이기도 한다. 초장에 “睡蓮은 졸아도// 절은 졸지 말라고”라는 묘사가 없었다면 나태나 무지를 물리치는 깨달음이나 성찰의 울림을 데리고 올 수 없는 지경이 될 수도 있었다. 역으로 이 詩는 독자들에게 어렵고 무거운 감상 능력을 요구하지 않는 재미가 있다. 하지만 깊은 사유의 무늬를 독자들에게 드리우기에는 역부족이다. 김제현의 풍경(風磬)소리가 잘 듣기고, 읽히면서도 개성적 깊이를 가지고 있다면, 박권숙의 풍경(風磬)소리는 읽히는 시로서는 다소 난해성을 동반했지만 비가시적 비가청적 권역까지 즉 인간정신의 한계점 너머까지 내다보는 내밀한 울림이 있다. (채천수)

다. 역사를 다루는 관점 살피기

자규가 울어 만리 첩첩산중 영월땅/ 나누어 가질 이 하나 없는 소리들은/ 칠흑의 서강을 끌며 먼 곳으로 가고 있다// 꽃 이파리 흘러오는 급류 한 모퉁이쯤/ 애락의 흰 그림자도 간간 비춰보는/벗나무 환한 앞산에 이마를 짚은 어둠// 캄캄한 베갯머리 용안을 적셔 놓고/ 높아 홀로 서럽던 꿈 닦으며 닦으며// 청령포 저문 물소리 아름다운 저녁에// 먼 훗날 때로는 인적없는 그믐달빛/ 저기 잡풀 자라는 언덕바지 길 위에/ 홍자빛 자규로 울며 내 마음 타고 있거라 (박권숙 「적소의 밤」전문)

1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나는 왕이니라/심장의 고동 소리만 남은/눈물의 왕이니라.// 자규루의 봄도 눈물/베겟잇의 잠도 눈물/첩첩산 적막하여 물소리 뼈에 저린/ 피비린 이승의 문을 열일곱에 닿았노라.

2

살갗도 뚫는다는 게 의라고 하지만/ 숨 걷고 가는 길이/엄 호장!/ 네 등이구나/ 이렇게 죽어 업혀도 혈육처럼 따스해라.// 힘을 잃은 왕의 값이 숱한 피를 불렀건만/ 두렵지 않느냐/ 너와 삼족의 목이/ 묻햐도 흙에 묻혀도 네 절개는 쥐고 가마. (채천수 「눈물의 왕」- 엄홍도에게 전문)

 단종이 마지막 숨을 거둔 청령포의 詩는 많다. 그 중 이 두편을 선택했다. 시적 화자의 입장을 생각해 보자. 박권숙의 작품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단종의 처지를 노래하고 있다면 채천수의 작품은 단종의 혼령이 직접 말하는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 다르다. 전자의 시가 청령포의 지형을 아우르는 구체성 속에 역사적 비련을 채색하고 있다면 후자의 시는 충신 엄홍도에게 남기는 말로 전달의 의미를 뛰어넘는 生과 死의 또 다른 절박성과 절개를 입말체로 구성했다고 볼 수 있다. 시인 자신이 대상을 노래하는 것과 그 대상이 직접 자신을 노래하고 있는 형식이 가지고 오는 미묘한 차이 즉 어떤 형식이 더 절실하게 독자에게 다가갈까를 찾는 거이 필자가 이 두 시를 제시한 이유다. (채천수)

3.. 시조의 형식과 내용

-형식 : 3장 6구 12음보

 자연환경과 지리적 환경이 인간과 모든 생물의 삶에 영향을 주듯이 인간이 사용하는 말과 언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나라의 문학․ 예술의 형식이나 내용은 그 나라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내용 : 노래의 가사에서 본격적인 시로서 자리매김

１.가을입니다 아이들 방 다 비워 단둘 남은 가을입니다 장단도 추임새도 몇 안 남은 가을입니다 고수와 소리꾼만 남아 깊어가는 가을입니다

2. 가을 고백 아이들 키우면서 안팎이 참 힘들었죠 더러 짬을 내어 외국이라도 가는 건데 살림에 온통 매달리다 예까지 오고 말았죠 장단이랑 추임새랑 소리마저 몇 안 남은 고수와 소리꾼 같은 뒤안길의 후회라고 단둘의 텅 빈 가을을 준비나 했겠어요

4. 한 편의 시조가 되기까지

3. 늦가을 아니리 아이들 키우면서 안팎이 참 힘들었지 단둘이 짬을 내어 나들이라도 가는 건데 살림에 통 매달리다 예까지 오고 말았어 장단이나 추임새나 소리마저 몇 안 남은 고수와 소리꾼의 뒤안길 후회라고 소리도 흉중의 소리 깊고 짙어 한이라지

4. 서릿가을 아니리 아이들 키우면서 안팎이 참 힘들었지 벼르던 나들이는 견주다가 다 놓치고 똥 누고 뒤 안 닦은 살림만 예까지 흘러왔어 사람 일 데면 쉬고 졸리면 자는 건데 판소리와 자식이 뭔지 주야장천 오고가다 청춘은 미꾸라지처럼 솔솔 다 빠져 달아났어 장단이나 추임새나 소리마저 몇 안 남은 고수와 소리꾼의 뒤안길 후회라고 소리도 흉중에 품은 소리 짙고 깊어 恨이 되지

[이명애]

5개월도 더 한참 지난 이 때에, 들었던 강의 다시 한 번 새겨 보니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양한 시각으로 시조에 접근하도록 충격 주심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