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牧牛堂主(목우당주 )의 一代期(일대기)를 敍述(서술)하기 始作(시작)한지도 벌써 110회차에 이르른 날,
乙巳年(을사년)도 立秋節期日(입추절기일)을 맞음에 가을철로 접어 들고 있는 즈음이다.
公州 鳳凰山 修行(공주 봉황산 수행) 첫 靈驗(영험)과 같이
우선 大韓民國 名山(대한민국 명산)들을 두루두루 올라다니며 山神祭(산신제)를 올리게 되었을 적에
한울에서 天下事(천하사) 하는 朴 正熙 大統領(박 정희 대통령)과
三年(삼년)동안을 隨時(수시)로 對面(대면)하였고 個人的(개인적)인 請託(청탁)도 받았었다.
請託(청탁)이란 子女(자녀)들을 잘 보살펴 달라는 것이었다.
世運(세운)의 政治(정치)판으로 물들지 않게 指導(지도)해 달라는 뜻이었다.
하여 여름 날 하루는 박 근혜씨가 머물던 서울 舍宅(사택)에 찾아 간 일이 있다.
1980년대 後半期(후반기)로 記憶(기억)된다.
문지기가 約束(약속)을 하고 왔느냐 물어 아니라 對答(대답)하였더니
그러면 入宅(입택)이 不可(불가) 하다며 出入(출입)을 막았다.
待機(대기)하다가 되돌아 나오는데 여름철이라 門(문) 열어놓고 앉아 있던
巫堂(무당)집 法士(법사)가 벌떡 일어서며 '저 아무 것도 몰라요' 라고
큰 소리로 무엇을 크게 잘못한 듯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지나가려던 발길을 돌려 들어 갔더니
敬待(경대)하며 하는 말이 自己(자기)도 道 工夫(도 공부) 한다고
江原道 山川(강원도 산천)을 많이 다니면서 勞力(노력)을 하였지만
道人(도인)님께서는 어떻게 그렇게도 큰 工夫(공부)를 많이 하셨느냐 묻는 것이 아닌가?
朴 槿惠氏(박 근혜씨) 집 문지기는 門前迫對(문전박대)를 하였는데
神通(신통)한 法士(법사)는 敬對(경대)하여 맞이 한 것이다.
나는 여러번 이러한 경험을 한 바 있다.
淸州市內(청주시내)에 있는 무당집에 들어갔는데 무당이 점을 본다며
방울을 흔들다가는 그치고서 몸을 벌벌떨며 시험하시지 말라 부탁하는 것이 아닌가!
하루는 大川(대천)에 사는 後學(후학)이 있어 先塋山所(선영산소)를 보아 달라기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길가에 깃대가 꽂혀 있는 집을 지나쳤는데 갑자기 그 무당집이 끈이 이어져 되돌아가 들리게 되었는데
무당이 방 밖에 나아가 마당을 왔다 갔다만 하였다. 방안에 손님도 같이 있었다.
한참 뒤에야 들어와 먼저와 있는 손님에게 하는 말, 아까 큰 손님이 오신다 하지않았더냐? 라는 것이다.
내가 들어 올 것을 미리 알았고 내가 들어가자 도리어 방 밖으로 나가서는 한참을 들어오지 못했던 일이다.
또 부여 향촌에서 수차례 내왕했던 막내 동생 知人(지인)이
한 날은 자기 마을에 절 스님이 神通(신통)하여 자기 前生(전생)을 보아주었는데 단군시절에 장수였다고 하더란다.
그러면서 자기집에 가주기를 청하여 들렸을 적의 일이다.
한 마을의 그 신통한 중 절간에 들린 것이다. 나와 後學道伴(후학도반)들 몇 명이 방안으로 들었는데
그 신통한 중은 역시 밖으로 나가 제 방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 마당에서 빙빙돌다가 한참 뒤에서야 겨우 들어와서는 자기가 앉는 큰 황금 방석 제자리에 앉지 못하고는
큰 탁자 모서리에 앉아 모서리부분 탁자만 잡고 들석들석 움직이기만 했던 기억이다.
내가 들면 이렇게 어쩔 줄 몰라하는 무당이나 법사나 중들의 實話(실화)는
그 外(외)에도 이렇게 類似(유사)한 事例(사례)가 많아 모두 사례를 다 言及(언급)하기가 困亂(곤란)하다.
冊(책) 한권은 써야 한다.
時俗(시속)에서 賤視(천시)하는 巫人(무인)들은 牧牛堂主(목우당주)를 알아보는데
所謂 國家指導者(소위 국가지도자)라는 爲政者(위정자)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내게 來往(내왕)한 有名人事中(유명인사중)에
高位官職人(고위관직인)은 忠淸北道 檢査長(충청북도 검사장)이었다.
檢察改革 團長職銜(검찰개혁 단장직함)의 職務(직무)가 오히려 檢査長 職務(검사장직 직무)보다 더 많았던듯
나와 相面中(상면중)에도 관계되는 電話(전화)벨이 連續(연속) 울렸었다.
그가 牧牛堂(목우당)에 오던날 退勤時間(퇴근시간) 저녁 무렵인데 電話(전화)가 왔다.
道人宅(도인댁)이냐는 質問(질문)이었다.
道人(도인)은 아니고 修道子(수도자)라 答(답)하였더니 저녁식사 接待(대접)를 하겠단다.
하여 바쁜 職務(직무)에 外食(외식) 할 時間(시간)을 節約(절약) 할 兼(겸)
簡便(간편)하게 牧牛堂(목우당)으로 오라 하였더니 그렇게 來訪(내방)한 것이다.
牧牛堂母(목우당모)의 저녁식사 對接(대접)으로 함께 밥 먹으며 對談(대담)하게 되다.
내가 먼저 어렵게 牧牛堂(목우당)에 까지 來訪(내방)하게 된 目的(목적)을 말하다.
내방객에 對(대)하여 미리 알았고 '서울로 發令(발령)이 났을텐데
應(응)하는 것이 좋을지 應(응)하지 않는 것이 좋을지 그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니냐?' 물었더니 그러하단다.
그 當時(당시)에 檢察組織內(검찰조직내)에서는
가장 威勢堂堂(위세당당)했던 職銜(직함)이 中修部長(중수부장)이었다.
檢士(검사)로써 누구나 꿈꾸는 最高位職(최고위직)이었다.
나의 豫見(예견)이 正確(정확)했다. 그는 高位職 官爵人(고위직 관작인)이면서 修道人(수도인) 이었다.
아침에 起床(기상)하여 修行(수행)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電話 通話(전화 통화)만 해도 相對(상대)의 氣運(기운)을 感知(감지)하게 된다고 하였다.
氣功修道(기공수도)를 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고
本人(본인)에 대한 未來(미래)의 吉凶 如何(길흉 여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修道人 知人(수도인 지인)을 통해서 牧牛堂主(목우당주)를 알게 되었다며 나에게 電話(전화)해 온 것이다.
事實 本人(사실 본인)은 發令(발령)에 應(응)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지 않느냐 물으니 그러하단다.
나는 發令(발령)을 받아들여야 할 處地(처지)에 놓여있다 라고 判斷(판단)해 주었다.
그 理由(이유) 첫째는 夫人(부인)이 願(원)하고 있다 말하고 나서
지금까지 부인은 賢母良妻(현모양처)로써 남편 뜻 그대로 모두 받아들여
順從(순종)하고 지내왔던 循眞(순진)한 女性像(여성상)이었지만
이번만은 아니다 라고 말해주었더니 깜짝 놀란다.
그동안 부인은 내가 말한 그대로 順從派(순종파)이었던 것이 맞다며
집사람이 그런 마음일까 疑心(의심)이 든다 하였다.
서울로 가야 할 두 번째의 이유로 고향 집안에서 그렇게 해야 된다 願(원)하기 때문이라 말해주다.
出世(출세)의 길에서 下車(하차)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라 그 이유를 덧붙여 말하여 주었다.
셋째는 當時 大統領(당시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바라던 政策中(정책중)
하나의 目的(목적)이 간절하게 있었고 實現(실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아주 크기 때문이라 일러주었다.
그는 내가 말한 그대로 중수부장직에 올랐다.
故鄕(고향)이 全羅南道 江津(전라남도 강진)이기에 고향가는 길에 들리겠다는 電話(전화)도 있었다.
나는 四株(사주)쟁이가 아니었으나 來訪(내방)하는 人生相談 希望者(인생상담 희망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주보러는 오지 말라 일렀고
다만 道工夫(도공부)를 願(원)하여 내방하는 것은 크게 歡迎(환영)한다 말하였지만
그래도 다이어리 노트 17권 分量(분량)의 來訪客(내방객)이 있었다.
나는 公人(공인)으로 軍 將校出身(군 장교출신)이고 統計(통계)를 위함과
因緣子 記錄維持 次元(인연자 기록유지 차원)으로 래방객들의 四株(사주)를 풀어 記錄(기록)하였다.
그 중에서 幣帛(폐백)으로 50만원을 받은 것은 그때까지 처음이었다.
近來(근래)에는 100만원 封套(봉투)를 놓고 간 讀子 來訪客(독자 내방객)도 있기는 하다.
관심을 가지고 牧牛堂 援金(목우당 후원금)을 보내주는 讀子(독자)들에게
이 機會(기회)를 통해 感謝(감사)한 마음 다시 表(표)하는 바이다.
영어(English)
It has already been 110 days since I started writing the life story of the owner of the cattle herd. It is the beginning of autumn in the year of Eulsa, the beginning of autumn. As with my first spiritual experience during my ascetic training at Bonghwangsan Mountain in Gongju, I climbed many of Korea’s famous mountains to perform mountain god rituals. During that time, I frequently met with President Park Chung-hee, who was in charge of world affairs, for three years and even received a personal request. The request was to take good care of my children. It was meant to be a request for guidance so that it would not be tainted by the politics of Seun. So, one summer day, I visited the Seoul residence where Park Geun-hye was staying. I remember it was in the latter half of the 1980s. The gatekeeper asked if I had made a promise, and when I told him no, he denied me entry, saying that I would not be allowed in. After waiting for a while, I was coming back when the shaman of the shaman's house, who had been sitting with the door open because it was summer, suddenly stood up and said loudly, "I don't know anything!" as if he had done something terribly wrong! So I turned around and went in, and the shaman greeted me respectfully and said that he too had studied the Tao and had worked hard, traveling the mountains and rivers of Gangwon-do, but he asked me how I had managed to study so much. The gatekeeper of Park Geun-hye's house was rude to her, but the divine monk welcomed her with reverence. I've had this experience several times. I once entered a shaman's house in downtown Cheongju, and the shaman, shaking a bell to tell fortunes, stopped and trembled, begging me not to test her! One day, a junior student living in Daecheon asked me to look after the ancestral graves of Seonyeongsan Mountain. I was on my way back from there. I passed a house with a flagpole by the roadside, and suddenly, a rope pulled back from the shaman's house, and the shaman stepped outside, pacing back and forth in the yard. There were also guests in the room. He came in after a while and said to the guest who had arrived earlier, "Didn't you say a big guest was coming?" He knew I was coming, and when I entered, he went out of the room and didn't come back for a long time. Also, my youngest brother, an acquaintance who had visited the Buyeo countryside several times, told me that one day, a monk from a temple in his village had supernatural powers and could see his past life. He said he was a general during the Dangun era. He asked me to visit his house, and I visited. We ended up in the temple of a village monk with supernatural powers. I and several of my junior students entered the room, but the supernatural monk, unable to enter his room, wandered around the yard outside. He finally came in after a long time. However, unable to sit on his large golden cushion, he sat on the edge of a large table, holding onto the edge and moving around unsteadily. When I hear about these true stories of shamans, monks, and monks who are at a loss, there are so many similar cases that it is difficult to mention them all. A book would have to be written. The shamans who are looked down upon in the times recognize the shepherds, but the politicians who are the so-called national leaders do not recognize them at all. Among the famous people who came to visit me, the high-ranking official was the Chief Prosecutor of Chungcheongbuk-do Province. It seemed that the duties of the Chief Prosecutor of the Prosecution Reform Team were more numerous than those of the Chief Prosecutor, and the phone rang repeatedly during our meetings. On the day he was coming to the Mokwoo-dang, he got a phone call in the evening after work. The question was whether this was a Taoist's house. When he answered that he was not a Taoist but a monk, he said he would treat him to dinner. So, he told him to come to the Mokwoo-dang for convenience and to save time from eating out during his busy work schedule, and so he came. I was treated to dinner by the shepherd's mother and had a conversation while eating together. I first explained the purpose of my difficult visit to the shepherd's house. I knew in advance that I had been sent to Seoul, and asked, 'Should I comply or not? Isn't that why you came?' and she answered yes. At that time, the most prestigious title within the prosecution was that of Chief of the Central Investigation Department. It was the highest position that any prosecutor could dream of. My prediction was correct. He was both a high-ranking official and a practitioner of the Way. He said that because he lived his life waking up in the morning and practicing, he could sense the other person's energy just by talking on the phone. It seemed that he had practiced Qigong. However, since a monk cannot cut his own hair, he did not know what to do about his future fortune or misfortune, so he called me, saying that he had met the owner of a herd through a monk acquaintance. When I asked her if she actually had no intention of complying with the order, she said yes. She judged that she was in a position where she had to accept the order. The first reason was that her wife wanted it. After saying that she had been a good wife and wise mother until now, she had been an innocent woman who had accepted and obeyed her husband's every wish, but this time it was different. She was shocked. Meanwhile, my wife was indeed a follower, just as I had said, and I doubted if she felt the same way. I told her the second reason for moving to Seoul was because my hometown family wanted me to do so. I added that it was difficult to accept leaving the path to success. The third reason was because the then-president had a personal, fervent desire for a specific policy objective and a strong desire to realize it. He was appointed to the position of Director of the Central Investigation Department, just as I had said. Since my hometown is Gangjin, Jeollanam-do, I even received a phone call saying I would stop by on my way home. I wasn't a fortune teller, but many people came to see me for life counseling. Each time, I told them not to come for fortune telling, saying only that those who came to seek guidance from a Taoist priest were most welcome. But even so, I still had 17 diary notebooks' worth of visitors. I am a public official and a former military officer. For the purpose of statistics and to maintain a record of karmic relationships, I recorded the sajju (fortune-telling) of visitors. It was the first time I had ever received 500,000 won in gift money. Recently, there have been visitors who have left envelopes worth 1 million won. We would like to take this opportunity to once again express our gratitude to the readers who have shown interest and sent donations to the Mokwoodang.
일본어
牧牛堂主(牧牛党主)の一代期(一代記)を敍述(説明)する 始作(開始)もすでに110回目に達した日、乙巳年(乙巳年)も立秋節期日(入秋節期日)を迎えて秋に折りたたむ。 公州鳳凰山修行(王女鳳凰山修行) 初の靈驗(冒険)のようにまず、大韓民国名山(大韓民国名山)を振り回して山神祭(山神祭)を上げたことに、韓ウルで天下事(天下統領)大統領)と三年(三年)の間を隨時(随時)で対面(対面)し、個人的(個人的)の請託(請託)も受けた。 請託とは子女たちをよく見守ってほしいということだった。 世運の政治版で染まらないように指導してもらうという意味だった。夏の日は、朴槿恵氏が滞在したソウル舍宅に訪れたことがある。 1980年代後半期(後半期)で記憶(記憶)される。門番が約束をしてきたのか尋ねずに対答したら、入宅が不可だと出入を防いだ。 待機(待機)して戻ってくるのに夏場なので門戸開けて座っていた巫堂家屋 法士(法師)が立ち上がって「あの何も知らない」と大声で何を大きく間違ったように言うのではないか!して通り過ぎようとした足を回って入ったところ、敬大(敬大)して言う言葉が、自分も道工夫も勉強すると言って、多くの江原道山川(江原道山川)を通って勞力をしたが、道人はどうしたのかではないか? 朴槿惠氏(パク・グンヘ氏) 家の門番は門前迫對(文戦朴大)をしたが、神通(神通)した法士(法師)は敬対(敬大)して迎えたのだ。 私は何度もこの経験をしました。 淸州市內(清州市内)にあるてんとう屋に入ったが、てんとうが点を見ると鈴を振っていく途中で体を罰して試験してはいけないように頼むのではないか! 一日は大川(大川)に住む後学があり、先塋山所(線営酸素)を見て違うことに行ってくる道だった。道端に旗竿が並んでいる家を通り過ぎたが、突然そのてんとう屋がひもがつながって戻って聞こえるようになったが、てんとうが部屋の外に進んで庭を出て行った。部屋の中に客も一緒にいた。しばらく後ろに入って先に来ているお客さんに言う、さっき大きなお客さんが来てくれなかったのか?ということだ。私が入ってくるのを事前に知り、私が入るとすぐに部屋の外に出てはしばらく入ってこなかったことだ。 また扶余郷村で数回来王した末っ子弟知人(知人)がした日は、自分の村に寺僧が神通(神通)して自分の前生(転生)を見てくれたが、丹軍時代に長寿だったと言った。それとともに、自宅に行くことを聞いて聞いたことのあることだ。ある村のその厄介な中、節間に聞こえたのだ。私と後學道伴の数人が部屋の中で聞いたが、その痛みの中はやはり外に出て、私の部屋に入ることができず、外の庭で氷のような石が一瞬後ろにやっと入ってきて、自分が座る大きな黄金クッションの座席に座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いろいろな動きをしただけの記憶だ。 私が言うとこんなに仕方ない知り合いや法師や中々の實話(実話)は、その外にもこんなに似たような事例(事例)が多く、いずれも事例をすべて言及(言及)するのが困る。 冊(本)一冊は書かなければならない。 時俗(時速)で賤視(天視)する巫人(無人)たちは牧牛堂主(牧牛党主)を調べるのに所謂国家指導者(いわゆる国家指導者)という爲政者(委定者)は全く調べられない。私に來往した有名人事中(有名人事中)に、高位官職人(高位官職人)は忠淸北道檢査長(忠清北道検査長)だった。 檢察改革團長職銜(検察改革団長職)の職務(職務)が、むしろ檢査長職務(検査長職職務)よりも多かったように、私と相面中にも関係する電話(電話)ベルが連續(連続)鳴った。 彼が牧牛堂(木牛堂)に来た日、退勤時間(退勤時間)の夕方頃に電話(電話)が来た。 道人宅かという質問(質問)だった。 道人(道人)ではなく修道子(修道者)と答えたら夕食の接待(おもてなし)をする。として、忙しい職務(職務)に外食(外食)する時間(時間)を節約(節約)する兼(簡易)、簡便に牧牛堂(牧牛堂)に上がったので、そのように來訪(内方)したのだ。 牧牛堂母(牧牛堂母)の夕食對接(おもてなし)で一緒にご飯食べて対談(大談)することになる。 私が先に難しく牧牛堂にまで來訪になった目的(目的)を言う。来訪客に対してあらかじめ知り、「ソウルに發令が出たのに應するのがいいのか、應しないのが良いかそれのために来たのではないか?」尋ねたらそうだ。その當時(当時)に檢察組織內(検察組織内)では、最も威勢堂堂(威勢堂堂)だった職銜(役職)が中修部長(重水部長)だった。 檢士(検事)として誰もが夢見る最高位職(最高委職)だった。 私の豫見(予見)が正確(正確)だった。彼は高位職官爵人(高位職官作人)であり、修道人(水道人)だった。朝に起床(気象)して修行(遂行)をして暮らしたため、電話通話(電話通話)だけでも相対(相手)の气運(気運)を感知(感知)することになるとした。 气功修道(気功水道)をしたように見えた。 しかし、中が脱毛できないと本人(本人)に対する未來(未来)の吉凶如何(吉凶如何)については、どうすべきかわからない。 事實本人(事実本人)は、發令(発令)に應(ん)したい考えがあまりないのか尋ねるので、そうする。私は發令を受け入れなければならない處地に置かれていると判斷していた。 その理由(理由)まずは夫人(夫人)が願っていると言ってから、今まで夫人は賢母良妻(現模様処)として、夫の意味そのまますべて受け入れて順從(従順)して過ごしてきた純眞(純真)な女性像(女性像)だったが、今回はない。これまで奥さんは私が言った通り順從派(純宗派)だったのが正しいとし、家の人がそんな気持ちなのか疑問がある。 ソウルに行かなければならない二番目の理由で故郷の家でそうしなければならない願いだからだと言ってくれる。 出世の道で下車することを受け入れにくいからだから、その理由を付け加えて言ってくれた。 三つ目は、當時大統領(当時大統領)が個人的に望んでいた政策中(政策中)一つの目的(目的)が切実にあり、實現(実現)しようとする心が非常に大きいためだと言った。 彼は私が言ったように、中部長に上がった。 故鄕(故郷)が全羅南道江津(全羅南道江津)だから故郷への道に聞こえるという電話(電話)もあった。 私は四株争いではなかったが、來訪する人生相談希望者(人生相談希望者)が多くあった。そのたびに私は買って見に来てはいけなかったし、ただ道工夫(陶工部)を願って来訪することは大きく歓迎すると言ったが、それでも日記ノート17巻分量の來訪客(来訪客)があった。 私は公人(公認)で軍將校出身(軍将校出身)であり、統計(統計)のためと因緣子記錄維持次元(縁者記録維持次元)でラバン客の四株(社主)を解いて記錄(記録)した。その中で幣帛(廃白)で50万ウォンを受け取ったのはそれまで初めてだった。 近來(近年)には100万ウォンの封套(封筒)を置いて行った讀子來訪客(読者来訪客)もあるという。 関心を持って牧牛堂援金を送ってくれる讀子(読者)に、この機会を通じて感謝した感謝を表している。
[출처] # 牧牛堂主 一代記(목우당주 일대기)(110) The biography of Mokwoodangju|작성자 해인1691 HAE IN 169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