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득 ,
내가,아이 셋을 낳았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내 존재가 굉장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세상에나,나를 통해 세 생명이 몸을 얻어 이 세상의 빛을 보게된 것이다.우와.
아이를 낳았다.
15년 하고도 닷새 전 꼭 이맘 때.
새벽에 가벼운 산기를 느껴 위의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병원으로 향했다.
날씨는 화창했고 병원 마당의 커다란 나무에서는 새소리가 들렸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분만 대기실에서 기다려야했다.
두차례의 경험 덕에 출산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없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엔 반드시 끝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정말 두려운 건 내 발밑에 존재하는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운명 그런 거 아니겠는가)
간간이 몰려왔다 물러가는 통증 사이사이에 남편에게 나가서 담배도 피우고 커피도 마시게하는 여유도 부렸다.아이 이름도 그 때 지었다.하하(출산의 고통은 온전히 혼자 몫이지 옆에 누가 붙어있다고 덜하지는 않다!)
커튼 너머 내 곁에서 산고를 겪던 ,아마도 초산인듯한 산모가 기억난다.이 산모 참 깜찍했다.친정엄마와 웃으며 얘기하다가도 남편이 들어오면 계속 죽을 듯이 아야아야하다가 남편 나가면 도란도란~
첫 아이 때는 예수병원이었다.분만 대기실에서 여덟시간을 견뎌야 했다.보호자 입장도 불허된 곳.
라디오에서 들려오던 이문세의 별밤과 ,인턴들과 간호사들이 주고받던 농담들과 웃음소리.바로 눈 앞에서 이렇게 죽을 것 처럼 아픈데 ,참 어처구니 없는 풍경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 술 더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으니 남편을 들여보내주든지 아님 허리 한 번만 만져달라는 산모에게 "아줌마만 아픈 거 아니예욧"이라고 알려주기까지 했다.(남들도 다 겪는다는 사실이 고통을 완화해주지 못하는 때도 있다 )
전날까지 열심히 요가를 해서인지,아님 횟수가 선수를 만드는 건지 순산을 했다.
의사한테 아주 잘 참는다고 칭찬까지 들었다.
아이를 낳아본 여인들은 그래서 잘 견디는 것일까?죽을 것같은 고통을 견디어봤기 때문에?
며칠 전 교회 오빠의 죽음을 들었다.내 위에 위에 오빠의 초등학교 동창.그러니까 58년 개띠.당차고 유쾌한 청년이었다.운동도 열심히 하고 나름 건강관리도 충실히 했다는데 심근경색이었단다.
아버지인 장로님은 나 어릴 때에도 할아버지셨다.95세.노인이 충격받으면 치매가 올 가능성이 많다는 이유로 그 분에겐 비밀로 했다고한다.그 분의 아내 권사님.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쭉 보아오신 분.일년에 한번쯤 교회에 가면 "아이고 진숙이는 어찌면 이렇게 처녀 때랑 똑같냐" 하신다."권사님도 하~나도 않늙으셨어요,호호"하는 농담을 주고받곤했다.선하고 유쾌하신 분.가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혼자 견디느라 얼마나 힘드실까.일이 나기 전 주말에 내려와서 그동안 자주 못와서 죄송하다고,이젠 자주 내려오겠다고하며 올라갔다는데..
그래도 이겨내시겠지.우리 엄마도 그러셨다.
31년전 유월.
나는 초등학교 육한년이었다.뒷마당에서 부모님은 내게 탱자나무 울타리에 올린 나무딸기를 따주고 계셨다.우체부가 왔고 아빠가 나가셨다.그 후의 상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어떻게 엄마에게 말씀하셨는지 아빠가 어떤 표정으로 나가셨는지....작은 아버지와 함께 부산에 내려가서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해서 바다에 뿌려주고 오셨다고한다.그래서인지 내게 오빠의 죽음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둘째오빠 였는데 그 일이 있고나서,지금도 세째오빠에 대해 얘기할 땐 둘째오빠라고 해야할 지 세째오빠라고 해야할 지 망설여진다.
우리 오빠.
초등학교 오학년 담임선생님은 숙직 할 때 우리 반 애들을 숙직실로 불러 공부를 시켜주신 적이 있다.한 번은 밤에 집에 가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는데 누군가 저 쪽 구석진 나무 아래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노래라기 보다는 기타치며 절규하고 있었다.루루 루루 루루루..지금도 마로니에는 피이고오 있겠지...
미친 놈이라고 욕하며 집에 돌아 왔는데 잠시 후에 오빠가 기타들고 들어오는 것 아닌가.오빠였어???
Y대에 가고 싶어하는 애를 학비며 여러가지가 엄두가 나지않아 간신히 설득시켜 국립해양대로 보낸 것이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하셨다,엄마는.다섯개로 혹은 여섯개로 보이는 섬에 대한 편지가 오빠의 마지막 편지였다.물론 끝은,다름이 아니라 돈이...였지만.(삼십여년이 지나 지금은 핸드폰으로 버전이 바뀌었지만 객지에 유학한 자식이 부모에게 돈탈때 쓰는 여전한 수법^^)
엄마는 내 앞에선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대신 어디론가 사라져서 찾아보면 들판을 교회를 훠이훠이 헤메고 계셨다.그래서 더 걱정이 되었다.
신앙이 아니었으면 정신을 놓았을 거라고 하셨다.나중 나중에 내가 성인이 된 후에 말씀하셨다 .
그러나 나는 엄마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남아있는 자식들의 존재가 정신을 다잡게했으리라고.고통을 겪어본 어미의 힘.본능.
그나저나 한 달 쯤 후면 그 날이 돌아오는데 엄마는 지금도 그렇게 아프실까?
기억해서 전화라도 드려야지 하면서도 한 번도 못했다.두 분이서 가만히 기도하며 추모하시겠지..
아기는 건강하고 예쁘고 순했다.위의 아기들은 바스락 소리만 들려고 깜짝깜짝 깨서 늘상 업고 키웠다.자주 깨는 아이 때문에 밤에 숙면을 제대로 해본 적도 드물었다.
어느 날인가는 밤에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아침.깜짝 놀라 코에 손을 대어보았다.기저귀가 축축한데도 밤 새 자는 아이라니~
성격도 밝아 외가식구들은 햇님같다고했다.
그런 아이가 이제 중학생이 되어 하얀 교복입고 등교한다.종아리 치수 관리하고 ,하루 종일 거울을 끼고 산다.속눈썹 뷰러와 고데기를 사고 , 립글로스를 사고, 어제는 바닥에 벗어 팽개친 청바지에서 마스카라까지 발견되더니 오늘은 드레스룸에서 내 향수냄새까지 났다.허 참.
" 어머님 말씀대로 성적관리는 잘하지만...당돌하고 돌출행동을 하고.....많은 지도가 필요한 아이입니다"라는 가정통신문도 받았다.야영갈 때 굼슬굼슬 고데하고 가며 쉬는 시간에 떠들고 아마 그런 행동들땜에 40대 여자 도덕선생님 눈 밖에 났을게다.
그래서 나는 학교와 이 아이의 분방함 ,호기심을 조율하느라 조금 신경을 쓴다.그러나, 다소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나는 이 아이를 키우는 게 정말 즐겁다.맹랑소녀 이양.
그래서 오늘도 쌀 씻어 밥 안치고 뜨물받아 시레기국 끓이는 수고를 기꺼이 할 것이다
parent.ContentViewer.parseScript('b_11650742');
첫댓글 와, 선생님 자랑스러워요, 그런 분 곁에 있다는 것이.....
'남들도 다 겪는다는 사실이 고통을 완화해주지는 않는다'에 깊이 공감해요.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진실... 즐거이 셋째를 키우시는 타인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사회문화 선생으로서 수업 시간을 빌리자면.. ㅎㅎㅎ ; 엄마는 성취지위, 자식은 귀속지위... / 부모가 된다는 것, 누구나 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 저도 누군가의 착한 여동생이고 싶었지요. 아주 오래도록!!! 그러나 사악한 누나로 끝날 운명인것 같아요. "셋째" 오빠까지 있는 샘이 부러운데요..
국민학교까진 네명....
영원히 오빠 넷인거죠? 샘의 기억 속에서 30년은 더 사실테니.. / 샘의 삶의 궤적.. 결혼 전, 후 모두 든든한 가족이 함께했기에 넘치는 포용력과 섬세함을 함께 가지게 되셨나봐요.^^* 사진 속 이뿐 이양~ 경계선에 있다고 보기엔 너무 순한 얼굴인걸요~
여태 취향님의 영화글, 단상만을 보다 더듬더듬 옛적 회상을 따라가다보니 풍경이 더욱 입체적으로 보이는걸요? 꿋꿋한 여성, 엄마, 그리고 다사다난한 삶을 통과해오신 분으로 말이죠. 무시로 일상과 몽상 사이를 오가자면, 우선 즐거움도 즐거움이려니와 이런저런 수고들이 따르기 마련이지요. 한 편의 영화에 바친 감동과 삶의 흔적을 세세히 투영한 님의 글들, 글구 "오늘도 쌀 씻어 밥 안치고 뜨물받아 시레기국 끓이는 수고를 기꺼이" 하겠노라는 다짐들 사이에서 여전히 섬세한 감성과 시심을 잃지 않고있음에 놀라울 따름입니다. 모쪼록 더욱 빛나는 세월만 가득하기를, 더욱 화려한 몽상의 날개를 펼쳐가시기를....
차분한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니 저 역시 옛날 일들이 생각나는군요. 누구나 아픔과 회한이 없으련만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세상으로 훌쩍 떠난다는 것은 슬픈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