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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시선 13|정연휘 시선집『정신의 길』|신국판|136쪽|값10,000원||
|2013,07,13.|도서출판 해가 刊|||||||||||||||||||
해가시선 13
초판1쇄 | 2013. 7. 13.
지은이 | 정연휘
펴낸이 | 정연휘
펴낸곳 | 도서출판 해가
245-943강원도삼척시오십천로301-30,102-1503
전화 033-573-4613․ 010-3341-3327
e-mail:haika@hanmail.net
출판등록 | 제99-10-3호 1999. 7. 7.
인쇄처 | 문왕사 033-648-3670
ISBN 978-89-93138-17-7
값 10,000원
ⓒ2013 정연휘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를 생략합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오.
preface
● ●
머리말
물은 물로 흐르고,
평생 예술과 정신을 교감한
내 삶의 원형질은 詩이다. 내 삶에 詩의 본질은 詩精神 이다.
세상이 아프고 힘들 때, 쓰러지면 이르켜주는 것이 詩精神이다.
내 삶에 빈부, 권력과 피권력, 미추, 불의와 정의, 육신과 영혼을 넘어
그것들의 원형질 속을 차거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로 읽고,
그것들의 폭풍우에 흔들리지 않음은 내 영혼에 박힌 詩精神이다.
그렇게 세상에 왔다가 그렇게 세상 속을 살다가 이제는 조용히
아주 조용히 숲속 오솔길을 산책한다. 하루이든 이틀이든,
일년이든 이년이든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낮은 자세로 인생을 산책한다.
평생을 함께한 분들이 고맙다, 사랑하는 아내 강복순 님과
사위 원경과 혜윤, 나미, 일교 3남매, 김익하 작가, 박종화 시인,
조관선 작가, 김진광 시인, 김일두 시인 외 두타동인들과 문우들,
이용선 죽마고우 외 친구들, 평생 후견인 이만우 노인회장님,
정연기, 진금연 형과 형수님과 형제자매들,강봉순 외 처제들,
시집을 출판한 문왕 김의준 사장님,
평생을 藝術과 精神을 교감한 분들께 고마운 절을 올린다.
물水은 물水로 흐르고, 산山은 산山으로 어연하다.
2013년 7월 13일
翠薟山房에서 정연휘 절
차례
시인의 말 | 14
1부 정신의 바다
서시 | 24
해일주의보 | 25
독도·1 | 26
죽서루에 오르면 | 27
수로부인·2 | 28
해랑신당 | 29
수로부인과 술 한 잔을 | 30
홰나무 두어 그루 | 32
숙면의 바다 | 33
밤파도 소리 | 34
어안에 고인 투명한 눈물 | 35
이별·1 | 36
새벽낚시 | 37
대금굴·1 | 38
동강 어라연·2 | 39
수종사 물종소리 | 40
일곱살 아이 | 41
부처님 웃음소리 | 42
2부 버팀 그리고 고향
44 | 묵시록·1
45 | 묵시록·2
46 | 말 속의 말
47 | 잡초를 뽑으며
48 | 산간수록
50 | 근황
51| 지금도 웃고 있는
52 | 두메 여심이
53 | 고향·1
54 | 사모곡
55 | 어머이의 정지 봉당
56 | 진금연 여사
57 | 감나무가 있는 텃밭에는·1
58 | 감나무가 있는 텃밭에는·2
59 | 아버지의 빗자루
60 | 강은 바다로 흐르고
61 | 오분리
62 | 숭례문
3부 지구, 빠름 혹은 느림
비닐꽃 | 64
산 가출 | 65
물고기 별 그리고 | 66
어디 가고 없는가 | 68
꿈에서·3 | 69
꿈에서·4 | 70
봉황산이 하는 말씀·2 | 72
봉황산이 하는 말씀·3 | 73
찔레꽃 | 74
입동 전 | 75
막걸리 두어 사발 | 76
여름 바다에서 | 77
맹방리바다에서 | 78
삼족오三足烏 | 80
만추 | 81
퇴근길 | 82
함백산·1 | 83
붉은점모시나비 | 84
4부 바람, 바람, 바람
86 | 시인·1
87 | 첫사랑·1
88 | 첫사랑·4
89 | 사랑·3
90 | 돌하나
91 | 할아버이의 숯구
92 | 아내
93 | 향기있는 사람들
94 | 우는 돌
95 | 꿈에 그리던 바닷가에
96 |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
98 | 천경자, 꿈과 정한情恨
100 | 시만 쓴 미련한 소야
102 | 18세 유지환
103 | 관음암 가는 길
104 | 문수봉 천단·1
105 | 여심이재
106 | 아 그렇구나
5부 정신의 길
한계령 | 108
태백산·2 | 109
미인폭포·1 | 110
구방사 가는 길 | 111
고봉암 가는 길·2 | 112
건봉사지에서 | 114
산야에 가면·5 | 116
마이산 북소리 | 117
강원도 범 한 마리 | 118
만리장성 어디쯤인가 | 119
등신불 | 120
예감 | 121
봉황산에서·1 | 122
봉황산에서·2 | 123
밤바다 | 124
노고단·1 | 125
126 | 고란초
127 | 광진산에는·2
128 | 동안 이승휴 선생·1
129 | 쓸쓸한 여백
130 | 금강산·1
131 | 금강산·3
132 | 이심이래요
133 | 심밤중
134 | 수종사에서
136 | 별을 보는 나라
137 | 대청봉 눈잣나무
6부 열정적인 외로운 혼의 詩人
140 | 열정적인 외로운 혼의 詩人
1부 정신의 바다
서시
-오십천·1
산협을 굽이 굽이 흘러
가람 강변에서, 오십천은
무시로 죽서루를 만나
청량한 물결소리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천 년을 두 곱한
세월이 잠겨 있었다.
이 굽이에 시가 흐르고
저 굽이에 역사가 흐르는
오십천 청정한 물에는
푸른 산이 잠겨 있었다.
푸른 산에는 고기떼가
실직悉直의 역사와 노닐고,
깍아지른 벼랑위 선계
시인 송강 선생은
관동제일 죽서루에 앉아
은하수 서녘으로 흐르는 소리를
꿈 속에 듣고 있었다.
물에 잠긴 푸른 산에
노니는 고기떼 서너마리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읽고 있었다.
해일주의보
바다는 일어서서 산행을 한다
잠든 야밤에 도적같이
해변 상가 지붕 위를 걸어서
두타산頭陀山 산정에 따개비 붙이려
바다는 산행을 한다
바다를 텃밭으로 살아가는
추암 마실 할아버지 말씀이
윙윙윙 고막을 울린다
― 옛날 아주 옛날 조수가 일어나
두타산에 바다 따개비가 붙었다
밤비 내리는 날 소리 없이
적막으로, 해안 도시의 고층 건물을 밟고
부풀어 부풀어 바다는 산행을 한다
강진으로 일본 열도가 주저앉던 날
동해안 해일주의보 내리던 날
옛날 아주 옛날 두타산에
바다 따개비 붙었다는
전설이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산행을 하고 있다
독도·1
― 삼척부사三陟府使 윤숙尹肅의 말씀
아! 물안개가 잠옷을 시나브로 내리는 아름다운 그대. 꿈인가 생시인가, 망망의 바다 천고의 풍랑 속에 깊이 발을 딛고, 정갈히 멱감다 내게 처음으로 신비한 전라全裸를 드러낸 환상 같은 우청도羽淸島1). 그대 정갈한 영육에서 향기나는 소리,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쉼없는 괭이갈매기떼, 조선 땅! 조선 땅! 기도소리 지천을 울린다. 아득한 신라시대 삼척 포진성에서 배에 목사자를 싣고 우산국2)을 정벌한 김이사부金異斯夫와 그대는 먼 발치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었는데, 인연이 닿지 않았느니라. 나 삼척부사三陟府使 윤숙尹肅이 처음으로 그대를 내 눈에 넣고, 물안개 잠옷을 내리고 전라의 그대를 탐험, 보듬었느니라. 우릉羽陵3)에서 동남쪽 이백리 망망의 바다에서 꿈이 아닌, 환상이 아닌 멱감는 정갈한 그대를 발견. 그대 이름을 지어 정조正祖께 주청奏請하고『陟州先生案』4) 칠십오쪽 넷째줄에 우청도는 삼척 땅이라 기록되어 있느니라. 아득한 신라역사를 조선조의 역사를 안고, 태고로부터 영원토록 짙푸른 난바다 탐라耽羅와 우산于山과 그대는 한반도의 형제자매이니라. 바다 밖 이웃나라 후안무치 쪽발이 그대를 넘보면 능지처참 삼족을 멸하리라.
………………………………
1) 독도 2) 울릉도 3) 울릉도
4) 김구혁(1798∼1859)이 쓴 삼척사서.
1369∼1853년까지, 그 이후 1904년까지. 삼척부사 이취임
월일 재임시 기적記績과 이변까지 기록.
죽서루에 오르면
― 오십천·2
낭낭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죽서루에 오르면
아주 먼 옛날, 민족자존의 소리
샘물소리 솔바람소리에 섞이어
고려 때의 소리가 들린다.
구름에 허리 가린
두타산 천은사1)로부터
오십천 강줄기 따라 묻어 오는
낭낭한 글 읽는 소리
뼈속까지 깨끗한 선비
이승휴2) 선생이
『제왕운기帝王韻紀』3) 글 읽는 소리.
아주 먼 옛날, 자존의 소리.
죽서루에 오르면
고려 때의 소리가 들린다.
………………………………
1)『제왕운기』의 산실, 삼척 미로에 있는 사찰.
2) 1224∼1300 동안거사로 제왕운기 저자.
3) 상하권 한책, 외침의 수난기인 고려 중기의 민족 서사시.
수로부인·2
― 해가사
일행이 임해정臨海亭에서 쉬는
실직悉直의 자줏빛 바다
해룡海龍이 홀연히 나타나
수로부인을 해중으로 끌고 갔었다.
계책 없이 허둥대는 순정공純貞公.
옛날 말에 여러 입은
쇠도 녹인다 하니
모두 모여 막대로 언덕을 치며,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1)
남의 부녀 뺏어간 죄 얼마나 큰가
네 만일 거역하여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어 먹으리.
뭍으로 돌아온
절세미인 수로부인 왈, 칠보궁전
음식은 맛 있고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의 요리가 아니었다.
생글 생글거리는 홍조 띤 얼굴,
옷에는 세상 없는 이향異香이 풍기고,
해룡은 천신이었다.
아니 해룡은 해신이었다
아니 아니 해룡은 억센 실직인2)이었다.
………………………………
1) 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 조에서 海歌詞
2) 삼척의 옛명
해랑신당
신남리1) 포구 솔바람 소리
예사 소리가 아니다
그녀의 애절한 울음소리이다.
파도 부서지는 신당,
해송 아래 옹달샘은
예사 물이 아니다
그녀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다.
날이면 날마다
떡거머리 총각 삼킨
먼 수평선 바라보다
못 이룬 혼사로
해신과 열애터니
바다 위로 걸어가
그녀도 신이 되었다.
양물陽物 깍아 모시는 신당
그녀 원혼을 달래는
신남리 한촌 파도소리는
예사 소리가 아니다
못다한 열애, 그녀 한의 소리이다.
………………………………
1) 강원도 삼척시 원덕읍 신남리
현재의 해신당 공원이다.
수로부인과 술 한 잔을
― 꿈에서·1
푸른 비늘 번득이는 야성의 바다
여름 바다에 발목 담그고
출렁이는 물결, 자줏빛 바위에 앉아
낚시를 띄우고 세월을 낚는다.
퍼올린 세월에 묻어온
수로부인水路夫人과 통성명
생전의 연이라 생그레 웃는,
퍼올린 세월의 빈 잔에
술동이 앞에 놓고
잔을 채운다.
임해정臨海亭 삼척 바닷가
벼랑의 철쭉꽃은 아직도 피어 있고
생기 넘치는 절세미인과
― 한 잔 더 드시지요
― 한 잔 더 드시지요
흐트러지며 정념이 교감하는
가는 허리 하늘하늘 춤을 추는
온 몸 발그레 상기한 수로부인
사위 별들이 원무하다
수륙水陸에 내려 꽃으로 반짝이고
― 다시 한 잔 더
― 다시 한 번 더
홰나무 두어 그루
― 죽서루에 가면
지금도 죽서루1)에 가면
그림같은 자리에 천 년 나이
죽서루와 손잡고 서 있는
두어 그루 홰나무를 만날 수 있다
오십천 물소리로
삼척 앞 바다 파도소리로,
천 년하고 천 년 실직悉直의 산하를
인걸을, 품고 서 있는 홰나무 푸른 영혼.
두타산 솔바람 가슴으로 안아
죽죽선녀竹竹仙女2) 젖은 이마 닦아주는
홰나무 맑은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지금도 죽서루에 가면
동동주 술맛으로 일어서는 은밀한 정념
오십천 물소리 거문고 타는 소리
두어 그루 홰나무 큰 그늘 아래
고려 사람 김극기金克己3)를 만날 수 있다
………………………………
1) 삼척시 성내동에 있는 관동팔경 제 1루
2) 죽서루 명칭 유래의 절세미인
3) 1150∼1204. 고려 명종 때의 문인. 죽서루에 관한 문헌 중
가장 오래된 그의 ‘죽서루’ 시가 남아있다.
숙면의 바다
― 고생대 삼엽충 화석 하나
지층에 묻힌 세기世紀의 문을 삽질한다.
신선한 전신의 이 떨림
눈 시리게 만날 꿈같은 수 억 년
먼 시대를 삽질한다.
가슴 저미는 그리움으로
산털에 몸 가린
강원의 태백의 산중턱
고생대 주변에는 개불알꽃
참나물이 수줍어 웃고 있다
지층에서 빼내는 반아름 미화석
삽질을 하다 삽을 놓고
5억 년 고생대의 문을 연다
예감의 파도소리, 출렁이는 바다
눈 마주친 삼엽충三葉蟲 화석 하나
눈 시린 만남, 삼엽충 화석 하나
아, 신선한 전신의 이 떨림
바다는 숙면하던 바다는
비로소 툭툭 털고 일어나
물이랑 파도소리 출렁이고 있었다.
밤파도 소리
― 해문 밖에서·1
밤 늦은 시간,
은은한 밤 파도소리
찻잔 속에 출렁이는 바다.
한 잔의 따끈한 커피로
하루의 피곤을 풀 때,
기억의 환희와 고뇌
그 차고 매끄러운 첫정
상금도 커피잔에 남아 있다.
세월이 핥고 간 후진後津 바다
부푼 꿈 많던 그 때 그 시간
출렁이는 동해바다
젖은 전신으로 파도타기 하다
생그레 웃던 그대
이 시간 파도를 탄다
찻잔 속에서.
들리지 않는가 저 소리
찻잔 위로 첫정이 묻어 오는
은은한 밤 파도소리
어안魚眼에 고인 투명한 눈물
― 해문밖에서·4
어시장 어안에 고인
투명한 눈물, 눈물 한 방울
그 눈물에
해초가 일렁이는 바다가 보인다.
출렁이는 파도소리가 들린다.
어안에 고인 투명한 눈물
눈물 한 방울, 그 눈물에
어망을 끌어 올리는 근육질이
푸른 지폐를 세는 어부가 보인다.
어안에 고인 투명한 눈물
좌판에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구겨지는 지느러미
은빛 비늘
눈 감을 수 없는 어안
바다는 그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파도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별·1
오늘은 빈 바다이다.
내밀하게 피멍든 바다는
먼 길 떠나고 없었다.
길게 누운 해변은
일어서서 빈 바다를
파김치되어 걸어가고 있었다.
오장육부, 뼈 마디마디
흔적조차 없는
빈 바다.
바다는
피멍든 바다는
먼 길 떠나고 없었다.
새벽 낚시
출렁이는 새벽 바다
심해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낚시줄을 당기면
바다소리가 걸려 오르고
아득히 묻혔던 사랑이
묻어 오른다.
새벽 바다는
뭍을 잠 깨우고
파도자락은
모래밭에 모래톱을 그린다.
출렁이는 바다
심해의 소리에 귀 기울리다
낚시줄을 채치면
새벽이 걸려 오르고
떠나고 없는 자리
모래톱에 물새 발자욱
소년 때 사랑이
현기증으로 일어서고 있다.
차갑게 내연하는 수평선
대금굴1)·1
황금궁전을 지하에 지었다
나이 5억 살이어도
늙지 않는 젊디젊은 청춘이다
팔딱팔딱 정신이 뛴다
형제자매가 많다
위로 자라는 석순이
밑으로 자라는 종유석이
석순이와 종유석이
맞닿는 석주
전신으로 웃는다
형제자매들의 엄니는
석순이를 낳고
종유석을, 석주를 낳고
또 낳고, 아이들은 키재기를 한다
아이들 키 자라는데,
십센티미터 키 키우는데,
5만 5천년이 걸린다
………………………………
1) 삼척시 신기면 동굴군지대에 있는 동굴
동강 어라연·2
― 삼선암三仙岩
곤드레 곰치 큰제비꼬깔 둥글레
물병나무 억새풀 스치고 간 길 끝자락
젖은 강바람과 함께, 나루지기
엄할아버지 나룻배로 건너면
아주 작은 섬, 목선처럼 떠 있는 삼선암
바위 위 소나무 아래, 세 분 신선과
어린 단종의 영혼이 앉아 있다
정신 깊이 아프고 시린 가슴이다
노을 같은 그리움을 등에 업고
울먹이며 헌시獻詩를 읽는 산까치
비오리 한쌍이 놀고 있는 수면 아래
윗동네에서 물 속으로 흘러 온
아라리 절절한 가락, 가락 사이로
어름치 쏘가리 쉬리 금강모치
물고기들이 한줄로 나란히 서서
단종임금의 영혼에 인사를 올린다
정신 깊이 아프고 시린 가슴이다
강가 병풍 같은 산마루에
걸려 있는 하얀 낮달이
내 가슴 깊이 흐르는 동강을
내 정신 깊이 어루만지고 있다
水鐘寺1) 물종소리
두 물 한 몸으로 스며드는
찻잔 너머 두물머리雨水里 풍경,
시간이 모여 세월이 되는가
도도한 세월의 줄기에서,
수종사 물종소리로, 삼정헌 차 향기로,
아, 만나는 사람들
‘과거시험에 붙은 날이니
그냥 보낼 수 있느냐’ 아버지 말씀따라
젊은 다산茶山과 네 명 친구들,
말과 노새, 소년노비 여나무 명
그림자 보이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눈으로 만나는 곳
‘동방사찰 중 제일의 선망’이라
서거정徐居正이 노래한 절집
수직의 축대 위에 가부좌한
수종사 물소리 들리는가,
도도한 세월의 줄기에서
아, 만나는 사람들
………………………………
1) 경기도 남양주 운길산에 있는 고찰
양수리 인근에 다산 정약용 묘가 있다.
일곱살 아이
― 시설에 있는
엄마가 보고 싶어 소리치고 싶을 때
나는 그림을 그린다. 나는 노래를 부른다
엄마가 보고 싶어 울고 싶을 때
비밀장소에 가 소리없이 눈물을 닦는다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무릎 꿇고 두 손 모아
나는 날마다 기도한다
엄마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내 소원은 일주일에
한번 만이라도 엄마 만나는 것
고등학교 때에는 엄마와 함께 사는 것
언제 눈물을 닦을 수 있을까
내 눈물은 누구 하나 닦아주지 않는다
버렸다. 엄마가 나를 버렸다
엄마가 보고 싶어 위가 꼬이고
엄마가 보고 싶어 열 나도
나는 홀로 서야 한다
부처님 웃음소리
― 신흥사 법당, 어느 보살님
1.
입이 째지게 웃고 있는 부처님
삼배 중 부처님을 쳐다보니
껄껄껄 웃음소리, 법당이 흔들린다
옆 사람은 체감 못하는
부처님 껄껄껄 웃음소리
갑자기 새처럼 가벼워지는 온몸
하늘을 나르고 있다
이 가벼움, 오우 부처님―
2.
정한수 떠 놓고
올리는 새벽 기도
두 시간 걸리는 백팔기도가
부처님 웃음소리 이후
이십 분으로 당겨지는
청량한 가슴
이 기적, 오우 부처님―
2부 버팀 그리고 고향
묵시록·1
― 겨울 꽃밭에는
겨울 꽃밭에는
마음 아파 입다문 꽃들이
어둠처럼 수묵 빛으로 말라
바람이 불 때마다
거부의 손짓을 보낸다.
꽃은 떠나가고
꽃핀 자리에 꽃의 영혼이 매달려
묵시의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겨울 꽃밭에는
어둡고 단단한 뿌리에
핏줄같이 따뜻한 물이 살아서
한 시대 저리고 아픈 엄동을 견딘다.
오늘은 내 삶의 빈 자리
아주 조용하고 낮은 자세로
발 시린 아침이
겨울 꽃밭에 내린다.
묵시록·2
― 마른 잡초의 영혼
겨울 들판에는 맑은 정신의
편린의 마른 잡초들이
내밀히 꿈의 날을 세우고 있다
눈 속에 파묻혀
어두운 세상 입 다물고 있다
마른 잡초의 영혼이
마른 잡초의 영혼끼리
마른 영혼 불러 모아
저희끼리 몸 부비며
저리고 아픈 겨울을 견딘다.
매운 바람 온 몸으로 불어오는
시린 가슴 시린 가슴 속
따뜻한 사랑이 있어
새 생명 보듬는 질긴 뿌리
지금은 입 다물고 떨고 있다
천지에 새 순 자라
녹색으로 출렁일 들판을 예비하고 있다
겨울 들판에는 맑은 정신의
편린의 마른 잡초가
마른 잡초의 영혼을 불러 모아
눈 속에 파묻혀 추위를 견딘다
내밀히 예리한 꿈의 날을 세우고 있다.
말 속의 말
말은 말 그 자체가 생명이다.
아니다 말 속에는 가시가 있다
아니다 말 속에는 뼈대가 있다
아니다 말 속에는 비수가 있다
가시를 거르고
뼈대를 추스리고
비수를 건져버린,
말 속의 사랑은
가슴의 피멍을 풀어준다.
가슴 설레임을 주는 말
싱그러운 마음이 묻어오는
향기있는 말에
귀 기울일 때
이 지구를 주고 싶은거다
아니 나를 주고 싶은거다
우리 풀잎 위의
이슬 같은 인생 아닌가.
잡초를 뽑으며
꽃밭에는 꽃이 핀다
접시꽃 패랭이 꽃, 꽃이 피면서
꽃밭에는 잡초가 자란다.
꽃밭은 빈부가 없다.
꽃밭은 꽃밭으로
꽃은 꽃 그 자체로 아름답다
아름다운 꽃밭에
잡초가 왕성히 자란다
웃자라 꽃의 행복을
짓누른다.
살며 사랑하며
꽃밭의 잡초를 뽑는다
다같이 풀이고 꽃인데
마음이 아리다.
山間水錄
― 물밑 근대사를 만남이다
청산에 들면, 청산 골짜기
개울물 물 밑에 피난 와 살아가는
옹기종기 모여 입 다물고 살아가는
근세사를 만남이다
맑은 산간수에 얼굴 담그면
물 밑 순백의 한 권 책을 만나고
순백의 책장을 넘기면
백 년 전후 세상 안팎
활자화 못한 숨은 역사가 보이나니
참혹한 근세사의 정곡을 만남이다
물 밑 근세사를 깔고
가부좌한 산간수 맑은 얼굴
돌돌돌 청아한 웃음소리 이면裏面
한정 없는 곡소리 들림이다
시린 가슴으로 더 시리게 젖어오는
내 심혼에 녹아드는
백 년 전후 세상 안팎 근세사는
손 흔들어 보이고 말문을 열음이다.
― 역사는 바로 잡아 바로 자리 매김
무언으로 오는 무언의 저항
청산에 들면, 청산 골짜기
개울물 물 밑에 피난 와 살아가는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참혹한 근세사를 만남이다
산간수 맑은 얼굴 이면을 읽음이
근황
― 빗살무늬로 깨어지는 소리
귀를 씻고, 눈을 씻고, 마음을 씻고
헹구고 헹궈도
철옹성 같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내 빛깔 내 삶에서
마음을 맑게
선한 기운의 가슴으로 살았는데
말과 말 사이에 칼을 꽂아 숨기고 던진 말
쨍그랑 말의 돌멩이에 맞아
내 가슴이 빗살무늬로 깨어지는 소리
내 가슴이 빗살무늬로 깨어지는 소리
이후, 가슴 깊숙한 곳 동굴 하나
동굴 속 섬처럼 떠 있는
봉긋한 상처의 무덤에 갇혔다
마음을 활짝 열고 나뉘며 살던
기쁨은 만가輓歌로,
쨍그랑 말의 돌멩이에 맞아
내 가슴이 빗살무늬로 깨어진 이후.
원형이 재생되지 않는다
지금도 웃고 있는
옹기 종기 돌담에 싸여 있는
유년의 초가 지붕
보름달 같은 박 서너 개
지금도 구김살 없이 환히 웃고 있다.
봄 아지랑이로
여름 소나기로
부모님 가신 지 오래이지만
어린것들 얼굴에서
지금도 부모님 만나 웃고 있다.
발가벗고 물장구 치던 여울목
물소리 새소리
보세난報歲蘭 서너 촉, 꽃으로 피어
지금도 그 시절 머물러 웃고 있다
두메 여심이
― 유년의 아침
감나무 윤엽 위로
까치소리 산새소리
내 유년의 두메 여심이
젊어서 젊은 어머니
정지에서
솥뚜껑 열고
놋젓가락에 꽂아 주던,
분이 나서 목이 메이던
찐 감자 하나.
굴피집 뒤란 삼포
가삼 잎새에
돋은 이슬방울 속
하늘은 옥색으로 웃고,
산새소리 까치소리
아침이 열리는
두메 여심이,
어머니의 소리
삼베 짜던 베틀소리
가슴을 적시는 쟁쟁한 소리
고향·1
꿈들이 하얗게 바래져 있다
무르실 지나 새비실
여울길을 가면
할아버지 등짐 지고 넘던 고갯길
병색의 낮달 살아 있고
누구의 곡조였던가
숲을 떠나 시간을 챙기고 간 강물
입새터 옛 고향
나와 춤추며 뛰놀던 유년의 바람은
어디론가 떠나가고
뒷동산 자작나무 숲에
먼저 온 낮달이
할아버지 무덤가에 가 있었다
사모곡
정든 집 텃밭을 떠나
동구 밖 돌아서 가는
어머니의 뒷 모습
보리밭 수파樹波일던
청산의 만가, 꽃상여
햇빛 곱던 사월 초아흐레
보리밭 수파 일던 날
세상 밖으로 가시는 어머니
피붙이랑 한恨 이랑
되돌아 보지 않고,
내 가슴에 계시는 어머니
어머이의 정지봉당
― 心象·2
마른 갈비 소낭구 가지 한아름 쌓인
젊은 어머이의 정지 봉당
소구이를 등뒤로, 맨봉당에 주저앉아
아직도 코흘리게 내 유년은
부지깽이로 아궁지를 쑤시고 있다.
소낭구 가지. 갈비 타는 노근함
내 첫 울음 터트린 본적지
젊은 어머이의 정지 봉당은
유년의 놀이터
철따라 찐 감자 찐 강냉이
칼국시, 보리개떡 빨리 달라고
아직도 발뻗어 투정을 하고 있다.
가매에는 여물 끊는 냄새
소구이에 주댕이 대고 침흘리는
큰 눈 껌벅이는 에미소와 송아지.
무쇠 솥에는 깡보리밥 익는 냄새.
어머이의 정지 봉당에 주저앉아
아직도 코흘리게 내 유년은
연신 군침을 흘리고 있다.
진금연 여사
― 여삼리 고향집
「아이구 인제 오와」 정겹고 투박한 사투리가 반긴다. 바닷가 맹방리에서 산촌 여삼리로 시집 온 스물네 살 새색시 때 그 이쁘던 모습의 진금연陳金蓮 여사. 이제는 눈가의 잔주름이 더 고운 산같은 믿음이다. 할아버지 때는 굴피집, 아버지 때는 양철지붕의 집에서 두 분의 간병과 임종을 지키고, 연전에는 연기 형님과 옛 집을 털어 이층 양옥을 짓고, 가업 3대 울안에 백여평 장뇌산삼長腦山蔘을 키워 가문을 일구었다. 이남 이녀 성가시킨 복덩어리 형수님이 「아이구 삼촌 이제 오와」 내 유년의 투박한 사투리를 지키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우리 형제 삼남이녀 첫 울음소리 배어있는 삼척시 노곡면 여삼리 93번지 마당에서 무공해한 유년을 건져올린다.
감나무가 있는 텃밭에는·1
― 열일곱 살 안팎
감나무가 있는 텃밭에는
잠 깨어 있는 내 열일곱 살 안팎
고뇌와 푸른 꿈이
이랑마다 풋알곡으로
채소 이파리로 자라고 있다
남양동 1통 진주학교 뒷골목
땡땡이네 간이 이발소 뒷편 언덕 위
왕대 숲에 싸인 기와집
첫정이 죽순처럼 자란 본향이다
학교 지붕 위로 수채화같은
바다가 걸려 있는
왕대 숲에 싸인 청춘의 갈망
웅쿰할 수 없는 사랑
감나무가 있는 텃밭에는
내 열일곱 살 안팎
아프고 시린 발자국이 잠들지 못하고
지금도 이랑마다 꿈을 캐는
구원한 곳이다
감나무가 있는 텃밭에는·2
― 땀에 젖은 아버지 어머
밀레의 만종晩鐘 같은
감나무가 있는 텃밭에는
내 열일곱 살 안팎, 이랑마다
학창시절이 살아 있는
아버지 어머니 노동의 수고로움이
은혜로 푸르게 출렁이는 곳이다.
텃밭이랑 이랑마다 학자금이
보리, 조, 콩, 팥, 철따라
참깨, 분추, 무우, 배추로 영글고,
땀에 젖은 어머니 허리 굽혀
거기 철따라 밭을 매시고,
아버지 땀 닦을 틈 없이
거기 철따라 거름을 주시고,
쉰 살 안팎 그 시절 아버지 나이 되어도
감나무가 있는 텃밭
아버지 어머니 등 뒤에는
열일곱 살 안팎 까까머리 검은 교복을 입고
푸른 하늘과 녹색의 텃밭을
번갈아 보는 내가 거기 서 있다.
아버지의 빗자루
― 꿈에서·10
손수 만드신, 아버지 살아 생전
수숫대궁 빗자루 하나
아버지에의 그리움으로
저승에는 일요일이 없는지
가끔 먼 하늘을 본다
오늘 일요일 아침
아버지가 오셨다
둘째 사는 형편 보시러
세상 밖으로 나들이 오셨다.
해후의 눈물은 접었다.
밭 갈고 소 치는 일
더러 향교에 출타하시는
밤 늦게 소리내어 고전을 읽으시는
새벽 마당가 모탕에서 장작을 패는
더러 거나하게 좋아 하시던 술
그런 일상 손 놓으신 지 오래인데
생전의 일 그리워 오셨는가
강은 바다로 흐르고
― 아름다운 김금자 회장님1)
모든 강은 바다로 흐르는데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다
아름다운 그대의 눈부신 나눔,
정신의 보석, 보고寶庫이다
엊그제는 해변과 산자락에서
그대 출렁이는 푸른 마음
어제는 강과 들판에서
이웃과 흘린 땀과 눈물,
모두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하면 된다는 힘이 불끈 솟았다
사계四季 온몸으로 걸어 온 길 30년
고단한 삶, 견디기 어려운 아픔
온갖 고난 검푸른 바다에 잠재우고,
그대 출렁이는 푸른 마음 위로
희망이 동터오는 밝은 빛
모든 강은 바다로 흘러
바다는 넘치는 일이 없지만,
그대 가슴의 바다는
사랑과 봉사로 출렁인다
좋은 꿈꾸는 이 행복
아름다운 그대 있으므로
………………………………
1) 삼척여협 회장 재임 때『三陟女協30年史』발간.
2) 구약성서 전도서‧1
오분리1)
간헐적으로 찰싹이는 파도소리
작은 목선木船 부근에서
갯바람은 파도와 몸을 섞는다
깃발은 내려지고
노동이 보이지 않는다
휴식이 보이지 않는다
고요한 간이부두
산성山城의 푸른 숲 향기
시원始原을 떠난 긴 여로의 종점
오십천五十川은 목선 아래에서
짠 바닷물과 몸을 섞는다
괭이 갈매기 너흘너흘
날개짓 하는 정오의 간이부두
꿈처럼 살았는가
산처럼 살았는가
………………………………
1) 삼척의 모천 오십천 하구에 있는 마을
숭례문崇禮門
― 08.02.10 화염에 휩싸인 민족혼
혈맥을 관통하는 혈연血緣이
610년 생명 있는 것이
한민족의 자존심이 한민족의 정문正門이
훨훨 불이 붙어 불타고 있는 것을
정말, 정말 말릴 길 없이 지켜만 보았다
우리의 민족혼 숭례문崇禮門
우아하고 장엄한 진경
조선 초 국가 이념이
역사의 질곡 임진왜란, 병자호란
6.25전쟁 참화 속 어연했던
잘 생긴 우리 민족혼 숭례문
혈맥을 관통했던 혈연이
정말 훨훨 불이 붙어 말릴 길 없이
우리 가슴에 국보 제1호
다섯 시간 불타고 있는 것을
정말, 정말 지켜만 보았다
우리 민족의 정문正門 민족혼 숭례문을
3부 지구, 빠름 혹은 느림
비닐꽃
― 환경詩·1
비닐꽃이, 허연 꽃이 또는 꺼먼 꽃이
상가喪家의 지등처럼
도시의 거리의 뒷골목에 흐드러져 피고,
봉황산 산자락 산허리
도토리나무 싸리나무 잡목림에,
두타산 정상 주목 철쭉나무 가지에
낄낄낄 귀신 울음소리로
소리내여 웃다가 울다가
그래도 기운이 넘쳐 펄럭이고 있다.
내 피부 내 허리에 부스럼으로
내 정신에 악령으로 파고들어
펄펄 신열을 일으키는
이 거리에서 저 거리
저 산에서 이 산, 시들지 않는
피고 피고 피기만 하는 꽃으로
우리들의 죄가 종횡무진
질 줄 모르는 악의 꽃으로 피어서
지천에 펄펄 펄럭이고 있다.
산 가출
― 환경詩·3
대낮에 호롱불을 켜고,
가출한 산을 찾는
마음을 비운 현자는 보이지 않는다.
수삼 년 전 가출한 산자수명 금수강산
골목마다 아픈 이 시대
앓는 도시의 문을 열고,
불치의 병 3기의 산은
앓는 도시의 문을 닫고,
앓는 도시를 떠나간다.
떠나가는 산은
몸저 누운 강을 지나
도시의 변방
쿨럭쿨럭 잔기침하는
병색의 산에 닿아
가쁜 숨을, 구토를 한다.
가출한 산자수명 금수강산을,
떠나간 병든 산을 찾아 헤매는
대낮에 호롱불을 켠,
이 시대의 현자는 보이지 않는다.
물고기 별 그리고
그 바다 위를
열아홉살 나는 걸었지
청정해역 그 해 겨울 저녁
그 바다 위를
물고기들과 어깨동무하여
도란 도란 은빛 빛나는
이야기를 하였지.
끼어들어 말했지
서녘 황금별은
― 친구들아 어디로 가니
지구는 비극적 종말이 올 거야
핵전쟁·인구팽창·공해로
눈물 글썽이며
물고기들은 낮은 소리로
말했지
― 어쩌랴, 너희들 욕심 때문에
이 아름다운 지구가……
사람이 못 살면
우린들 살 수 있으랴
은빛 빛나는 물고기들은
은빛 빛나는 말을 남기고
어깨동무 풀고, 떠난 그 자리
그 바다 위를
열아홉살 나는 걸었지
흐느껴 울며 울며
어디 가고 없는가
귀밑머리 하얀 파도
파도가 일렁이고
어디 가고 없는가.
모랫바람 곱씹으며
황토길을 걸었다.
여린 마음 씻으며
먼 길, 빗금으로 걸었다.
마음자리 제자리 돌아와
그대 따스함 읽고
이제 넉넉히 포도를 걷는데
귀밑머리 하얀 파도
파도가 일렁이고,
어디 가고 없는가
찬란한 젊은 날은.
꿈에서·3
― 원전사고·1
어둠이 머리까지 묻히는
아픔이 내리는 시간
휘황한 도시에
푸른 산하에
우리들 의사와 무관하게
아무 소리 없이
지천에 내리는 핵먼지.
청초한 이름 없는 풀꽃 하나
북적거리던 도시
가정의 내실, 식구들 얼굴 위로
어디에도 스며드는 핵먼지
깔깔거리던 아이들
웃음소리 사라지고,
용서하며 사랑하던 이땅,
아픔이 머리까지 묻히는
식구들 심장에 스미는 핵먼지
숨 죽인 적막강산
만지면 바스라지는 사물들
꿈에서·4
― 원전사고·2
이 땅에
출렁이는 여론을 밟고
덕산리에 원전原電이 왔다.
식구들 의사와 무관하게
밤새 원전사고로 방사능이 누출
내실에 스며들어
처와 아이들을 천 년 잠재우고
정을 줄 수 있으므로
이승의 의미가 있었는데
처와 아이들은
세상 밖으로 떠밀려 가고
살아 온 날이, 살아 갈 날이
이승의 의미가 없다.
가슴에 간직한 영상 하나
저녁 식탁에 둘러 앉은
장미꽃 같은 식구들
― 입이 터지랴 먹어대는 막내
밥투정하는 둘째
맏이는 우유에 빵
아내와는 술 한잔의 잔잔한 미소
토닥이며, 살부비며
살아온 식구, 처와 아이들은
이제는 이 세상에 그림자가 없다.
원전 방사능 누출로
봉황산이 하는 말씀·2
― 오십천·11, 삼척사투리·2
야이야1), 우타하와2), 맴 정데이3)차리고 오십천을 지키와. 이마빼기 앞세우고 세상에 빠져나와 강물 더럽피는데 날새지 말고, 심실이4) 살다가 가와이. 요새 심깨나5) 쓰는 사람들 쌈박질6)하는거보이 과관도 아이두와. 이제 싱기로 때곡대지7) 말고. 좋은 환경 물려 줍시데이. 그래야 자손들이 냉중에8) 잘 전댈기 아이와9). 오새는 사람들이 아꾸운10) 물 물쓰듯이 막쓰대는거, 내싸마 고마11)몸서리가 다나잖소. 우타하머 좋겠소. 살멘사12), 맑은 물 넘치게 뜀박질해 나갑시다. 잘 있스웨이13), 뭉청 고맙쇠이14).
………………………………
1) 여보게=이 사람아 2) 어떻게 하나 3) 마음 똑바로
4) 마음 편안하게 5) 힘이 센 6) 싸움질 7) 서로 아등바등
8) 나중에 9) 견뎌낼거예요 10) 귀한 11) 나는 이제
12) 살아가면서 13) 잘 계세요 14) 많이 고맙습니다.
봉황산이 하는 말씀·3
― 오십천·12, 삼척사투리·3
‘어데 가와1)’ ‘오분이 가와’ ‘뭣하러 가와2)’ ‘고기 사러 가와’ ‘잘갔다 오아3)’ ‘야아4)’ 울타리 없이 인정이 넘쳐 살았잖소. 요새 사람들 우타되사5) 진싱이6)같이 초로인생인데 환경파괴하는 거 보면 입이 씨구와7)말이 안나와요. 뭘 똑띠 알지, 고마 한 대 쌔래빠까이. 지벌시 개주나 창자머리는 있사가지고, 내가 소기 타겠소 안타겠소. 우타하와8) 사람들 뭘 핸기요, 오십천 등때기 낮짝 모가지 온몸에 부시래미 매린도 없어요.9)말두말아요. 피 말루는 기래요, 달부 어러워요. 오십천 이고 지고 가는 짐이 무과사 혼절 직전와. 오십천이 막 울고 있잖아요. 다 때래치우고 이제 고마, 마카10) 일어 납시다. ‘아 디라라11) 오십천에서 아 밍경같이12) 맑아라 오십천이’ 되게끔 우타하와, 한 편생 같이 살아온 이 맴, 가가 아프면 나도 아파, 가가 가면 나도 가와.
………………………………
1) 어디로 가십니까 2) 무엇하러 가십니까
3) 조심스럽게 다녀오십시오 4) 예 5) 어떻게 되어서
6) 바보 7) 입이 써서 8) 어떻게 합니까
9)처참합니다. 10) 모두 11) 더럽다 12) 거울같이
찔레꽃
무명의 하늘 가는 길목
산자락 길섶에
소복한 여인들이 흐드러져 있다.
산 따로 숲 따로
외로운 산협
여인들이 어깨 부비며
제자리 떠나지 못하고
하얗게 하얗게 흐느끼고 있다.
산 높고 골 깊어
드러누운 대관령 산그림자
한恨이 높고 깊어
무명의 하늘 문 들지 못하고
산자락 길섶에
머리 풀고 어깨 추스르며
하얀 영혼
서럽게 서럽게 흐느끼는
오백년 조선조 여인들.
입동 전
― 떠나는 가을
가을은 산에 산행 온
여인의 머리카락에 얹혀,
떠나기 위해 하산한다
하산한 가을은
도시의 주점 술탁 앞에 앉아
동행한 여인과 술잔을 비운다
여인의 가슴에 안겨 온 산국 몇 송이
술탁 위에 누웠다
저기 오는 입동을 바라보다
제 풀에 놀라 추락하는 한때
몇 순배 술잔을 돌린 가을은
술탁에 잔을 놓고
여인의 옷깃을 여미어 주고
살래살래 손 흔들며,
안녕안녕 작별을 고한다.
취한 얼굴 낙엽에 숨기고
막걸리 두어 사발
설움 가득한 세상,
가슴에 눈물 가득 채우고
막걸리 두어 사발 들이키는 주막,
어둠이 밀려오는
도시의 변두리 주막에서
하루의 피곤한 노동을 달랜다
낮은 자세로, 낮은 자세로 살아온 나날
연거푸 막걸리 두어 사발 들이키면
모래밭에 열두 칸 기와집을 짓고
사발 가득 철철 넘치는
김삿갓의 너털 웃음소리
술잔 수면에 이는 미세한 파문
막걸리 두어 사발 들이키면
눈물로 가득한 가슴에
하루의 텁텁한 노동의 피곤이,
온 몸으로 녹아들어 짜릿하게 풀리는 시간.
여름 바다에서
― 金益河 訶白께1)
나이쯤 잊은 채 파도 타기를 한다
맹방리2) 바다에서
키를 넘는 파도를 뛰어 넘으며
정신의 싱싱한 젊음으로
반백의 친구와 파도 타기를 한다
동심이 여름을 먹었다
살갗의 세포를 뚫고
혈관에 정신에 짜릿짜릿
차갑게 파고드는 싱그러운 우정.
파도타기를 한다
겹겹이 찰랑찰랑
더러 감당키 어렵게
밀려왔던 생애.
나이 쯤 잊은 채
싱싱한 정신의 젊음으로
파도머리를 뛰어 넘으며
여름 바다에서 파도등을 탄다
………………………………
1) 소설가,『33년만의 해후』외 소설집이 있음
2) 삼척시 근덕면 맹방리 ‘맹방해수욕장’
맹방리바다에서
― 시인 그리고 어화
이까배1) 휘황한 어화魚花는
이까의2) 눈물로 밤바다에 핀 꽃이다
긴 백사장 끝에 앉아, 시인들이
어화 불빛 언저리에서
밤바다를 앞에 놓고
가슴 열어 시를 읽더라
춘천 이영춘 시인이
칼날에 베이지 않는 목소리로
강릉 조영수 시인이 시를 읽더라
술잔 속에 시가 물장구치며 헤엄치더라
삼척 김은숙 홍성화 시인은
전신에 출렁이는 바다로 서서
퍼들퍼들 뛰는 시어를 지천에 뿌리더라
뿌려진 시어들은
이까배 휘황한 어화로 피어나고,
밤바다 불야성 신도시로
가로등으로 나란히 서더라
생존의 꿈을 쫓다
채낚기에 끌려 온 이까의 눈물.
시인이 뿌린 시어들은
어부의 손아귀, 어안魚眼에
영롱히 빛나는 눈물로도 피더라
………………………………
1) 오징어 잡이 어선 2)오징어
삼족오三足烏
― 눈 속에 새 한 마리
내 눈目 속에 새 한 마리 키우고 있다
너를 향하여 가는 한 마리 새
접동새 까치 두루미
물총새 봉황새는 저 아래
고구려 새 한 마리 키우고 있다
윤나는 검은 깃털
태양을 품에 안은 삼족오三足烏
새 한 마리 키우고 있다
태양을 먹고 그리움을 낳는
그리움을 먹고 태양을 낳는
너가 그리우면 그리운 만큼
그리움의 덩어리 새 한 마리
푸슬푸슬 눈 내리는 고구려 하늘
고구려 하늘을 날아 눈雪을 헤쳐
너에게로 가고 있는
내 눈 속 삼족오三足烏1) 새 한 마리
………………………………
1) 해 속에 있다는 세발 가진 까마귀.
집안集安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새로,
고대 신화에서 태양을 상징하고,
해의 신이 들고 있는 해 속의 삼족오
晩秋
만추의 길을 가는데
노란 은행잎 일행이
내 앞서 걷고 있다
가을을 안은
노란 은행잎 일행이
내재한 겨울을 흘리며
까불까불 바람에 밀리어
골목길을 걷고 있다.
내 살아 온 날들이
노란 은행잎에 실리어
잠시 동행하는 퇴근길.
만추의 노을 피는 한때
저기 오는 추운 겨울
퇴근길
온 세상은 젖어 있는데
비에 젖지 않는 낮은 웃음소리
한적한 아파트 촌
가로등 불빛은 젖고,
내 옆을 스쳐서 지나가는
비에 젖지 않은 낮은 웃음소리
저기 내 기거 창문이 보이는데
젖은 가로등 불빛 아래
한 우산을 받고
빗속을 걸어가는 젊은 부부
비에 젖지 않은 낮은 웃음소리
내 가슴에 파고들어
온 몸 젖어오는 외로움
함백산1)·1
― 여름 야생화
엎드린 떡갈나무 숲
떡갈나무 아래 피어있는 애잔한 꽃
얼굴 붉히는 동자꽃이 앉아 있다
지척에서 하늘하늘
여린 웃음 웃어 주는
이질꽃 예쁜 얼굴
도란도란 이야기를 건넨다
주변에는 며느리밥풀꽃
모싯대, 꿀꽃, 여우오줌, 노루오줌
큰까치수염, 야생화가 웃고
산청목과 마가목이
하얀 미소로 서 있다
얼굴 붉히는 동자꽃에
절집, 노스님, 동자승이 보인다
얼굴 붉히는 동자꽃 위로
보이잖는 눈이 펑펑 내리고,
애잔한 전설이 보인다
………………………………
1) 태백산 옆에 있는 산
붉은점모시나비·1
― 김경숙 조각작품에
초곡리1) 바닷가에 가면
귀한 붉은점모시나비
네댓 마리 만날 수 있다
조각 위 기린초에 앉았다
우아하게 훨훨 우아하게
내 가슴으로 날아 온다
초록산 하얗게 물들이다
첩첩산중서 바닷가로
꿈을 안고 소풍 와서
붉은점모시나비 날개짓
산과 바다를 이어준다
너와나 우리를 이어준다
초곡리 바닷가에 가면
하장2) 붉은점모시나비가
우아하게 예술로 철학으로
훨훨 푸른지구 위를 날은다
………………………………
1) 해양레일바이크 휴게소에 조각작품이 여러점이 있다.
2) 삼척시 하장면 추동리에 유일한 붉은모시나비 집단 서식지
4부 바람, 바람, 바람
시인·1
모음과 자음의 베틀에서
자기의 분신을 빚는
언어의 직조사이다.
그의 정신에서는
맑은 시어의
수액이 흐른다.
언어의 베틀에서
하나의 생명을
불어 넣는
시의 꼭지를
따는 사람이다.
첫사랑·1
― 개방 19세
거부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오뚜기처럼 살아가는 생활철학
아롱아롱 꿈많은 가시내
할딱 숨 가쁘게
시야 가득 채워 오는
흉하지 않는 두툼한 입술.
우람한 산을 안으며
원시림으로
미끄러져 오는 무게
옹동그라이 수축으로
받아들이는
궁문宮門
산여울, 물 흐르는 소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늘을 보는 마음으로
전신에 퍼지는 온새미로,
아, 아프지 않는
개방 19세, 촉촉이 비나 내렸음
첫사랑·4
― 사랑 그리고 이별
몸 전체로 물비늘 반짝이는
여린 파도머리를 밟으며
소중한 마음
예쁜 조개에 담아
안고 이고 오는 그대
석양빛 속에
나풀거리는
옷자락
얼굴 없는 바다
움큼할 수 없는 사랑
웃음 그리고 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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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전체로 핏빛 노을 타는
여린 파도머리를 밟으며
소중한 마음
예쁜 조개에 담아
안고 이고 가는 그대
사랑·3
내가 너를 부르므로
너는 내게로 왔다.
투명한 마음을 읽으며,
너는 너를 허물고
나는 나를 허물고
그런데, 가위 눌려
질항아리 깨어지는 꿈
어둠 속 빛나는 눈물
눈물만 남고
눈물에 젖어
더욱 빛나는 영혼,
비로소 너와 나는
영혼에 사랑의 화인을 찍었다.
돌하나
― 오십천·3
천 년을 오십천으로 걷다가
만 년을 강바닥에서 쉬었다가
다시 천 년을 걷다가.
따스한 봄날
마평리馬平里1) 강가에서
다섯 살박이 혜윤이가 찾은, 첫 만남
비로소 단단한 가슴을 열고
녹음기가 녹음 못 할
묵시의 말문을 텄다.
세상 햇빛 부시어
눈이 있돼 눈 뜨지 못하고
천만 년 기다린 그리움으로
온 몸은 젖어
물결소리로 새 정을 전하고
경탄의 눈으로 어깨를
머리를 어루만지며
사진 찍을 수 없는
내밀한 마음과 마음을 교감한다.
………………………………
1) 오십천 강변 마을로 삼척시 마평동임.
할아버이의 숯구
― 心象·5
숯꺼멍으로
땀에 젖은 얼굴
흰 이빨 드러내어
웃던 훤칠한 키.
평생 등짐으로
휘어진 할아버이
어깨선 같은 덧뫼기
산길을 내려.
솔미산 중턱에
피어오르는 연기
나무숲에
배어있는 숯내음.
손수 참나무를 자르고
지게로 져 나르던,
손수 쌓은 숯가마에
숯감 참나무를 채워
손수 숯껑 굽던
할아버이의 숯구덩이
아내
― 강복순康福順님
나의 본향本鄕 당신에게
들뜬 목소리로 당신을 불러
앞치마에 젖은 마음 닦으며
환한 미소로 내게 다가오는 당신
실내 가득 은은한 난향蘭香
창밖에는 함박눈이 내리고
겨울 난향에 설레이는 가슴
환한 미소로 내게 다가온 당신
나의 본향 당신의 손을 잡는다
맞잡은 따슨 손, 손금을 타고
내 가슴으로 전류처럼 오는 당신의 사랑
항상 내 곁에 있는 당신의 고운 눈망울
내 눈目은 자주 젖는다.
향기있는 사람들
― 남양동 백조아파트 이웃·1
따스한 가슴을 키운다
마음과 마음을 주고 받는
팥죽 한 그릇, 시루떡 한 접시
미역 한 오리, 오징어젓 한 접시
이따금 별미를 돌리는
따스한 정이 깊은
천국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내 삶은 아름답다
이미 적의는 바람 속에 녹아 들고
이미 냉랭함은 물결 속에 녹아 들고
교감과 친화 선의와 기댐
정신의 이 따스함
팥죽 한 그릇, 시루떡 한 접시로
닫힌 세상 문이 열린다
따스한 마음과 마음이
따스한 가슴을 키운다
백조아파트 향기있는 사람들
우는 돌
― 정선 아우라지
고려의 강물로 정신을 씻고
아우라지 강가에서
가만히 귀 기울이면
꿈너머 꿈 속 같이 들리어 오는 소리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먹구름이 막 모여든다”
민초들의 애절한 아라리 가락
돌 위 돌에 닿아 돌 안으로 스며들어
돌의 울음이 들린다.
구구절절 바람갈피에
묻어오는 고려 일곱 유신遺臣 한의 소리,
충절의 소리 물 위에 닿아
물 안으로 스며들어
강의 울음이 들린다
꿈너머 꿈 속 같이 들리어 오는 소리
꿈에 그리던 바닷가에
― 陳仁鐸 시인 영전에
유년의 꿈이 자란 뒷동산
유년의 꿈이 자란 천지사방
꿈꾸는 외로운 작은 섬 하나
영혼으로 앉은, 잔잔한 노老 시인
귀 열어 놓고 파도소리 솔바람소리
앞 바다 바라보고 있다
아픈 도시에서
반듯한 외교관, 교수, 시인으로
한 생애를 내리고
고향, 텃밭, 유년의 설경,
그리운 어머니, 파도소리 가슴에 묻고
꿈꾸는 외로운 작은 섬 하나
영혼으로 앉은 노시인
맑은 정신으로, 영혼 속에서
이승을 내다보며
볼펜 잔 글씨로 원고지에 시를 쓰고 있다
시를 쓰다가 시를 쓰다가
유택에도 주막이 있어
서너 잔 막걸리, 덩덩 덩더쿵
장난끼가 넘치는 동안의 엷은 미소
덩덩 덩더쿵, 안경을 치켜올리고 있다
화염에 휩싸인 천사의 에필로그
― 윤이상의 음악과 삶
나 윤이상은 통영에서 태어나 1995년 11월 4일 분단조국을 뒤에 두고, 독일 베를린에서 78세로 영면했습니다. 생전에 인생의 마지막을 조국에서 보내고, 묻히고 싶었습니다. 환갑에, 칠순에, 윤이상음악제에 조국을 찾았으나 나를 거부한 문민정부. 지구에 마지막 남은 못난 분단조국 남북을 그리움으로 살다 갔습니다. 나의 음악은 언어이며 노래입니다. 나의 음악은 지적 음의 유희가 아닌 시이며 호소입니다. 나의 음악은 환상이며 암묵의 극적 세계입니다. 교향시<광주여 영원히>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는 민족사의 비극 광주정신, 불의와 억압 속에 시달리는 인류의 고난 확장입니다. 민족통일과 세계평화, 빈곤과 불평등이 내 음악의 주제정신으로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는 내 음악의 양심의 기록으로, 나의 동포들을 위해 쓴 작품입니다. 불협화음의 시대에서 도덕으로 완성된 사람 세계조화를 추구하는 나 윤이상은 예술과 삶이 일치된 세계입니다. 굴욕적인 고문, 중앙정보부 납치로 한 영혼이 파괴되는 고통 속에서 정신은 극명하게 깨었습니다. 옥중 깨진 유리창 사이로 차가운 황소바람이 몰아치는 바닥에 쭈구리고 앉아 언손을 입김으로 녹여가며 <나비의 미망인> <영상>을 탄생시켰습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감옥 속에서도 자유로우며, 죽음에 직면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쓰고, 불구덩이 속에서도 노래하는 윤이상이다.> 루이제 린저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 윤이상은 생전에 인생의 마지막을 조국에서 보내고 조국에 묻히고 싶었습니다. 모시잠뱅이 걸치고 고향 통영 바닷바람 한 번 맞고 싶었습니다. 나를 거부한 문민정부, 지구에 마지막 남은 못난 분단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천경자, 꿈과 情恨
― 나의 화력 50년, 호암갤러리
화력畵歷 인생을 정리, 나를 해방 시키는 종막 전시회입니다. 유난히도 나를 이뻐했던 외조부를 그린 <祖父>, 6.25 직후 화단에 당당히 입성한 뱀소재 <生態> 등 120점 내 그림 속 뱀, 꽃, 슬프디 슬픈 여인들, 그림소재라기 보다 내 분신이고 내 자식이에요. 내 꿈을 그린 정한의 화력인생 50년, 더이상 뱀, 꽃과 여인을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뱀이나 인골을 그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어요. 독사의 몸뚱아리에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꽃이 숨겨져 있죠. 뱀의 존재는 나를 도전케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일종의 구원의 상징입니다. 온 몸의 기를 끌어 모아 그림에 정진함으로 순수를 지키고 한을 정화, 외톨이 고독과 슬픔이 열린 영혼으로 그림에의 승화였어요. 어렸을 때 어머닐 유난히 따랐어요. 쪼그리고 앉아 원삼 조각지를 가지고 놀곤 했죠. 색동저고리도 참 좋아했고요. 여기서 색채에 대한 감각이 싹텄던 것 같아요. 원삼 자락이 오랫동안 바랜 색과 눌눌한 배추색, 촌스런 분홍색만 보면 지금도 환장하게 좋아요. 남도창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외조부의 실감나는 장화홍련전과 심청전 옛 얘기에 웃음과 눈물을 쏟아냈던 즐거운 어린시절, 진절머리 나는 가난, 아끼던 예쁘디 예쁜 동생의 죽음, 가난과 슬픔이 내 작품 활동의 약이였어요. 잔혹한 운명에 저항, 울면서 계속 그림을, 압박하는 운명의 무게를 고스란히 화폭 속에 옮겨 놓았습니다. 기막히게 좋은 자식들 2남 2녀 다 떠나 보냈습니다. 모두 다 바람처럼 떠나고, 보고 싶어요. <너희들 참 예쁘구나> 그린 그림과 말을 걸면 그 애들이 뭐라고 말을 해요. 죽음이 참 아름답고 편하게 느껴져요. 모델없는 영의 세계에 함몰하여, 보라나 하얀 목도리가 팔랑팔랑 거리며 나신의 여인을 휘감아 3차원 영계로 이끄는 그런 환상을 그리려 해요. 그러다 보면 돌아가신 조부, 어머니, 동생, 2남 2녀를 꼭 만날거예요
詩만 쓴 미련한 소야
― ‘80소년 떠덜이의 시’ 서정주론
1)
난 평생 시만 쓴 미련한 소야. 시로 일관한 내 평생, 미련한 소가 풀을 먹고 일곱 번을 되새김질하지 않아? 그런 꼬락서니지. 그래도 육십 몇 년을 시를 함부로 쓰거나 양산하지 않았으니 다행이지. 내겐 시란 살아가는데 유일한 것으로, 나대로 진실을 다해 시 앞에 내 인식을 그득히 담는데 주력해 왔어.『80소년 떠돌이의 詩』 시집에는 이런 내 인식이 잘 담겨 있지. 시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일상생활을 소재로 시가 되어야 하지. <아내의 손톱 발톱을 깎아 주고/ 난초 물 주고 나서/ 무심코 눈 주어 보는 초가을날의 감익는 햇살이여> 이게 시가 돼. 안돼?
2)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왔던 「자화상」의 젊은 모습에서, 꽃뱀의 낼름거리는 붉은 아가리 「화사」 같이 분출하던 나의 언어는 떠돌다가 이제 다시 동심으로 돌아갔지. 동심과 통하는 영원에의 희구, 영원한 정신적인 생명, 늘 영생永生을 파왔지. 나는 젊을 때 일찍이 노자 도덕경, 폴 발레리와 말라르메, 릴케, 니체, 슈르데알리스무에 경도되던 휴매니스트 시절이 있었고, 죽은 윤동주도 릴케 영향을 받았어. 영랑은 나를 친아우처럼 알았고, 재사 지용의 별명은 할미새였지.
3)
한국 전쟁이 계기가 되어 신라주의인『신라초新羅抄』와『동천冬天』의 시집이 나왔지.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문밤의 꿈으로 밝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이 「동천」이 내 대표 시이지
4)
요즘 매일 아침마다 성경 읽고 체조하고 아내 대신 원두커피를 끓이고 토스트 굽지. 그리고 1,625개 더하기 3개의 전세계의 산 이름을 외는데, 각 산이 있는 나라의 수도 이름까지 넣어서 다시 해야겠어. 그러면 한 시간 정도 걸리겠지. 나의 희망은 소박해, 바라는 것 일체 없어. 그저 부부가 소꿉장난 친구같이 손잡고, 여행하고, 그리고 함께 가는 거야. 올해 내 나이 여든 셋이야. 내년이 결혼 60주년인데, 타히티나 가봐야겠어. 그런데 이쁜 여자를 보면 마음 속에 아직도 이쁘구나 라는 감각이 꿈틀꿈틀하니 이것이 문제이긴한데―.
18세 유지환
― 기적의 생환
움직이는 맨발이, 발톱에 치자색 매니큐어 발가락이 보인다. 뇌물공화국, 산산히 부서져 내린 리들의 꿈. 산산히 부서져 내린 맘모스 삼풍백화점, 501명 생목숨들, 따뜻한 마음 해맑은 웃음들이 매몰 귀천한, 비리공화국, 눈물이 빗물이고 땀방울이 눈물인 필사의 구조현장, 차디찬 주검앞에 사랑하는 가족의 목쉰 통곡소리, 슬픔속에, 아! 움직이는 맨발이 보인다. 숨마저 멈춘 세상, 길이 1.5미터 높이 40센티미터 시멘트 조각 철근 사이, 뒤척일 수 없는 비좁은 공간에서 매몰 열사흘 285시간. 기적의 열 여덟살 유지환양―.
산소용접기로 철근을 잘라내고, 시멘트 조각들을 맨손으로 젖혀내는 급박한 구출작업, 움직이는 맨발이, 발톱에 치자색 매니큐어 발가락이, 온몸이 들것에 실리고,얼굴 가린 노란 타올을 젖히는 앳된 손 하나, 코와 다문 입이 드러나고, 마침내 해맑은 눈이 드러나 다시 보는 세상의 눈부신 빛이여! 매몰 열사흘 285시간 기적의 생한 유지환양의 첫 말은 ‘냉커피가 제일 먹고 싶었어요’ 흰 이빨 드러내 웃는 어여쁜 열여덟살. 비리공화국에서, 우리들의 꿈, ‘살아 돌아와 위대하다.’ 유지환 양―.
관음암1) 가는 길
추사秋史 선생을 만났다
산중에서 산행을 하다
천길 벼랑바위 위
세한도歲寒圖 기품있는 푸른 소나무
계곡 건너편 병풍바위 너머
두타산정頭陀山頂을 바라보다
푸른 소나무로 시선을 옮기는
추사 선생 옷자락이
세한에, 세한도가 흔들린다
화선지, 젖은 묵필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지만
선생의 체취가 솔향에 묻어 온다
마디마디 가지가지가
눈물나게 외롭다
그 많은 좋은 자리 어디 두고
토굴 앞 천길 벼랑바위 위
말 없이 서 있는 푸른 소나무
옆에 가부좌한 추사 선생이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세한도를 감상하고 있다
………………………………
1) 두타산 무릉계곡에 있는 암자
문수봉 天壇1)·1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왔다
여인의 간절한 기도에
산새로 현신하여 문수보살이 왔다
앞 제단에 놓인
입쌀 한 주발 물 한 사발
돌탑 아래 가부좌한
여인의 절절한 속 기도에
문수보살이 포르르 산새로 날아 와
쌀 한 톨 쪼아 먹고
하늘 한 번 쳐다 보고
다시 하늘 한번 쳐다 보고
살 한 톨 쪼아 먹는
기도의 기적을 보고 있다
기돗발이 하늘로 통하는
앞은 태백산 옆은 함백산
하늘 문門이 열리는 천단天壇
산새로 현신 문수보살이 왔다
………………………………
1) 태백산 줄기에 있는 산봉우리
여심이재1)
내 삶이 지칠 때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울 어머니의 함박 미소
생전의 함박 미소 떠 올리면
그리움이 꽃이 되고
불끈 힘이 솟는다
내 삶이 목 마를 때
울 어머니 웃음소리
생전의 웃음소리 떠 올리면
웃음소리 갈피에서
샘물이 솟는다
내 삶이 힘들 때
생전의 모습 떠 올리면
어릴적 젖먹던
울 어머니 심장소리
지구가 들썩거리며
들리어 온다
울음 울다, 웃음 웃다
다시 울음 운다
………………………………
1) 삼척시 조비리와 여삼리 사이에 있는 큰재의 옛길
아 그렇구나
― 구절초와 쑥부쟁이 구별법
꽃대 하나에 꽃 하나만 피는구나
맑은 흰색꽃은 구절초이구나
잎은 쑥 모양이구나
다 그런건 아니지만
높은 산에 있으면 구절초
아 그렇구나
꽃대 하나에 가지마다 꽃이구나
연보라색꽃은 쑥부쟁이구나
잎은 방망이 모양이구나
다 그런건 아니지만
들판에 있으면 쑥부쟁이
아 그렇구나
쑥모양 잎에 흰색꽃은 구절초
방망이형 잎에 보라색꽃은 쑥부쟁이
아 시원해, 이젠 구별이 확실해
또 훗날, 아 구절초, 아 쑥부쟁이
아슴 아슴 헛갈리면 어떡해
그냥 ‘들국화’라 불러요, 예전처럼
정겨운 우리말 ‘들국화’라고…
5부 정신의 길
한계령
장수대에서
동양화 전시장이다.
창세기 원형의 신비이다.
산의 생기가 넘쳐
다른 세계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침엽수는 침엽수를, 활엽수는
활엽수를 낳고 낳고
설악의 영봉 한계령에는
창세기가 머물고 있다.
고혈압 비만증이 없는
원근이 명료한 선
괴암괴석은 설악의 견고한 근육질이다.
한계령을 보는 것은 환상이다.
병풍을 펼쳐 놓은 지평
내설악 장수대에는
수천 점의 동양화가
묵향에 젖어 있다.
태백산·2
내 얼굴 내 표정이다.
고생대나 지금이나
싱싱한 피부, 이 나이에
건강이 넘치는 건
넉넉한 마음이다.
늘 푸른 마음, 마음을 비워
바다에 발목 적시고
낚시하다
이 아침 거울을 보니
붉어진 내 얼굴
단풍잎 사이로 아련한 기다림 하나.
내 생애 살아갈 날
살아온 날 보다 더 긴 세월
되돌아 보면 새록한 기억 하나
내 품에 산행 온
보기에 흐뭇했던 처녀 총각.
한 가정을 이뤄 준 보람이다.
떠나지 않는 것은
산의 자존심만은 아니다
편지를 쓰지 않는 것도
믿기 때문이다
일가 식솔이 다니려 온다는.
미인폭포·1
― 오십천·6
실직悉直1)의 변방, 그리움의 땅
향기로운, 창세기의 바람이 인다
가슴 열린 첫 만남의
지순한 미소가 있다.
옥색투명한 영혼이 투영되는
그대 지순한 미소는
에델바이스 꽃향을 묻혀
나에게로, 내 가슴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내 젊은 날같은 지그재그 그 철길 위
지루박 춤을 추는 열차와 눈 맞추는 땅
황금빛 낙엽이 쌓인 원시림
낙엽송 숲길을 걸어
아, 미인폭포
아, 그대
영혼에 굳건한 믿음이 양각된
실직의 변방 미인폭포에는2)
첫 만남의 지순한 미소가 있다
창세기의 향기로운 바람이 있다
………………………………
1) 삼척의 옛 나라
2) 오십천의 발원지, 삼척시 도계읍 신포리 소재
九房寺1) 가는 길
마주치던 일상을 털며 간다. 털며 가는 길, 길은 끝이 없고 항상 시작이다. 산은 길이 없는 길이 있는데 나의 길은 어디 있는가. 가다가 역사의 강에서 옛사람을 만나 정담을 나누고, 한 수 인생을 배우고, 훌쩍 또 떠나는 길, 늙지 않는 마을 미로末老에서 산새가 하늘 문을 여는 구방산을 오른다. 항상 내 안에 자리한 엄마품 같은 구방산에 문인 몇 사람과 온몸 땀에 젖어 오른다. 먼 산이 눈 아래 아득한 산 중턱. 청산 청솔가지 흔드는 바람, 바람은 바람의 길을 보이며 길을 가고, 병풍 같은 바람벽 아래. 역사의 강에서 먼저 온 사람 ‘어서들 오세요, 후학님들 어서 오세요∼’ 담소하다 반기는 동안선생2)과 미수선생3)을 내 영혼으로 만난다. 산새가 가까이서 하늘문을 여는, 동안선생과 미수선생이 후학을 반가이 맞는 미로에서 구방사 가는 사색의 길에는 내 인생의 길이 보이더라.
………………………………
1) 삼척시 미로면 구방산 = 근산에 있는 작은 사찰
2) ‘제왕운기’의 저자 이승휴의 호
3) ‘척주동해비’ 동해송 시를 쓴 허목의 호.
고봉암 가는 길·2
산문에 드니 산이 맘 속으로 들어 온다
솔바람 숲향기 별천지 원시림이
내 안에서 깔깔거리며 웃는다.
산은 내 안에 있고 산에도 있다
원만한 산길 「눈꽃산의 은자」1)
수필 속 산을 오른다.
청연암 선방 덧문은 열리지 않고
“목소리가 들리어 얼른 나왔네요
어머 그 새 눈이 많이 내렸네요.”
해맑은 동안의 비구니 스님 목소리는
선방 앞 대숲에 묻어 있다 무언으로 들리고
수정색 물방울 흰 드레스를 입은
크고 작은 눈꽃나무 휘늘어진 터널
수필 속 겨울 풍경은
신록으로 옷갈아 입은 나무 줄기에 잠들고
산빛 하늘빛 건강한 웃음소리
가파른 길 땀흘려 오른 산행
산마루 건너쪽 뭉긋한 산
꿈인가 생시인가 고봉암2)은 거기 있고,
그 아래턱 늙은 돌배나무가 있는 샘터 가에
독가촌 검버섯 돋은 너와집이 거기 있고
노란 옥수수 막걸리와 갓김치
무욕의 노인장을 만날 수 있으랴
참선삼매 젊은 수좌를 만날 수 있으랴
솔바람 숲향기 별천지 원시림이
내 안에서 깔깔거리며 웃는데
앞 바다 아득한 수평선 너머
선명히 보이는 울릉도 산봉우리.
........................................
1) 김원우 수필 제목으로, 수필 속 산행
2) 삼척시 노곡면 안개산리에 있는 암자.
근덕면 양리 ‘신흥사’에서 청연암지나
낙락장송 숲길을 한시간 반 걸어 닿는다.
건봉사지에서
바람은
4세기 전 금강산 바람은
문수보살 미소로
불어오고 있었다
민통선 철책 넘어
고성 건봉사지乾鳳寺址로
당나라 오대산 거쳐,
사리탑에 나부끼고 있었다
불치佛齒 사리를 봉안하는
사명대사 흰 수염이.
반 천 년 이끼 낀
기왓장 파편,
천여 승병 땀에 젖은
흔적 흩어져 있었다.
신라의 자장율사
어깨를 토닥이는
문수보살 너털 웃음
양산 통도사 임란의 아픔 쯤
나루람 없이 넘기고
금강산 자리 잡은 건봉사지
명당중의 명당에서
불치사리를 아직도 봉안하고 있었다
사명대사는.
산야에 가면·5
― 晩秋에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운 날
어제 비 내린 뒤 오늘 아침 산에 오른다
설레이는 가슴으로 낙엽은 원무하고
산에는 부처님으로 가득하다
소나무 부처가
맨몸의 떡갈나무 부처가
옆의 자작나무 부처가
흰 이빨 드러내어 웃는다
작은 키 큰 키 빨강 노랑 이파리 부처들이
온 몸 흔들어 몸 전체로 반긴다
성철性徹 스님과 동행하여 오신 부처님이
작은 키 큰 키 빨강 노랑 이파리
부처들에 둘러싸여
이파리 색깔의 설법을 한다
열반한 성철 스님 다비식 날
산야에는 금빛 햇살 오선지에
구르는 산새소리 밟고
길을 가는 부처님 후광에
내 삶이 부끄러워 녹아든다
부처님 머리 위로
선홍의 낙엽이 원무한다
마이산 북소리
전라全裸의 암수 마이산이다
얇디얇은 운무雲霧옷을 어깨에 걸치고
수줍은 미소로 맞는다.
탑사塔寺에서 원시시대를 옆에 끼고
마이산 샅길 천황문을 오른다
정상에 서니 둥둥둥
뼛속까지 파고드는 천고天鼓북소리.
지천을 이은 가냘픈 허리의 키 큰 나무
음각 암벽에 양각으로 키 자란
이파리 실핏줄이 북소리에 하르르 떨린다
내 온 몸 파장으로 물어오는 하늘 목소리
너, 흔들며 살아 온 이승 삶은 무엇이뇨
너, 별을 보는 마음으로 사느뇨
너, 흔들림을 분해하라, 둥둥둥 천고 북소리
원시시대를 옆에 끼고, 수줍음 타는
암수 마이산 샅길 천황문을 내린다
옷을 적시는 여기는 이승인가
천고정天鼓亭에서 천고를 친다
등 굽지 않은 스님 말씀따라
세가지 약속, 세 가지 꿈, 세 가지 번뇌를 친다
둥둥둥, 내 자신이 주인이다.
지천을 울리는 마이산 천고 북소리.
강원도 범 한 마리
― 영랑호 범바위에서
더는 못 가 머문 땅
속초에 살면서
사무치게 그리운 날에는
비에 젖어 호반을 걷는다
꿈에도 보고 싶은
부모형제 두고 온 산천
설악산을 뒷발 딛고
영랑호에 앞발 씻는
오십 년 실향, 눈물 그렁한
강원도 범 한 마리
고향 가까이, 고향 가까이
타향살이 설움 이고
인생을 등짐 지고
북녘 가까이
더는 못 가 머문 땅
두고 온 산천
꿈에도 보고 싶은 부모형제
코 앞 지척에 두고,
더는 못 가 머문 땅
눈물 그렁한 강원도 범 한 마리
사무치게 그리운 날에는
비에 젖어 호반을 걷는다
만리장성 어디쯤인가
― 중국에는·3
직립했던 장성은,
이천년 직립했던 장성은
내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인다
‘이제는 편히 내 주춧돌 아래
누워 쉬고 싶다.’
‘그래, 그래 장엄하고 아름다워’
어깨를 감싸주며 역사를 밟았다.
저 앞 어디쯤인가 화살이
꽂히던 초토의 땅, 바람을 가르던
말발굽소리, 목숨 베던
장칼 휘둘림
흉노족의 함성이 아련하다
저 앞 어디쯤인가 젊은
진시황의 통쾌한 웃음소리
또 어디쯤인가 ‘중국에서
장성을 보지 못한 사람은
사나이가 아니다.’ 바람결에
묻어오는 모택동 목소리
等身佛
― 구화산 무하선사1)
가슴 속을 아리게 파고 든다
생사의 원리를 깨우친 좌화상坐化像
성불成佛한 무하无瑕선사, 생옻칠 후
금물金泥 입힌 등신불等身佛
해탈, 죽어서도 죽지않은 영육이다
바랑鉢囊하나 울러메고
지팡이 짚고, 구름따라
물따라 가는 무하선사
산길 행각이 보인다
하늘의 별을 쳐다보며
고행 참선하던, 생전의 수행동굴이
삼십육 년 간 바늘로 혀를 찔러
방혈防血한 피로, 손가락에 묻혀 쓴
팔십 한 권의 혈경血經의 빛 부심
세상 때 묻지 않은
구화산 소슬바람이 삼백 년을 너머
오늘, 아리게, 가슴 속을 파고 든다.
………………………………
1) 1513-1623 중국 동부 안휘성 구화산 마공령
임제종 만년선사(일명 백세궁) 명나라 말엽에 입적
예감
― 중국 방천리防川里에서
나는 분명히 바람을 보았다
바람 안에 진실을 보았다
한국지도 맨 위 동해 쪽
적막한 삼국三國의 하늘 아래
새벽 닭이 울면 닭 울음소리
세 나라에 동시에 들리는
중국 땅 방천리 전망대에 올랐다
왼쪽 초원 러시아 땅에
오른쪽 두만강 너머 북한 땅에
어제의 바람이 휙 지나 가고
오늘의 바람이 휙 불고
내일의 바람이 휙 불어 오는 것을
바람의 저변 여명을 보았다
저 아래에는 평양
바람에 흔들리는 설익은 사과를
저, 저 아래에는 서울
바람에 흔들리는 잘 익은 사과를
나는 분명히 바람을 보았다
바람 안에 진실을 보았다
봉황산에서1)·1
― 일명 코끼리 산
산행을 가는 거대한 코끼리
시내 오십천 강변을 걷고 있다
바다에서 수영을 즐기다
몸을 부르르 털며
뭍으로 뒤뚱뒤뚱 걸어가는 코끼리
코 위 미륵불 삼체
공기놀이 하며
높이 110미터 길이 2킬로미터
8천 그루 벚나무 꽃 길
무성한 수림 삼림욕공원
정자 서너 개
배낭 속에 넣어 등에 메고
코 앞 죽서루가
뒷걸음질 몸을 떤다
거대한 코끼리가
바다에서 막 올라와
오십천에 앞뒤 네발을
첨벙첨벙거리며
뒤뚱뒤뚱 두타산행2)을 가고 있다
………………………………
1) 동해바다와 삼척시내 사이에 있는 산
2) 삼척시내 서쪽에 있는 산
봉황산에서·2
― 상서로운 봉황새
오색五色빛 날개 짓으로
오음五音의 소리로
봉황새鳳凰鳥가 오는 것을
상상의 눈으로 보고 있다
저기 훨훨 날아 오는 새 한쌍
몸은 닭의 머리, 뱀의 목,
제비의 턱, 거북이의 등,
꼬리는 물고기 모양의 봉황새
오음의 소리로, 오색 날개짓으로
훨훨 내 앞에 다가오고 있다
전설이 잠자는 봉황산에
봉황이 깃들 일 오동나무를 심고
열매를 따먹는 대나무를 심고
마실 예천醴泉을 준비 해야지
저기, 수컷 봉과 암컷 황이
성천자聖天子를 따라
뭇 짐승을 데불고, 봉황산에
상상의 상서로운 새
봉황새가 가까이 오고 있다
밤바다
― 네살, 해정海晶이의 여름
파도 찰삭이는 뒷나루 배나드리1)
은파교銀波橋2)끝자락 모래톱에
손가락으로 그린 그림 한 점 놓고
까르르까르르 아가와 엄마의 웃음소리
작은 파도소리에 자즈러진다
수평선 부근 집어등 불빛이
은파교를 뭍으로 연결, 하얗게 웃는
장난꾸러기 작은 파도가
흰 손 뻗쳐 그림을 지우면
손가락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는
아가와 파도의 신나는 소꿉놀이
김영채 시인의 집 앞 바닷가
여름 끝자락 배나드리 밤바다
까르르까르르 아가와 엄마의 웃음소리
………………………………
1) 삼척해수욕장 옆 작은 후진
2) 달빛 또는 집어등 불빛으로 놓인 불빛다리
노고단·1
― 나무들 소리
1
내 안에 웅얼웅얼
나무들 이야기 소리
나무와 나무 사이로
청아한 바람소리
나무들 아래로
맑은 산간수 흐르는 소리
번민은 증발되고
고민이 빠져 나간 자리
내 안에 웅얼웅얼
나무들 이야기 소리
2
내 안에 원시의 비경
엉클어진 머루와 다래넝쿨
고로쇠나무 피나무 함박꽃나무
까치박달나무 나무 나무
나무들 출렁출렁 웃음소리
내 안에 들리지 않는 소리로
출렁출렁 나무들 웃음소리
고란초皐蘭草1)
― 지금도 부여扶餘에 가면
부소산扶蘇山을 싸고 흐르는 백마강가
고란사 뒤안 우물가 벼랑에서
백제百濟의 미소를 만난다
군생群生 잎 수 적은 여린 고란초 잎새에서
국가흥망을 초월한 미소
전쟁과 평화를 초월한 미소
은은한 백제의 미소를 만난다
지금도 부여扶餘에 가면
희고 황갈색인 이면裏面은 숨기고
광택나는 녹색의 윗면上面 고란초에서
서산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의 천의 미소
기쁨과 슬픔을 초월한 미소
신神의 미소, 백제의 미소를 만난다
………………………………
1) 부여 부소산 고란사 우물가에 있는 희기종
광진산에는·2
1.
솔숲 산정 봉수대烽燧垈에1)
기대 앉아 바다를 내려다 본다
온 몸으로 파고드는 솔내음
솔숲에 놀러온 푸른 바다소리
봉화를 올리던 임란壬亂의 역사가
내 가슴속으로 들어 온다
2.
봉수대 옆에 앉아
우뚝한 소나무둥치 사이로 바다를 본다
내 가슴에 출렁이는 푸른 바다
물결 위로 미끄러지듯 가는
내 젊은 날 꿈 실은 돛배,
뱃전에 하얀 물보라 피고
하얗게 부서지는 그리움
배 뒤를 따르는
돌고래 몇 마리
내 그리움을
넙죽넙죽 받아 먹는다
………………………………
1) 삼척시 교동 바닷가에 있는 산으로
‘오랍드리 산소길’ 1코스 봉수대길이 있다.
동안 이승휴선생·1
― 문일봉 주지스님의 미소1)
쉰움산을 오르려
천은사 범종각 앞에 서니
울려 퍼지는 범종소리
범종소리 속에
일봉 스님 미소가 있다
일봉 스님 미소에
동안 선생 목소리 묻어오고
맑은 물소리 흐른다
범종소리 흐르는 물에
마음을 씻는다
쉰움산 오르는 계곡
발걸음 가벼운 오솔길
맑고 향기로움이 번진다
맑은 향기로움 안에
동안 선생과 일봉 스님이 있다.
………………………………
1) 천은사 절집 15채를 중건하고, 7백년 전의
동안 이승휴와『제왕운기』를 재조명하다.
쓸쓸한 여백
― 추사秋史 세한도歲寒圖1)
흙먼지 이는 분분忿憤한 세상
시절은 수상해도
옛정은 살아 따스하다
내 탄생으로부터 1백년 전
종이에 수묵, 집 한 채와 네 그루 나무
절해고도 쓸쓸한 유배지
추사秋史 아닌가, 우뚝 선 늙은 소나무
젊은 나무는 이상적李尙迪 아닌가
칼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추운 시절을 그린 세한도歲寒圖
쓸쓸한 여백, 보이지 않지만 따스함이
스승과 제자의 사랑이 보인다
올곧고 꿋꿋한 선비정신이 보인다
고금천지 유례없는 추사체가 보인다.
.............................................................................................
1) 세한도歲寒圖는 1844년 종이에 수묵 23×69.2cm로,
제주도에 찾아온 제자 이상적李尙迪(1804-1865)에게
그려준 추사秋史의 작품이다.
금강산·1
― 구룡폭포
비로봉서 내리는
깨끗한 금강의 얼굴이다
우레와 같은 금강의 말씀이다
수천 년 한시도 쉬임없이
하늘계와 지상계를
오가는 유일문이다
순수하고 맑은 절정
폭포수 아래 구룡소에
아홉마리 용이 지켰다
폭포 위 상팔담에는
선녀와 나무꾼이 살고
아홉마리 용이 이웃이다
구룡폭포는
산 속 깊히 감춰 있는
금강산 말씀이다
말씀 속에
김삿갓 모습이 어린다
시 쓰는 최치원이 보인다
금강산·3
― 옥류담에서·2
옥류에 손을 담그고
손사발 가득 물을 뜬다
손사발 물로 목을 적신다
아, 차고 달디단 금강산
물 위로 지나던 미풍이,
물 위로 내리던 운무가,
내 가슴으로 들어 온다
내 안의 금강산 미풍이,
내 안의 금강산 운무가,
깔깔거리며 청춘이 뛴다
이심이래요
― 삼척설화·1
갈매기바위 아래 물 속, 대가리 양쪽 뿔이 솟고, 귀도 돋아난 괴물이 살았대요. 뗏목을 타고 미역 따러 옛날에 다녔어요. 운이 나쁘면 뗏목 노 끝에 괴물이 올라붙어 사람을 잡아 먹었거든요. 요령을 아는 사람은 낫으로 자기 손가락을 뭉청 끊어 피를 물에 헹구면 괴물이 피를 마시고 내려 갔대요. 하루는 지금 나이 83세인 서월주 할아버지가, 50년 전 젊은 날에 뗏목을 타고 갈매기바위로 가니까 자꾸만 뗏목이 물에 가라앉더래요. 번뜩 정신이 들어 낫으로 자기 손가락을 뭉청 끊어 가지고 바닷물에 피를 헹구니, 그 괴물이 슬그머니 바다 밑으로 내려 가더래요. 가라앉아 죽어, 그 괴물의 밥이 되었을 텐데―. 글쎄 그 괴물이 뭔지 아와, 깡철이 이심이래요. 아주 큰 뱀이야요. 옛날부터 내려오는 유래가 있어서, 지금도 해녀들은 갈매기바위에서는 작업을 안 할라 한다니까요. 요즘도 깡철이 지나갔나, 통 괴기가 안 잡힌대요.
심밤중
― 삼척설화·2
1.
이슥한 달밤에 호미로
사대 조밭을 짐매기1)한다
사래 긴 밭 아이밭 짐매기를2)한다
― 짐매기는 제때에 늦추면
밀과져서3) 나중에 더 애먹는다
중얼거리는 시아버지 심씨
잔뎅이4) 욱신거리고 고뱅이가5) 시립다
2.
아침 밥을 이고
밭에 온 며느리
시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집 조밭은 잡풀이 그대로이다
시아버지 심씨, 짐매기 끝내고
잔뎅이를 펴서
손에 묻은 흙을 털다
저쪽 며느리를 보자마자
― 밤새도록 헷단데6)나무끄7)
짐매기 했구나, 남새시루와라8)
....................................................................................
1) 김매기 2) 처음 밭매기 3) 밀려져서 4) 허리
5) 무릎 6) 헛곳에 7) 남의 것 8) 창피스럽게
수종사水鐘寺1) 에서
― 두물머리 절경
두물머리兩水里 곁, 높은 운길산雲吉山
산중턱 숲에 상서로운 기운의 절집 하나
청아하고 명징한 종소리
세조世祖왕이 처음 들은 물종소리 들리는가
수종사 경내를 산책한다
가파른 산기슭에 깃든
약사전藥師殿 밑 바위에서 샘솟는
물 맛은 천하일품天下一品이다
물 맛을 보고 저쪽서 산책하며
정담情談을 나뉘는 추사秋史2)선생과 초의선사3)
아름다운 뒷모습 보이잖는 눈으로 보고 있다
전망 좋은 절벽 가 다실삼정헌茶室三鼎軒
찻상 앞에 앉아 샘물을 따라
차를 다려 마신다
정면 남북으로 흐르는 한강
두물머리 절경에 넋을 놓는데
옆자리에서 두런두런 들리는 소리
추사秋史 선생이 차를 마시며
초의선사와 담론談論, 옆모습이 선禪이다
다산茶山 선생은 보이지 않는다
절경의 환상인가, 차향茶香에
............................................................................
1)경기도 양수리 운길에 있는 절집
별을 보는 나라
― 은사 朴木月 시인
서정시의 진수, 빼어난 시인
‘강나루 건너 서 밀 밭 길을…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속에서
50대 그 모습 짧은 머리,
특유의 동안童顔의 미소로 은사님이
별이 있는 나라에서
별을 보는 나라로 찾아 왔다
논두렁 밭두렁 지나
카랑카랑한 특유의 목소리로
‘뭐라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로 바람에 날려서…’
서정시의 진수 빼어난 시인
은사님이 노래하듯 시詩를 읊으며
별이 있는 나라에서
별을 보는 나라 우리집으로
지난밤 꿈길에 찾아
..............................................................................
1) 박목월(1916.1.6~1978.3.24) 시 ‘나그네’에서
2) 박목월 시 ‘이별가’에서
대청봉 눈잣나무
무릎으로 기어 오르다 오르다
된바람 칼바람에,
폭설에 눈보라에 막혔다
더는 못가 낮은 자세로 머문 땅,
무릎으로 기어 오르다
오르다 더는 못가 엎드린 땅
가슴으로 뿌리내려
허리 한번 펴지못하는 생애
다섯잎 다발 이뤄 체온을 유지
잎을 축소 가지를 축소 어연히
늘 푸르게 칼바람 폭설을 견뎠다
잎을, 꽃을, 전신을 축소 눈향나무,
들쭉나무, 땃두릎나무, 만병초,
산솜다리, 털진달래 희귀 고산식물
키 작은 이웃들과 엎드려 산다
...................................................................................................................
1) 해발 1708m 설악산 대청봉 부근을 오르다보면 사계절 녹음이 짙은 눈잣나무 군락을 만난다. 대청봉과 중청봉 사이 해발 1500m에 있다. 키가 1m 안팎의 눈잣나무가 넓게 펼쳐진 고산초원 지대에 15000㎡에 군락을 이뤘다. 눈잣나무는 땅을 기는 듯한 줄기가 흙과 만나면 뿌리를 내려 강한 바람을 버티게 하는 힘이 되어 준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설악산 일대에만 자생하는 눈잣나무는 지구온난화로 생존에 위협을 받고 있다.
6부 열정적인 외로운 혼의 詩人
정 연 휘 대표수필
1편열정적인 외로운 혼의 詩人
시공을 너머 450여년 전의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峰의「夢魂」을 만났다.<近來安否問如何 요사이 우리 님은 어찌 지내나요/月到紗窓妾恨多 달 밝은 창가에서 이 몸 한이 많아/若使夢魂行有跡 꿈속에 오고 간 길 넋에 흔적/門前石路半成沙 임 계신 문앞 자갈길은 반쯤 모래가 되었네요.> '꿈속에 오고 간 길,임 계신 문앞 자갈길은 모래가 되었다' 기가 막힌 절창의 시,동서고금에 이런 열정적이고 외로운 혼이 담긴 독보적인 사랑의 시는 그렇게 많지 않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다던가, 시인詩人이란 무엇인가, 이 시詩를 대면하면 가슴이 저릴 만큼 사랑의 아픔이 스며온다. 남 모르는 고뇌에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 탄식과 비명이 이 아름다운 시로 바뀌지지 않았는가. 신선한 감수성을 지닌 시인, 열의와 다정함을 지니고 사람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지닌 시인, 이 사랑의 시인을 만남은 수십년 전이다. 내 나이 스물네댓 살, 대학을 막 졸업하고 그당시 지방에서 유일한 문화예술의 구심체 역할을 하던 삼척문화원三陟文化院 재직시절 이옥봉李玉峰시인을 만남이다.
「삼척군지」에 이옥봉은 삼척부기三陟府妓 즉 삼척부의 기생이라고 기록하고, 시가 게재되어 있었다. 만남은 바로 「三陟郡誌」의 기록이다. 문화원시절 내 책편집의 시작이던 재경학우회지『진주眞珠』5집을 편집하면서 거기 실린 김중열씨의 논문에서 좀더 구체적인 만남이 이뤄졌다.이옥봉 시인의 이름은 원媛이고 옥봉玉峰은 호이다. 조선조 광해군과 인조시대의 시인이다.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증손녀로, 옥천군수를 지냈던 이봉李逢의 서녀였다. 그녀는 출가했다가 일찍 남편을 여의고 뼈를 깎는 외로움과 숨막히는 봉건제도의 속박 아래 세월을 보내면서, 재기발랄한 시詩창작으로 칭송을 받는다. 자신의 감정과 의지를 기꺼워하며 내부의 생명력 시창작에 기쁨을 느끼다가, 그녀 나이 30고개를 넘을 무렵 시우詩友이며 승지벼슬에 있던 조원趙瑗을 사모하게 된다. 왕손이라도 조선조 법도에서는 한번 결혼했던 여성은 재혼이란 추호도 없는 일이다. 다시는 시詩를 짓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조원의 장인이 사이에 들어서 조원의 부실副室이 되었다.
「五日長干三日越 닷새 걸리는 먼 길 사흘에 넘네/哀詞吟斷魯陵雲 슬픈 노래를 읊조리다 그치니 노릉의 구름/妾身亦是王孫女 이 몸 또한 왕손의 딸이니/此地鵑聲不忍聞 이곳의 두견새 울음 차마 듣기 어렵구나」이 시는 남편 조원이 괴산현감(1578년~1583년)에서 삼척부사로 제수되어 삼척으로 가는 길에 영월을 경유할때「寧越道中영월가는 길에」시이다.조원이 40세때 삼척부사로 부임했는데 그녀도 따라와 삼척부에서 3년을 살면서「죽서루竹西樓」,「추사秋思」제목 의 시를 남겼다. <江涵鷗夢濶 강물에 몸 담근 갈매기 꿈은 넓고도 넓고/天人雁愁長 하늘에 들어간 기러기 근심도 하 길구나.>「죽서루竹西樓」경치를 읊은 그녀의 이 시는 짧으면서도 자연과 인생과 우주를 형이상학적으로, 고금의 시인 가운데 이렇게 표현한 시인은 드물다.
<霜落眞珠樹 진주 같은 나무에 서리 내려니/關城盡一秋 성에는 어느 사이 익은 가을/心情金輦下 마음은 임금 곁에 있으나/形役海天頭 몸은 바닷가 이곳에 있네/不制傷時漏 상심한 눈물 막을 길 없고/難堪去國愁 한양을 떠난 시름 감당키 어렵구나/同將望北極 더불어 북녘을 바라보라고/江山有高樓 강산에는 죽서루 높이 있네> 「秋思'가을 생각」이 시는 1583년~1586년 사이 삼척에 있을 때 지었다.진주眞珠는 삼척의 다른 이름 진주부進珠府에서 온 말이면서 서리 내린 나무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이옥봉은 삼척부사의 부실이었는데 삼척부기로 와전 기록되었다.
그녀의 또 한 편의 「別恨이별의 슬픔」시 <明宵雖短短 님 떠난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도/ 今夜願長長 님 계신 오늘밤은 길고 길었으면/鷄聲聽欲曉 닭 울어 날이 새면/雙瞼淚千行 가실 님 생각 하니 두 빰에 흐르는 천 갈래 눈물이 앞선다.> 이 열정의 사랑시 앞에는 숙연해진다. 낭군을 떠나보내는 여인의 애달픈 마음이 섬세한데,이옥봉 시인은 이별시의 대가이다.
이옥봉 시인은 평생의 한이되는 필화筆禍를 겪는다.그 필화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이유인즉, 이웃한 산지기가 소도둑 누명으로 관가에 끌려가 파산되기 직전, 그 아내의 간절한 요청에 그 아내의 슬픈 신세를 시로 적어 관원이 탄복하여 석방시킨다. 아녀자가 송사에 끼어든다 하여 버림을 받아 백방으로 남편의 마음을 돌리려했으나 끝내 좌절되고 그후 그녀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平生離恨成身炳 평생 이별의 한으로 병든 이 몸/酒不能療藥不治 술로 달래지 못하고 약도 안듣네/衾裏泣如氷下水 이불 속에서 흘리는 차가운 눈물/日夜長流人不知 밤낮으로 적시는 줄 뉘가 알랴>「閨情여인의 정」시에 평생이라는 시어가 아프고 애처롭다.평생 이별의 한을 읇은 슬프고 아름다운 시로 그녀의 말년을 읽을 수 있을 뿐이다.
그로부터 40년 세월이 흘러 인조 때 조원의 아들 승지벼슬의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로대신을 방문한 자리에서 생사를 모르던 이옥봉의「이옥봉 시집」한 권을 받는다. 40년전 동해 바닷가에서 표류하는 시체를 건졌는데, 옷 속 살몸에 조선창호지가 두툼하게 감겨있어, 고이 풀어 말려보니 많은 명시가 적혀있고 끝에 ‘해동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 이라고 쓰여 있었다. 거기 시들이 너무도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옥봉 시체가 어찌하여 중국해안에 표류되어 있었는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태어난 조선에서 빛을 못보고, 사후 명나라에서 진가가 발휘되었다.그런데 최근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옥봉은 친정으로 돌아간 후 시「夢魂몽혼」을 썻고, 임진왜란이 나던 바로 그해(1592년)에 40세의 나이로 난리통에 죽었다는 것을'이옥봉행적'은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해안 시체 표류는 작설作說이 아닌가?! 이옥봉은 허난설과 한묵翰墨을 주고 받으면서 아주 친하게 지내었다.이옥봉은 허난설헌과 황진이에 버금가는 뛰어난 시인이였다.호방할 때는 호방하고 섬세할 때는 섬세하고 아름다울 때는 아름답고 슬픔은 찬연 하였다. 열정적인 외로운 혼의 이옥봉李玉峰 시인, 약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랑병은 사랑하는 이의 사랑으로 치유됨인데, 그녀의 외로운 혼은 아직도 치유받지 못하고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月刊에세이』1995.6.1.통권제98호
정연휘 약력░ 號 : 翠薟, 平山 ░ 生 : 1944.7.25. 삼척 출생 ░ 學 : 삼척공고, 서라벌예술대학 문창과 졸업 ░ 登 : 1988.10.1. 서정주 발행 월간『문학정신』░ 賞 : 삼척시문화상 1988, 관동문학상 2001, 예총문화예술상 수상 2012 ░ 冊 : 제1시집『해문밖에서』혜화당 1992, 제2시집『솔숲에는 바다가』혜화당 1995, 제3시집『눈 속에 새 한 마리』해가 2001, 4시집『바람의 길 따라』해가 2012, 시선집『정신의 길』해가 2013, 편저 『三陟文學通史』해가 2011, 포토에세이집1『풍경이 있는 삼척여행』해가 2012 ░ 예간 : 포토에세이집2 『풍경이 있는 한국여행』, 에세이집 3『詩보다 짧은 이야기』░ 歷 : 1964.4.1. 불모지문학회 김익하, 최홍걸 등과 동인활동 시작, 1969.6.24. 두타문학회 창립주도. 1969-2013 현재『頭陀文學』1권-36권 주간, 1990.10.1. 『悉直文化』창간주간, 1982-1987, 1993-1996 5대,10대 두타문학회장, 1984.10.20. 제1회동안이승휴전국학생백일장 창출, 2013 현 30회, 1995.5-1996.11. 삼척시지 집필위원, 『三陟市誌』삼척시 1997 刊, 1995.9.23.-1999.12.31. 초대 삼척예총회장, 1995.10.23. 제1회삼척종합예술제 창출, 1999-2013 현재 『三陟文壇』주간, 1999-2011『三陟藝術』주간, 2000-2007. 4대, 5대 삼척문인협회장, 2007-2013 현재 한국문인협회 발전위원 ░ 務 : 도서출판해가 발행인 ░ 住 : 삼척시 오십천로 301-30, 101동1503호 ░ 連 : 033)573-4613, 010-3341-3327 ░ E : haika@ anmail.net, http://blog.daum.net/haika
Ernesto Cortazar / Sentiment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