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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16 강 메시지_아산UBF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말씀 / 마가복음 10 : 1-31
요절 / 마가복음 10 :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고"
하나님 나라 일꾼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역사를 섬기는 영적인 리더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풍조와 달라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자기를 자랑하고 욕심을 합리화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금하시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이 괜찮다 하여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께서 하라 하시는 것을 행하여야 합니다. 세상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그래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시대를 거슬러 살아가는 예수님 제자의 삶을 배워 나가기를 기도합니다.
1. 결혼의 진리 (1-16)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질문 하였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 질문은 이혼해도 된다는 시대의 풍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지만, 실제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헤롯 때문입니다. 분봉왕 헤롯이 아내를 버리고, 동생 빌립의 아내와 결혼하였습니다. 이것을 책망하였다가 세례 요한은 죽임 당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시대 풍조를 합리화 할 수 있는 근거로 모세오경 신명기 24장 1절을 들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바리새인들은 이혼증서만 써주면 이혼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신명기 24:1절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 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이 구절이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이혼증서 제도를 이혼합리화 근거로 삼은 것입니다. ‘모세가 허락했다!’ 여기에 더하여 힐렐파는 ‘수치 되는 일’을 넓게 확대하였습니다. 밥을 태운다든지, 목소리가 크다든지, 잠 잘 때 코 고는 것, 머리단장 하지 않는 것까지 수치스러운 일로 포함하였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예수님께서는 결혼에 관한 신명기 말씀은 결혼의 원칙과 본질적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하십니다. 신명기 말씀이 초점을 맞춘 것은 애굽에서 죄에 물들은 채 광야에서 연단받던 시절 완악한 마음의 백성들이며 그로 인하여 버림받고 피해당하는 여자들 보호측면입니다. 완악함이란 부부가 이해와 긍휼이 사라지고 감정적이 되어서 적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400년 노예살이 하였던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아내를 대하며 큰 아픔을 주며 버렸습니다. 이로 인하여 심각한 2차 피해가 발생하였습니다. 모세가 이혼증서를 쓰게 한 것은 이혼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감정 때문에 버림받는 여자들의 큰 아픔을 막기 위하여 취해진 조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혼의 본질이 창세기 말씀에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6절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남자와 여자를 짝 지어주셨습니다. 결혼은 창조 시에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제도입니다. 결혼을 창설하시고 결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에는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과 은혜가 충만하게 녹아들어있는 것입니다.
7~9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 창설하신 결혼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은 비로소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통하여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한 몸되게 하셨습니다. 불완전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가 되며 결혼함으로써 부모를 떠나 자립합니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의 전인격적인 연합이며 사회적 자립입니다. 하나님께서 결혼을 이루신 것인데 결혼한 부부가 나뉘는 것은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11,1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따라서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한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는 것도 간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혼은 간음으로 연결됩니다. 당시는 남자들이 여자를 버렸고 아내가 남자를 버리는 일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내가 남편을 버리는 것을 말씀하신 것은 남편 빌립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이혼증서를 써주고 헤롯에게로 시집간 헤로디아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합당한 이유가 없음에도 개인의 야심과 탐욕으로 남편을 떠났으므로 이혼이 성립할 수 없는데,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으므로 헤로디아는 당연히 간음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이것을 분명히 지적하고 이로 인하여 순교하였다 하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관한여 조금도 물러서거나 주저함 없이 단호하십니다.
이혼을 합리화하고 이기심과 정욕으로 말미암는 이혼을 용인하고 있던 시대에 예수님께서는 창세기의 결혼관을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말씀을 기초로 가정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혼 할 수 있다’. ‘이혼해도 된다’는 시대에 예수님께서 ‘이혼할 수 없다!’ 분명히 하셨습니다. 옛날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서로 좋아서 결혼했지만, 살아보니 아내가 남편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아내에게 다정다감하게 대화 해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화가 났습니다. ‘나에게 다정하게 이야기 좀 해달라’ 남편은 집에 오면 말이 없고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였습니다. 화가 난 아내는 ‘이혼해요, 나 못살아요’ 이혼을 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화가 나 이혼 요구하는 정도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심각한 상황에서 남편이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이혼해주고 싶어도 못해줘, 예수님께서 이혼하지 말라고 하셨거든’ 시간이 흘러 아내는 감정적이 되어 이혼 거론한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힘든 시간, 자기의 펄펄 뛰는 이혼 요구에도 예수님 말씀을 제시하며 가정을 지킨 남편에게 감사하였습니다. 그 일이 너무 감사하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이 부부의 아들이 허이삭 목자님이라고 밝히기가 힘들지만 아무튼 우리 중에 있습니다. 우리센터 부부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 힘든 일 있더라도 예수님 말씀대로 예수님 말씀을 기억하며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2.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13-16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려왔다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이렇게 한 것에 대하여 분노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든다는 말은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는 가르쳐 주는 대로 배웁니 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는 자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어린 아이를 안으시고 저희에게 안수하시고 축복 하셨습니다. 지금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받들지 않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린 아이의 겸손하고 순수한 자세를 배워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다고 ‘우리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면 대권 잡을 사람들인데, 감히 아이들을 데리고 왔는가?’ 꾸짖고 아이들 가까이 오는 것을 막고 거절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바리새인 모습으로 흐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이혼을 용인하였던 사람들이 아이들 가까이 오는 것은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애들은 가라!’ 이혼은 절대 하지 말라 하신 예수님께서 아이들은 가까이 오게 하십니다.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사람들이야’ ‘우리는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사람들이야’ 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금하게 한 것은 제자들의 오만한 마음, 어긋난 영적 자부심입니다. 사람들에게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 자기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 자부하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는 사람, 자기는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자기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자부심에 가득한 사람은 예수님을 분노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께서 기뻐하고 안아주시는 사람을 배척하는 일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시고 안아주시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을 배척하지 않으려면 먼저 자기 자랑부터 그만 두어야 합니다. 오만한 자부심부터 내려 놓아야 합니다. 틈만 나면 드러내고 싶어하는 그 자랑을 버리고 흉내내는 겸손이 아닌 어린 아이같은 순수함, 어린아이의 그 수용성을 마음에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예수님 제자로 살 수 있습니다.
3.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1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한 사람이 달려와 꿇어 앉아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을 얻는 길에 대하여 이 사람은 대단히 진지하였습니다. 그의 자세는 딸이 죽어가니 살려달라고 나온 야이로가 생각나게 합니다. 그는 영생에 대하여 진심이었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비록 이 사람이 영생에 대하여 진심이었고 구하는 자세도 절실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영생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그는 영생을 두고 선함과 악함을 기준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한 사람은 영생에 도달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때 영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저변에 존재한 것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누구도 선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영생은 영생 얻을 자격 없는 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은혜로 내려주시는 선물입니다. 사람은 모두 악하여서 하나님께 영생 얻을 자격이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선하다 하는 것도 무엇을 알고 칭하는 것인지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계명을 통하여 인간은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계명을 지키고자 하면 할수록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의 사악함과 한계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런 노력이 오랫동안 쌓여서 자신 있게 이런 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습 니다. 그는 영원한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많은 수고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돈이 많았습니다. 그의 평안을 빼앗는 것은 많은 돈이었습니다. 이 많은 돈을 누가 빼앗아갈까봐 두려워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그의 마음이 많은 돈에 빼앗겨 있었습니다. 평안이 없었고 하늘의 위로가 없었고 가까이에 마음을 열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울에서 자산 500억 있으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부자’라 합니다. 아산, 천안에서는 100억있으면 부자라 할 것입니다. 강남에서는 1000억이 있어야 ‘부자’대열에 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강남 부자들은 절대 부자라는 사실을 숨기고 산다고 합니다. 자기가 부자인 것을 알면 그 돈 빼앗으러 올까봐 그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영혼을 사랑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예수님께서 그의 재산을 빼앗으려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많은 돈이 그의 마음을 잡고 있었고 많은 돈에게 영혼이 잡혀 있는 그가 참 자유 참 평안의 하나님 나라를 맛볼 수 있는 길은 하나 뿐이었습니다. 많은 돈으로부터 마음이 풀려나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켜 행하고 선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의 기쁨 대신 불안과 근심이 가득하고 영혼의 공허만이 더 커졌던 것은 돈에 마음이 빼앗긴 때문이었습니다. 도둑 들면 어쩌나, 혹시 가족이 아프면 어쩌나 공연한 근심, 알 수 없는 걱정, 일상적인 두려움이 그에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가 영생을 체험하고 얻을 수 있는 길을 주신 것입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는 영생에 대한 소원이 있었지만,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영생의 소원보다 물질 집착이 더 강했습니다. 물질욕은 그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님 말씀을 들을 수 없게 하였습니다. 돈에 대한 탐심이 그를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한 것 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도 순종하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부자들을 부러워하고 선망했습니다. 부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로 여겼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심히 어렵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유대인들은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하나님의 선물로 많은 부를 얻은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 확실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천국가기 어렵다니!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충격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율법까지 열심히 지켜 온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면 자기들 같이 허물 많고 가난하고 약점 많은 사람은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는가? 방금 돌아갔던 그 사람은 스스로 자신할 만큼 경건하게 살았는데도 못 들어간다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사람이 노력과 힘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무슨 수로 노력하고 애를 써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의 의에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 많은 아브라함을 구원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 다. 욕심 많은 야곱도 12지파를 세우는 영적인 믿음의 사람 이스라엘이 되게 하셨습 니다. 죄지은 다윗왕의 많은 죄를 사해주시고 그를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역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메시야의 그림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음을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생계수단을 두고 왔습니다. 아버지를 두고 왔고, 가족들을 두고 왔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은 사람들입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품꾼을 두고 일을 하는 집이었고, 마태는 벌어놓은 돈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함께 가난과 부족함을 맛보며 생활하였습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와 복음을 위해서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을 주십니다. 금세에서 백배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내세에는 영생을 얻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다만 버릴 때에 아픔이 따르며 핍박이 따르는 것을 각오하여야 합니다. 이때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자만심을 경계하여야 합니다. 과거의 결단과 희생, 과거의 실적과 성과에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을 받드는 어린아이의 특징은 끊임없이 배우고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는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모두가 이혼할 수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절대 이혼할 수 없다 하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린 아이를 무시하고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가볍게 여길 때, 우리는 어린 아이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훌륭하다고 하는 것의 허상에 현혹되지 말고 영생에 합당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계속 성장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속 새롭게 되고 변화를 이어가야 합니다. 사람 앞에 자부하지 말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라 자만할 때, 성장이 멈춥니다. 예수 안에서 지속적인 영적인 투쟁에 힘써야 합니다. 뭔가 이루었다고 생각하며 방심하다가 나중 되는 경우가 생깁니다. 예수님 안에서 지속 성장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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