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모 부부
밤 수확기가 되면 밤 산에는 사람만큼이나 청설모도 부산을 떤다. 밤농사에 일조한 것은 하나도 없으면서 주인보다 먼저 나서 수확하고 땅에 저장하고 설레발이다. 그렇게 사람 눈치 보며 애쓴 만큼 한겨울에 꺼내 먹으면 좋으련만 그 기억은 마치 치매 환자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고 굶는다. 그런 청설모를 보고 있으면 흡사 남편 모습이다.
남편은 지갑이 있음에도 현찰을 주머니나 차 안, 선반 위에 두고 청설모처럼 까맣게 잊어버린다. 매번 찾지 못해 허둥대는 것도 모자라 아내가 가져갔나 하고 의심에 눈초리 레이저로 쏘아댄다. 그런 남편의 습관은 상고대에 서릿발을 이고도 고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나는 치유의 방법으로 무조건 현찰은 아내한테 맡기고 카드 한 장을 내주었다.
과거와 다르게 요즘은 도시나 시골이나 어디를 가던 카드 한 장이면 먹고, 마시고, 사고, 타고 문제가 없다. 더욱 스마트폰에 인터넷 금융 결제로 입력해두면 반드시 지갑을 챙겨야 하는 불편함도 없다. 달랑 핸드폰 하나만 손에 쥐고 있으면 모든 결제가 해결되는 우리는 편한 세상에 살고 있다.
요양센터 팀장님께서 요양사 직무교육 날짜를 문자로 보내왔다. 하필 시 낭송 공연 날과 겹친다. 나는 교육을 담당한 학원에 전화해 다른 날로 일정을 다시 잡아달라 요청했다. 그랬더니 일주일 후다. 그날도 일주일 전에 손자를 맡기고 간 딸 부부가 데리러 오는 날과 맞물린다. 통화 중 망설임을 눈치챈 담당자는 하반기에 잡힌 교육 날짜가 적어 더 이상 날짜 변경은 어렵다 못 박았다.
딸 부부가 친정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손자의 육아는 남편이 맡기로 하였다. 치매 시어머님과 남편, 그리고 손자의 먹거리는 전날 미리 장만해 두었다.
교육가는 당일 아침이 되었다. 오늘같이 바쁜 날에는 늦잠을 자주면 좋을 손자가 할미가 일어나기 무섭게 꼬리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정신없이 손자 아침밥까지 먹이고 난 후 가방을 들고 차를 주차해둔 가교 하천길로 뛰어갔다. 차에 타서 시동 걸고 가방을 열어보니 빈 가방이다. 서두르다 보니 화장대에 둔 지갑을 챙겨 넣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핸드폰은 잊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왔다. 요양직무교육은 여덟 시간 동안 진행된다. 간식은 물론 점심까지 학원에서 제공한다. 여태까지 경험으로 따로 돈 쓸 일은 생기지 않았다. 더욱 카드는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가.
얼마 전 일차교육이 있었음에도 간호학원은 교육 온 요양사들로 붐볐다. 근무하는 센터마다 무리 지어온 듯 앞뒤로 짝을 이뤄 자리 잡고 서로 차와 간식을 챙긴다. 교육 날짜를 미뤄서인지 우리 센터 사람은 나 혼자였다.
늦가을 추운 날씨여서 난방해 줄 거라 굳게 믿었는데, 눈 감은 채 멀대처럼 끝까지 구석에서 눈치 없이 서 있는 온풍기. 가볍게 입고 온 탓에 오전 교육 내내 사시나무처럼 떨어야 했다. 많은 인원에 뒤에 배치된 커피와 간식도 턱없이 모자랐다. 배려 없이 욕심껏 먼저 앞사람이 챙겨가는 바람에 적은 간식은 내 차지까지 오지 않았다. 작년과 다르게 교육기관이 달라지면서 어설픈 면이 많았다.
작년만 해도 교육을 담당했던 학원은 개인 접시에 공평하게 간식을 풍족히 나눠 주었다. 점심은 뜨끈한 국물을 파는 식당을 예약해둬서 좋았다. 그런데 이곳은 달랑 식은 김밥 한 줄과 베지밀이 끝이다. 한겨울 서릿발 내린 허허로운 들판의 모습처럼 썰렁 의 극치였다. 나는 김밥을 먹고 나자 얼마 전 앓은 장염이 도지는 듯 위 통증이 왔다. 간절히 따뜻한 국물이 생각났다.
따듯한 어묵 국물이라도 사 먹어야 할 거 같아 학원 문을 나섰다. 시내버스정류장 앞에 실내 포장마차가 보였다. 냄비에는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지나가는 손님한테 호객행위를 하고 나섰다. 그리고 포장마차 안에는 삼삼오오 모인 요양사들이 꼬치 어묵과 국물을 먹고 마시며 그동안 크고 작게 여며둔 보따리를 푸는 듯하였다.
나는 현재 현찰이 없어서 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서지는 못하였다. 먼저 카드기가 있는지 가게 안을 살펴야 했다. 그런데 길거리 좌판 장사들도 가지고 다니는 그 흔한 카드기가 보이지 않았다. 계좌이체 해주겠다고 하면 되겠지만 그날따라 요양사 무리 때문인지 외딴섬이었던 나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는데 울컥 슬픔이 목울대를 넘어왔다. 주머니 속 손에 쥔 핸드폰이 마치 시장 좌판에 놓인 꽝꽝 언 동태처럼 느껴졌다. 뱃속도 마음도 유난히 더 시려왔다. 나는 싸늘히 식은 속을 데워볼 요량으로 양지를 찾아 나섰다. 다음에는 꼭, 현찰을 챙겨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사곡면에 있는 마트에 들려 어묵을 사서 저녁 국으로 끓일 참이다. 마트에서 어묵을 사고 핸드폰으로 결재했다. 그리고 영수증을 넣으려 가방 속 안 지퍼를 열다 놀라고 말았다. 언제 넣어두었는지 그 안에는 오만원권 지폐 한 장에 만 원권 다섯 장이 웅크리고 있었다.
순간 돈을 함부로 관리하는 남편한테 한 잔소리가 메아리로 되돌아와 머릿속 능선을 탄다. 남편처럼 나도 청설모 두뇌를 가졌던 거였다. 가끔 남을 먼저 탓하기 전 나를 먼저 점검해볼 일이었다.
첫댓글
슈퍼우먼이십니다.
바쁜 생활인에, 보호사에, 짬짬히 글도 쓰시고 시낭송까지..
밤을 이제 수확하세요? 추석무렵인줄로만 알았는데..
밤이야기를 하시니 갑자기 군침이 ㅎㅎ
선생님 글을 읽었어요. 사이다를 마시듯 신선하고 톡톡 튀는 것이 제가 좋아하는 감성이 보였어요. 글 많이 올려주세요.
밤은 9월에서 10월 10일까지가 밤 산에서 수확기입니다. 저희는 수확한 밤을 직거래로 팔고 있어요. 제가 작년에는 투병중이어서 판매를 쉬었고요. 올해 다시 시작하려니 다시 맨땅이네요. 그래도 여전히 조금씩 나가고는 있어요.
청설모 부부, 딱이네용~
저도 별수 없더라고요. 이날이 가장 슬프고 황당한 날이예요.
수연님의 청설모수필 잘 읽었습니다.
우리집 할망도 이번 요양보호사 시험 합격했다고 제가 저녁을 샀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공부 많이하셨네요.
자격증 따놓으면 사용할때 생기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