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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5월에 처음으로 절호의 기회를 잡아 14대 1의 경쟁을 물리치고 길위의 인문학 강진 여행에 참여한 후 어언 5년이라는 세월이 후딱 지나고 2014년 마지막 탐방에 행복한 마음으로 참여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길위의 인문학 탐방이 마지막이라고 하니, 서운하면서도 또 다른 방법으로 새해에 시작할 여행을 기대하며 아쉬움과 설렘의 교차 속에 원주와 횡성 지역 역사의 흔적을 50여 명의 탐방객을 비롯하여 홍인회 교수와 함께 하게 되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이어서 마음의 여유와 앙상하게 그 아름다운 계절의 옷을 다 벗어버린 나무들을 통해서 휑한 벌판을 보는 재미와 느낌도 싫지가 않았다. 짓궂은 초겨울비가 내리는 쓸쓸한 산야에 흩어진 역사의 발자취가 빗속에서도 우리를 맞아주는 것 같아서 나는 언제나 여행을 하는 동안은 행복감을 마음 가득하게 느끼며 담는다.
김제남 생가. 먼저 도착한 곳은 강원도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 능촌리에 있는 김제남 고택이었다. 옛날 선조 때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 시절에 지나갔다는 한길 가에 별다르지 않은 기와집이 한 채 자리 잡고 있었다. 고풍스럽지도 않고 규모도 그렇게 크지 않은 그저 평범한 시골 기와집인데 대문에 붙은 현판은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다. 延安金氏懿愍公宗會라는 낡은 글씨가 이색적이었다. 그 집에서 얼굴이 하얗고 빨간 패딩을 입은 여인이 나와서 의민사의 문을 열어주는데 서양 사람이다. 현재 그 집 주인은 김제남의 14대 손인 김일주 라는 분인데 미국 유학시절에 만난 미국 여인과 결혼을 하였고, 그 아내가 낮선 이국땅에서 그것도 종부라는 낮선 문화의 주역이 되어서 겨울비 내리는 시골의 종택을 지키고 있으면서 우리 탐방객이 가니까 사당의 문을 열어주었다. 이름은 카렌! 한국 이름은 김가련이다. 피부가 희고 깨끗한 60대 정도가 되어 보이는 전형적인 서양 사람으로 말도 영어만 하는 것이 우리의 전통문화와 그것도 종택을 지키는 종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이 느껴졌다. 사랑이 그렇게도 좋은 것인가? 조국과 부모 형제를 떠나서 먼 이국의 어느 시골의 종택을 지키면서 살아온 세월이 왠지 낮 설게 느껴지는 것은 나의 선입견 때문일까?
혼이 나와서 논다는 혼유석이 비에 젖은 모습
인목대비의 친필 족자는 그 전에 왔을 때는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감추어 볼 수가 없어서 아쉬웠다.
김제남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다. 다시 말하면 부원군으로,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죽자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영창대군을 적자로 추대하려던 유영경 일파는 몰락을 하고,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해서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을 유배 보내고, 영창대군을 폐서인 시킨 뒤에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어 증살을 하였으며 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과 두 아들마저 사사를 하였고, 인목대비는 서궁(덕수궁)에 가두었다.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인 광산 노씨는 제주도로 유배를 가면서 김천석을 데리고 갔다고 한다. 가난하게 살면서 술찌개미를 모아서 다시 걸러서 술을 만들었는데 그 술이 인목대비 어머니가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母酒라고 하였으며 바로 모주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유배에서 풀려날 때 한양에서 내려온 배를 따라 육지의 까치가 따라가서 짖게 되므로 제주도에도 까치가 살게 되었고, 반가운 손님이 오면 까치가 운다는 이야기가 생겼다고 한다. 훗날 인목대비는 복원이 되었지만 지나간 아픔의 상처는 복원을 할 수가 없었다.
원주 지역은 왕비가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선조의 정비로 영창대군을 낳은 인묵대비와 선조의 후궁로 광해군을 낳은 공빈 김씨. 인조의 정비로 효종을 낳은 인형왕후와 고종의 후궁으로 영친왕을 낳은 엄비가 바로 원주 출신의 왕후들이다
벽계수 이종숙의 묘. 비석에는 都正李終叔之墓라고 적혀있다. 강원도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에 있는 이종숙의 묘역을 찾았다. 가는 길목에 세종대왕증손 도정벽계묘원이라는 돌 팻말이 서있었다. 조금 의아해하며 근처 야산 언덕으로 올라가니, 벽계수 이종원의 묘가 겨울비를 맞으며 이끼와 세월의 흔적을 안고 고요히 자를 지키고 있었다. 개성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와 벽계수 이야기는 널려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그 벽계수가 서화담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종숙이라는 것은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벽계수는 황진이의 미모와 문필도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는 절대로 넘어가지 않는다며 도대체 어떤 여인인지 한 번 만나 본다고 갔다가 먼빛으로 본 황진이의 모습에 그만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황진이의 유명
한노래를 낙마곡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우리가 익히 아는 시다.
靑山裡碧溪水 莫誇易移去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一到滄海不復還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워라.
明月滿空山 暫休且去而若何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종숙은 세종대왕의 17번 째 아들인 영해군의 아들로 세종의 증손자가 되며, 조광조의 제자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책사 이달과 같이 황진이를 보러갔다가 멀리 잠자리 날개 같은 핑크빛 치마저고리를 입고 나타난 여인을 보고는 그 모습에 반해서 타고 있던 말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니 황진이의 미모가 얼마나 예뻤는지는 짐작할 만하고 큰 소리 쳤던 이종숙은 보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그 후로 황진이가 이종숙의 사람됨이 대범하지 못하다고 하여 만나주지도 않았다니 완전히 패자가 된 것이나 다름없다.
강원감영은 원주시 원일로 85번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원형이 보기 드물게 잘 보존된 곳이라고 한다. 옛날 관찰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원래 60여 개 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선화당을 비롯하여 포정문과 증산문, 내삼문 세 곳이 남아있는 정도다. 내삼문은 포정문과 증삼문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관찰사 집무실인 선화당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고유 명칭인 證淸門은 청렴결백한 정신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니 옛 관료들의 가르침이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았다. 宣化堂의 현판 글씨는 강원도 출신 대통령이었던 故崔圭夏의 글씨로 걸려있었다.
조선 500년 동안 500여 명의 관찰사가 거쳐 갔으며 과거에 합격한 숫자가 안내판에 적혀있는데 서울이 14,338명으로 제일 많고 다음이 안동으로 783명, 충주가 624명, 원주가 570명, 개성이 569명, 평양이 529명 순이었다. 원주에서 세 번째로 많이 배출하였다는 것은 조금 놀라운 사실이었다.
조충 장군 묘를 찾아갔는데 일정에는 나와 있지 않은 곳이다. 조충은 1171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난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무신이 된 보기 드문 사람이다. 몽고군에게 쫓겨서 5만 명의 궐안군사가 고려로 내려오자 몽고 군사와 연계하여 궐안군사를 평정하고 몽고 장군과 협상을 하는 자리에서 술안주를 칼끝으로 찍어서 주는 것을 거침없이 받아먹으므로 적장의 가슴을 서늘하게 하여 결국은 적장이 조충을 형님으로 부르면서 협상을 성공적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담이 크고 센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궐안의 군사들이 갈 곳이 없게 되자 살 곳을 마련해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궐안장이라고 한다.
고형산 묘역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을 한 가지 소개하려고 한다.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였던 고형산이 강릉에서 서울까지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고 한다. 불과 3개월 만에 만들었다니 그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훗날 1636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이 강릉에서 한양까지 쳐들어왔는데 너무 빨리 오게 되어서 그 이유를 알아보니 길이 좋아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 길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를 알아보니 바로 고형산이었다. 그것이 이유가 되어 그는 죽은 지 108년 만에 부관참시를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청나라가 강릉에서 한양으로 온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진왜란의 오류로 본다고 하니, 아 이를 어쩌랴!
세덕사는 횡성 조씨 시조인 조영인과 그의 아들 조충과 손자인 조계순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사당으로 후세 사람들은 이들의 뛰어난 업적을 기리어 지역 이름을 삼원수골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후손들이 사당을 지어서 춘추로 제사를 지내며 그들을 기리고 있는 곳이다.
횡성공원은 근대사에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강원도에서는 3.1운동 때 가장 먼저 일어나고 또 열렬하게 독립만세를 부른 곳이 양양과 바로 횡성이라고 한다. 146명이 순국을 하였고 그 배후에 두 여인이 있었는데 횡성에서는 김순이 열사라는 분으로 힘센장사로 소문이 났으며 주모가 되어서 번 돈을 몽땅 독립자금으로 내면서 독립운동을 돕다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후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지금은 군에서 그를 모시고 돌본다니 다행이다. 그리고 양양에서는 조화벽이 있었다. 그는 개성 호수돈여고 출신으로 고등학교 2학년 때 3.1운동을 주도했으며,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재직을 하면서 유관순의 두 동생을 키워 주었다고 한다.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이 그에게 청혼을 하여 결혼하고 고흥 유씨 맏며느리가 되었다니 강원도와 3,1운동은 물론이요, 유관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며 그 뜻을 기리고 있는 공원이 횡성의 3.1운동 기념공이다.
횡성 시내 한 가운데 자리 잡은 3.1공원에서 바로 군청으로 가서 강당에서 한규호 군수님의 인사와 어사품이라고 쓴 쥐눈이 콩 1kg과 강낭콩 1kg, 그리고 쌀 500g을 선물을 받다. 군수님과 관계자 분들께 감사를 전하는 바이다.
횡성에는 세 가지의 특색이 있는데 첫째는 산세가 빗겨난 곳이라 하여 山橫. 둘째는 산따라 냇물도 빗겨난 곳으로 川橫이며 셋째가 사람의품성이 호락호락하지 않아서 人橫이라고 한다. 원래 개성 까쟁이와 횡성 깍쟁이가 겨로어 횡성 깍쟁이가 이겼다고 하니 횡성 사람됨을 알만 하다.
이어서 홍인희 교수의 강의를 들었는데, 강원도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중심으로 강의를 하였다. 먼저 정도전이 이성계 앞에서 전국 8도를 4자성어로 표현한 글귀를 살펴보면 경기도는 鏡中美人. 충청도는 淸風明月. 전라도는 風前細柳. 경상도는 泰山峻嶺. 평안도는 春波投石. 함경도는 泥田鬪狗라고 했다가 이성계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石田耕牛로 바꿔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강원도는 巖下老佛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巖下高佛이라고 하여 양보와 겸양을 갖춘 덕망이 높은 스님에 비유했다는 것이다. 高佛이 古佛로 다시 老佛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향가 중에 헌화가라는 노래가 있다.
자주빛 바위 끝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작자는 실명노인(牽牛老人)이다.
이 노래에는 강원도의 기질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겸손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암하노불에서도 양보와 겸양을 뜻하는 강원도의 기질을 표현하였다고 한다.
후한서에는
其人終不相盜 서로 훔치지 않으니
無門戶之閉 문이 없고
婦人貞信不淫辟 부인은 신의가 있어서 음란한 짓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서는
其人性遇慤 그 사람의 성품은 우직하고 성실하다
少嗜欲不請匃 즐기거나 욕심이 적으며 빌지 않는다.
이것이 강원도의 기질이라니, 때로는 우직하고 욕심이 없으며 겸손과 곧은 정신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순수하고 정직한 사람들인 것 같다.
건등산은 동네의 작은 뒷산으로 언덕으로 오르는 비탈진 곳에 아파트가 있고 산입구에 비석 하나가 서있다. 바로 왕건이 견훤과 싸워서 이기고 올랐다는 산이 건등산인데 그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있었다.
고려 태조가 군사를 지휘하던 그 날,
여기에 올라 천군만마를 호령하다.
많은 영웅들은 정권을 잡으려고 경쟁을 하였으나,
마침내 진정한 주인이 왕위에 오르다.
지난 일은 옛날의 연기와 저녁놀처럼 사라지고,
자취는 우거진 수풀 속에 찾을 길 없네. 蓀谷 李達
견훤산성지는 영동고속도로 주변에 접한 작은 산등성이로 길도 없는 길을 비틀거리며 올라가니 돌무더기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견훤산성유적비라고 쓴 크고 높은 비석이 하나 서있었다. 주변은 절벽이라서 사람이 운신을 하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 성을 쌓고 견훤이 4km나 떨어진 건등산의 왕건과 마주하며 활을 쏘면서 싸웠다는 것이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성을 쌓을 정도의 공간도 없고 많은 군사가 진을 치기에는 마땅치 않은 것 같았다. 다만 성만 한 줄로 쌓아서 적으로부터 날아오는 활살을 막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흥원창은 강원도 일대의 물류가 모이던 큰 조창으로 그 곳 이름이 부론면인 것이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富論은 그 의미가 말이 많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말이 많을 수밖에 없고 각종 정보와 소식을 듣는 곳이 바로 부론면이라는 것이다. 흥원창의 흔적은 간곳이 없지만 쉼터의 벽에 걸려있는 당시 그림 한 장이 유일한 증거로 흥원창의 장소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흥원창을 끼고 있는 나루가 銀蟾浦라고 하는데 오른쪽으로는 섬강이 흐르고 왼쪽으로는 남한강이 흐르는 배향산의 깎아지른 절벽을 끼고 여주로 흘러가는 여강의 경치는 가히 절경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하였다. 저녁놀이 질 때면 더욱 아름답지만 달빛 속에 비치는 물결은 금빛이 넘실거리며 황홀할 지경이라고 한다. 세 강이 합하여 지는 곳으로 일찍이 공양왕이 遜位室-자리를 물려주고 유배길에 잠시 내렸던 곳이요, 혹은 단종도 유배길에 이곳을 지나갔다고 하며, 부론면과 원주 일대에서는 인현왕후를 비롯하여 인목대비와 엄비 공빈 김씨 등 왕비를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법천사지는 그 규모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국보 75호인 지광국사탑비만 무인지경의 산자락에 방치하듯이 홀로 서있고 주변에는 축대만이 절터의 흔적을 짐작케 할 뿐 별다른 유적을 찾을 수가 없고 다만 발굴 작업이 한창인 돌무더기가 영화를 누리던 당시를 막연하게 그리게 하였다. 지광국사비는 경복궁 안에 지금도 그대로 모셔져 있는데 박물관이 옮기면서 원래 수천 조각으로 부서진 조각을 맞춘 것이라서 손을 댈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서있다는 것이다.
이달은 허균의 스승으로서 개혁적인 사상에 영향을 끼쳤고 최경창, 백관훈과 함께 당나라 시를 공부한 당대의 당시 대가라고 할 수 있다. 유일한 그의 시비에 한 편의 시만이 그를 알려줄 뿐이다.
역시 임경업 장군의 기념비도 길가에 이달의 시바와 30여 미터를 사이에 두고 덩그렇게 서서 겨울비를 맞으며 쓸쓸하게 서있는 것이 측은하게 느껴졌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 때 큰 공을 세웠으나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굴욕적인 화의를 하고 말았다. 이후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치기 위해서 조선의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1639년 임경업의 비협조의 사실이 밝혀지면서 조정에서는 청나라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임경업을 체포하여 청나라로 압송하였다. 압송 도중에 탈출을 하여 명나라로 갔으나 결국은 명나라가 패하게 되어 임경업은 북경으로 압송되고 1646년 죄인이 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었으나 인조의 친국을 이기지 못하고 그 해 6월 20일에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힘없는 나라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모든 일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잠시 손위실 마을 이정표 앞 길 가운데 서서 4행시 발표를 하였다. 역시 나도 선정이 되어서 홍인희 교수의 책 '우리 산하에 인문학을 입히다' 2권을 선물로 받았는데 마침 집에 있는 것이라 이광세 씨에게 주었다
미:미소띤 여인의 아리따운 자태에
소:소리없이 빠져버린 벽계수 마음
눈:눈이 오나 비가 오나 벽계수와 명월의 애틋한 그리움
물:물어도 대답없는 영원한 침묵!
5년간 이어온 길위의 인문학이 막을 내린다고 한다. 그 동안 개인적으로는 참으로 행복한 세월이었다. 내년에는 어떤 모습으로 다시 시작을 할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며 긴긴 동면을 통해서 나름대로 준비하며 보내려고 한다. 그 동안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인문학을 좋아하는 분들과 다시 만날 것을 소망해 본다.
2014. 11. 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