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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일
"짤랑 쩔렁 워낭 소리를 내며 소는 열심이 덤불을
헤치며 풀이며 잎사귀를 뜯어 먹었다. 나는 이제
조금씩 겁이 옅어져서 소를 좀 더
머리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
자주 못 가는 고국이고 고향이지만 정작 가더라도 하루 저녁 이상은 나이 드신 부모님 냄새가 서린 방에서 자눕지를 못해 왔는데 이번에는 한 사흘을 묵을 여유가 있었다. 마침 부산에서 형님이 손수 차를 몰고 올라와 형제끼리 오랜만에 부모님 두 분이 사시는 집에서 이렁저렁 시간을 보내며 날을 잡아 한 나절 이곳저곳을 함께 다녀 볼 기회가 있었다.
타국 땅에서 자주 향수에 젖었을 동생을 배려함인지 형님은 어릴 때 해수욕하던 바닷가인 봉림불에 가 볼래? 외가 동네에 가 볼래? 아버지 교편 잡으시던 청라 구경 한 번 안 할래 하며 완전히 운전기사로 봉사할 태세였다. 그 까마득하게 멀게만 느껴지던 여러 곳을 하루 만에 한꺼번에 어떻게 다 돌고 오노? 하면서도 그냥 따라나섰는데 정말이지 그 긴 세월이 한 가닥으로 엮어져 왔던 모든 장면의 언저리를 잘 닦인 포장도로를 따라 차를 타고 휭 돌아 보니 정말이지 너무나도 작은 세상일 뿐이었다. 오십 년간 가슴과 머릿속에 간직했던 세계가 디즈니랜드 한 모퉁이는 아닐진대 실제로 다녀 보니 그야말로 스몰 월드, 한 나절 주행거리였던 것이다. 어린 다리로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타박타박 걷던 까마득한 자갈길이 이제는 흔해진 육기통짜리 승용차로는 제대로 엔진이 데워질 틈도 없이 다시 시동을 끄고 내려야 하는 차라리 아쉬운 거리였던 셈이다.
어쨌든 바닷가를 돌고 엿재를 넘어 청라에 갔다가 어느 길인지도 모르겠는데 산모롱이를 돌고 돌아 점심때를 지나 외갓집이 있는 동네에 들렀다. 바로 외가 집앞에 차를 대고 열려진 대문으로 들어가니 적적한 게 인기척이 없었다. 뒤안까지 돌아보았으나 아무도 없어 다시 동네 공터로 나오니 나이든 어른 몇이 그늘에 평상을 펴고 멀뚱히 앉아 있다. 외삼촌에 대해 물으니 이미 우리가 누군지 짐작한 듯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보다가 이르기를 그 집 내외는 오늘 모두 우리가 떠나온 풍해 읍으로 거꾸로 볼일 보러 내려갔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웬만한 남의 일일지라도 행선지까지 서로 훤히 꿰뚫고 있는 셈이다.
- 시간이 좀 남는데…, 니 터일 가 볼래?
형님이 물었다.
- 음…, 그라지머!
온 지 하룻밤 밖에 안 됐는데 어릴 때 이 동네에서 놀 때 쓰던 고향 사투리에 완벽하게 부팅이 되어 언어 프로그램이 자연스레 돌아갔다. 나는 하나도 안 변한 채 옛 소리를 재생해 내는데 평상에 앉아 우리를 지켜보면서 우리 이야기를 듣고는 한 마디씩 내뱉는 저 노인들의 말투가 오히려 좀 변한 것 같다
- 그런데 터일에도 차가 드가나?
- 야가 머라카노! 그런데 동네 거진 다 없아졌다.
- 와?
- 땜 막아 수몰 댔다 아이가. 일부는 우로 옮기고.
나는 오늘도 상서이하고 있었다. 참, 여기서 몇 가지 설명을 먼저 해야 이 모든 무대 상황의 줄거리가 감이 잡히실 건데 실은 설명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번거롭게 다 할 수는 없고 꼭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할 테니 그리 아시고….
어쨌든 상서이는 내가 우리 동네 국민학교 분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부터 늘 함께 붙어 다니게 된 내 동무 머슴애다. 걔 이름이 상선인지, 상승인지, 상성인지 뭔지 불확실한데 그 까닭은 비록 이렇게 여러 가지로 써 놓았더라도 우리 동네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로 통일하여 ‘상서이’, 이렇게 부르고 발음하였던 것이다. ‘이응’ 받침이든 ‘니은’ 받침이든 그 다음에 ‘이’ 소리가 오면 다 이 받침소리를 탈락시켰다. 뒤에 ‘아’소리가 올 때에도 대부분 그랬는데 ‘이응’ 받침은 다 날아가 버리지만 ‘니은’ 받침은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서 살아남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했다. 상서이를 부를 때면 다들 ‘상서아’ 라고 했기 때문에 혹시 그 애 학적부가 아직 남아 있다면 몰라도 그래서 내 소리 기억 가지고는 그 애 이름의 정확한 받침을 되살리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으’와 ‘어’ 소리가 구별이 없어 그 중간 쯤 되는 ‘어’ 비슷한 소리로 아무 때나 막힘없이 지껄였다. ‘애’와 ‘에’의 구별도 애초부터 없었다. 그 밖에도 시옷과 쌍시옷의 구별이 없는 점 등 이른바 표준말에는 있는 것이 우리말에는 없는 게 많았다. 참,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제외한 우리다. 이렇듯 듣는 사람은 뺀 우리와 포함한 우리를 구별하여 두 가지 ‘우리’라는 대명사를 갖춘 말들이 세계에는 여럿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은 거의 사어가 된 만주말도 그렇다고 하니 혹시 옛날에는 우리말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그 구별의 필요성이 지금 이 순간 당신들은 뺀 우리들, 상서이와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늘어놓자니 납득이 간다.
그렇다면 서울말에는 갖춘 그 여러 가지 소리를 다 뭉개 버리고는 ‘우리’는 어떻게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였던가? 염려 마시라. ‘우리말’에는 낱말마다 구절마다 정해진 고유한 높낮이와 장단이 있어 그에 맞춰 연주하는 정해진 곡조가 있었다. 그래서 바람 부는 날,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누가 소리치면 비록 시옷 소린지 쌍시옷 소린지는 헷갈리더라도 바람결에 잡히는 그 말소리의 맥락, 가락의 높낮이와 셈과 여림, 길고 짧음이 분명했으므로 거의 틀림없이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었다. 그래서 가을바람이 살살 부는 그날도 상서이는 저만치 분교의 꽃밭, 코스모스가 간들거리는 사이에서 나를 보고는 헤죽 웃으며, ‘워익아, 내캉 터일 안 갈래?’하고 불분명한 발음으로, 하지만 정확한 인토네이션으로 물었다.
아, 또 설명을 하나 해야겠군. 터일은 동네 이름이요 땅이름이다. ‘터 기’자에 ‘하나 일’, 그래서 공식 이름이 ‘기일’동이지만 거의 모두가 ‘터일’이라고 불렀다. 그 이름이 수백 년이 된 건지 수천 년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터’는 턴데 ‘일’은 또 뭔지, 왜 ‘터하나’가 아니고 ‘터일’인지, ‘일’이 정말 하나를 뜻한 건지는 여태 아무도 모른다. 아마 오래 전에 그 뜻을 잊어 먹었을 것이다. 그나마 동네가 이제 없어질 지경이라니 영원히 모르고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렇듯 ‘터일’ 뿐만 아니라 돌채이, 무덤실, 말비기, 선둘, 빌랫재, 땅뻐디이…, 하며 모퉁이마다 기슭마다 갖가지 땅이름들이 눌어붙어 있었는데 아마 지금쯤 많이 씻겨 나갔거나 그 잘난 한자 지명이나 심지어 영어 나부랭이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자, 무대 설명은 이만큼 하고 진도를 나가 보자. 상서이 아부지도 생각난다. 검붉은 힘살이 툭툭 불거진 굵다란 장딴지 위로 늘 핫바지 가랑이를 둥둥 말아 걷고서는 지게 위에 훌쩍, 커다란 훌칭이를 가볍게 얹어 지고 가거나 한 손으로는 고삐를 잡고 우렁차게 소를 몰면서도 부드럽고 다정한 눈길과 목소리로, ‘상서아, 상서아’ 하고 부르며 함께 노는 우리 두 꼬마를 몸시 귀여워하던 기억이 난다. 어떻게 귀여워 한 줄 아느냐고? 그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고 바보라도 안다. 마치 그늘이 지다가 햇볕이 비치면 온 몸이 따스해지는 것을 저절로 아는 것과 같아서 이런 원초적인 것에 관해서는 애들일수록 더 속일 수가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상서이네는 터일 가는 산길 골짜기 틈바구니 여기저기에 조각논, 다락논이 몇 뙈기 있었던 것 같다. 상서이 아버지는 논둑에 지게를 받쳐 놓고 낫으로 풀을 베거나 하면서 우리더러 소를 데리고 저만치 기슭으로 가서 소에겐 풀을 뜯기고 우리는 근처에서 멀리 가지 말고 놀라고 하는 것이었다. 온 천지가 불타는 가을이었다.
그 때 우리 집엔 아직 소가 없었으므로 나는 그 커다란 짐승을 겁내었다. 그런데 상서이는 덩치로 보나 나이로 보나 나와 하등 차이가 없는 쌍둥이 땅꼬마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큰 짐승을 고삐 하나와 몇 마디 말로서 이리저리 다루며 제 뜻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얼마를 가다 상서이는 내게 고삐를 넘겨주며 자기처럼 그냥 해 보라고 했다. 앞서 가던 소는 기미를 챈 듯 잠시 멈칫하는 기색이더니 가던 대로 내쳐 발걸음을 떼는 것이었다.
상서이는 내게 소에게 하는 말을 몇 가지 가르쳐 주었다. ‘가자’ 할 때는 ‘이라’, 이 때 ‘라’에 힘을 줘 소리를 짧게 높여야 하는데, 한글이 좋다지만 이런 건 글자로 잘 표시할 수가 없어 유감이다. 가다가 ‘서라’ 할 때는 좀 어른 같이 점잖은 소리로 길게 빼며 ‘워~, 워~’ 하면 정말 신기하게도 거짓말같이 멈춰 서서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마치 말 한 마디로 항공모함을 움직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가다가 오른 쪽으로 틀게 만들려면 코뚜레로부터 이어져 소의 오른편으로 뻗어 내손에 쥐어진 고삐를 좀 당기면서 짧게 ‘이로로, 이로로’ 하면 소는 우회전한다. 이때 가운데 ‘로’를 높게 발음해야 한다. 왼편으로 돌게 하려면 고삐에 작은 파도를 일으켜 소의 등짝을 조금 치면서 ‘워디! 워디!’하는데 이때는 ‘워’를 높게 발음한다. 그런데 나중 커서 어디에 보니 이렇게 소에게 하는 말도 고장에 따라 달라서 ‘워디’가 좌회전이 아니라 우회전이라고 돼 있었다. 아마 경상도 소는 경상도 억양을 잘 알아들을 것이고 갑자기 충청도나 경기도로 팔려 간다면 제대로 못 알아들어 애꿎게 쿠사리를 많이 들을 것 같다.
상서이 아버지는 가끔 짚으로 소신을 만들어 소에게 신겼는데 새로 삼은 소신을 손에 들고 소 다리 옆에 바싹 쪼그리고 앉아 ‘발!’ ‘발!’ 하며 단호하게 명령하면서 때로 살짝 소의 발목을 치면 소는 그 다리를 든다. 소는 한 다리를 들고 오래 있지를 못하는데 이 때 상서이 아버지는 재빠른 솜씨로 소신을 소의 갈라진 발굽에 맞춰 끼워 신기고는 신에 달린 가늘고 질긴 새끼끈으로 금방 내려 땅을 디딘 소의 발목을 찬찬히 동여매었다.
어쨌든 풀 뜯길 장소에 도착하자 상서이와 나는 소를 데리고 건너편 기슭으로 가서 덤불 어름에 소를 놓아 주었다. 짤랑 쩔렁 워낭 소리를 내며 소는 열심이 덤불을 헤치며 풀이며 잎사귀를 뜯어 먹었다. 나는 이제 조금씩 겁이 옅어져서 소를 좀 더 머리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다. 널름 날름 휘둘러 먹을 것을 움켜 뜯는 소의 혀가 연한 색이며 참으로 두텁고 튼튼하다는 것도 알았고 소의 두 눈이 쌍꺼풀이며 옅은 속눈썹이 가지런하게 길게 나 있다는 것도, 소의 두 뿔 앞쪽에는 긁어 주고 싶은 평평한 이마가 있고 거기에는 짧고 곱슬곱슬한 흰 털이 나 있는 것도 보았다.
가을의 산기슭 덤불에는 벌레도 많았다. 메뚜기는 물론이고 우리가 ‘홍굴레’라고 불렀던 방아깨비는 동작이 느려 잡기가 쉬웠다. 그리고 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작은데다가 날아 앉으면서 날개를 비벼 ‘때때때때…’ 소리를 내는 것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 작은 방아깨비를 ‘때때’라고 불렀다. 그 밖에도 풀무치, 풍뎅이, 하늘소, 여러 종류의 잠자리, 처음 보는 크고 작은 나방이 종류들…. 그런데 상서이는 이 모든 것들을 다룰 줄 알았고 내개 가지고 노는 법을 가르쳐 주고 함께 놀아 주었다. 이렇게 벌레를 가지고 놀고 돌멩이를 가지고 놀고 개울물을 가지고 놀고 하다가 어느 순간 좀 심드렁해져서 주위를 의식하는데 저 건너편에서 상서이 아버지의 낫질하는 소리가 싸악 싸악 들리고 소의 워낭소리는 머리 위편에서 들렸다. 고개를 드니 눈앞에 솟은 높은 산봉우리들이 나란히 겹쳐 있는 것이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마치 기름진 장닭의 목덜미처럼 반짝였다. 붉고 노란 갖가지 단풍진 나무들이 검푸른 솔숲과 섞여 햇발을 받고 있어서 마치 불길이 타오르듯 하였다. 나는 시냇물 골짜기에서 풀섶을 헤치고 둔덕으로 올라섰다. 소는 거기에서 부지런히 풀을 뜯고 있었다.
눈앞 덤불에 빨갛게 익은 망개의 열매들이 보였다. 한 가지를 꺾었다. 그러고 보니 이 편 기슭은 온통 붉거나 푸르거나 자줏빛 보랏빛의 갖가지 산열매의 담벼락이었다. 나는 눈길 가는 대로 드문드문 하나씩 꺾다가 소가 있는 곳까지 왔다. 그런데 소가 머리를 들이밀고 연신 혀를 널름거리는 앞쪽 작은 덤불에 조그만 표주박처럼 생긴 처음 보는 붉은 열매들이 달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따려 하였지만 소가 있어 어찌할 수 없었다. 기회를 보다가 소가 조금 비켜난 틈에 팔을 뻗쳐 그 잔가지를 잡았으나 쉽사리 꺾이지를 않았다. 몇 번 애를 쓰는데 어느 순간 소의 큰 머리통이 느닷없이 내 배밑에 들어왔다 그리고는 그 큰 이마를 내 배에 붙이며 떠받으며 마구 덤불에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소의 두 뿔을 잡고 버티었지만 금방 숨이 막힐 것 같았고 공포에 젖어 울음반 비명반으로 소리를 질렀다. 어느 샌가 상서이 아빠가 나타나 고삐를 낚아챘다. 상서이도 잇따라 나타나 얼이 빠진 나를 들여다보았다.
- 개얀나?
눈물이 찔끔 난 얼굴을 겨우 끄덕이며 내가 대답했다.
- 으.
그 정도로 내 배가 터져 버린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있다 털고 일어서는데 지게를 진 상서이 아빠가 소를 몰고 저만치 내려가면서 밀짚모자 쓴 고개를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
- 쪼매 노다가 조 아래로 오나라이~
상서이가 맞받아 소리쳤다.
- 워익이카 터일 가 노다 가요~
산모롱이 길굽이를 두어 개 돌자 정말로 드문드문 작은 초가집들이 산기슭에 박혀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여기가 우리 반 계집애랑 머슴애들 너댓이 사는 그 마을인 것이다. 상서이는 자주 와 본 듯 저게 누구 집이고, 누구는 지금 집에 없나 하며 조잘대었다. 정말로 우리 반 계집애인 듯한 아이 하나가 집 모퉁이에서 빼꼼히 내다보다가 개바자 뒤로 사라졌다. 상서이가 걔 이름을 불렀는데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 집을 지나 어느 조그만 초가집 뜨락으로 상서이는 스스럼없이 들어섰고 나도 멈칫멈칫 따라갔다. ‘분자야! 분자야!’ 하고 부르는데 정말 우리 반 분자 가시나가 뒤안을 돌아나왔다. 이렇게 장난감 같은 집에서 살고 있구나! 여기서 보니 딴애 같은데? 하는 생각이 스치며 학교에서라면 못 그랬을 텐데 나도 덩달아 스스럼없이 분자 이름을 불렀다.
- 분자 너그 집이가?
- 으, 와 왔노? 우리 동네 좋제?
우리는 그 집 마당에 남아 있던 대추도 몇 알 따 먹어 보고 강아지도 같이 들여다보다가 조그만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공깃돌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놀이를 ‘짜개 받기’라고 불렀는데 어느 새 아이들이 둘인가 더 와서 같이 놀았다. 이곳에서는 머슴애 계집애 모두 어울려 같이 노는구나 하면서도 재미가 나고 열에 들떠서 떠들고 놀았다. 땅따먹기도 했고 묵찌빠도 한 것 같다. 무엇을 했든 대수랴! 내 인생에 몇 안 되는 다시 못 올 열락의 시간이었으리니!
쪼그리고 놀다 고개를 드니 초가집 울타리 너머 붉고 노란 갖가지 채색의 높은 산봉우리가 이미 설핏해진 햇살에 마지막 불길을 태우며 넌지시 우리들의 노는 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장면을 끝으로 그날 후반의 이야기는 전혀 필름에 없다. 언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소는 누가 몰고 왔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그 다음의 필름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날은 그 때부터 몇 날이 지난 언제인지, 내가 돌채이에서 멱을 감다가 자갈밭에서 몸을 말리고 있었으니까 아마 이듬해 여름이었을 것이다. 그 날엔 왠지 상서이도 없이 우리 동네 뒤편 그곳에서 다른 아이들과 있었다. 어느 무료해진 순간 골짜기 쪽을 보고 있는데 터일 쪽에서 하얀 장꾼들이 서너 사람 중게중게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오는데 보니 이고 진 아주머니들이었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시냇물 소리에 섞여 들리다가 차차 알아들을 만치 가까워졌다.
- … 마캐…,…아잉교!
- …가디이마느, … 함마…,
- 그케 말이시더! …백제 다레 미게 가주고…,
- 참 그랬구마. 하나 뿌인 자슥인데, 다 살아났는데 그 아아만 물아 가네, 쯔쯧.
- 부이네는 인자 어예 살라카노! 남편은 벌써 전에 때늦은 마마에 잃디이 딸내미는 호열자라…,
그렇지, 까맣게 몰랐는데 분자가 안 보인지가 한참이나 된 건가? 부이네가 분자네 말하는 거 맞제? 그런데 호열자가 머고? 호랑이는 아일끼고 참말로 무섭은 건가 본데…?
굽이굽이 그 산모롱이들은 이제 많이 발끝들이 모지라져 나간 채 그 위로 걸쳐진 길은 말끔히 포장이 되어 있었고 형님이 모는 차는 이를 쉬 거슬러 올라 오래지 않아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큰 둑 위에 멈춰 섰다.
- 저 물속 동네 사람들은 다 보상 받고 떠나고 몇 집만 조 위로 옮겨 조상 지키고 아 있나. 저 대추나무는 나라에서 주사 맞추고 큰 돈 들여 저기 옮게 심가 놓은 것이제.
형님이 가리키는 곳, 댐의 아래쪽 한편에는 큰 나무가 한 그루, 울타리가 둘러쳐진 채 심어져 있고 그 앞에 무슨 팻말이 보였다. 다시 위쪽으로 눈을 돌리니 골짜기를 가득 채운 가을 못물 너머 몇 채의 슬레트 집들이 물가 언덕 위에 숨어 있었다. 그리고 건듯 한 줄기 바람이 이는가 하는데 잔잔히 주름 짓는 수면 위의 붉은 산봉우리들이 오래 된 모니터처럼 줄줄이 갈라지며 즈르르르 헝클어져 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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