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이만쯤 가을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어느 날 저녁, 지리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던 한 산골마을인 음정의 어느 집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 짓는 모습을 보고 부엌으로 발길을 향한 적이 있다. 저녁늦은 하산 길에서 본 이 정겹고 그리웠던 모습에 귀신에 홀린듯 발길은 부엌으로 향했고 붉은 아궁이 불빛이 얼굴에 가득한 할머니에게 불을 넣고 싶다고 했다. 땀에 젖은 등산복의 사람에게는 불이 제일이라 생각하셨든지 부지깽이를 건네주셨다. 잘 쪼갠 마른 장작 몇 토막을 아궁이에 넣고 이리저리 불꽃을 건너 이으니 아궁이의 달아오른 열기에 용광로 쇳물보다 붉은 빛을 내면서 타 올랐다. 아궁이 불 앞에 앉아 본 적이 얼마만인가. 하염없이 불빛을 바라보니 내 어릴 때 이 모습으로 앉아 있으면서 엮었던 이야기가 실타래 풀리듯 풀려 나온다.
우리 조상들이 참으로 불을 조심스럽게 다루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우리 가족이 분가를 할 때였다. 이삿짐에 꼭 챙겨야 할 것은 요강도 있었지만 할머니는 장손인 나에게 불씨를 들려 주셨다. 건네 준 불씨를 오지그릇에 담아 새집으로 가져 갈 때는 무엇때문인지를 몰랐으나 한참 뒤 그것은 조상들이 재속의 불씨를 귀중히 다루는 한 의식임을 알았다. 당시 “시집 온 색시가 불씨를 잘못 다뤄 쫓겨났다”는 떠도는 소문도 있었으니 잿불의 귀중함이 사람보다 더 했던 것이다. 무엇 때문에 불이 사람보다 중요했단 말인가? 그것은 사람은 태어나 살다가 죽는 시작과 끝을 가진 유한한 생명체이지만 불씨는 불을 피우고 다시 불씨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리라....
온돌을 데우는 아궁이 불은 바로 재속 불씨로 비롯하는 것이 예사였다. 당시에도 성냥은 있었으나 돈으로 구입해야 했고 그래서 가급적 긴급을 요할 때 사용될 소중한 물건이었기에 머리 맡에 둔 화로의 재속에 묻어 둔 불씨로 아궁이 불을 일구었다. 집안 어른들이 전날 탄 아궁기의 숯불을 화로의 재속에 묻고 인두로 잘 다독거려 두었다가 아침에 그 재 무덤을 허물고 그 속에서 채 삭지 않은 조그맣고 납작한 빨간 불씨들을 사용해서 불을 지폈던 것이다. 입에서 닳고 닳은 빨간 사탕처럼 예쁜 불씨, 그것을 검불에 옮겨 입으로 불면 활활 타는 아궁이 불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장면들을 지금 생각해 보니 마치 동화 속의 이야기처럼 아름답게 느껴진다.
동네 친구들과는 달리 아궁이 불넣는 것이 좋아 어머니가 시키지 않아도 그 보직은 항상 내 것이었고 저녁의 부엌에는 거의 내가 있었다. 그럴 때 기쁨은 순식간에 싹터 주위에 열기를 퍼뜨리면서 휘황한 불꽃으로 타 오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었고, 아궁이 불의 그 흐뭇한 따뜻함은 무엇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 순간 아궁이 불은 뜨겁다기보다는 따뜻했고 구수한 냄새가 났으며 그 냄새 속에는 영양가도 푸짐히 들어 있었다. 어릴 적 누군가에게서 들은 ‘거지는 모닥불에 살찐다’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불을 지필 때에는 남녀 누구나 양 무릎을 크게 벌리고 앉는다. 그런 자세는 따뜻한 불기운을 아랫도리에 한껏 쪼이는 데에는 최고의 포즈로, 특히 여자들 아랫도리의 건강에 좋았다. 그 불기운의 따뜻함과 구수한 불 냄새에 휩싸이고 한껏 취하다 보면 몸은 빵처럼 부푸는 것 같았고 아궁이의 너울거리는 주황색 불길에 시선을 빼앗긴 채 공상에 잠겨보는 것도 좋았다. 밥이 끓어 무쇠솥뚜껑 사이로 수국 같은 흰 거품이 퍼져 나오면서 밥 익는 구수한 냄새가 입안 가득 돌 때의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 즐거움과 기쁨들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무쇠솥 앞에 앉아 불을 지피고 넣는것이 좋았고 기다려졌던 것이다.
당시 겨울철의 땔감은 솔잎을 말린 갈비, 장작, 청솔갱이, 콩짚이 주종이었다. 나무와 그 잎과 가지가 타고 콩짚이 타들어 가면 아궁이 안으로 땔감을 조금씩 조금씩 안으로 밀어 넣으면 되었다. 불은 부지깽이로 다스리는데, 이놈은 원래 먹성이 좋아 주는 대로 야금야금 잘도 받아먹었으므로 조금씩 아궁이에다 땔감을 밀어 넣어야만 했다. 일종의 '통제시스템'을 작동해서 다루어야 땔감 사용도 줄이고 화력도 높일 수 있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이 넣으면 부지깽이로 때려 덜 먹게 하고 축축하게 젖어서 맛없는 것은 부지깽이로 들추면서 먹여야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불을 때고 있으니 산행의 피로가 몰려와 온몸이 노곤해진다. 아궁이 불에 뜨거워져 불알주머니가 기분 좋게 축 늘어진다. 혀를 날름거리며 땔감을 잘도 먹는 아궁이 불의 그 흐뭇한 따뜻함과 구수한 불 냄새 그리고 남은 불씨들....이제 남은 것은 오직 불멸의 씨앗인 불씨뿐이다. 그 불씨는 내 가랑이 사이에 있는 생명의 불씨인 것이다. 어둑한 저 지리산 너머로 '인생, 인생 우리 인생, 불 전하러 온 인생, 어이 어이'하고 슬프게 달구질 노래를 하는 조상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기억이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어떤 것은 잊으려고 해고 계속 기억이 나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아주 오랜 것처럼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달구질 노래와 불씨의 영혼은 다르다.
큰 산 밑이라 그런지 주위가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부지깽이 끝에 살아있는 불씨를 털고 일어서면서 이곳 산골 마을에서 대대로 꺼지지 않고 이어져 왔고 또 이어져 갈 재 속의 불씨를 묵묵히 바라본다. 불씨는 환영처럼 속삭이며 내게 묻는다. ‘인간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게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온 한 고독한 영혼인 것을. 당신은 어떤가요? 나는 죽어서 불을 피우지만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삶을 찾았나요?’라고. 아궁이 불을 넣으면서 잠시 잊어버렸던, 내가 원하는 운명과도 같은 삶을 마침내 발견한다. 인간의 삶은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한 두 개의 꿈을 되찾으려는 긴 여행이라는 것을 뒤늦게 이제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20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