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번역 >
냐나띨로까 스님의 생애 (5)
번역 / 김재성
능인대학교 대학원 대학교 명상심리학과 조교수
Nyanatiloka 스님(1878~1957)은 현대 세계에서 불교의 선구자 중 한 사람이자 최초의 유럽대륙 출신의 불교 승려였다. 본명은 안톤(Anton Walther Florus Gueth)이며, 음악을 전공하던 소년 시절부터 영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프랑스에서 작곡가가 되기 위한 공부를 마친 후, 1902년에 불교 승려가 되기 위해 인도를 거쳐 스리랑카로 가게 되었다. 25세가 되던 1903년, 스리랑카에 도착했지만 영국인 불교 승려인 아난다 메떼야 비구를 만나가 위해 버마(미얀마)로 가서 그해 가을 출가하여 사미가 되었다. 그리고 1904년 초에 비구계를 받았고 법명을 ‘삼계(三界)를 아는 자’라는 의미의 냐나띨로까Nyanatiloka로 받았다. 버마에서 빨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빨리어와 빨리 문헌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 위해서 1905년에 스리랑카로 갔다. 2년 가까이 스리랑카에 머물면서 빨리어 공부와 부정관, 죽음명상을 수행했다. 1906년 말에 앙굿따라 니까야의 번역을 위해서 버마로 가게된다. 그리고 1906년에 첫 번째 저작인 <붓다의 말씀>을 독일어로 출판하였다. 1907년에 빨리어로 버마 사람들에게 사성제를 법문했고, 버마어와 빨리어에 능통한 통역자가 버마말로 통역하였다. 이후,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등지를 다니며 불교를 전하였고, 1911년에 스리랑카로 돌아와서 도단두와의 호수 한가운데 있는 버려진 섬에 Island Hermitage를 만들어 지내게 된다. 이후 이곳을 중심을 스님은 많은 서양인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 책은 원래 스리랑카 캔디에 있는 ‘불자출판협회-Buddhist Publication Society Inc. 에서 출판되었다. 그런데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의 출판물에 대한 모든 책의 한국어 출판권은 ‘고요한 소리’에 있다. 본지는 ‘고요한소리’와 한국어 번역에 대한 저작권 계약을 맺었는데 ‘고요한 소리’ 회주 활성 스님께서는 무료로 계약을 해 주셨다.
서양인으로 120년 전인 1903년에 출가하였지만 냐나띨로까 스님은 세계 1차 대전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단지 독일 출신이라는 이유로 영국정부에 의해서 스리랑카에서 추방되기도 하고, 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때에도 그는 경전 번역을 했다고 한다. 서양인 스님으로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 유럽과 스리랑카와 미얀마 등에서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수행과 경전 번역을 하고, 제자들을 길러낸 감동적인 내용이 가득한 이 책을 독자들의 많은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주
1부 독일의 불교
발터 페르시안, 1931년 (3)
불행히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베를린 불교원(Buddhist House)의 설립자인 고(故) 달케 박사의 저술들은 불교에 대한 최고의 학술적이며 정통적인 연구성과라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 저술들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지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장 저명한 출판물이기도 하다. 단순한 철학자나 해석가가 아니라 불교도라고 주장하는 달케는 처음부터 붓다의 가르침에는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사색이 없음을 단호히 주장한다.
달케에게 붓다의 가르침은 순수한 개인주의이다. 달케의 출발점은 세계관('Weltanschauung')으로 간주되는 불교이다. 그의 작업의 목적은 믿음과 과학의 중간인 "황금 중도" 위에서 붓다의 가르침이 만족스럽고 논리적이며 현명한 세계관을 제공함을 증명하는 것이며, 그 근원으로 부터 진정한 도덕과 윤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 증거는 달케의 공로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로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유명한 베를린 불교원의 설립자였으며 그의 작업을 완성하고 보호하기 위해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모든 건강과 부를 희생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1923년에서 27년 사이의 가장 어려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의 작업에 자금을 조달한다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의사로서 하루 종일 일했다.
불교원은 언덕에 서 있다. 두 마리의 작은 코끼리가 떠 받치고 있는 인도 장식품으로 장식된 대들보가 있는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서면. "여덟 단계의 길"이 있다. 성스러운 8단계(팔정도)를 상징하는 8 단계의 돌계단(총73개의 계단)이 언덕 정상까지 이어진다.
본관에서는 달케 박사가 동종요법을 수행했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 거주하는 집 옆에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서관이 있었다. 1층에서는 틈새의 여명으로 신비롭게 반짝거리는 스리랑카의 칼라웨와에서 모셔온 불상을 보면 사람들은 압도된다. 넓은 본관 뒤에는 사원이 우뚝 솟아 있고, 홀 주위에 세로로 늘어선 채광창으로 둘러싸인 두 개의 지붕은 서로 지탱하고 있으며, 극동지역의 종교 건축의 특징인 상향 곡선을 보여준다. 벽에는 오직 하나의 문이 있다. 채광창 외에 다른 창은 없다. 내부는 채색된 모자이크 바닥과 황토색 사암 벽으로 된 작은 방들이 있다. 전면에는 소박하지만 가치가 있어 보이는 홀에는 꽃으로 장식된 부조 불상이 있고 양쪽에는 법구경과 다른 경전의 말씀이 적힌 금빛 돌판이 있다. 오늘날에도 여기에서 포살일에 법회를 연다. 그러나 외부인은 달케가 그의 스승인 붓다의 가르침을 설명할 때 그 엄숙함을 거의 상상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사원에서 신도들과 방문객들을 강단 앞까지 인도했는데, 지평선 저 멀리에서 막 떠오르는 보름달이 나타났다. 이곳에서는 다른 건축 작품도 볼 수 있다. 스리랑카 양식의 건축인, 두 개의 추가적인 입구인, "귀의의 문Door of Refuge"과 "법륜의 문Door of the Wheel"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은 건물들과 조용히 숲 속에 숨어 있는 개인용 숙소를 볼 수 있다.
같은 도시 베를린에는 10년 넘게 또 다른 불교모임이 있었다. 마틴 슈타인케Martin Steinke(비구 타오 춘Tao-Chun)을 지도자로 하는 "붓다를 둘러싼 공동체"입니다. 보름날에는 정기적으로 강의와 토론을 하고 있다. 한달에 두 차례 <붓다의 길과 불교도> Der Buddhaweg und Wir Buddhaen을 발행한다. 이 모임의 사람들은 모두 진정한 불교도이며 어떤 형태의 종교적 혼합 또는 외부 교리나 정치와의 연결을 용납하지 않으며, 오직 붓다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여 붓다가 가르친 목적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그러한 다른 종교의 전도와 같지 않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이른바 전법이나 포교활동도 하지 않는다. 불교 사상이 독일에서 호의를 얻고 퍼졌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불교 문헌, 특히 지칠 줄 모르는 불교학자들의 저술과 번역 덕분이었다.
뮌헨에 자리를 잡은 또 다른 불교모임인 "Loge zu den drei Juwelen"(삼보의 집)이 있다. 이 단체에서는 회원들에게 일상생활에서 준수해야 할 불교의 윤리적 원칙을 지키라고 한다. 이 단체의 창시자이자 지도자는 유명한 책 <붓다의 가르침, 이성의 종교> The Doctrine of the Buddha, Religion of Reason의 저자인 게오르그 그림 Georg Grimm 박사이다.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작가가 불교와 서양철학의 절충을 시도함과 동시에 일관되고 절대적 헌신으로, 유일하고 완전한 절대 진리로서 불교의 해탈의 진리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쇼펜하우어, 니체, 하르트만과 같은 철학자들과 음악가인 리차드 바그너가 불교의 진리를 소개한 전조가 된 반면, 막스 뮬러, 올덴베르히, 칼 유겐 노이만, 냐나띨로까 테라, 카리 자이덴 스튀커, 폴 달케, 막스 와레저와 같은 학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근본에서부터 불교를 파고 들었다. 그리고 폴 달케, 쿨트 피셔, 게오르그 그림 및 기타 많은 해석자들은 서양 사상가들의 입장에 따라 해석했다. 마지막이면서도 중요한 사람들은 (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칼 제레룹 Karl Gjellerup(Pilgrim Kamanita 등 저술)와 같은 시인들과 많은 사람들은 모든 계층의 독일인에게 불교사상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독일에 어떤 불교협회나 모임에 참여하기를 원하지 않는 많은 성실한 불교도들이 있음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의 진정한 제자처럼, 모든 모임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독일에서 스승이 선포한 더 고귀한 삶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사례는 1928년 7월 6일자 함브르크 공보에 "초원의 붓다Buddha in the Heath"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고되어 있다. “루도빅 스퇼이라는 사람이 31세에 고향인 실레시아를 떠나 뤼네부르크의 초원(함부르크 근처)으로 이주했다. 퇴핑겐 근처, 솔타우 지역에서 그는 자신을 위해 작은 오두막을 짓고 가장 원시적인 방식으로 꾸민 다음, 작은 벽난로를 만들고 테이블, 의자 및 다루기 힘든 침상을 만들었다. 칠판에는 칼 유겐 노이만의 대표 번역인 고타마 붓다의 대화(The Dialogues of Gotamo Buddha) 5권이 놓여 있다. 이것들은 그의 영적 도구이다. 이 은둔자는 추수기에 히스 지역 농부들과 함께 일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처음에 그 히스 거주자들은 이 과묵한 사람을 불신하였다. 사실, 그의 손은 거칠고 단단하고, 그의 얼굴은 열려 있고 강인했지만, 이 흰색의 뒤로 구부러진 이마를 가진 이 남자에 대해 어떤 수수께끼가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쁜 농민들은 오직 하나만이 생각했다. 즉 일이었다. 그리고 루도빅 스퇼은 자신이 일하는 사람임을 보여주었다. 그는 현금이 아니라 빵 한 덩이나 우유 한 병을 위해 일하고, 건초를 뒤집고, 밀짚 단을 들어 올리거나, 감자를 실어 날랐다. 그를 인간 사회로 데려간 것은 음식과 음료가 필요할 때 뿐이었다. 그 외 시간에 그는 홀로 앉아서 자신이 따랐던 위대한 인도 현자의 목소리를 듣곤 했다. 작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에 매료된 낯선 사람이 예기치 않게 그의 오두막에 들어갈 때마다, 그를 환영하는 쾌활하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을 발견했다. 루도빅 스퇼은 소작농의 상속인이었고, 군 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후 과부였던 어머니가 재혼한 것을 발견하고, 그의 계부가 농장 상속인이었던 그를 떠나게 할 계책이 있었다. 그 때 이미 그는 붓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집과 가정을 떠나 고요한 고독속으로 들어가 고요한 넓은 초원을 거처로 삼았다. 이제 얼마 전에 이 작은 붓다가 운명을 달리했다. 한 농부가 그가 가부좌를 하고 오두막 앞에 생명 없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따라서 이 사람은 기독교인의 미신과 성경과 신도 없고, 혹독한 겨울 밤 동안 그의 오두막을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평생을 고독하게 보냈다. 그는 수천 마일 떨어진 불교도들이 한 명의 거룩한 제자라고 부를지도 모르며, 실제로 그들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이제 독일의 불교가 대중의 사상에 침투하여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노이만은 디가 니까야 번역 편집자는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마치 기독교에 대해서 그랬던 것처럼, 더 이상 누구도 불교 교리를 아시아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그리스도는 공간적으로는 더 가까웠지만 유럽땅에 발을 디딘 적이 없었다. 그의 가르침의 보편적으로 유효했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모든 유럽 국가가 그리스도께서 마치 자기 나라 사람인 것처럼 말하였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으면, 붓다도 독일인들에게 독일어를 말하는 분으로 생각될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낯선, 인도라는 외부 세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주변보다 더 동양적으로 보이지 않을 것이며, 후자보다 더 친숙해지거나 심지어 더 이상 특별하게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직 붓다의 우화와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은 조형예술은 인도적 양식 없이 그것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래된 인도풍 복사본의 형태가 아니라, 그러나 내부에서 잉태된 상당히 독립적이고 독창적인 형태로 붓다는 유럽 예술의 모델이 될 것이다.
서양의 법률과 관습에 대한 붓다의 영향력은 불교 사상이 여러 세대에 스며들어, 적대적인 책들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서양의 자산이 될 때까지 끝없이 논의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