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편 41편 1–13절
[서론] 폭풍우 치는 들판의 병상의 실존
성도 여러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리어 왕》에는 인간 실존의 가장 비참한 순간이 등장합니다. 모든 권력과 영토를 두 딸에게 넘겨주며 가장 깊은 신뢰를 보냈던 늙은 리어 왕은, 권력을 잡은 딸들로부터 비정하게 버림받고 폭풍우 치는 황량한 들판으로 쫓겨납니다. 왕관을 빼앗기고 광기와 병마 속에서 울부짖던 리어 왕은, 들판의 가난한 이들을 바라보며 비로소 이렇게 탄식합니다. "아, 내가 너무나 미흡하게 이 연약한 자들을 보살폈구나!"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41편 역시 바로 그 폭풍우 치는 들판, 즉 ‘육체적 질병’과 ‘가장 믿었던 친한 친구의 배신’이라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극단의 한계 상황 한가운데서 터져 나온 시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겉으로는 병문안을 와서 위로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그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며 악을 수집하는 원수들과, 한 식탁에서 떡을 나눠 먹던 친한 친구의 배신을 목도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평소에 자신의 신체와 관계를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병상과 배신의 순간은 우리의 존재론적 연약함을 잔인하게 폭로합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서로를 존재 자체로 존중하던 '나와 너(I-Thou)'의 거룩한 관계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을 도구로 삼아버리는 '나와 그것(I-It)'의 가식으로 전락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절망의 심연에서 비명으로 끝맺지 않고, 본문에 녹아 있는 단어들을 통해 복과 구원의 참된 의미를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신약적 성취와 우리의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약자를 향한 긍휼이 진정한 참된 복입니다.
본문은 탄식으로 시작하지 않고, 뜻밖에도 지혜 선언으로 포문을 엽니다. 1절의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복이 있음이여(아쉬레이)”에서 ‘아쉬레이(אַשְׁרֵי)’는 단순한 물질적 형통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 언약 안에 바르게 서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신성한 복과 영적 안녕을 의미합니다. 시편 제1권이 1편 1절("복 있는 사람은...")에서 ‘아쉬레이’로 시작했듯, 제1권의 마지막인 41편 역시 ‘아쉬레이’로 열리며 수미상관을 이룹니다.
성경이 말하는 가난한 자를 보살핌은 자선 사업이 아닙니다. 레비나스(E. Levinas)의 철학처럼,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은 우리에게 이기적 주체성을 내려놓으라는 하나님의 윤리적 명령입니다. 이 구약의 선언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 즉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 5:7)라는 팔복의 선언으로 완성됩니다.
리어 왕이 들판에서야 깨달았던 약자를 향한 눈물이, 성도에게는 삶의 평안할 때 실천해야 할 언약적 의무입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의 약자와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의 병상에 누울지라도 '아쉬레이'의 은혜로 우리의 요를 고쳐 주시고 구원하실 것입니다.
둘째, 식탁의 배신속에서 십자가의 은혜를 바라봅니다.
4절에서 시인은 "여호와여 내게 은혜(헤세드)를 베푸소서"라고 구합니다. 시인이 이 은혜, 언약적 자비(חֶסֶד)를 구하는 이유는 9절에 나타난 극심한 관계의 파괴 때문입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누어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아케브)를 들었나이다" 고대 근동에서 떡을 나누는 식탁은 생명을 함께 공유하는 언약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친한 친구가 '발꿈치(아케브, עָקֵב)’를 들었다는 것은 그 식탁의 언약을 짓밟고 등을 돌렸다는 비극을 뜻합니다. 이 ‘아케브’는 구약의 인물 ‘야곱(יַעֲקֹב)’의 이름과 직접 연결됩니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나 타인을 밀어내고 속였던 야곱의 이름처럼, ‘아케브’는 나만을 위해 남을 짓밟고 뒤통수를 치는 인간의 타락한 배신적 본성을 고대 근동적 문화 언어로 담아낸 단어입니다.
이 구절은 신약성경 요한복음 13장 18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자신과 함께 떡을 떼던 가롯 유다의 배신을 예언하시며 이 시편 41편 9절을 직접 인용하셨습니다. 다윗이 아히도벨에게 배신당했던 역사적 고통은, 참된 다윗 왕이신 예수께서 십자가로 가시기 전 가장 가까운 제자에게 배신당하시는 구속사적 수난의 모형이었습니다. 가롯 유다는 주님과 한 식탁에서 떡을 먹었지만,주님을 향해 발꿈치(아케브)를 들고 배신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며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친밀했던 관계가 파탄 나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러나 내 떡을 먹던 친구의 발꿈치 들림 속에서도 주님은 십자가에서 친히 자신의 살을 생명의 떡으로 찢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의 신뢰가 무너질 때, 우리는 결코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 즉 '헤세드'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온전한 자를 영원히 바로 세우십니다
원수들은 시인을 향해 "악한 병이 그에게 들었으니 이제 그가 눕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라"(8절)고 조롱하며 승전가를 부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12절에서 반전의 확신을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를 온전한(투밈) 중에 붙드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나차브)" 여기서 ‘투밈(תֹּם)’은 도덕적 완벽함이 아니라, 신앙적 온전함으로서 세상의 조롱과 배신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인격적 지조를 꺾지 않는 '중심의 진실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온전함을 지킨 자를 주 앞에 ‘바로 세우십니다(나차브, נָצַב)'. 10절의 "나를 일으키사"와 12절의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시나이다"라는 고백은 신약적 맥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귀(Exaltation)를 예표합니다. 무덤과 사망 권세는 예수를 영원히 가두어 둘 것이라 착각했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를 부활시키시어 하나님 우편에 영원히 세우셨습니다.
세상은 때로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를 보며 "너는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중심의 온전함(투밈)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마침내 당신의 백성을 영원히 바로 세우시는(나차브) 부활의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송영으로 마감하는 삶
본문은 비참한 병상과 친구의 배신이라는 참혹한 실존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마무리는 위대한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이 13절의 송영은 시편 제1권 전체(1~41편)를 마감하는 거룩한 찬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리어 왕의 비극은 황량한 들판에서의 뒤늦은 후회와 절망으로 끝났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삶은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ㆍ환난 날에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자에게 주시는 복(아쉬레이, אַשְׁרֵי)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ㆍ가까운 친구가 발꿈치(아케브, עָקֵב)를 드는 배신의 고통 속에서도 십자가의 은혜(헤세드, חֶסֶד)를 바라봅시다.
ㆍ믿음의 지조를 꺽지 않는 온전함(투밈, תֹּם)을 지켜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임재 앞에 영원히 바로 세워(나차브, נָצַב) 주실 것입니다.
질병과 사람의 배신으로 신음하고 계신 성도님이 계십니까? 나를 병상에서 일으키시고, 영원히 주 앞에 세우실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영원한 찬양(아멘 아멘)을 올려드리는 복된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