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랑탕, 내 영혼의 숨결이 뜨거웠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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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PAL National Park No.1
2014—HIMALAYA LANGTANG-GOSAINKUNDA TREKKING (11)-2
* [카투만두 가는 길] — 솔레-스와라 그리고 베트라와티와 트리술리…
☆… 오전 8시 15분, 둔체를 출발했다. 카투만두로 가는 길, 솔레(Sole)에서 람체(Ramche)에 이르는 문제의 산간도로도 무난하게 통과했다. 비록 일방통행의 진흙길이 파이고 질척거려 시간이 많이 걸리기는 했어도 걱정했던 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 람체(Ramche)를 지나고 나서는 길은 온전한 2차선 아스팔트 도로이다. 스와라(Swara) 마을을 지나고 나면 고도를 엄청나게 낮추면서 지그재그로 내려오는 길, 차창으로 스며드는 바람결이 시원했다. 연도의 집들은 대부분 도로를 향해 가파른 절벽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계곡의 건너편 3,000m 이상의 가파른 고산의 산기슭에 펼쳐지는 다랑이밭의 풍경이 그림처럼 아름다운데, 거기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집들을 바라보며 저 위태로운 산록에도 엄연한 생명이 깃들어 있는 것을 생각하니 문득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막연하고 아득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 그렇게 굽이굽이 구절양장의 길을 따라 내려오면 해발 620m 베트라와티(Betrawati)에 이른다. 베트라와티는 트리술리(Trisuli)와 함께 랑탕이나 티벳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산중도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공안서(公安署)도 있고 병원도 있고 각종 학교도 있다. 그리고 군(軍) 부대도 눈에 띄었다. 길거리에는 차들도 많고 거리에 다니는 사람도 많았다.
* [카투만두 삼사라호텔] — 오랜만에 시원한 물맛을 보다!
☆… 오후 4시 30분, 카투만두에 도착, 우선 한식당 <에베레스트>에서 가서 시원한 냉면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삼사라호텔에 가서 여장을 풀었다. 호텔에 돌아온 일행은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씻었다. 그리고 호텔과 여행사, 환전소, 관광상품 가게가 즐비한 카투만두 문화의 거리로 나가 쇼핑을 했다. 거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등산객들이 거리를 메웠다. 호산아는 상세한 네팔의 지도와 랑탕과 고사인 쿤도의 지도를 구입했다. 우리집 귀요미 지윤이와 영민이에게 줄 예쁜 양가죽 어깨걸이 지갑을 샀다.
비 내리는 카투만두 삼사라호텔 앞 관광문화의 거리
* [카투만두] — 툭텐 사장의 사저(私邸) 초대, 정성어린 만찬
☆… 저녁 7시, 아스트렉의 사장인 툭텐(Tukten Serpa)의 사저(私邸)에 초대를 받았다. 회사에서 미니버스를 보내와서 타고 갔다. 여행사의 고객을 사장이 자기 집에 초대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툭텐 사장은 우리 원정대 7명을 흔연(欣然)히 집으로 초대한 것이다. 툭텐이 이상배 대장과 각별한 우의(友誼)가 있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으로 깊이 감사하며 정해진 시간에 도착했다. 호산아는 작년 3월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왔을 때에도 이렇게 초청을 받아 융숭한 대접을 받은 바 있어 툭텐 내외분께 더욱 친근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아스트렉 툭텐(Tukten Serpa) 사장의 사저(私邸)
☆… 툭텐은 우리를 맞으면서 회사[ASTREK]의 전무도 불러 자리를 함께 했다. 같이 온 그의 아들은 네팔의 대학생인데 며칠 전 혼자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끝내고 왔다고 소개했다. 우리 대원들은 큰 거실에 ㄴ자로 놓인 긴 소파에 둘러앉았다. 특텐은 시원하게 냉장된 네팔의 맥주 ‘EVEREST’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수 따라주며 환영의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담소를 나누며 친교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이상배 대장이 그 나름의 유창한 영어로 주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래도 필자도 간간히 토막말이지만 영어로 대화를 하기도 했다.
송기섭 회장이 준비하여 선물로 드린 고급코트를 입은 툭텐 사장 부인과 함께
☆… 그런데 이 댁의 거실 벽에는 만년의 힐러리(E.Hillary)가 툭텐의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1953년 세계최초로 히말라야 에베레스트(Everest) 정상을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 경(卿), 생전 툭텐과는 부자(父子)의 인연을 맺어 각별하게 지냈다. 힐러리 경이 네팔에 오면, 항상 툭텐의 집에 머물렀다고 했다.
* [에드먼드 힐러리 이야기] — 세계의 최고봉을 세계 최초로 등정한…
☆…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lary) —. 뉴질랜드 태생의 33세 청년 힐러리는 네팔의 셰르파족(族) 가이드 텐징 노르게이(Norgay, 당시 38세)와 함께, 나중에 '힐러리 스텝'으로 이름 붙여진 12m의 험난한 수직 빙벽을 통과하여,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Everest, 8,848m) 정상에 올랐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인 1953년 5월 29일의 일이었다. 에베레스트가 세계 최고봉으로 밝혀진 지 100년, 도전한 지 29년 만에 이루어 낸 쾌거였다. 그리고 나흘 뒤 6월 2일 엘리자베스(Elizabeth) 2세 영국 여왕의 대관식에서 정식 공표됐으며, 전 세계는 기쁨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왕은 힐러리에게 작위를 수여했다. 그 후 힐러리 경(卿)으로 불리운다.
☆… 그는 원래 양봉업자였지만 뉴질랜드의 남알프스에서 등반 기술을 습득하고 로우(J. Lowe) 에게 빙벽등반 기술을 배우며 등산 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로우와 함께 히말라야 무쿠트 파르바트(Mukut Parbat· 7,243m) 원정대를 조직했는데, 이는 뉴질랜드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대였다. 그는 이 원정에서 로우와 함께 정상에 오른 후 귀환 도중 영국 에베레스트 정찰대의 대장인 쉽튼(E. Shipton)의 요청으로 정찰대에 합류한다. 이 정찰에서 그는 쉽튼과 말로리가 등반 불가능이라고 판정을 내렸던 웨스턴 쿰(Western Cwm) 돌파에 확신을 얻는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와 이듬해 쉽튼의 초오유(Cho Oyu· 8,153m) 원정에 참가했지만 실패로 끝난다. 1953년 에베레스트 원정 대장으로 지명된 쉽튼은 그와 로우를 대원으로 선발한다. 그러나 대장이 쉽튼에서 헌트(J. Hunt)로 바뀌자 힐러리는 원정대에서 탈퇴를 생각했으나 쉽튼과 헌트의 설득으로 이를 받아들인다.
☆… 그는 원정대의 셰르파 시르다르(Sirdar, 선임자)인 텐징 노르게이와 최상의 컨디션으로 완벽한 팀워크를 형성하여 1953년 5월 29일 오전 11시 30분에 세계 최고봉의 정상에 올라섰다. 이 등정으로 그는 귀족 칭호를 받아 에드먼드 경(Sir Edmund)이 되었다. 그는 1954년 바룬(Barun) 빙하를 탐험하고 바룬체(Baruntse· 7,220m)를 등정한다. 이후 1956~58년 남극 탐험에 참가하여 남극점에 도달하고 1959~60년에는 마칼루(8481m) 국제학술탐험대를 조직한다.
이 탐험대의 목표는 우수한 장비를 사용하여 효과적인 고도순화와 전설속의 설인(雪人)인 예티(Yeti)를 수색하는 것이었다. 이 탐험대는 아마다블람(Ama Dablam· 6,856m) 등정에 성공하고 무산소로 마칼루 등정도 시도했으나 힐라리는 뇌혈관 이상으로 후퇴하고 나머지 공격대원도 폐수종에 걸려 결국 철수한다.
☆… 이 등반 이후 힐러리는 1967년 <히말라야 트러스트>라는 재단을 만들어,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낙후한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산중의 사람들을 위하여, 120여 차례 방문하며 학교와 병원 등을 지어 주는 사업을 해 왔다. 죽기 전, 그의 재산은 재혼한 부인과 함께 사는 오클랜드의 바닷가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2층집이 전부였지만, 매년 25만 달러 이상의 기부금을 모아 셰르파 족을 돕는 데 썼다. 그의 첫 부인과 딸은 1975년 히말라야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생존 인물로서는 유일하게 뉴질랜드 지폐(5달러)에 얼굴이 그려진 그는 1982년에는 자신이 사인한 5달러 지폐 1000장을 판매해 모은 53만 달러(약 5억 원)를 네팔에 기부하기도 했다.
☆… 그의 장남인 피터(Peter Hillary)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악활동을 시작하여 1982년 로체(8,511m)에 도전하였으나 실패한다. 하지만 1990년 5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으며, 힐러리와 함께 정상에 오른 텐징 노르게이의 아들인 잠링 노르게이 또한 1996년 5월에 정상에 올라 2대에 걸쳐 부자(父子)가 정상에 오른 기록을 세운다.
☆… “뛰어난 사람만 인생을 잘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동기다. 진정 무언가를 원한다면 온 맘을 다해라.” 늘 이야기하던 자신의 철학을 삶의 끝자락에서도 몸소 보여준 것이었다. 그가 75년 펴낸 자서전의 제목인 『모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Nothing Venture, Nothing Win)』는 이러한 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다.
☆… 그가 세상을 뜨며 남긴 바람은 “내가 좋아하는, 내 삶의 출발점인 고향 바다에 닿고 싶다”였다. 그래서 자신의 유골을 오클랜드 앞바다에 뿌려 달라고 부탁했다. 영광을 안겨준 산에는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2009년 1월 11일 뉴질랜드 자택에서 힐러리 경(卿)이 죽었을 때 툭텐 사장은 직접 뉴질랜드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왔다고 했다. 거실의 사진은 바로 그러한 각별한 두 사람의 우정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