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전란기 임시수도 부산에서 해상운수사업을 하면서 사회활동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동아리 모임에 들어가 동료들과 어울려 독서회를 열고 양서 읽기 모임을 주도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책읽기에 취미가 있었지만, 부산에서 사업하는 3년 여의 동아리 활동은 많은 책을 읽는 계기가 되고 책을 더욱 가까이 하게 되었다. 이 때 동아리에서 만났던 이희호와는 뒷날 재혼하였다.
이화여고시절의 이희호 여사(맨 오른쪽).
현실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정치인들과 만나 토론하기를 즐겨하였다. 독서회에서 장택상 총리를 만나게 되어 토론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53년 봄에는 부산에 있는 건국대학 3학년에 편입(정치외교학과) 하였지만, 곧 회사를 목포로 옮기게 되면서 학업을 오래 계속하지는 못하였다.
1954년, 김대중은 어느새 30세의 청년이 되었다.
이 해는 김대중에게 대단히 의미있는 해였다. 할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한자로 大仲 이었는데 호적에 등재하는 과정에 大中 으로 바뀌었다. 이 해에 大仲 으로 바로 잡았다. (그러나 뒷날 선거에서 떨어지고 고난이 닥치게 되자 ‘인변 (人)’을 떼어버리면 크게(大) 적중(中) 한다는 ‘大中’이 되니 좋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얘기를 듣고 다시 中으로 고쳐 썼다.)
이 해는 또 그동안 경영해 오던 선박회사 흥국해운을 군산출신 정성렬에게 넘기고 해운사업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부산의 생활을 정리하고 목포로 돌아왔다.
이 무렵 발췌개헌을 통해 장기집권의 길을 튼 이승만은 종신집권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또 한 차례 개헌을 준비하고 있었다. 제3대 민의원 선거는 1954년 5월 20일로 예정되었다.
정치 입문기의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은 6·25 한국전쟁과 부산의 정치파동을 지켜보면서,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 않으면 국민의 안전과 나라의 발전은 불가능하다는 신념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로 결심하였다. 만 30세, 아직 새파란 청년으로 정치적 경험이나 정당 배경이 전혀 없는 ‘처녀출진’ 이었다. 그동안 선박운수사업과 신문사 경영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목포지역 노동계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친구들도 정치인의 자질이 엿보이니 출마해보라고 권유하였다.
당시 목포의 정치역학은 노동조합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목포는 해상운수사업이 활발해 지면서 노동조합의 역할이 증대되고 발언권도 강화되었다. 제2대 민의원 선거 때에도 노동조합 출신이 당선되었다.
김대중은 다행히 운수사업을 하면서 노동조합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목포일보> 경영자로서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노력하여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괜찮은 편이었다. 누구보다 조합장이 열성적으로 김대중을 지지하고 조합원 들의 지지 결의를 이끌어 냈다.
김대중이 목포에서 출마하기로 작정한 것은 이와 같은 노동조합과의 관계가 배경이 되었다.
그런데 막상 출마를 앞둔 시점에 정당의 선택과 관련하여 문제가 일어났다. 조합에서는 보수야당인 민주국민당(민국당)이나 제2야당인 대한국민당(국민당) 등 야당후보로 입후보하지 말아달라는 조건이었다. 그렇다고 이승만의 정치방식에는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자유당에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민국당에서 김대중의 출마 소식이 알려지면서 입당을 권유해 왔다.
하지만 노조와의 관계 때문에 입당 결정이 쉽지 않았다. 민국당은 이승만과 권력투쟁에서 패배한 한민당이 이승만 세력을 견제하고 친일 지주출신 정당이라는 당의 이미지 쇄신을 위해 신익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국민당, 지청천의 대동청년단과 함께 1949년 2월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만든 정당이다. 한민당에 뿌리를 두고 독립운동가 일부와 기타 세력을 영입하여 창당한 것이다. 민국당은 점차 양당 체제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정치구도에서 제1야당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