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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
바르고 참된 산문 정신
저자 한유(韓愈)
해설자 이세동(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목차
암벽 속에 숨은 동산
한유의 삶과 문학
문장은 도(道)를 담고 있어야
무형식의 형식, 새로움을 찾아서
아! 장강대하(長江大河)
더 생각해볼 문제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암벽 속에 숨은 동산
어린 시절, '한유'는 몰랐지만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한퇴지'는 자주 들었다.
이제, 그 어른들의 담소는 아련한 추억 속의 일이 되어 버렸으나 언제부턴가 어깨 너머 견문 덕에 한퇴지는
'글 잘하는 사람'으로 필자의 기억에 자리 잡았고, 이 땅의 늙은 선비들을 그토록 매료시킨 그의 글이
궁금하기도 하였다. 그럭저럭 세월이 흐른 뒤 '퇴지(退之)'는 한유의 자이고 그의 이름 뒤에 수식처럼 붙어
다니는 '당송팔대가'니 '고문운동'이니 하는 따위의 이야기도 듣게 되었다.
중국 문학의 숲을 탐색하면서, 귀로만 듣다가 눈으로 만난 한퇴지는 산이었다. 암호처럼 놓여있는 난해한
글자들과 그 암호들의 기이한 조합이 빚어낸 문장은 산 가운데에서도 암벽으로 뒤덮인 험준한 고산이었다.
부실한 장비를 믿고 호기롭게 그 암벽을 타다가 발을 헛디디기 일쑤였고, 반복되는 실족은 성급한 좌절과
회의를 안겨주었다. 아! 이것이었던가? '글 잘하는 한퇴지'의 진면목이 이것이었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한유의 문장을 '기이하고 험난하다'하였고, 눈 밝은 선비들은 이 기험함을
그토록 칭송하였단 말인가?
아닐 것이다. 공자도, "언어는 의사를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면서 언어의 간명함을 강조하였을진대, 천여 년의 긴 세월 동안 한유의 산문이 칭송을 받아온 것이 기험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기험의 이면에는 또 다른 세계가 갈무리되어 있으리라. 숨을 고르고 오독의 실족을 무릅쓰면서 그 기험한 바위산을 다시 올라 보리라. 어느 순간, 좌절은 격려가 되어 장비를 다시 점검하게 하였다. 신발 끈을 고쳐 매고 자일을 부여잡으며 조심스레 발을 옮겨 갔다.
차츰 실족의 횟수가 줄어들면서 시야가 가늠되기 시작하였고, 암벽 속에 숨어있던 부드러운 토양은 어느덧 정겨운 동산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바위산이 동산으로 다가오던 그 지점에서, 동산 곳곳에 숨어 있는 싱그러운 풀내음과 맑은 꽃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풀내음처럼 신선한 수사와 꽃향기처럼 저며드는 서정이 한없는 설렘으로 다가왔고, 그 설렘을 좇아 하염없이 걷다보니 굽이굽이 능청대던 동산은 다시 강물이 되어 도도한 논설로 넘실대고 있었다. 그랬다! 이것이었다. '글 잘하는 한퇴지'의 진면목은 이것이었다!
한유의 삶과 문학
한유는 768년, 장안에서 벼슬하고 있던 한중경(韓仲卿)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모와 위로 세 명의 형들이 모두 일찍 죽어, 11살부터 형수 정씨만이 한유의 유일한 보호자였으니 고단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그의 가문은 명문은 아니었으나 하양(河陽), 즉 지금의 하남성 맹주시(孟州市)에 뿌리를 둔 관료 집안이었다. 아버지 한중경은 여러 곳의 지방관을 지내며 선정을 펼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맏형 한회는 재상의 인정을 받아 한 때는 황제의 측근에서 근무하기도 하였던 유능한 인재였다. 고단한 유년이 한유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면, 관료로서의 삶을 소망함도 그에게 주어진 환경적 운명이었던 셈이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일곱 살 때 이미 자연스런 문장을 지을 수 있었던 한유는 19세 되던 786년에 과거에 응시하고자 상경하였다.
당시의 과거는 여러 종류가 있었으나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이부(吏部)에서 주관하는 박학굉사과(博學宏辭科)에 합격하는 것이 엘리트 코스였다. 그러나 한유는 진사시에 세 번이나 낙방하였고, 진사시에 합격한 뒤에도 박학굉사과에 또 세 차례 낙방하였다. 진사시의 답안은 변려문(騈儷文)으로 작성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한유는 변려문을 좋아하지 않았고, 박학굉사과를 주관하는 이부는 문벌 귀족들의 아성이어서 배경 없는 신진사류들의 관계 진출을 꺼려하였다.
관료로서의 입신을 소망하던 한유에게 시대 환경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25세에 네 번째 치른 진사시에 어렵사리 합격하였으나 이부의 시험에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부득이 절도사의 막료로 5년의 세월을 보낸 한유는 34세에 낙수(洛水)로 낚시 여행을 갔다가 낙양의 혜림사에 묵으며 유명한 기행시 「산석(山石)」을 짓게 된다. 황혼부터 이튿날 아침까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바뀌는 산속의 풍광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이 시는 신선한 언어와 고결한 회포가 어우러져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많은 평론가들은 한유 시의 특징을 "문장으로 시를 지었다"고들 하였다. 시에서도 산문에서처럼 서술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언어의 형식 역시 산문과 유사한 작품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그의 시가 표현이 어렵고 기괴하다고도 한다.
그러나 폄하에 가까운 이러한 평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에는 그의 시만이 가지는 매력이 있다. 독특한 구상과 창조적인 언어의 운용, 그리고 이러한 기법들로 빚어낸 웅장한 기세 등은 그의 시의 장점들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산석」이나 「장적(張籍)에게 장난삼아 드림」ㆍ「8월 15일 밤에 공조참군 장서에게 드림」ㆍ「좌천되어 가다 남관(藍關)에 이르러 종손자 상(湘)에게 보임」 등이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한유는 802년 35세에 드디어 이부의 시험에 합격하여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었다. 비록 하급관료의 자제들을 교육하는 보잘것없는 직책이었지만 19세에 상경한 이래 16년 만에 중앙 관료가 된 것이다.
이후 회서(淮西)로 출정하기까지 15년 동안 한유는 중앙과 지방을 오가며 좌천과 강등으로 얼룩진 장년기를 보냈다. 817년 7월, 이미 노년기에 접어든 50세의 한유는 배도(裴度)의 행군사마(行軍司馬)가 되어 회서를 평정하고 개선하였다. 오원제(吳元濟)의 반군을 평정하기 위해 편성된 진압군 사령관 배도가 한유를 자신의 참모로 추천하였던 것이다. 한유의 벼슬길에서 가장 화려한 업적이었던 이 회서평정은 그에게 법무부차관격인 형부시랑에 임명되는 영광을 가져다줌과 동시에 중앙 정계에서 그의 지위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한유는 헌종(憲宗)의 칙명에 따라 「회서(淮西)를 평정한 기념비문」을 지었다. 『서경』을 모방한 산문 형식의 서(序)와 『시경』을 모방한 운문 형식의 명(銘)으로 이루어진 이 글에서 한유는 그의 학식과 문학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대당제국(大唐帝國)의 위대함과 왕조 통치의 정당성을 찬미한 내용이 현대적 감각과 동떨어져 오늘날 별반 주목을 받지 못하는 듯하지만 종래 당문제일(唐文第一), 즉 '당나라 최고의 글'이라는 평을 받아온 글이다. 고전의 문체를 창조적으로 운용하여 고박한 문체로 유장하게 회서 평정의 전말을 기록한 이 글에는 한유 산문의 특징적인 면모들이 잘 드러나 있다.
819년 정월에 헌종은 장안 서쪽의 법문사(法門寺)에 봉안되어 있던 부처의 손가락뼈를 궁중으로 맞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교가 성행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던 한유는 즉각 상소를 올려 이 일의 불가함을 논하였다. 이 「부처의 뼈를 논한 상소문」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고, 특히 동한에서 불교를 받든 이후부터 천자들이 모두 요절하였다는 내용은 황제를 격노케 하였다. 한유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이 글은 불교에 대한 이해 부족과 논리적 하자 등 내용상 문제가 없지 않지만 한유 산문의 흘러넘치는 기세를 엿볼 수 있는 명문이다.
어쨌든 한유는 이 일로 야만의 땅 조주(潮州)의 지방장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 해 10월에 사면되어 원주자사(袁州刺史)로 옮기기까지 반 년 동안 조주를 문명과 학문의 땅으로
바꾸고자 노력하였다.
한유가 원주자사로서 재임하고 있던 820년 10월에 새로 등극한 목종(穆宗)은 그를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임명하여 장안으로 불렀다. 821년에는 병부시랑으로, 822년에는 이부시랑으로 옮겼으며, 823년에는 서울시장격인 경조윤 겸 어사대부가 되었고, 그해 10월 5일에는 다시 병부시랑으로, 6일 뒤에는 다시 이부시랑으로 옮겼다. 만 3년 동안 여섯 번이나 벼슬이 바뀌었으니 중앙의 요직에 있었던 만년기조차도 권력의 암투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한유는 이부시랑을 마지막으로 벼슬을 접고 이듬해 824년 12월에 장안의 사저에서 57세로 삶을 마감하였다.
한유가 죽은 뒤 그의 사위이자 문인인 이한이 그의 시문 716편을 모아 『창려선생집』40권을 간행하였다. 이후 몇 차례의 간행이 이루어지면서 송대에 이미 판본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게 되었다.
1189년에 방숭경(方崧卿)이 여러 판본을 대조 교정하여 『한집거정(韓集擧正)』을 간행하였고, 10여 년 뒤에
주희(朱熹)는 이 『한집거정』을 기초로 다시 교정한 『한문고이(韓文考異)』를 저술하였다.
그 뒤에 왕백대(王伯大)는 이 『한문고이』를 문집의 본문에 넣어 『주문공교창려선생집(朱文公校昌黎先生集)』을 간행하였는데 이후의 판본은 대체로 여기에 기초한 것이다.
이후의 판본 가운데 가장 널리 통용된 판본은 요영중(廖瑩中)이 송말에 간행한 세채당주각본(世綵堂注刻本)이다. 현대에 활자로 정리된 책으로는 1957년에 간행된 마기창(馬其昶)의 『한창려문집교주(韓昌黎文集校注)』가 유명하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한유 문집의 완역본이 없다.
문장은 도(道)를 담고 있어야
한유의 시대에 유행하던 산문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를 풍미한 변려문이었다. 변려문은 4자나 6자구를 대구로 나열하되 다량의 고사를 원용하고 독음의 조화를 강구함으로써 미학적인 측면에서 중국고전산문의 정점에 도달한 문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형식미의 추구는 점차 내용의 효과적인 전달보다는 언어유희적 경향으로 흐르고 마는 폐단을 초래하게 되었다. 하염없이 아름답되 부질없는 문장들이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유 이전에도 그 부질없는 문장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으나 그들 역시 자신의 창작에 있어서는 그 아름다움을 포기하지 못함으로써 제대로 힘이 실린 주장을 펼칠 수가 없었다.
반성은 있었으나 실천이 없었던 것이다. 한유의 미덕은 바로 그 아름다움을 과감히 포기한 실천에 있다. 변려문으로 써야만 했던 과거의 답안조차 낙방을 무릅쓰고 고문으로 썼던 그 과감함과 한유의 문학적 재능이 이후 산문의 흐름을 바꾼 것이다.
고문운동(古文運動)은 바로 한유가 변려문의 폐단을 직시하고 창작실천을 통해 새로운 글쓰기를 주도한 사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문은 문자적으로는 시문(時文), 즉 당시에 유행하는 글의 반의어이며, 한유의 시대를 두고 이야기하자면 유형식의 변려문에 대한 반의어로서 무형식의 옛 글을 의미한다.
한유 스스로 "하(夏)ㆍ은(殷)ㆍ주(周) 삼대와 양한(兩漢)의 글이 아니면 읽지를 않았다"고 하였으니 옛 글은 후한(後漢) 이전, 변려문이 출현하지 않았던 시대의 글이다. 한유는 이 옛 글을 읽고 이 옛 글을 쓰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유가 추진하였던 고문운동은 일차적으로 변려문 부정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산문의 형식 타파 운동이었다.
그러나 한유는 고문운동을 통하여 단순히 산문의 형식만을 타파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변려문의 형식미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던 '삶의 바른 길' 즉 '도(道)'를 살려내고 싶었고, 변려문 속에 녹아 있던 부박한 사유들도 모두 쓸어내고 싶었다. 그는 구양첨(歐陽詹)이라는 선비가 젊은 나이에 죽자 애도하는 글을 짓고, 그 글을 짓게 된 경위를 설명한 글인「제애사후(題哀辭後)」에서 분명하게 말한다.
내가 고문을 추구하는 것은 문장의 형식만을 변려문과 달리 하자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들이 그리워도 만날 수 없으니 옛 사람들의 도(道)를 배우고 아울러 그 문장에도 통달하고자 함이다. 그 문장에 통달하고자 하는 것은 본시 옛 사람의 도에 뜻을 두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한유는 변려문을 쫓아낸 그 자리에 고문의 둥지를 틀고 그 둥지를 옛 사람의 도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당나라는 사상적으로 관대한 왕조였다. 표면적으로는 유학이 관방의 학문이었지만 불교와 도교가 이론적으로 정밀해지면서 민간은 물론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세를 넓히고 있었다.
한유의 고문운동은 이 지점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한유가 옛 사람의 도라고 할 때 그 도는 부처의 가르침도 아니요, 노자의 가르침도 아닌 유학의 가르침이었다. 한유는 요, 순, 우(禹), 탕(湯), 문왕(文王), 무왕(武王), 주공(周公), 공자, 맹자로 이어져 내려온 도통(道統), 즉 '도의 전통'이 맹자 이후 끊어졌음을 안타까워하며 이 유서 깊은 도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도(道)의 본질을 탐구한 글」과「부처의 뼈를 논한 상소문」은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대표적인 글들인 동시에 유가가 불교와 도교에 의하여 위축되고 있던 현실에 대한 위기의식을 고백하는 글들이다. 그가 "나는 오직 올바름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천명하였을 때 그 '올바름'은 유가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고문운동의 본질은 유가의 중흥을 도모한 사상운동이다. 한유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유가가 제시하는 인의(仁義)의 길로 독자를 인도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육경을 몹시 사랑한 것은 공자의 손에서 이념적 세례를 거치면서 정리된 문헌이기 때문이며, 양한의 문장을 강조한 것은 그 글들이 한무제가 유학을 통치의 전면에 내세운 이래 유가의 이념과 교의가 오롯이 살아 있는 글들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식과 지향을 바탕에 두고 왕성하게 이루어진 그의 창작실천은 변려문에 젖어 있던 당시 문인들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으며, 끝내는 그들이 휩쓸리듯이 따라오게 하였던 것이다.
한유의 고문운동은 유종원(柳宗元)이라는 걸출한 동지가 있어 더욱 순조로울 수 있었으며, 송대에 와서 구양수라는 거인과 그가 배출한 탁월한 인재들에 의하여 탄력을 받아 청말까지 중국 산문의 주류가 되었다. 그러므로 모곤(茅坤)은 한유, 유종원과 더불어 구양수(歐陽修),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의 여덟 사람을 당송팔대가라고 하였고, 우리도 지금까지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당송팔대가는 바로 글쓰기의 제한된 형식을 타파한 고문팔대가이며 한유는 그 기점에서 새로운 글쓰기의 문을 연 개척자였다.
무형식의 형식, 새로움을 찾아서
형식미를 부정한 한유였지만 그의 문장에 예술적 수사미가 없었다면 '글 잘하는 한퇴지'가 될 수 있었을까? 대답은 자명하다. 무형식의 글쓰기라고 하여 한유의 창작 실천이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 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삼대(三代)와 양한의 글을 열심히 읽은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육경』으로부터 양한(兩漢)의 문장까지가 그의 모범이었을 것이며 그의 글에는 분명 『육경』과 양한의 문장을 닮은 글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한유 문장의 전부는 아니다. 그가 오로지 육경의 문체에다 유가의 도를 담은 글만을 썼다면 우리는 그를 유학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를 문인, 특히 산문작가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그의 글에는 그의 글만이 가지는 미덕, 그것도 산문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던 크나큰 미덕들이 있었다는 말이다.
한유의 주장대로 유가의 가르침만 지루하게 나열해서는 독자를 설득하고 감동시킬 수 없다.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수사와 세련된 언어감각이 필요하다. "언어는 의사를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 공자도 "말이 문채가 없으면 멀리 전해지지 못 한다"고 하여 후세의 연구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거니와 적어도 한유에게는 공자의 이 상반된 말이 모두 유용했던 것처럼 보인다. 한유가 내건 무형식의 깃발 속에는 무형식의 형식이 숨어 있었다.
그 무형식의 핵심은 '새로움'이다. 그는 "언어는 나의 언어라야 한다"거나, "옛 사람들의 묵은 말들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새로운 글쓰기를 끊임없이 강조한다. 한유의 고문은 이름과 달리 '옛 글'이 아니라 '새 글'이었으며, 그는 이 '새 글'에 유가의 이념을 담아 독자를 감동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모영(毛穎)의 전기」에 번득이는 의인(擬人)의 풍자, 「미장이 왕승복전(王承福傳)」의 허구가 개척한 전기(傳記)의 새로운 형식, 「학문의 진보를 위한 해명」이 보여주는 복잡다단한 변화 속의 정연한 논리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그의 글들에서 솟아나는 풀내음 같은 싱그러운 감동들이 바로 이 '새로움'의 결과들이다.
새로움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겐 충격으로 다가와 어렵고 괴이함으로 읽히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한유의 문장을 '기험(奇險)'하다고 하는 까닭이다. 새로워서 신기하다가 어려워서 괴이하기까지 하다는 말이다. 확실히 한유의 문장은 어렵고 괴이한 맛이 있다. 그래서 우뚝한 바위산이다. 「회서를 평정한 기념비문」으로 대표되는 이런 유의 글들은 일견 예스럽고 난삽하여 기가 질리지만, 꼼꼼히 뜯어읽다 보면 넉넉하고 유려하여 유장한 맛이 있다. 암벽 속에 갈무리된 이 부드러운 육질을 느끼지 못하면 기험할 뿐이지만, 느끼고 나면 유장하여 도도한 것이다. 그래서 청나라 건륭제는 「회서를 평정한 기념비문」을 "당나라 제일의 문장"이라 하였던가!
'기험'이 빚어내는 한유 문장의 도도한 기세가 「부처의 뼈를 논한 상소문」이나 「어사대(御史臺)에서 날이 가물고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논하여 올린 상소문」, 「잘못된 정치를 비평해야 하는 소임을 맡은 신하에 대한 논의」등의 논설문에서 두드러지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서정 산문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 이채롭다. '지극한 문장'으로 정평이 있는 「열두째 조카를 위한 제문」은 그의 조카 한노성(韓老成)의 요절을 애도한 글이다. 운문으로 짓는 것이 통례였던 제문을 산문으로 쓴 것도 새롭거니와 죽은 자와 대화하는 형식의 진솔함으로 더욱 독자의 심금을 울린다.
고단했던 유년기를 같이 보낸 회상으로부터 시작하여, 함께 겪었던 중년의 시련과 남은 자의 비애까지, 절절한 심회를 세세한 일상에 버무려 도도하게 엮어내는 솜씨! 통절한 아픔을 풀어낸 글을 두고 도도한 기세를 이야기하니 이상하기는 하다. 그러나 독자를 휘어잡는 작가의 감정, 주체할 수 없는 그 감정의 줄기는 도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도도한 감정은 글을 읽고 난 뒤에도 낙화의 향기처럼 저며드는 여운으로 독자의 가슴에 사무친다. 그래서 한유의 글을 장강대하(長江大河) 즉, '길고도 큰 강물'이라고 하였나보다.
아! 장강대하(長江大河)
당나라 말기의 시인 두목(杜牧)은 한유의 글을 두보의 시와 나란히 견주어 '두시한필(杜詩韓筆)'이라 했고, 소동파는 한유를 "여덟 왕조 동안 무너졌던 글을 다시 일으킨" 인물로 평가하였다. 그 소동파의 아버지 소순은 한유 문장의 도도한 기세를 두고 '장강대하'와 같다고 하였으니, 이제 짧지만 도도한 그의 글 한 편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기로 한다. 네 편으로 이루어진 「여러 가지 이야기들」 가운데 명마에 대한 감식안이 있었던 백락(伯樂)을 내세워 세태를 풍자한 네 번째 작품이다.
세상에는 백락이 있어야 천리마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천리마는 늘 있지만 백락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명마가 있다 하더라도 천한 사람의 손에서 욕을 보다가, 천리를 달린다는 명성도 얻지 못하고 평범한 말들과 함께 마구간에서 죽고 만다. 천리를 달리는 말은 한 끼에 한 섬의 곡식을 먹지만, 말을 먹이는 사람은 천리를 달릴 수 있음을 알지 못하고 말을 먹이니, 이 말이 비록 천리의 재능이 있다 하더라도 배불리 먹지 못하여 힘이 부족하게 된다.
재능이 밖으로 드러나지 못하여 평범한 말처럼 달리려 해도 되지 않는데 어찌 천리를 달릴 수 있으리오? 채찍질을 함부로 하고 재능을 다할 수 있도록 먹이지도 않으며, 울부짖어도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채찍을 잡고 다가와서는 "천하에 말이 없다"고 한다. 아! 정말 말이 없는 것인가? 말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원문이 150여 자로 이루어진 짧은 글이지만 한유 문장의 맛과 멋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글이다. 천리마를 가운데 두고 시대를 만나지 못한 인재의 아픔을 우의적으로 드러내되, 짧은 편폭의 구비마다 물결치는 변화와 기교가 놀랍다. 한유가 어디 기교를 부리고자 하였으랴만 전편을 휘몰아가는 논리가 파란과 곡절을 일으켜 저절로 기교가 되었다. 그리고 그 천의무봉의 기교가 빚어낸 오연(傲然)한 기세! 이런 것들이 아마 한유의 문장에서만 볼 수 있는 '장강대하'일 것이며 '새로움'일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작품들 이외에도 「스승에게 배워야 하는 이유를 논한 글」이나 「맹교(孟郊)를 보내며 지은 글」, 「기린을 잡은 일에 대한 해명」, 「남전현(藍田縣) 현승(縣丞)의 집무실 벽에 적은 글」, 「백이(伯夷)를 찬양한 글」, 「장적(張籍)에게 보내는 두 번째 답장」, 「악어(鰐魚)를 쫓는 글」등이 명문으로 손꼽히고 있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한유는 글쓰기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으나 유가의 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글쓰기의 형식은 무시하는 듯한 주장을 하였다. 형식과 내용을 겸비한 이상적인 글쓰기가 아닌 내용에 치중하는 글쓰기를 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글이 아름다워야 하는지, 혹은 내용에 충실하여야 하는지 또는 이 두 가지를 겸비할 수는 없는지 등의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글쓰기의 보편적 화두이고, 양자를 겸비한 글쓰기가 이상적인 글쓰기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한유 당시는 변려문으로 인해 형식미가 강조되는 글쓰기가 지나치게 유행하고 있었다. 그 뿌리 깊은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이상론을 펼칠 여유가 없었을 것이며, 그러므로 아예 형식을 배제하는 극약처방을 들고 나온 것이다. 그가 함께 고문운동을 추진했던 유종원(柳宗元)과는 바로 이러한 점에서 다르다. 그것은 또한 유종원이 아니라 한유가 고문운동의 영수가 될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유종원은 변려문은 반대했으나 문장의 수식미도 중시하였다.
2. 한유와 함께 고문운동을 추진하였던 유종원도 도(道)를 강조하였으나 인생의 바른 길이라는 의미의 당위(當爲)의 도를 강조하여 유가의 도만을 도라고 여기지 않았다.
한유는 왜 유독 유가의 도를 강조하였는가?
한유는 유학을 학문의 정통으로 보고 불교나 도교를 이단으로 배격하여 이와 관련된 글들을 남기고 있다.
동시에 맹자 이후로 도의 전통이 끊어졌다고 여기고 자신이 그 끊어진 전통을 되살려 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므로 그가 유가의 도만을 강조한 것이 정당한가의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글쓰기에서 유가의 교의를 천양할 것을 주장한 것은 당연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그는 사상가로 평가되기도 하며, 유학사에서는 그를 당(唐)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로 다루기도 한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우리나라에는 아직 한유 문집의 완역본이 없고, 한유의 산문을 선별 번역하여 부분적으로 삽입한 책들만이 있다. 『고문진보』에 한유의 대표적인 산문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번역본으로는 아래의 책을 추천할만하다.
『고문진보ㆍ후집』, 황견 엮음, 이장우ㆍ우재호ㆍ박세욱 옮김, 을유문화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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