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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12.예루살렘-구약시대에서(헬라제국 알렉산더 침공과 하스몬왕조)| 세계사
헬라제국침공(주전336-322)
주전336년 알렉산더는 아버지가 살해 당한지 3년만에 페르시아왕 다리우스 3세와 두번 싸워이겼고 이에 다리우스 3세는 동쪽으로 후퇴했습니다. 알렉산더는 예루살렘에 자기군대를 위한 보급품을 제공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사제들은 처음에 이를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못했습니다. 티레가 알렉산더를 거절하자 알렉산더는 성을 포위했고 성읍이 무너지자 모든 생존자를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인들은 알렉산더를 환영했고 성전으로 안내하여 알렉산더는 유대인의 신에게 희생제사를 바쳤다고 합니다. 알렉산더는 고레스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법에 따라 살 권리를 인정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후, 알렉산더는 이집트를 정복하러 갔고 그곳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다음 동방으로 향했으며 동방원정중에 33세의 나이로 주전323년 6월13일 열병 혹은 독살에 의해 바벨론에서 임종을 맞았습니다. 그는 다시는 예루살렘에 돌아올수 없었습니다.
알렉산더의 충성스런 군인들은 알레산더가 임종 할 때에 얼굴에 눈물을 쏟으며 줄지어 병상을 지나 갔습니다. 그들이 "누구에게 왕국을 물려 줄것이냐"고 묻자 알렉산더는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 -가장 강한자에게”- 알레산더의 갑작스런 죽음은 헬라제국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장 강한자를 가리기 위한 토너먼트는 알렉산더의 장군들사이에서 2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자 큰 제국은 그의 7명의 장수에 의해 나뉘어 다스려지다가 권력 싸움에 의해 3명은 도태되고 4명의 장수가 분활 통치를 하게 됩니다.
카산드로스장군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와 본토를, 리시마쿠스 장군은 소아시아를 , 포톨레미 장군이 이집트지역을 셀류쿠스(안티오쿠스)장군은 시리아(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 지역), 까지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참고---여기서 성경 다니엘서 8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숫염소가 스스로 심히 강대하여 가더니 강성할때에 그 큰뿔이 꺽이고 그 대신에 현저한 뿔넷이 하늘 사방을 향하여 났더라 ."(단8:8)고 기록 하였습니다.
여기서 숫염소는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헬라를 상징합니다(단8:5, 21, 11:3) 큰뿔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해 나왔습니다.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 대신에 그의 네 장군들 (7장 6절의 네 날개, 네 머리와 일치함)인 마케도니아- 카산더, 소 아시아-리시마쿠스, 애굽(남방짐승)-프톨레미, 시리아(북방짐승)-셀류쿠스가 그의 제국 사방에서 일어나 각각의 나라를 형성한 것을 상징합니다.
사람의 관점에 따르면 헬라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헬라제국이 알렉산더 대왕의 네 장군들이 형성한 네개의 제국으로 계속 존재하였습니다.
결국 이들 네 제국은 병합되어 두 제국 즉 남방에 하나(애굽)와 북방에 하나(시리아)로 형성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세상을 악으로 가득 채웠던 마케도니아의 군벌들 사이를 오고갔습니다. 두명의 유력한 경쟁자간의 결투에서 예루살렘은 여섯 번이나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은 15년간 애꾸눈 안티고노스의 지배를 받았고 주전 301년 안티고노스가 전장에서 죽자 승자인 포톨레미가 성밖에 도착해 예루살렘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인 들에게 안식일에 성안으로 들어가 유대인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안식일을 지내고 있던 유대인들은 그의 거짓말을 믿었지만 프톨레미는 이새 성읍을 빼앗고 유대인의 율법 준수는 광신일뿐 이라고 폭로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해가 지자 유대인들은 반격했습니다.
포톨레미 군대는 광란하듯 예루살렘을 휩쓸었습니다. ‘집들은 약탈당하고 여자들은 능욕을 당하며 도성의 절반이 유린되었습니다. 프톨레미는 느헤미야가 성전 북쪽에 지은 바리스 요새에 마케도니아 수비대를 주둔 시키고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이집트로 끌고 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프톨레미의 화려한 수도 알렉산드리아에서 그리스어를 말하는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했습니다.
프톨레미의 제국은 마지막 후손인 클레오파트라까지 3세기 동안 유지되었습니다. 프톨레미는 여든까지 살았으며 알렉산더의 역사를 썼습니다. 프톨레미 2세 필라델포스가 왕이 되자 그는 유대인을 선호하여 12만명의 유대인 노예들을 해방시켰고 성전을 재건할 금을 보냈습니다.
그는 또, 열렬한 도서 수집가이기도 해서 대사제가 20여권의 유대 타나크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내자 그것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는 유대인 학자들을 존중했으며 그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해서 번역에 대해 토론을 했습니다.
왕은 “너희들의 관습에 따라 또한, 나를 위해서도 모든 것을 뒷받침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헬라(그리스)어 로 번역하는 놀라운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 당시에 세계 공용어는 오늘날에 영어와 같이 헬라어였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헬라도시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읽기 위해서는 헬라어로의 번역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 번역본이 최초의 번역본인 “칠십인역입”니다. 유대교 전승에 따르면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사람 70명을 선발해 그들로 하여금 각자가 성경을 번역하게 했는데 작업을 마친후 70인의 역을 한데 모아보니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하심 이었으며 그 시대에 이러한 번역의 작업이 진행된 것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번역 작업으로 인해 조금 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 번역본을 많이 인용하셨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많은 이방인들이 구약성경을 읽을 수있게 되었으며 복음의 사역이 순조롭게 될수 있었다고 합니다.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를 받으며 비교적 평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유대 땅의 분위기는 주전 2세기 초를 전후하여 바뀌기 시작합니다.
주전 198년 셀루커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3세가 프톨레미 왕조로부터 유대땅을 빼앗아 시리아에 합병시켰기 때문입니다.
유대를 점령한 안티오쿠스 3세도 처음에는 유대인들을 최대한 배려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유대인들에게 부여된 이러한 호의들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주전190년 로마와의 전쟁에서 참패한 안티오쿠스3세에게 5천달란트라는 어마어마한 배상금이 부과되자 이 막대한 배상금을 채우기 위하여 안티오쿠스 3세가 나라안에 있는 신전들의 재산을 압류하기 시작합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 일수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곳곳에서 이에 대한 백성의 반대가 일어났고 그는 결국 암살당하고 맙니다. 그 뒤를 이은 셀루커서 4세 역시 조공을 바치라는 로마의 압력을 받습니다.
얼마후, 셀루커스 4세는 한 장군에 의해 살해 당하고 그의 뒤를 이어 셀류커스 4세의 동생이며 에피파네스라 불리는 안티오쿠스 4세(주전175-163)가 왕이 되는데 이때부터 유대가 큰 곤경에 빠지게 됩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특히 그의 영토 전역에 헬라적인 관습과 문화를 강요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전과 다른 험난한 세월이 또 시작됩니다. 바벨론 귀환이후 냉소적인 신앙일지라도 유일신 사상만은 확고하게 지니고 있던 유대인 귀환 공동체는 헬레니즘 사상을 거부해왔기 때문입니다.
안티오쿠스는 이집트 원정을 꿈꾸었지만 로마의 출현 때문에 그의 숙원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지중해가 이미 로마의 손에 대부분 넘어가버렸기 때문입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이집트의 점령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릅니다. 이때 안티오쿠스 4세 는 이집트 원정기간동안 예루살렘에서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일들이 일어난 것에 분노 했습니다. 유대가 그의 헬라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발생했다고 억측을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 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를 잡아서 제우스 신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유대인의 눈에는 우상숭배의 행위가 성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실시한 아이들을 찾아내어 그 아이를 죽이고 죽은 아이의 시체를 그 어머니 목에 걸어 놓게 했습니다.
또한, 제사장 600명을 묶어서 그 위로 마차가 지나가게 해서 그들을 참혹하게 죽게 했습니다. 안티오쿠스 4세는 스스로 에피파네스(신의 현현)라 불렀으나 유대인들은 에피마네스(미친놈)라 고쳐 부르며 저항했습니다.
이 저항 세력이 유대에 하스몬 왕조를 세웠고 그들이 하시딤입니다. 하스몬 왕족들이 헬라왕처럼 헬라화 되자 그들은 실망합니다. 그 하시딤의 후예가 바리새파와 에세네파입니다.
(참고하면, 바리새파는 도시상인의 후손들로서 개종은 절대 반대하면서도 선진문명에 대해서는 배우려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사상을 흡수했고 구전율법을 만든 경위가 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몇몇 부유한 가문, 지도적 제사장 가문으로 사회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솔로몬 시대때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후손들이라 하여 사두개파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종교 귀족으로서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한쪽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척하고 다른 한족으로는 현실권력과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생활은 현세적이었으며 율법을 어기면서까지도 당시 정치적 힘을 행사하는 로마총독이나 헤롯왕과 타협하기도 했습니다.
마타디아스 하스몬은 우상에게 절하라고 유대를 압박한 안티오쿠수 4세의 명령에 도전한 연로한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이어 마카비혁명을 주도했는데 셋째 아들 유다 마카비가, 이어서는 요나단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둘째 아들 시몬이 이일을 맡았습니다.
마카비와 그 형제들은 혁명을 주도 하면서 개혁파 인물들을 구금하고 셀류커스왕조의 인물들을 감금했으며 그후 성전을 정화하여 주전 164년12월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다시 거행하게 됩니다.-수전절입니다. 참고하면, 신약에서 마카비는 하나님의 이기는 자들의 예표였습니다.
주전 162년 셀루커스왕조의 안티쿠오스5세는 유대의 대제사장 메넬라우스를 처형하고 하스몬 가문은 오히려 주전 161년 로마와 동맹을 맺어 독립국가의 지배가문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주전 152년 셀루커스는 유대를 그리스화 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당시 하스몬 가문의 지도자 였던 요나단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데 이로써 하스몬 가문은 그 직책을 115년 동안이나 고수하게 됩니다.
주전142년 셀루커스 왕조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방식으로 유대의 독립을 인정해 주었으며 이로 인해 형에 이어 대제사장에 오른 시몬 마카비는 명실공히 유대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왕조"와 는 다른 유대의 또 다른 왕조인" 하스몬 왕조" 라고 불렀습니다. 마카비 혁명으로 말미암아 주전 142년 유대는 마침내 셀루커스로부터 독립하여 페르시아와 헬라제국에서 440년만에 독립을 이룬 때입니다.
주전 134년부터 104년까지 통치했던 하스몬 왕조 시몬의 셋째 아들 요한 힐카누스는 하나님의 뜻이 다윗 왕국을 회복하는데 있다는 근본주의적인 신앙에 고취되어 그는 여호수아, 사무엘상, 그리고 사무엘하에 특별히 집중했는데 그 때문에 팔레스타인 전체를 하나님께서 유대기업으로 주셨다는 생각에 유대 땅 전체의 정복을 자신의 의무로 받아 들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성을 완전히 파괴하였고 그리스식 도시인 스키토폴리스를 약탈해 불태우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일에 열심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두메 지역을 정복하고 정복민들에게는 유대교로 개종할 것인가 아니면 학살을 당할 것인가를 선택하게 했습니다. 또한, 패트라도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하스몬왕조는 통치자와 왕과 정복자가 되면서 부패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 힐카누스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로스는 자신을 유다의 왕으로 선언했습니다.
아리스토불로스는 어머니를 감옥에 집어 넣었고 자기 보다 인기가 좋은 형제를 죽였습니다. 그러한 범죄로 인한 죄책감으로 그는 미쳐 버렸습니다.
그러나 피를 토하고 죽어 가면서도 살아남은 그의 당돌한 동생 알렉산더 야나에우스가 마카베오 가문을 파괴시킬 괴물임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형이 죽고 알렉산더 야나에우스가 왕이 되면서 그는 예루살렘을 확보했고 곧바로 형의 미망인과 결혼했으며 유대인 제국의 정복에 착수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무례하고 잔인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의 방탕한 가학증으로 인해 그를 미워했습니다. 알렉산더 야나에우스는 자기 마음대로 이웃 나라들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그당시에는 그리스왕국은 붕괴하고 있었고 로마는 아직 오직 않았습니다.
알렉산더 야나에우스는 악마의 행운과 집요한 야만성 때문에 잦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습니다. 알렉산더 야나에우스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반대하는 소요 등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자기백성 5만명을 살해 했습니다. 그후 알렉산더 야나에우스는 알콜중독으로 죽었고 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가 이세벨의 딸 이후 예루살렘을 다스린 최초의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왕조의 정신은 소진되어 버렸습니다. 두 왕의 영리한 미망인 살로메 알렉산드라는 바리새파인들의 도움을 받아 60대까지 그녀의 작은 제국을 다스렸지만 두 아들을 통제하는 것은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북쪽에서는 로마가 지중해 주변으로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했고 그리스와 터키를 차례로 삼켜습니다. 터키에서 로마의 힘은 폰토스의 그리스왕 미트리 다테스의 저항을 받았습니다.
주전 66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는 미트리 다테스를 물리치고 힘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습니다. 로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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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알렉산더의 충성스런 군인들은 알레산더가 임종 할 때에 얼굴에 눈물을 쏟으며 줄지어 병상을
지나 갔습니다. 그들이 "누구에게 왕국을 물려 줄것이냐"고 묻자 알렉산더는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합니다.
“ -가장 강한자에게”- 알레산더의 갑작스런죽음은 헬라제국에 큰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장 강한자를 가리기 위한 토너먼트는 알렉산더의 장군들사이에서 2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죽자 큰제국은 그의 7명의장수에 의해 나뉘어 다스려지다가
권력 싸움에 의해 3명은 도태되고 4명의 장수가 분활 통치를 하게 됩니다.
카산드로스장군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와 본토를, 리시마쿠스 장군은 소아시아를 ,
포톨레미 장군이 이집트지역을 셀류쿠스(안티오쿠스)장군은 시리아(지중해에서 중앙아시아 지역),
까지를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의 예언 7장~12장을 이해하려면 흔히 암흑시대라 일컫는 신구약 시대의 중간사를
반드시한번씩 읽어보아야 합니다.
(공동번역본의 마카베오 상하권 참조)
여기서 숫염소는 알렉산더 대왕과 함께 헬라를 상징합니다(단8;5,21,11:3)
큰뿔 대신에 현저한 뿔 넷이 하늘 사방을 향해 나왔습니다.
이것은 알렉산더 대왕 대신에 그의 네장군들 (7장 6절의 네날개, 네머리와 일치함)인
마케도니아- 카산더, 소 아시아-리시마쿠스, 애굽(남방짐승)-프톨레미, 시리아(북방짐승)-셀류쿠스가
제국을 분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