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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랑길(Haeparang Trail)
'떠오르는 해와 푸른 바다를 보면서
너와 내가 함께 걷는 길'이란 뜻으로
부산 오륙도 해맞이 공원에서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는
총 길이 770km의 걷기여행길이다
2010년 9월 15일에 문화체육관광부가
동해안 탐방로 이름으로
해파랑길을 선정하였으며
2016년 5월에 정식 개통하였다
벌써 한여름 같은 날씨이다
햇빛 쨍~~ 더울 것 같지만
바닷바람이 불어 줄거라 믿으면서
점점 아침이 빨라지는 계절에 해파랑길을 걸으러 간다
해안가를 걸으면서 다양한 풍경을 보게 되는 것과
산길을 걸으면서 느끼는 것과 각각 다르기에
오늘은 주로 산길을 걸으면서 그 느낌과
산속향기를 맘껏 담아 보리라
경정1리항에 도착하여
바닷바람 시원하게 마시고 시작한다
경정(景汀)리
경정리 동명의 유래는 긴 모래불이 있으므로 뱃불 또는 경정이라 하였다
경정1리인 뱃불 마을은 15세기 중엽(1449년경) 세종 연간에
영해박씨라는 이가 월부현(月浮峴)에 올라 지형을 살펴 본 다음
김해 김씨와 함께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경정2리인 수구너미 마을은 11세기 중기(1060년경) 영해부사(寧海府使)가 마을을 순시하던 중
말을 타고 재를 넘으면서 이 마을의 형국을 보고 우마차(牛馬車) 길마같이 생겼다고 하여
우차의 차(車)와 넘을 유(踰) 자를 따서 차유라 명명하였다고 한다
경정3리인 오매 마을은 16세기경 어느 지관(地官)이 와서 보고, 남쪽에 오두산(烏頭山)이 있고
마을 앞에는 매화산이 있으므로 오(烏) 자와 매(梅) 자를 따서 매화라고 하였으며
일설에는 까마귀가 열매를 물고 들어오는 형국이라 오매라고 하였다고도 하고
또 까마귀가 춤을 추고 들어오는 형국이라 하여 오무(烏舞)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경정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고곡리, 남은 영덕읍 석리, 북은 축산리와 접하고 있다
접시꽃
차유마을과 경정마을사이의 해안에는
약 1억년 된 백악기의 이암과 사암이 파식대지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이곳에서 붉은 이암이 동해바다 앞에 펼쳐진 흔하지 않은 풍경을 볼 수 있다
차유마을쪽에는 붉은 이암이 관찰되고
경정 마을쪽에는 붉은 이암과 흰 사암이 함께 펼쳐진다고 한다
경정리 지질공원
경정리 해안
영덕 경정리에는 해안을 따라 붉은 지층이 넓게 분포한다
해안으로 내려가 자세히 보면 붉은색 바위 지층은 입자가 고운 이암이다
이암사이에는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밝은색의 사암이 들어 있다
이 지층은 공룡이 번성하던 중생대 백악기에 강 주변의 범람원에서 형성되었다
지질학자들은 이 지층을 가송동층이라 부른다
가송동층의 이암과 사암에서는 층리,사층리,하도구조,점이층리 등
여러가지 퇴적 구조물도 함께 관찰된다
이암과 사암 사이에는 수직으로 작은 원기둥 모양의 구조가 있다
이는 퇴적될 당시 갯지렁이나 게와 같은 해양 생물들이 남긴
구멍에 퇴적물이 채워진 것이다 이를 서관구조라 한다
서관구조는 생물의 활동 흔적이 남아 있는 생흔화석이다
밝은색을 띠는 암석은 대부분 사암이지만
일부는 자갈을 포함하는 역암이다
밝은색 암석은 옆으로 가면서 층의 두께가 점차 얇아지다가 사라지기도 하는데
범람원 사이를 흐르던 하천의 모양을 나타낸다 이를 하도구조라한다
경정리 백악기 퇴적암
차유마을과 경정마을 일대에는 백악기에 퇴적된
백색 사암(1/16~2mm 크기의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암석)과
붉은색 이암(1/16mm 보다 작은 크기의 진흙이 쌓여 만들어진 암석)이 분포하고 있다
이 층은 퇴적암층의 일부로 하도구조, 서관구조, 점이층리 등
여러 퇴적구조들도 함께 관찰된다
차유마을쪽에서는 과거 강이 흘렀던 흔적인 하도구조와
과거 생물이 굴을 판 흔적인 서관구조,두 방향의 절리가 직각으로 만나
만들어진 직각절리조가 관찰된다
경정마을쪽으로 내려오면 이암과 사암이 서로 반복되는 층리가 뚜렷하게 나타나고
사암 내에서는 입자의 크기가 위로 가면서 작아지는 점이층리도 관찰할 수 있다
지난번 코스때 많이 봤었던 모래지치가 거의 시들고 있다
경정2리항(차유항) 방파제
절벽위에 피어있는 갯부추
땅채송화
경정2리항(자유항)
멀리 죽도산 전망대가 보인다
용도는....???
데크계단으로 오른다
비닷바람 솔솔 불어오는
산길이 이쁘다
선씀바귀&기린초
다 져 버린 기린초
해국 두송이가 섣불리 피어있다
내려서니
헉~~~!!!
암벽을 타고 있다
보기만해도 아찔~~
뒤돌아 보고
축산해수욕장
축산(丑山)리
축산리 동명의 유래는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경덕왕 14년(755년) 당나라 현종 연간에
김충(金忠)이란 안렴사가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던 도중 태풍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이곳 축산에 표착한 다음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南)씨로 사성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을 영양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남씨 시조가 되었으며 뒤에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관되었다고 한다
축산2리인 염장(鹽場) 마을은 약 2백여 년 전 해일로 염수가 스며들어 붙여진 이름이다
축산3리는 죽도산 밑으로 약 3백 년 전 오씨가 개척하여 추씨와 함께 대나무를 심고
죽산동이라 했다고 하며, 일명 신기마을이라고도 한다
축산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도곡리, 상원리, 남은 경정리, 북은 영해면 사진리와 접하고 있다
축산해수욕장 백사장을 걷지 않고
시포트리조트 앞을 걸으니
조형물들을 이쁘게 해 놓았다
에구 귀여운 아이들~~~
축산천 기수역 끝 지점에 있는 현수교
잔잔하면서 깨끗한 축산해수욕장
죽도산 퇴적암
죽도산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육지와 동떨어져 있는 섬이었으며
섬이 거의 발달하지 않는 동해안에서 특별한 의미였다
이런 죽도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모래 둔덕이 점점 쌓이면서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육지와 모래로 이어진 섬)가 되었다
특히 강 하구의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육계사주(육지와 육계도를 잇는 모래 둔덕)는
우리나라에서 흔하지 않은 지형으로 비록 일제의 매립공사에 의해
원형이 일부 파괴 되었으나 생성 당시의 전체적인 형태는 보존되어 있다
죽도산은 과거(약 1억 년 전)의 모래와 진흙, 자갈로 만들어진 암석으로 되어 있어
퇴적암(암석 또는 생물 조각이 쌓여 눌리고 다져져 만들어진 암석)과의 관련이 매우 깊은 곳이다
죽도산 둘레를 따라 이어진 해안산책로에는 퇴적암 해안이 잘 발달 해 있고
해안산책로 앞 강 하구에서는 강물을 타고 내려 온 모래와 자갈이 펼쳐져 있다
따라서 퇴적암의 시작인 모래, 자갈에서부터 온전한 퇴적암, 시간이 지나 깎여 나가거나
갈라져 나가는 퇴적암까지 다양한 퇴적암의 양상을 관찰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지나온 길 내려다 보고
데크로 이어지는 길따라~~
축산항 방파제랑 빨강등대가 보인다
죽도산 전망대를 올려다 보고
돌(땅)가시나무
벌노랑이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카페 청로
송엽국
선인장
난쟁이아욱
언젠가 고향에서 만난 아이
또 만나게 되니 반가움~~
축산항(丑山港)
축산항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있는 항구로
영덕의 대표적인 어항(漁港)이다
가자미,문어,오징어를 비롯해
근처의 강구항과 마찬가지로 대게로 유명하며
대게 위판이 열리는 전국 5개항 중 한 곳이다
대게원조마을로 알려진 차유마을과도 가깝다
와우산이 북풍을 막고 대소산이 서풍을, 죽도산이 남풍을 막아
예전부터 최고의 피항지로 이름 높았다
현재는 ‘축산항 푸른 바다마을’이라 불리며 관광항구로 조성되고 있다
강구항과 축산항을 잇는 26km 구간의 아름다운 해안 도로인
강축도로(918번 지방도로)로 인해 관광객이 증가하였다
22코스 시작 스탬프 찍는 곳은
축산항 버스정류장과 축산택시 사이에 꼭꼭 숨겨져 있다
보기만해도 답답하게만 보인다
이곳에 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축산(丑山)리
축산리 동명의 유래는 지형이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축산1리는 경덕왕 14년(755년) 당나라 현종 연간에 김충(金忠)이란 안렴사가
일본 사신으로 다녀오던 도중 태풍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이곳 축산에 표착한 다음
신라에 살기로 청원하자 경덕왕이 남쪽에서 왔다 하여 남(南)씨로 사성하고
시호를 영의(英毅)라 내리고 식읍을 영양으로 정하였다
이로써 남씨 시조가 되었으며 뒤에 영양, 의령, 고성으로 분관 되었다고 한다
대소산으로 오른다
통사동(通使洞) 표석은
비각이 있던 자리로 서쪽 망령(望嶺)아래 남쪽 기슭이다
이곳은 영의공이 처음 살았던 이부동(吏部洞)과 함께
역시 공이 살았던 곳으로 1850년 이곳 벼랑에 통사동(通使洞)이란
동명(洞名) 석자가 새겨졌다고 한다
금계국과 코스모스
딸이 선물로 준......
축산항이 내려다 보이는 팔각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다
보트쇼를 하는 것처럼 멋지다
시조 영의공 유허비(遺墟碑)
월영대(月影臺) 아래 바다에 임한 곳 반석(般石) 위에 영의공을 기리기 위해
1798년에 최초 건립하였다가 1973년에 현 위치에 국한문 혼용으로 다시 옮겨 세웠고
그간 구비(舊碑)가 기울고 신비 좌대의 균열과 철책의 부식 등으로 2013년에
새로 중수하였다고 적고 있다
당(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으로 사신을 떠난 김충(金忠)을 배행한 장자 김석중(金錫中)은
신라 경덕왕 때 신라로 귀화한 김충이 남민(南敏)으로 성과 이름을 하사받기 이전에 이미
출생해 있었으므로 본래의 성씨인 김(金)를 써서 영양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래서 영양김씨와 의령남씨는 성씨는 다르나 시조는 남민[김충]으로 동계 혈족이다
중앙에는 한글로 '당안렴사김공충유허'비석이 서 있고 그 좌측에 '唐按廉使金公忠遺墟'가
우측에 '僕射英陽金公錫中遺墟碑'가 자리하고 있어서 영의공과 그의 장자 유허비각이다
산바람 바닷바람이
산길과 함께 어우러지니 걷기에 참 좋다
솔나물
톱풀
뒤돌아보고
영해면 사진리(絲津)리
동명의 유래는 나루가 실(悉)과 같이 길게 뻗어있다 하여 실나리라 하였는데
변하여 시나리 또는 사진이라 하였다
현재 행정동으로 사진 1, 2, 3리로 분동 되어 있다
사진1리인 '밭내미'는 걸리동(傑里洞)이라 불리다가
밭이 많다고 하여 ‘밭내미’라 불렸다
사진2리는 '시나리' 마을이다
사진3리인 '마흘발'은 뒤에 봉화산이 있어 공수진, 대진, 건달리, 밭내미, 시나리와 함께
6진(津) 중의 하나로 14세기 말 고려 유신의 후예인 배씨와 김씨가 은신하기 위해
이 마을에 정착하여 마흘발이라 했다 한다
사진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성내리, 남은 축산면 축산리와 면계를 이루고
북은 대진리, 괴시리가 있다
갯메꽃
멋진 소나무숲길을 빠져 나오니
대소산봉수대 오르는 길이 보인다
기린초
대소산 봉수대(盈德 大所山 烽燧臺: 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
이 봉수대는 조선 초기의 것으로
남쪽으로는 영덕 축산포 방면의 변경 동태를
서울 남산까지 알리던 통신시설이다
직경 20m 넓이의 둘레에 방어벽을 쌓고
그 안에 원추 모양의 직경 11m, 높이 2.5m의 봉돈(烽燉)을 쌓았다
이곳은 남쪽으로 별반산 봉수대, 북쪽으로 평해의 후리산 봉수대
서쪽으로는 광산 봉수대를 거쳐 진보의 남각산 봉수대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벌노랑이가 이쁘게 길을 열어준다
지난번에 지나 왔었던 풍력발전단지
봉수대를 한바퀴 휘리릭 돌고
한번 더 올려다 보고 내려간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주니 너무 고맙다
체육시설과 평상 쉼터가 있는 곳에서
누워 하늘을 보니 소나무가 멋지다
망월정
목은이색 등산로 방향으로 내려간다
가다가 오른쪽 돌탑이 보여서 가 보니 하늘이 넘 이쁘다
다시 내려서니 오른쪽 데크길이 보인다
오르락 내리락 해파랑길이 아니라 완전 산파랑길이다
사진구름다리를 건넌다
우측 사진 2리(시나리) 마을에서
좌측 괴시리 전통마을로 넘어가는
괴시사진길 위를 가로 지르는 사진구름다리다
초록세상~~
때묻지 않은 오지처럼...... 이런 길이 참 좋다
대소산봉수대가 보인다
노루발풀
목은 기념관 앞에 산딸나무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2006년에 개관한 목은 기념관
좌측에는 목은 선생의 좌상이 자리하고
우측에는 목은 이색 생가지(무가정지)와 만서헌이 복원되어 있다
무가정(無價亭, 務稼亭으로도 불림)
목은 이색이 1328년(고려 충숙왕 15)에 태어난 외가의 사랑채 건물이다
마을 입구에 서 있는 유허비로부터 마을 중심부를 지나
망일봉으로 약 500m 올라간 자리에 외조부 김택이 살았고
목은이 태어난 생가터가 남아 있으며
본채는 없어지고 사방 반듯한 모습의 집터만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옆에 사랑채인 무가정이 1979년에 중건 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마루형 팔작 기와지붕인
이 무가정은 현재 기둥만 제대로 서 있을 뿐 기와는 무너지고
벽과 바닥은 대부분 무너져 있다
그마저도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바로 코앞에 다가설 때까지
건물이 그곳에 있는지조차 알기 힘든 지경이었다고 하며
무가정으로 접근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마을 중심부를 지난 뒤 다시 2~300m를 올라가는 길이 있지만
늪지로 변해 있어서 사실상 접근하기 불가능하다[2001년도 목은 선생 생가지 일대 문화유적 지표 조사]
이에 영덕군에서는 괴시마을을 전통마을로 조성하는 한편
목은 생가지의 복원을 추진하여 현재 무가정지를 말끔하게 정비하여 놓았다고 한다
꿀풀
괴시리전통마을로 들어선다
우단동자
꽃양귀비
괴시리전통마을 규모가 제법 크다
다 둘러 볼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듯....
다른 사람들은 벌써 하산 마무리를 하고
뒷풀이를 하고 있겠기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둘러 보기로 하고
서둘러 산악회 버스 있는 곳으로 간다
영해면 괴시리(槐市里)
괴시리는 동해로 흐르는 송내(松川)의 주변 마을로 넓은 평야를 이루고 있다
마을 북쪽으로는 호지(濠池, 水路)가 발달하여 있어 호지촌이라 부르다가
목은 이색(李穡)이 원나라에 유학할 당시 대학자였던 구양현의 고향인
괴시처럼 시야가 넓고 풍광이 아름답다 해서 괴시(槐市)로 개명했다 한다
선생의 외조모가 지금 괴시마을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영양남씨다
괴시1리인 호지촌은 고려 말(1260년 경) 함창 김씨(목은 선생의 외가이며 외조모는 영양 남씨)가
처음 입주한 이래 조선 명종(1545~1567) 연간에는 수안 김씨, 영해 신씨 등이 거주하다가
인조 8년(1630년)부터 영양 남씨가 처음 정착하고 그 후 타성은 점차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조선 중기 이후부터는 영양 남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문벌을 형성하였다
괴시2리인 관어대(觀魚臺)는 16세기 초 중종 연간에 안동권씨가 입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는데
관어대란 이름은 목은 이색이 명명했다고 한다
괴시3리인 교동(校洞) 마을은 17세기 윤씨가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괴시리의 위치는 동은 망월봉(望月峰)과 대진리와 연해 있고
남,서는 성내리,벌영리와 접하고 북은 연평리가 있다
보호수인 수령 400년 된 팽나무 서낭
둘러보지 못한 곳은 사진으로 남기고
도착하니 뒷풀이가 거의 끝나간다
맥주 한잔 시원하게 마시고
뒷풀이 정리를 하고
오늘도 무사히 잘 걸었음에 감사함을 안고
버스에 오른다
함께 걸으신 모든 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2023. 6. 4(일)
첫댓글 늘 변화없는 멋진 후기를 재탕에 숙독까지하고 있습니다
점식하면서 샘터님이 지날갈 시간이 되어서
계속 힐끗 힐끗 쳐다보았는데~~끝네
만날수 없는 수평선이네요
햇살이 따가워서 사진이 더욱 멋지네요
즐감하였습니디
멋져요^^
대단하십니다~~
구석구석 좋은 풍경들……
너무나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