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선(下船)한 뒤 시작한 것이 여행업이었다. 많은 고객들이 당시로선 드물게 60여 개국을 다녀본 경험을 듣고는 어디가 가장 좋으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때는 관광이라면 주로 눈을 위주로 했기에 문화나 역사, 지리적 여건 등은 그리 중요한 이슈가 되지 못했다.
‘뉴질랜드가 좋다’고 하면 ‘거기 뭘 볼 게 있는데?’하는 반문이 바로 뒤따른다. 우리나라가 해외여행이 자유화된 직후에는 행선지 보다 몇 개국, 몇 박 며칠을 더녀왔는지가 더 중요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이는 여행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남에게 과시하려는 의도가 다분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우선 목적에 따라 행선지가 정해짐으로 같은 지역이라도 때에 따라 혹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 느낌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뉴질랜드(NZ)가 가장 마음이 편안했다. 우선 대륙과 떨어져 있으니 공기가 맑아 속이 시원하다는 느낌이 앞선다. 인구가 적고 자연환경이 좋은 데다 목가적(牧歌的) 풍경이 아름다웠다. 사람이 적으니 자연히 인심(人心)을 그리워하는 것도 덤이라 할 수 있지만, 막상 그곳에서 정착하고 살려면 텃세가 센 것은 세상 어디가나 마찬가지였다.
뉴질랜드의 위치
맨 처음 이 나라를 방문한 것이 1979년 4월, 북섬의 하우케만(Hawke Bay)에 있는 네이피어(Napier)항이었다. 우리나라는 초봄이지만 거기엔 초가을이었다. 적도를 넘어 남반구였기 때문이다.
뉴질랜드(NZ)는 남반구의 오세아니아주에서 타스만해(Tasman sea)를 사이에 두고 오스트레일리아와 약 2,000여 km 떨어져 있는 섬나라이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지만, 영국의 군주(君主)가 국가원수로 남게 되었다.
오늘날 뉴질랜드의 인구는 약 500만 정도라지만, 처음 방문할 당시는 약 300만 정도였다. 이 중 대다수가 유럽계이다. 원주민인 마오리족이 소수민족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외국에서의 이민은 받아들지 않았다. 크게 북섬과 남섬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수도 웰링턴(Wellington)은 북섬의 최남단에 있고. 국내 최대의 도시인 오클랜드(Auckland)로 북섬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특히 남섬에 있는 아오라키 마운트쿡 국립공원에는 높이 3천 미터가 넘는 23개의 산봉우리들이 이어져 있고 빙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접근이 매우 쉬워 세계적 관광지로 유명하다. 마운트쿡산은 해발 3,724미터의 산으로 뉴질랜드의 최고봉이다. 최근에도 TV에서 NZ의 유명 관광코스를 소개하는 걸 가끔 볼 수 있다.
왼쪽이 북섬. 오른쪽이 남섬
이 항차는 네이피어(Napier)항에서 사과와 키위(Kiwi)를 싣고 남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 유럽 덴마크의 북쪽을 지나 스웨덴 말모항(Malmo)항까지 가는 긴 항로였다. 키위라는 과일은 우리의 다래와 같은 것으로, 키위(Kiwi)란 이름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NZ에서만 사는, 날지 못하는 새의 이름인데 수풀 속에서 밤에만 활동하는 새이다. 여기에서 따온 이름의 과일이었다.
사실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물론 한국에는 수입되지 않은 것으로, 남해안 완도섬 출신인 나이 지긋한 갑판장이 보고 우리의 다래와 비슷한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주로 유럽으로만 수출되는 고급 과일로 포장도 예쁘고 깔끔하게 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선원들이 포장에 손 댈까봐, 미리 먹으라고 몇 박스를 주가까지 했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쉬는데 누가 찾는다. 잠바 차림의 중년 남자가 피가 뚝뚝 떨어질 듯 한 생녹용(鹿茸) 몇 개를 가지고 와서 사라고 했다. 지금이야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NZ에서 생녹용은 쓸모없는 무용지물이었다. 한데 이 사나이는 한국 사람이 녹용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버리지 않고 팔러 온 것이다. 얼마? 했더니 20$만 주란다. 두 말 않고 샀다. 새끼손가락 굵기의 말랑말랑한 녹용 끝에서 진홍색의 핏방울이 흐르다가 멎어 있다. 씻을 것도 없이 바로 입으로 털어 넣을까 하는데, 문득 예전에 읽은, 우리나라 초대 국무총리였던 철기(鐵騎) 이범석(李範奭) 장군의 회고록 ‘우둥불’이 생각났다.
그분은 무인(武人)이었다. 한때 만주벌판에서 사냥을 다닐 때의 일이다. 말 한 마리와 열흘 가까이 천막을 치고 숲속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이른 봄에 사슴 한 마리를 보고 발사했는데 사슴은 달아나고 그 자리에 핏물이 나는 녹용 두어 점이 있길레 그냥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켰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눈이 보이질 않아 꼼짝을 못하고 좁은 탠트 속에서 3일을 지내다 겨우 눈이 뜨이자 귀가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평생을 앓아 본적이 없었던 것이 그 덕분이 아니었나 추측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바로 입에 털어 넣을까 하다가, ‘혹시 나도…’ 하는 생각에 참았다. 오래 두고 먹어야겠다는 욕심에서 죠니워커 술에다 담가두고 해를 넘기고 귀국할 무렵, 어쩌면 좋아할 것만 같은 마누라의 표정을 떠올리며 다 먹었는데, 효능에 대한 별다른 기억은 없다. 그러나 어쩌면 평생 그렇게 술을 많이 먹어도 잘 견딘 것이 그 덕분이 아닌가 추정만 할 뿐이다.
그렇게 시작된 NZ의 입항은 그 후 로토루아(Rotorua) 티마루(Timaru) 맨 남쪽 끝에 있는 블러프(Bluff) 등 몇 차례나 더 있었다.
7월이면 NZ는 한 겨울이다. 초목과 꽃들은 여전히 무성하지만 기온은 우리의 가을처럼 시원했다. 기관장과 함께 인근의 고어(Gore)시(市)까지 버스로 가보기로 했다. 바닷가가 아닌 내륙 깊숙한 곳의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냥 시내버스로 종점까지 가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역시 인간의 채취와 사는 모습들이 그리웠던 탓이었으리라. 우리의 시골 농부 같이 인상 좋은 운전자에게 인사를 하고 뜻을 얘기하자 “Oh! Captain, very good idea!” 하면서 맨 앞자리, 앞의 훤히 보이는 자리까지 잡아 주었다. 승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한 정류소마다 한 두 사람이 내리고 타는 정도였지만 모두 다 아는 사이인 듯 하다. 역시 사람이 귀하다는 느낌이다. 쉴새 없이 얘기하는 운전기사부터 그랬다.
고어시의 약방에서
끝없이 펼쳐진 목장. 거기에는 온통 양들의 세계였다. 그런데 그 야산(野山)들의 목장에는 그냥 산등성이에 목초(牧草)를 심은 것이 아니었다. 멀리서 봤을 때 이상하게 계단이 되어 있다는 의문점을 가졌는데 자세히 보니 정말 그랬다. 양들이 올라가 네 발로 똑바로 서서 풀을 뜯기에 불편이 없도록, 그것도 일률적이 아니고 엇갈리게 계단을 만들었다. 운전기사가 일일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임을 확인해준다. 수십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의 노력이 이런 결실을 만들어 냈구나 하는 감탄이 저절로 났다.
NZ 국내 양(羊)의 숫자는 총 인구수의 5배나 된다고 했다. 이는 양모(羊毛) 생산용과 식용(食用)인데, 식용은 어린양을 잡은 람(lamb)이라고 해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은 중동으로 많이 수출할 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인기가 있었다.
살아있는 양들도 중동(中東)으로 많이 수출되는데. 이는 마치 최근의 관광유람선, 크루즈선과 같은 대형선박의 갑판 위에 수십층의 노천(露天) 축사(畜舍)를 짖고는 항해 중에는 사료(飼料)와 물만 주면 되고록 설계되어 있다. 이 양들은 선박에 싣고 내리는 데는 사람이 아닌, 너댓 마리의 개들이 하고 있었다. 주인이 휘파람으로 양들을 정확하게 층수와 마릿수를 맞춰 몰아다 넣는다. 신기했다. 사람들이 양들이 오르내리는 발판만 붙였다 땠다 해 주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항해 중 황파(荒波)를 만나면 이들도 배멀미로 죽어나는 숫자가 상당수에 이른다. 그냥 바다에 버리면 바닷속 고기들의 성찬(盛饌)이 된다고 했다. 이 선박의 선원들의 임무는 사료와 물을 주고 죽은 사체(死體)를 처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중동 사막에서 보는 양떼들은 대개 이렇게 해서 호주나 뉴우질랜드에서 수입한 것이라 보면 된다.
살아있는 양들의 운송선박. 왼쪽의 트럭은 사료 운반용
그리고 조그만 학교들이 너무나 인상적이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양, 소 그리고 사슴 떼들. 밤 9시경 비를 맞으며 귀선하고 보니 속이 후련했다. 역시 사람은 땅을 딛고 땅 위의 자연들과 교제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 도리임을 절실히 느낀다.
남섬에 있는 티마루(Timaru)항에 입항 중 이곳 수도 웰링턴(Wellington)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공산권 기항허가서를 발급 받아야 할 일이 생겼다. Agent(대리점)와 상의 했더니, 쉽게 다녀올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마침 수도(首都) 가까운 투우랑가(Tauranga)시에, 1972년 처음으로 상선 2등항해사로 승선했을 때 직속 상관으로 1등항해사였던 김진영 씨가 이민(移民) 와서 정착하고 있었기에 연락을 했더니, 그가 더 반가워 했다.
웰링턴의 국회의사당
김진영! 그는 나이가 두어살 위였는데 고향이 경북 상주(尙州)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통상 불가능했던 NZ로 이민(移民)을 이미 꿈꾸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NZ의 국회의원 친구가 있어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 같다.
이민이 성사되어 건너갈 즈음 슬하에 자녀가 없어 양자(養子)로 들인 조카가 걸림돌이 된 모양. 한국내에서 선박통신사 자격증은 있으나 경력이 없어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했다. 모 수산회사에 통신사로 승무한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협조해준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각자의 길을 가기에 바빠 잊고 있었는데, 그때 그가 이곳 Tauranga시에 정착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확인했더니 언제라도 오라고 했다.
일정에 맞는 비행기가 없어 정오에 출발하는 버스로 이 나라의 두 번째, 남섬에서는 가장 큰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까지 가서 비행기로 수도 웰링턴(Wellington)에 도착. 바로 인근에 있는 우리 대사관에서 허가서를 받고 타우랑가Tauranga)의 김진영 씨를 만나 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김진영씨 집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이민 초기, 그야말로 낯설고 물설은 타향, 그것도 외국땅에서 자녀도 없이 내외간이 노동으로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많은 심적 갈등을 겪었다는 얘기에 공감이 갔다. 완전히 다른 주위 환경과 언어, 문화. 방문자일 때는 그렇게 친절하던 사람들이 막상 함께 살게 되자 심한 텃세가 자전거 조립의 막노동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고 했다. 결국 부인이 먼저 쓰러졌다. 병원에서 의사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만 했단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이었다. 너무나 실감적이었다.
그 부인의 심정은 이해에 앞서 우리 모두의 일 같았다. 딸 넷 사진을 보고는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고 했다. 최근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애들보다 개를 더 좋아한다’는 어느 정치가의 얘기도 있었지만, 여성으로서의 본능은 아기를 갖고 싶은 것임을 느끼게 했다.
함께 승선할 때는 ‘에수쟁이’라 부르며 그렇게 싫어하며 욕하던 기독교에 이미 그는 푹 쩔어 있었다. 결국 하나님에게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는 얘기였다. 절망이 앞을 가로막을 때는 그냥 ‘하나님!’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나오더란다. 사실은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인간은 누구나 종교적이란 말에 공감한다. 김진영 씨의 경우 새 보금자리로 희망에 부풀어 찾았던 NZ에는 믿을 곳, 마음을 붙이고 끓다 못해 타는 마음속의 말도 펴놓을 수 있는, 그것도 눈에 보이는 대상이 없었다는 얘기였다. 부득이 보이지도 않은 하느님을 붙잡은 것이다. 교인들의 말 대로 ‘구원 받았다’. 쉴새 없이 하나님과 예수님 얘기만 이어진다. 그것도 약간은 지루했는데 나아가 ‘예수를 믿으라’고 끈질기게 권해온다. 후문으로 그는 결국 현지에서 목회자가 됐다고 들었다. 1979년 12월 31일 저녁의 일이었다.
대망의 80년대 1월 1일을 이곳 김진영 씨의 댁에서 맞았다. 신년이라지만 아무런 표시도 없이 그저 조용한 평일 같은 이곳의 풍경이 오히려 이상하다. 우중에도 불구하고 김 형 내외의 안내로 로토루아(Rotorua)까지 가다. NZ에서 화산과 온천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며 원주민인 마오리족 문화의 중심지이다. 땅속에서 솟아오르는 펄펄 끓는 물과 증기. 그리고 진흙이 팥죽처럼 보글보글 한다. 스프링타운(Spring Town)에서의 송어 양식장도 둘러보았고 석회성 온천에서 수영도 즐겼다. 양털로 된 요 하나를 사기도 했다.
타우랑가(Tauranga)와 로토루아(Rotorua) 사이에서 자라는 싱싱한 조림지역들의 나무는 미래의 부를 약속하는 듯 하다. 김 형이 고사리나무 둥치로 깎은 화병을 선물한다. 고맙다. 한때 함께 승선한 적이 있고 그 후에 그의 양자 김세락 군에 대한 작은 협조가 있었을 뿐인데…. 한때 한국이 뉴우질랜드에서 원목(原木)을 수입한 적이 있었는데 그 수출항이 바로 타우랑가(Tauranga)항이다.
펄펄 끓어오르는 땅. 로토루아
웰링턴(Wellington)에서 티마루(Timaru)행 비행기를 탑승, 도중에 일기관계상 예정 공항에 착륙하지 못하고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 공항까지 가다. 경비행기의 전 승객이래야 버스 한 대면 충분했다. 오는 도중에도 심한 호우를 만났다. 그런 호우 속에서도 강물 빛 하나 변하지 않는다. 아예 탁류는 생기지가 않는다는 의미였다. 빗속에서 가만히 서 있는 양떼들이 신기하고 애처롭다. 만약 움직이다가 그 양털 속이 빗물에 젖으면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져 죽는다고 했다. 곳곳마다 운전수 혼자서 친절하게도 짐들을 내리며 일일이 도와준다. NZ가 조용하게 살기 좋은 곳임이 분명하다.
통상 비행기와 공항(空港)을 얘기하면 시내에서 먼 곳에 거대한 시설과 소음 등을 연상하지만 이곳 NZ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국내선은 전 항공기가 프로펠러가 달린 경비행기였다. 승객도 우리의 관광버스 한 대 분인 최대 30여 명 안팍이다. 이런 작은 비행장이 곳곳에 있다. 잔디밭 위에 짧은 활주로만 깔았다. 상주(常駐)하는 직원도 없다. 내릴 비행기가 있으면 도착 10여분 전 직원 한 둘이 나와 맞이하고 떠나면 되돌아 간다.
우리의 예를 빌리자면 서울에서 대구 가는 도중 기상이나 어떤 이유로 대구에 착륙하지 못하면 구미나 김천, 아니며 밀양 부근의 공항에 내려 버스 한 대로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면 1~2시간이면 족하다. 그것도 운전기사 한 사람이 다 한다. 도중에 어디라도 필요하면 정차하고 내려주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도 한 번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봤다.
현재 우리의 실정으로는 국내선 항공편이라도 주거지 출발부터 공항까지, 다시 목적지 도착까지 걸리는 시간이 비행시간의 두 서너 배 더 길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있다. 그래도 NZ내 국내 항공기 사고는 한 번도 없었다고 버스 운전기사가 자랑스레 얘기해 준다. 물론 국제공항은 따로 있었다.
한 학교의 전교생이 선박견학을 왔다. 맨 우측이 필자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 장점이 많은 쪽을 선택하되 부족한 점을 보완해 가면 된다. 우리나라에는 국제공항은 한두 개만으로 충분하며 작은 항공기로 각 지방으로 신속히 연결시킨다면 오히려 경제적 부담도 시간적 손실이 적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서울과 부산의 거리는, 항공기로 일본의 후쿠오카와 부산보다 훨씬 멀다. 유럽이나 아메리카 쪽에서 부산으로 귀국할 때는 일본 공항 이용이 훨씬 바르고 편하다. 이런 경우는 북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많이 보아왔다. 물론 여기에는 더 많은 복합적인 문제가 있음도 사실이다. 아무튼 인상 깊은 나라임은 분명하다.
첫댓글 외국 관광은 눈과 입을 즐겁게 하는데
늑점이님 체험담은 마음을 즐겁게 합니다.
노년이 되니 눈이라도 즐겁게 하려고
<걸어서 세계속으로> <태어난 김에 세계일주>등을 찾아서라도 보고 있습니다.
책보다 와 닿는 느낌이 편해서입니다.^^
그런데
왜 약국 앞에서 '찰깍'했을까요?^^
그야 찍은 사람에게 물어보셔야지요. 내사 모르지요.내가 안찍었으니까. ㅎㅎㅎ 건강하소. 부산넘
혹시 아픈 일이 있어서 약국에 갔는 줄 알고.....늑점이님을 걱정하는 친구의 마음.^^
배경 선택한 찍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군요.
세상의 모든 개체가 각각 제 맘대로이니까 이해불가겠지만.
갈때는 괜찮았는데 올때는 비가 왔지요. 인도 위에는 비막이가 쳐저 있어서 그 밑에 선 것이 용케 약국 앞이었네요.
'걱정하는 친구의 마음'은 감사히 간직하겠음다. 찍은 사람에게 물으면 아마도 '그 때 폼이 젤 멋지더라' 했을 거요. ㅎㅎㅎ 건강하소. 부산넘
정감이 가는 구수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공산권 국가에 기항하려면 '공산권 기항허가서"를 받아야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여행을 갔을 때 들은 이야기로는, 문제점이 없는 곳이 없겠지만, NZ에서도 청년들이 농촌에서 도시로, 도시 청년들은
호주, 미국으로 가려고 정신이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같이 좁은 곳에서 살다가 목장으로 이어진 풍광을 보면
지상 낙원 같이 보여도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과 행운을 기원합니다.
뉴질랜드- 북섬 남섬- 30여년전 하나여행상품으로 갔었지요.
호수 물색이 코발트색 청정공기 만년설에 헬리콥터 도시의 낮은 상가건물 등이 기억에 남는 것이고
가이드가 녹용 등을 파는 쇼핑몰로 안내해서 물건들을 많이 사서 왔지요.
서선장님으 상세히 소개글을 쓰셨는데. 문장력이 대단합니다.
읽으면서 추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