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내장'의 고기문화
우리나라에서 돼지의 내장(內臟)은 예로부터 소의 내장과 더불어 당당하게 고기 대접을 받고 있다. 이렇게 고기로 쓰는 짐승의 내장을 내포(內包)라 하며, 내장 중에서도 고기로 쓰는 창자라 하면 대개 소창[小腸]과 대창[大腸]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추렴하여 돼지를 잡으면 살코기는 나누어 갖고 내장은 마을의 노인들께 드리는 미풍양속이 있었는데, 이런 습속을 배장(配臟)이라고 했다.
북한 음식을 소개한 《자랑스런 민족 음식》이란 책에는 소나 돼지의 내장을 재료로 써서 만드는 요리가 꽤 많이 나온다. 이중 '돼지내포국'은 돼지의 허파·간·대창을 깨끗이 씻어서 무르게 삶은 다음 김치·숙주나물·파를 넣고 다시 끓이는데, 고명으로 계란· 은행· 대추· 밤· 당면 따위를 얹어서 국물이 자작해지도록 끓인다. 이것을 국물이 많게 만들려면 신 김치를 넣고 파·마늘·후추 등으로 갖은 양념을 하여 끓이면 된다. 이렇게 완성된 요리는 평안도의 전통음식으로서 볼품이 있고 영양가도 많은 푸짐스럽고 구수한 찌개가 된다.
돼지 내장을 이용한 독특한 음식으로 '위쌈'이 있다. 돼지의 귀때기살· 갈비살· 족발살 등을 잘게 썰어서 갖은 양념을 하여 무친 것을 돼지의 밥통 속에 넣고 실로 꿰맨 다음 세 시간 가량 삶아서 돌로 눌렀다가 식으면 편육으로 썰어내는 음식이다. 때로는 밥통 대신 창자를 써서 '창자찜'을 만들기도 한다.
'고기순대'와 '선지순대'
'순대'는 돼지의 창자를 이용하여 만든 가장 서민적인 전통음식이다.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축산업이 성행해 고기가 흔해서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곱게 갈아 소금에 절여 돼지창자 속에 가득 채운 '소시지(sausage)'가 오래 전부터 가내수공업으로 발달해 왔다. 그렇지만 서양과 달리 농경 위주의 삶을 살아와서 고기가 귀하던 우리 조상들은 창자 속에 약간의 잡살뱅이 돼지고기나 돼지피를 여러 가지 다른 재료와 섞어서 가득 채워 삶아낸 순대를 만들어 냈다. 소시지를 우리말로 '양순대'라고 하는데, 서양의 소시지가 우리의 순대와 재료나 만드는 방법이 엇비슷하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순대는 돼지의 창자를 껍질로 써서 만들기 때문에 겉모습은 비록 징글맞지만 값이 싼데다 특이한 맛이 있어서 서민들이 즐겨 찾는다. 또 평안도 전통음식이라 순대라 하면 우리는 자연히 '아바이 왕순대'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순대의 껍질로 쓸 돼지 창자는 끓는 물에 살짝 데쳐서 많이 붙어 있는 흰 기름덩이를 떼어낸다. 창자는 소화기관이라 역한 냄새가 많이 나므로 뒤집어서 큰 그릇에 담아 굵은 소금으로 바락바락 주물러 창자의 한쪽 끝을 수도꼭지에 끼우고 물을 틀어 손으로 죽죽 훑어내려 맑은 물이 나올 때까지 씻어낸다. 그리고는 정종과 생강을 갈아 넣어 또 주무른 다음 겉이 나오도록 다시 뒤집는다. 손질이 끝난 창자는 적당한 길이로 잘라서 창자 끝에 깔때기를 끼워 두부·숙주나물· 찹쌀밥· 돼지고기나 돼지피· 표고 따위를 마늘· 후추가루· 생강· 소금으로 양념하여 미리 준비한 소를 가득 채워 넣는다.
이렇게 속을 채운 순대는 펄펄 끓는 물에서 삶아내면 되는데, 속이 새 나오지 말라고 양쪽 끝을 실로 묶으면 순대가 익으면서 공기가 팽창하여 순대 옆구리가 터지기 쉬우므로 꼬챙이로 이따금 찔러주어야 한다. 그러나 순대가 끓는 물에 들어가면 익으면서 양끝이 자연스레 오그라드므로 굳이 순대의 양쪽 끝을 묶을 필요가 없다.
순대는 재료에 따라 돼지고기를 소로 쓰면 '고기순대', 돼지피를 소로 쓰면 '선지순대'라고 한다. 옛날에는 '살'코기를 '골'고루 많이 섞어 창자에 '집'어 넣은 고기순대를 '쌀골집'[←살골집], 돼지의 '피'를 '골'고루 버무려 '집어 넣은 선지순대를 피골집'이라고 했다. 북한에서는 '선지순대를 '피순대'라 부른다.
전제옥(全濟玉)님은 옛날 순대국을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한창 때에는 순대국을 잘 끓이는 집만 찾아 다니기도 했으나 그 순대가 숙주나물로만 만든 것은 별로 맛이 없고 제 살골집이라 하여 순대 속에 고기를 다져 넣은 것이라야 먹을 만도 하다."
최상옥 여사가 회고하는 옛 '개성 순대'도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당면에 돼지피만 넣어 만든 순대와는 전혀 다르다. 우선 색깔이 요즘처럼 돼지피를 많이 넣지 않고 아주 작은 양만 넣기 때문에 짙은 자주빛이 아니다. 순대 모양은 비슷하지만 그 속에 들어가는 재료에 고기를 많이 쓴 '쌀골집' 순대라서 맛이나 영양면에서 요즘의 선지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삶아 익힌 순대는 김밥 모양으로 썰어서 함께 쪄낸 허파·간 따위를 곁들여 양념소금에 찍어 간식으로 먹거나, '순대국·순대볶음'을 만들어 먹는다. 최근 들어 경기도 양주시 주내면 유양리에는 임꺽정이 먹던 옛 양주골식 순대를 내놓는 음식점이 잇따라 등장하여 세칭 '순대골'이라 부르는 등 먹거리 드라이브 코스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순대의 음식문화
「돼지꼬리 잡고 순대 먹자고 한다」는 속담이 있다. 성미가 급한 사람을 풍자하여 이르는 말이다.「여윈 소 순대가 크다」는 속담도 있는데, 짐승은 마를수록 창자가 커서 많이 먹는다거나, 깡마른 짐승은 잡아도 고기가 별로 없고 창자만 많아서 별 실속이 없다는 뜻이다. 옛날에는 소 창자로도 순대를 만들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각종 요리서에는 돼지창자로 만든 순대 외에 《음식디미방》(1670년 말엽)에는 개 창자를 이용한 순대가 나와 있고, 《증보산림경제》(1766년), 《역주방문》, 《규합총서》(1815년 경) 등에는 소 창자에 다진 고기를 온갖 양념과 기름장으로 간을 맞춰 섞어서 가득 채워 쪄낸 순대가 설명되어 있다. 그러나 이런 음식들이 내용상으로는 분명히 순대이지만 순대라는 이름으로 나오지 않고 개장[狗腸?], 황육 삶는 법, 우장증(牛腸蒸) 따위로 표시되다가 1800년 말엽에 나온 《시의전서》에 비로소 '슌대'라는 낱말이 등장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남북조 시대(B.C 420~589)에 양고기를 곱게 간 다음 각종 양념으로 버무려서 창자에 집어 넣고 건조시킨 '腸(lup cheng)'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중국 원(元)나라 때의 《거가필용》이란 책에서는 순대를 '灌腸'이라고 했다. 《임원십육지》(1827년경)는 거가필용을 인용하여 灌腸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살찐 양(羊)의 소장(小腸)과 대장(大腸)을 깨끗이 씻어서 여기에 같은 분량의 활혈(活血)과 냉수를 섞어 가득 채운다. 활혈이 너무 많으면 이것이 굳어서 창자에 부어 넣을 수 없다.''
이를 보면 우리의 순대문화는 몽골 민족이 세운 원나라가 이 땅을 지배하던 고려 말엽에 들어와 양고기 대신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이용하여 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대변의 배설을 촉진하거나 영양을 보충하기 위해 약물을 항문을 통해 직장(直腸)이나 대장에 집어 넣는 것을 관장(灌腸)이라고 한다.
'순대'라는 말은 만주어로 순대를 뜻하는 '셍지두하(senggi-duha)'에서 나왔다고 한다. '셍지'는 '피'를 뜻하는데, 이 말이 고려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짐승의 피를 가리키는 '선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순대의 '순'이라는 말도 만주어 '셍지'에서 나왔고, '대'는 창자를 뜻하는 '두하'가 변형된 것이라고 한다. '대'가 창자를 뜻하는 것은 배창자를 가리키는 '배때기'의 '때'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몽골의 순대로 '게데스'가 있다. 양의 피에 부추와 야생 마늘·소금을 창자에 넣고 삶아낸 음식이다.
우리나라에는 짐승의 창자를 껍질로 써서 만드는 순대만 있는 게 아니다. 함경도에서는 동태의 뱃속에 여러 가지 소를 채워 넣고 말린 '동태순대'를 만들어 먹고, 강원도 지방은 삶은 오징어 다리와 두부 숙주나물 버섯 따위를 양념하여 생오징어의 몸통에 채워 넣고 찜통에 쪄내는 '오징어순대'가 유명하다.
[미트저널. 9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