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9월 27일 토요일
시대순 역사체험학습 6
영조 정조시대의 사회발전 - 수원화성,화성행궁, 화성박물관 , 융건릉
화성행궁 정문 신풍루
일찍 출발해서 일찍 수원화성에 도착했다.
'행궁'이란 왕이 항상 머무르며 나랏일을 돌보는 궁궐을 잠시 나와
임시로 머무는 곳을 말한다.
온천욕으로 쉬기 위한 곳 → 온양행궁
전쟁때 피난처 → 강화행궁(강화도), 광주행궁(남한산성), 양주행궁(북한산성),
정조 임금이 아버지 무덤을 참배 왔을때 머물던 곳 → 화성행궁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
신풍루에서 매우 어려운 한자(?) '풍(豊)'은
전주의 - 풍남문(豊南門), 전주객사의 현판 - 풍패지관(豊沛之館)을 나타낸다.
중국을 상징하는 '한(漢)' 한나라를 세운 사람이 한고조 유방이다.
한고조(유방)의 고향이 풍현 패읍이었다고 한다
조선은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있는 국가였다.
그래서 조선도 중국을 따라서...
조선을 세운 전주이씨의 본향인 조선의 상징을 전주~~'풍'
새로 생긴 도시 화성은 '새로운 풍' → '신풍(新豊)'~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을 다시 한번 세우겠다'
는 정조의 굳은 의지가 담겨있다고 하셨다.
우리도 문을 달아 지을때 이처럼 정신을 담아 보자라고 하셨다.
남군영(南軍營)
장용영 병사들이 머물던 곳
정조임금은 수원행차시 황금옷으로 갈아입고 위엄을 보였다고 한다.
역사극 '대장금'으로 인기를 누린 배우 이영애, 지진희와 어깨동무
하며 얘기중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공감대가 형성되지만 아이들은 잘 모릅니다.
아이들이 자알~ 아는 요즘 뜨는 연예인 이름을 어른들도 잘 모르듯.
우리 영인이는 지진희는 알겠다고....
팔작지붕에 잡상을 얹어놓고 행궁앞에 홍살문을 둔 이유는
신성한 곳이기에 잡귀를 몰아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마당 앞에는 무예시범 때 장용영 병사들이 들고 휘두를 깃발들이 줄지어 서있다.
북쪽 장용위(검은색 - 현무), 남쪽 팔달위(붉은색 - 주작)
서족 화서위(흰색 - 백호), 동쪽 창룡위(푸른색 - 청룡)
중앙 신풍위 (황금색 - 황룡)
바로 오방색과 오방신으로 구역을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봉수당(奉壽堂)
한자풀이 받들봉(奉) 목숨수(壽)... 우리팀 아닌 지나는
길손이 말하기를~~~ "봉.수.대"라고.... 집당(堂)자를 써서...
봉수당! (어머니께서 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정조가 지은 이름)
정조가 44세 때 어머니 혜경궁홍씨의 회갑잔치를
한양도 아닌 이곳 행궁 봉수당에서 엽니다.
정조의 아버지이자 혜경궁홍씨로서는 남편인 '사도세자'의 무덤이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혜경궁 홍씨 회갑잔치(진찬연) 광경을 이대로 그려서
'어머니 칠순잔치 때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이렇게 정조께서 명했다고 합니다.
무슨 얘기중이었을까?
즐겨서 하는 찍사 노릇하다 '하나가 되어 웃는 시간을' 놓쳐버렸당~~~
왕이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일월오병풍 앞에 앉아있는
정조임금과 함께한 소담이, 정민이
이곳은 바로 사도세자가 숨을 거두었던 역사의 현장 '뒤주'가 놓여있는 자리
세계적으로 아버지가 왕을 죽일수는 있어도 뒤주속에서 죽은 사례는 없다고 한다.
현시대에 걸맞게 사도세자는 - 새천년 민주당(소론)~
영조는 새누리당(노론)~
치고 받는 싸움에 목숨이 왔다갔다...
밀고 당기는 뻔한 싸움들 자기네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당파 싸움
한번은 사도세자가 영조임금에게 보고도 안하고 '평양'에 20일 동안
다녀왔는데 그 일을 빌미로 역모죄를 물어 스스로 자결을
명했다고 한다 왕이 될 사람인 귀한 몸이라 매나 칼을 댈 수 없어
뒤주속에 갇혀 한여름 더위 속에서 8일만에 죽었다고 한다.
그때 정조의 나이 11살 영조 말하기를
"이 일은 앞으로 누구도 입밖으로 꺼내서는 안되느라"
함구령을 내렸다.
11살이면 초등4학년...(나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때가 되니 드디어 정조대왕 즉위식에서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양되어 왕위에 오른 몸)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라고 외쳤다~
영조(노론 새누리당) ~벌벌 하면서 나 살기위한 정조의
암살을 7번 넘도록 시행~~
정조는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2가지 일을 10년 동안 추진해왔다.
문(文)을 일으키는 '규장각'
무(武)를 일으키는 '장용영'
죄인의 몸으로 허름한 곳에 묻힌 아버지 묘소를
화산으로 옮겨오면서 신도시 '화성'을 계획했고
정조는 순조가 15세가 되면 왕위를 물려주고 이곳 화성에서 살겠다고 했단다.
장용영 병사들의 무예시범 관람 시간
수원에 왔으니 수원 갈비탕을 맛있게 먹고~
수원화성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수원화성 박물관 야외전시유물
수원화성을 쌓는데 큰 공을 세운 정약용이 발견한 과학기기 거중기(擧重機), 녹로, 유형거(游衡車)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정조와 정약용의 특별한 인연 이야기....
정약용을 아끼며 곁에 두고 싶어했던 정조의 마음~
화성이 건설되었을 당시 모습 (화성박물관 1층 중앙홀)
계단위로 올라가서 보니 '화성'이 한눈에 확~보여요
우리가 둘러볼 곳 화성행궁을 지나 화성장대(서장대)→서화문,서북공심돈→장안문
→화홍문→방화수류정→동장대(연무대)를 설명해 주십니다.
(동문-창룡문(蒼龍門), 서문-서화문(西華門), 남문-팔달문(八達門), 북문-장안문(長安門)
"상감마마 행차시다~ 길을 열어라!"
옛날에는 왕이 행차할때 백성이 함부로 고개를 들수 없어
넙쭉 엎드린 사극 드라마를 많이 보았지요~
정조임금은
백성들에게 왕의 행차를 구경하도록 허락하고, 억울한 일을
하소연하도록 허락해주어서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주는 어진 임금이었다고 해요.
정조 때 무려 6000건의 격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화성축성 과정을 알아 보아요~
1. 산에서 돌 캐기
2.가마에서 벽돌 굽기
3.목재 이동
화성축성시 총동원 되었던 과학기기 거중기, 녹로, 유형거 등....
인부들 등장
수원화성은요,,,,,,,,이런 과정으로 쌓았대요.
정조의 어머니 진찬연(회갑잔치)
서북공심돈 '속이 텅비어 있는 돈대'
두 어머니 계단 오르는 모습
"언제 가요?"
"다 왔어요~ 우리가 꼴찌예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한 화성장대에서 한 컷~
화성장대(서장대) 장대(將臺)란 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는 곳.
서장대(화성장대) 수원화성 최고 지휘 본부
서장대는 수난을 많이 겪었다고 해요
일제시대 수원 농림센터에서 인공강우기를 시험하다 서장대가 무너지고,1996년
24살 청년이 카드 빚 청산하려다 화를 못 이겨 불을 질렀다고 합니다.
우리 역사 유적 유물은 소중한 것이에요
우리 후손들도 이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게 함께 지켜야 해요.
정조는 활쏘기를 잘 했답니다.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켰다고 합니다.
1발은 못 춘 게 아니라 일부러 잘못 쏘아 맞추지 않았대요.
스스로 자만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실학자 정약용, 이덕무는 화살을 못쏘았는데 열심히 연습해서
문(文)과 무(武)를 겸비하도록 정조는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화성장대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고 성벽을 따라 내리막길 시작
우리 일행 선두주자 박상용 선생님은 나뭇가지잎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빨리 따라가야 합니다~
화성 성벽을 따라 거닐며 우리가 보았던 벽돌과 돌, 치, 포루, 옹성
화서문, 서북공심돈, 장안문, 장대 ....
얼굴에 시원한 바람 맞으며 설명해 주셨어요~~~
장안문(북문)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항아리 반쪽으로 자른 것 같이 둘러싼 성 옹성
화홍문(華虹門)=북수문(北水門)
화홍문 아름다운 무지개 문 화홍문 누각 아래로 무지개 모양의 7개 수문이 보이지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화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꽃을 찾아 버드나무를 따른다'는 뜻을 담은 '방화수류정'
직접 정자에 올라 용연을 바라보고 성곽 전체를 요리저리 느껴보았어요.
방화수류정 정자 모습을 꼭 담고 싶었는데 어찌해서 사진 속에 담지 못했을까요?
최고의 아쉬움 백배!
방화수류정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성벽 모습
성벽 끝에 보이는 건물이 치성 위에 지은 누각 포루(鋪樓)랍니다.
동장대(東將臺)=연무대(練武臺)
장용영 군사들이 <무예도보통지>에 나오는 24가지 무예를 훈련하던 곳이에요
융건릉에 왔어요~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
그 중 능이 42기
원이 13기
묘가 64기
조선의 왕은 27명이지만 훗날 왕으로 추존된 분 포함해서 릉이 42기라고 한다
북한에 소재한 2기를 빼고 조선시대 왕릉(王陵)40기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500년간 똑같은 형태로 조상의 제사지내는 곳이 없다고 한다.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요?"
현욱이 대답히기를 "물이요"
한 여름 더위 속에서 죽어가며 물 한 모금 축이지 못했을 사도세자...
현욱이 융릉에 도착해서 물이 어디 있냐며 자꾸 물을 찾았다.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현륭원(정조)→융릉(고종 때 추존)
정조가 아버지 무덤 현륭원을 참배할 때 소나무에 송충(松蟲)이 많았다고 한다.
정조는 웬 송충이 이리 많은고 하면서 송충을 직접 잡아 씹어먹었다고해요
그 후 신하들이 어찌할 바를 몰라 정조의 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읽고
갖은 애를 쓰며 송충이 잡기에 나섰다는 이야기....
융릉 오는길에 바라본 소나무의 튼실함이 그 때문이었을까요?
조선시대 능(陵)의 일을 맡아 보는 벼슬아치 '능참봉' 에게는 100명의 노비가 딸렸고,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는 여유가 많았다고 합니다.
왕이 능 행차할 때 왕의 눈에 들면 초고속 승진 할 수 있는
능참봉이란 벼슬은 매력적인 직업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들려 주셨습니다.
영인이 연진이 융릉 앞에서
건릉(健陵)
정조는 온몸에 종기를 앓다가 49세의 나이로 돌아가시고 맙니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가 묻힌 곳입니다.
정조는 죽어서도 아버지 곁으로 오고 싶어했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이 곳에 잠들어 계십니다
융건릉을 찾아보고 돌아가는 길.....
가을 하늘에 아쉬움만 남기고 돌아가야만 합니다.
더 머물고 싶었습니다~ 오래도록.... 더....
미리 수원화성을 둘러보아요~~~
영인이의 후기
연진이의 후기
첫댓글 사진찍으랴 공부하랴 애들챙기랴.... 사진정리에 후기 쓰랴~~ 고생많으셨습니다. 역시나 아이들 노트는 멋지네요..
하나 수정하면 정조와 어머니 나이차이는 17살. 그래서 어머니 회갑때 정조 나이는 -17 입니다.
네~ 수정했습니다.
정조와 정약용의 나이에 관한 특별한 인연이야기도 쓰고 싶었습니다. 긴가민가 한 부분이 망설여졌지요.
매번 후기 읽어주시고 지적해주시고 감사합니다. 다녀와서 기록물 남기는 일은 체험학습 과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사진찍고, 공부하고 , 챙겨주고 이런 과정이 어쩌면 행복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