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국을 떠나 외국에 나가서 성공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언어와 생활 풍습이 다르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 때문에, 특별한 능력이 있어도 성공하기가 국내에서보다 훨씬 어렵다. 특히 외국에 나가 곧장 그 나라의 권력자로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렵다. 그런데 고구려 출신으로 북중국의 강대국인 북위에 들어가서, 임금의 외삼촌이 되어 최고 권력자가 된 사람이 있었다. 그가 고조(高肇)다.
북위로 건너간 고조가문
고조는, 정확한 탄생 연도는 알 수 없으나, 460년대에 태어나 515년에 죽은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고양(高颺)인데, 고곤(高琨), 고언(高偃), 고조, 고현(高顯) 4형제와 고조용(高照容, 469~519)을 비롯한 3명의 딸을 두었다. 고양은 470년대 초에 자식들을 데리고, 동생인 고승신(高乘信) 및 마을 사람 한내(韓內), 기부(冀富) 등과 북위로 건너간다. 고양이 장수태왕 시기 번영하던 고구려를 떠나 북위로 간 이유는 기록된 바가 없다.
고양이 북위에 도착하자, 북위에서는 그를 여위장군(厲威將軍)이란 직위를 주었다. 고승신도 명위장군(明威將軍)에 임명하였다. 이들은 북위의 환대를 받아 노비, 소와 말, 비단 등을 하사받고 북위의 귀족 대우를 받았다. 당시 동아시아에는 인구의 이동이 잦았다.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외국에서 건너오는 무리들의 대표자에게는 벼슬을 주는 경우는 흔하다. 고구려도 520년대 말에 북위의 용성(지금의 조양)을 쳐들어가 한상(韓詳)이란 자를 잡아왔는데, 그는 5백여 호를 거느리는 귀족이었다. 고구려는 그에게 대사자 벼슬을 주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많은 무리를 거느린 고양과 고승신이 북위로부터 귀족 대우를 받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위서(魏書)] 등에는 고조의 5대 조상인 고고(高顧)의 동생 고무(高撫)가 진(晋)나라 발해군 수현이란 곳에 살다가 북중국이 혼란에 빠졌던 영가의 난(307~312) 시기에 고구려로 피난을 갔다고 이때 되돌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고조 가문은 본래 중국의 명문 귀족이었기 때문에, 북위에서 귀족 대우를 해준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고구려에서 무려 160년간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여동생이 북위 황후가 되다
고조가문은 북위에서 처음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고조가 북위에서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계기가 생겼다. 그것은 그가 북위 왕실의 외척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조 가문이 북위로 건너가기 직전인 466년 고구려와 북위 사이에는 국혼(國婚) 논의가 있었다. 북위 6대 헌문제가 고구려 공주와 혼인을 맺겠다고 제의를 한 것이다. 하지만 장수태왕은 이를 거절했다.
그런데 양국 사이의 혼인 관계는 고구려에 있었던 귀족들이 북위로 건너가면서 맺어졌다. 그 첫 번째가 고무의 4세손인 고숭(高崇)이다. 그는 고조와 11촌 간이 된다. 그가 466년 무렵에 북위로 건너가자, 북위 헌문제는 그에게 개양남이란 작위를 준 후, 무성공주를 주어 그를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 또한, 북위 7대 효문제(471~499)는 고조의 여동생인 고조용을 귀비(貴妃)로 맞아들였다. 특히 고조용이 483년 낳은 아들 원각이 곧 북위 8대 임금인 선무제(499~515)가 됨으로써, 그녀는 문소황후가 된다. 뿐만 아니라, 고조의 형인 고곤의 아들 고맹(高猛)은 선무제의 친동생인 장락공주와 결혼하여 부마도위가 되고, 고언의 딸은 503년 선무제의 귀빈(貴嬪)이 되었다가, 508년에 선무제의 황후가 된다.
도대체 왜 북위 임금들은 고구려에서 막 건너온 고씨가문과 이렇듯 사돈관계를 맺게 된 것일까? 단지 고씨가문이 진나라에서 고구려로 도망갔다가 되돌아왔기 때문만으로는 볼 수는 없다. 그들의 배후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효문제와 결혼한 고조용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13살에 귀비가 된 그녀는 일찍이 자신이 방 안에 서 있는데 햇볕이 창문으로 들어와서 그녀를 뜨겁게 내리쬐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그 빛을 피하면 오히려 햇볕이 더 뜨겁게 그녀를 비추었다. 그녀가 이런 꿈을 자주 꾸자, 고양은 요동사람 민종에게 해몽을 부탁했다. 민종은 몸에 해가 비추는 꿈을 꾼 것은 장차 임금의 사람을 받아 제왕을 낳게 될 계시라고 했다. 그녀가 선무제를 낳은 태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을 낳은 유화부인의 이야기와 너무나도 닮았다. 이 이야기는 그녀가 진나라 후예이기보다는 순수한 고구려인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효문제 시기 북위는 남쪽으로 제(濟)나라, 북쪽으로 유연(柔然)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고구려와는 436~462년까지 서로 사신 왕래를 끊으며 대립하고 있었지만, 이후로는 두 나라가 서로 화친 관계에 있었다. 472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요청을 거절하고, 이를 고구려에 알린 것도 북위였다. 북위 효문제는 491년 고구려 장수태왕이 죽자, 장수태왕을 위해 상복에 입고 동쪽 교외에 나가 애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전까지 중국의 임금들이 이웃 나라 임금의 죽음에 이와 같은 예를 취한 적은 없었다. 이 무렵 북위는 외국 사신을 대할 때에 한족(漢族)의 나라인 제나라와 고구려를 동등하게 대해 제나라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고구려는 당시 북위에게는 가장 중요한 상대국이었다. 고구려마저 북위와 적대적이 된다면, 북위는 사면초가가 된다. 따라서 북위는 고구려를 우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구려 출신 귀족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가, 황후로 삼은 것이다. 물론 이것은 북위 황실의 입장이다. 중화(中華) 문화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을 가진 북위의 귀족들은 고조가문을 다른 나라(夷土) 출신이라고 멸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가문에서는 순수 고구려임에도, 과거 진나라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이 있다. 설령 진나라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고구려에서 5대에 걸쳐 160년 이상을 살았다면 고조가문의 사람들은 고구려인이라고 해야 옳다.
북위의 권력을 쥔 고조
499년 선무제가 즉위한 후, 다음 해에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을 궁으로 불렀다. 고귀비의 아버지 고양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선무제는 고조에게 평원군공, 고현에게는 징성군공이란 벼슬을 주었다.
고조는 이때부터 출셋길에 오르게 되었다. 선무제는 고조에게 장군 직위를 더 해주고, 수시로 만났다. 얼마 되지 않아 고조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령이부(領吏部), 기주대중정(冀州大中正)이 되었다. 이제는 그는 북위의 중대사를 결정하는데 참여하는 인물이 되었다. 함양왕 희가 죽은 후, 선무제는 고조를 크게 신임했다.
선무제가 왕위에 있는 동안 북위에서는 귀족들 사이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어났다. 함양왕 희, 북해왕 상, 고양왕 옹, 팽성왕 사 등이 서로 싸웠다. 모두 북위 임금의 친척들로 큰 힘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특히 함양왕 희가 선무제 마저 제거하고 북위 왕이 되고자 했다. 선무제는 이를 먼저 알고 외삼촌 고조를 불러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했다. 고조는 점점 사람을 모아 하나의 당을 만든 다음, 자신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북해왕 상을 죽이고, 선무제를 보호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여러 왕 등을 옥에 가두어 버렸다. 함양왕 희(禧)의 재물과 노비, 밭과 집이 모두 고씨가문으로 들어갔다. 정적을 제거한 고조는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상서령(尙書令)을 거친 후, 512년 사도공이 된다. 드디어 신하들 가운데 최고 직위인 3공(司徒, 司空, 太尉)의 지위까지 오른 것이다.
고조가 북위 황실과 3중으로 혼인관계를 통해 외척으로 큰 힘을 갖고 벼슬이 계속 높아지자, 이를 질투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선무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감히 나서서 고조를 반대할 수가 되지 못했다. 고조는 맡은 직분에 충실하여, 유능한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그가 정치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능력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 본래 학식이 없었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행동이 예도(禮度)에 어긋나는 것이 많고, 북위 선조들의 옛 제도를 개혁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조가 북위의 주류 문화였던 한족과 선비족(鮮卑族) 전통에서 벗어난 인물임을 보여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북위 귀족사회에서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지 세력이 있었다. 그의 동생 고현은 고려국대중정(高麗國大中正)이란 벼슬을 받았는데, 이는 고구려 출신의 인재들을 추천하여 벼슬길에 나가도록 하는 자리였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는 고구려 출신 사람들을 모아 하나의 당(黨)을 만들어 권력을 공고하게 했다. 고조가문은 고구려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웠다. 북위에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상당수가 되었고, 이들은 북위에서 쉽게 성공을 거두었다.
고조의 죽음과 북위의 고구려인
514년 고조는 선무제의 명을 받아 군사를 이끌고 남쪽 촉(蜀) 지역을 공략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515년 선무제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났다. 선무제가 죽자, 고조는 서둘러 원정에서 돌아와 선무제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고조는 조카인 선무제의 죽음에 너무나 슬퍼하여 며칠을 소리 내어 울기만 했다. 그런데 이때 고조의 반대파인 고양왕 등이 이 기회를 틈타 고조를 죽이고자 했다.
고조는 궁궐로 들어가 선무제의 시신을 보고자 했다. 선무제의 시신은 궁궐 내에 태극전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인 고조가 선무제의 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는 의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고조를 태극전으로 안내했다. 고조는 슬픔에 젖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태극전 주변에는 그를 죽일 암살자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조가 태극전에 올라갈 순간이었다. 이때 반대파들이 서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힘센 장사들이 뛰쳐나와 고조의 목을 비틀어 끌어내어 죽여 버렸다. 고조의 약 15년간에 걸친 권세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고양왕 등은 고조가 나쁜 짓을 많이 했기에 죽였다는 발표를 했다. 하지만, 고조와 함께 무리를 만든 다른 고구려 사람들은 죄를 묻지 못했다. 그저 벼슬만 낮추는데 그쳤다. 북위 내에 고구려 사람들은 너무 강력한 세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제거할 수가 없었다.
고조가 죽은 후인 519년 고구려에서 문자명왕이 죽었다. 그러자 당시 북위 정권을 쥔 영태후가 동쪽 사당에 나아가 문자명왕의 죽음에 애도하는 의식을 치렀다. 북위는 고구려를 여전히 특별하게 대우했다. 때문에 고조가 죽은 후에도 북위에 건너간 고구려 사람들은 여전히 높은 벼슬을 하고 권력을 누렸다. 특히 고조의 아들인 고식은 제주자사(濟州刺史) 등의 벼슬을 지냈다.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의 아들이 이렇게 지방장관이 된 예는 흔치 않다.
고조는 고구려 출신으로 북위 정권의 뒤흔든 놀라운 인물이었다. 비록 여동생이 황후가 되었기 때문에 외척이 된 행운이 있었기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의 뛰어난 능력과 고구려라는 배후세력 때문에 그가 북위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하겠다. |
첫댓글 고조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여러번 봐도 흥미진진한 듯 합니다 ^^
고조가 북위로 귀부한 데에는 고구려 장수태왕이 단행한 대숙청이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472년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상표문을 보면 고구려왕 연의 죄가 많아 대신강족을 살육하여 나라가 혼란스러웠다고 한 구절이 있습니다. 게다가 삼국사기 장수왕 59년조를 보면 고구려 백성 노각 등이 위로 투항해 위로부터 전택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두 기록을 연결시켜, 472년 혹은 그 이전에 단행된 장수태왕의 대숙청으로 발해고씨로 대변되는 사람들이 북위로 이주했다고 하는데.... 상당히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