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전 10월11일에 뭘 했는지 기억이 거의 없다. 문인협회 모임에 간 것만 어렴풋이 생각난다. 작년 9월10일과 11월11일은 아예 깜깜하다. 하지만 이 날들을 평생 애지중지 기억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날 결혼한 커플들이다. 숫자로 쓰면 올해 10월11일은 ‘10-11-12’이고, 작년 9월10일은 ‘9-10-11,’ 작년 11월11일은 ‘11-11-11’이다.
오는 12일엔 라스베이거스의 약식 웨딩채플 100여개소는 물론 전국의 유명 예식장들이 모두 혼례 스케줄로 꽉 차있다. 그날은 ‘12-12-12’이다. 라스베이거스의 ‘티볼리 가제보’ 채플은 이 ‘역사적인 날’에 결혼하는 커플에게 예식장, 신부 꽃다발, 사진 36매, 이메일 결혼 증명서를 묶은 패키지를 ‘단돈 199달러’에 제공한다고 광고하고 있다.
플로리다의 한 업소 광고도 ‘세기의 결혼식’을 내세우며 “하루 최다 결혼식 기록을 세우는 역사적 행사”에 동참할 커플들을 모집하고 있다. 이 광고는 모든 참가 커플이 풍광이 아름다운 포트 마이어스 비치의 백사장에서 합동결혼식이 아닌 개별결혼식을 올리며 추첨으로 뽑힌 한 쌍에게는 초호화판 ‘일몰 결혼식’을 올리게 해준다고 유혹한다.
역시 플로리다의 팜비치 카운티 당국은 이날 공식 혼례장소인 법원이 붐빌 것으로 예상되자 선착순 신청자들에게는 도떼기시장 같은 법정 대신 사적지로 보존되는 우아한 옛 법원건물에서 혼례를 치르는 특전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2-12-12-12-12’(2012년 12월12일 12시12분)를 고집하는 커플들이 있어 고민이라고 관계자는 귀띔했다.
희귀한 세 자리수 날짜는 기억하기 쉽고. 왠지 행운이 따를 것도 같다. 특히 새천년 첫날이었던 2001년 1월1일(1-1-1)과 ‘럭키세븐’이 세번 겹친 2007년 7월7일(7-7-7))엔 결혼식이 폭주했다. 작년 11월11일엔 결혼식과 함께 신생아도 많았다. 아기에게 1이 6개나 있는 생일(11-11-11)을 선사하려는 발렌타인 데이 임신모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트리플 숫자와 함께 1-2-3, 5-6-7, 9-10-11 등 역시 1년에 한번 뿐인 일련숫자 날짜에도 결혼식이 많았다. 신혼부부들은 이런 날짜들이 기회와 조화와 발전을 기약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수리학자들은 설명한다. 반대로 10-9-8, 6-5-4, 3-2-1 등 ‘카운트다운’식의 일련숫자 날짜를 선호하는 커플들도 많지만 아무래도 ‘카운트 업’ 쪽보다는 적다.
금년 12월12일에 결혼식이 유난히 더 러시를 이루는 까닭은 12-12-12가 금세기에 유일하게 남은 트리플 숫자 날이기 때문이다. 1년이 12달이므로 ‘13-13-13’ 따위는 없다. 다음번 트리플 날짜는 거의 한 세기 후인 2101년 1월1일(1-1-1)이다. 일련숫자 날짜도 내년의 11-12-13, 후년의 12-13-14 이후엔 2103년 1월2일(1-2-3)까지 기다려야한다.
한국인들에겐 12-12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전두환‧노태후 등 소위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 고약한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33년이 지난 요즘 첨단 신세대들에겐 12-12-12 결혼식이 ‘쿨’해 보일 수 있다. 한국은 미국의 月-日-年 표기와 달리 국제표준기구의 年-月-日 표기를 따르므로 10-11-12 같은 상향식 일련숫자 날짜와는 별로 인연이 없다.
애당초 ‘12-12-12’는 유쾌할 수 없는 숫자다. 지구종말의 날이라는 ‘12-21-12’와 너무나 흡사하다. 종말론자들은 천문학의 천재였다는 마야부족이 만든 달력이 2012년 12월21일까지만 표시돼 있다며 그 날이 지구 끝 날이라고 허풍을 떤다. 과학자들이 이 말의 허구를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듣지 않는다. ‘지구 끝 날’이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오는 12일 뉴욕 매디슨 스퀘어가든에서 ‘12-12-12 콘서트’가 열린다. 열흘 후의 지구종말을 면하려는 굿판이 아니라 최근 미국 중동부를 강타한 태풍 샌디의 피해자들을 돕는 자선공연이다. 반 조비, 폴 매카트니, 빌리 조엘 등 톱스타들이 출연하고 34개국에 실황중계된다. 그 콘서트가 ‘12-12-12’ 덕분에 세기의 공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12-08-12
첫댓글 '시비-시비-시비' 진짜 유쾌할 수 없는 말이 되네요. 평생에 돌아오지 않는 날 무었을 할까? 수고하셨습니다.
중복되는 숫자로 된 날짜 얘기 읽다 보니까 문득 69년 6월 9일에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네요. 아마 이상의 소설을 읽고 있지 않았을까? 그 날 6시 9분엔 학교 가는 버스를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까? ㅎㅎㅎ 12월 21일에 정말 종말이 온다면 그건 얼어붙은 농담이 되겠죠?
그들이 지하철 선로에서 변을 당한 한 석기씨를 위한 초혼의 노래도 부르길 바랍니다만....
날짜 마다 의미가 쌓여가는 것이 나이가 먹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 되네요, 나도 시비 하나 세워봐?
12를 시비로 볼 수 있는 시인의 눈이 참 밝습니다. 12-02 는 뭐 없나요? 제 기억에 영원히 남아 있는 날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