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이 상 봉 **
<국문초록>
본고는 호남출신의 문인 頤齋 黃胤錫(1729∼1791)이 아내와 小室에 대해 남
긴 기록을 통해 그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떻게
애정을 표현했는지 그의 한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鄕儒가 가졌던 배
우자에 대한 의식의 일면을 알아보려 한다. 본고는 그의 시 중에서 특히 아내와
소실을 대상으로 지은 작품에 주목했다. 이재는 20세에 남원에 살던 창원 정씨와
혼례를 올렸는데 24세부터 과거와 학
업을 위해 아내와 떨어져 지냈고, 38세에 음보로 장릉 참봉의 일을 하게 되면서
부터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집안일은 아내에게 맡긴 채 객지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과 어린 자식들이 커나가
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서글픔 등과 함께 이 모든 가정사를 홀로 도
맡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가 남긴 일기의 곳곳에
서 드러난다. 특히 아내는 일상적인 가정사 이외에도 이재가 객지에 머무는 동안 출산이나
死産·어린 자식의 夭折 등 큰 어려움들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이처럼 아내는
* http://dx.doi.org/10.14381/NMH.2016.49.03.30.277
**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강사. krishrama@hanmail.net
南冥學硏究 제49집
- 278 -
홀로 고생만 하다가 48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따라서 이재가 현감이
되었을 때는 정작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었다. 이재는 이점을 무엇보다도
아쉬워했고 그래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생일이나 기일이 되면 지난
날을 회상하며 그녀를 추모하곤 했다.
남자가 홀로 객지 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기에 장릉 참봉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은 이재에게 첩을 들여 의식주를 돌보게 하는 것을 권유했고 이재
역시 첩을 들이는 것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나 경제적
인 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喪期를 마친 뒤에야
小室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지만 小室은 황윤석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집에 머물며 며느리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므로 이재는 여전히 홀로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실을 들인 2년 뒤에 목천현감이 되어 어머니· 자식들과 함께 소실도 목천현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지만, 이 무렵 소실은 병이 들어 현감생활 내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이재는 소실의 병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의원을 초빙하고 탕약
을 제공하며 성심껏 소실을 보살폈고 소실 역시 병중에서도 안주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천현에서 파직되고 수년 간 고향에 머
물다가 다시 전의현감에 오르고 이듬해 최종적으로 벼슬을 떠나 고향에 머무를
때까지 소실은 이재의 곁에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었고 이런 소실에
대해 이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주제어 : 황윤석, 이재난고, 한시, 아내, 소실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79 -
<차 례>
Ⅰ. 들어가는 말
Ⅱ. 혼례 무렵의 정황과 아내를 노래한 시
Ⅲ.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추모
Ⅳ. 小室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Ⅴ.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본고는 호남출신의 문인 頤齋 黃胤錫(1729∼1791)이 아내와 小室에 대해
남긴 기록을 통해 그가 자신의 배우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어
떻게 애정을 표현했는지 그의 한시를 중심으로 살펴봄으로써 당시 鄕儒가
가졌던 배우자에 대한 의식의 일면을 알아보려 한다. 황윤석은 당시 호남을
대표하는 박학한 선비로 24세 때부터 과거시험·학 업·관직생활을 위해
京鄕을 오가는 삶을 살다가 59세가 되어서야 고향에 은
거했다. 생애 중 많은 기간 동안 고향을 떠나 홀로 지냈기 때문에 그가 창작
한 시 중에서 많은 분량이 離鄕의 슬픔이나 관직생활의 어려움·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1)
본고는 그가 가족을 그리워하며 남긴 시 중에서 특히 아내와 소실을 대상
으로 지은 작품에 주목했다. 이재는 20세에 남원에 살던 창원 정씨와 혼례
를 올렸는데 24세부터 과거와 학업으로 아내와 떨어져 지냈고, 38세에 음보
로 장릉 참봉의 일을 하게 되면서 부터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집안일은 아내
에게 맡긴 채 객지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때문에 가까이에서 부모님을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과 어린 자식들이 커나
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는 서글픔 등과 함께 이 모든 가정사를 홀
로 도맡아 책임지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그가 남긴 일기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1) 그가 고향을 떠나있을 때 가족을 그리워하며 창작한 시에 대해서는 이상봉의 논
문(2015b)에 개괄되어 있다
.南冥學硏究 제49집
- 280 -
특히 아내는 일상적인 가정사 이외에도 이재가 객지에 머무는 동안 출산
이나 死産·어린 자식의 夭折 등 큰 어려움들을 홀로 견뎌내야 했다. 이처럼
아내는 홀로 고생만 하다가 48세의 나이로 먼저 세상을 떠났고 따라서 이재
가 현감이 되었을 때는 정작 그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없었다. 이재는 이점을
무엇보다도 아쉬워했고 그래서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아내의 생일이나 기
일이 되면 지난날을 회상하며 그녀를 추모하곤 했다.
이재는 38세에 장릉 참봉으로 벼슬을 시작하면서 6개월에서 1년 이상까
지 장기간 객지에 머물며 생활해야 했다. 이는 여행 중의 상황과는 달라서
기본적인 의식주에 있어서 여러 불편한 점을 감수하게 했다. 값을 치르고 머
무르는 집의 주인이 자신과 잘 맞을 경우는 그래도 견딜 만 했지만 주인이
지나치게 돈을 밝힌다거나 불친절할 경우에는 객지생활 자체에 환멸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장릉 참봉에 재직할 무렵부터 주위 사람들은 이재에게 첩을 들여
의식주를 돌보게 하는 것을 권유했고 이재 역시 첩을 들이는 일에 대해 고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족들과의 관계나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차일피일 미
루다가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喪期를 마친 뒤에야 小室을 맞이하게 되었다.2)
하지만 小室은 황윤석과 함께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집에 머물며 며
느리의 빈자리를 대신해야 했으므로 이재는 여전히 홀로 객지에서 벼슬살이
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소실을 들인 2년 뒤에 목천현감이 되어
어머니·자식들과 함께 소실도 목천현에서 함께 기거하게 되었다. 하지만 소
실은 이 무렵부터 앓기 시작하여 현감생활 내내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재는 소실의 병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면서 의원을 초빙하고
탕약을 제공하며 성심껏 소실을 보살폈고 소실 역시 병중에서도 안주인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목천현에서 파직되고 수년 간
2) 황윤석이 泮村에 머물던 상황과 첩을 들일 때의 정황에 대해서는 유영옥의 논문
(2008)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81 -
고향에 머물다가 다시 전의현감에 오르고 이듬해 최종적으로 벼슬을 떠나
고향에 머무를 때까지 소실은 이재의 곁에서 아내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주
었고 이런 소실에 대해 이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황윤석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그가 남긴 방대한 자료만큼이나 다양한 방
면에서 이루어져 왔고3) 그의 한시에 대해서도 주제별로 다양한 연구성과가
있다.4) 또한 사대부가의 아내와 小室과 관련된 연구들 또한 적지 않다.5)
본고는 이러한 기존 성과에 더하여 황윤석이 아내와 소실에 대해 가졌던
사랑과 애정이 드러나는 시들과 주변 상황, 그리고 아내와 소실에 대한 기록
등을 분석하여 평생 동안 벼슬을 위해 떠돌았던 호남의 한 선비가 자신의 동
반자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생활했는지 그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
한 연구는 황윤석이라는 인물의 내면을 좀 더 깊이 있게 알아보는 계기를 마
련해 줄 것이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부터 자세한 사항을 살펴보도록 하자.
3) 이재 황윤석과 관련된 연구 성과에 관해서는 김승룡(2007)의 정리가 자세하다.
2007년 이후 연구성과까지 살펴본다면, 국어학·문학·사학·철학·수학·음악 등 다
양한 분야에서 대략 학위논문 6편, 일반논문 100여 편이 제출되었다.
4) 황윤석의 한시를 분석한 논문들을 살펴보면, 박명희는 황윤석의 천문학적 지식
과 한시와의 관계를 살핀 논문(2007a)과 그의 시에 나타난 유기체적 자연관에
관해 분석한 논문(2007b)·황윤석의 시조 한역시에 대한 논문(2014)을 발표했고,
백원철은 황윤석 한시의 실학문학적 특징을 파헤친 논문(2008)을 발표했으며,
김도형은 황윤석 문학론의 연원을 추적한 논문(2010)을 발표했고, 이지양은 仕
宦으로 京鄕을 오갔던 황윤석의 내면을 살펴본 논문(2008)을 발표했다. 이상봉
은 황윤석의 시에 나타난 孤意識을 분석한 논문(2008a)과 황윤석의 詩論을 분석
한 논문(2008b)· 황윤석의 청년 시기의 시를 분석한 논문(2014)· 황윤석이 두보
시어를 어떻게 활용했는지 추적한 논문(2015a)·그리고 황윤석이 남긴 가족애와
관련된 시를 분석한 논문(2015b)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김대하는(2013) 이재
의 시 중 ‘尊師正道의 意志’·‘愛民意識의 發露’·‘自然閑靜의 추구’의 주제를 담은
것들을 발췌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5) 김경숙(2006); 김보경(2003); 김승룡(2004); 문숙자(2006); 박재금(2003); 박
종덕(2015); 안대회(2005); 이지양(2011); 정수미(1999); 정창권(2003) 참조.
南冥學硏究 제49집
- 282 -
Ⅱ. 혼례 무렵의 정황과 아내를 노래한 시
이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7세 때 이미 소학·사기·사서오경·제자백
가를 읽었고, 잠깐 사이 4∼5장을 읽었으며 읽은 것은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고 한다.6) 그래서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고 있는 상태
였다. 그러다가 20세가 되던 1748년(영조24) 정월에 遠爀의 딸이며 興城 張字
龜의 외손녀인 창원 정씨와 혼례를 하게 되었다. 18세기 조선은 고구려 시
대 이후 계속 되어왔던 결혼제도인 男歸女家제도와 예기에 근거한 親迎制
의 중간단계인 半親迎의 결혼제도가 일반화 되어 있던 시기였고 이재는 이
반친영의 결혼풍습에 따라 처가로 혼례를 치르기 위해 떠났다. 이재는 혼례
를 위해 떠나는 날부터 혼례 이후 며칠 까지 동안 짧은 기록과 함께 시를 남
기고 있는데 이즈음의 시들을 살펴보면서 그가 혼례와 아내에 대해 어떤 생
각을 하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무진년 정월 초하루 비로소 龍城으로 출발해서 용두산을 지나다가 아버지 말
씀을 기억하니 감회가 있어.」
「戊辰正朝, 始啓龍城行, 過龍頭山, 記家君語有感.」
鵝山 月谷 두 마을로 가는 길 鵝山月谷兩村行
先塋 아래 구불구불 외길의 여정이라. 瑩下邐迤一路程
오가며 拜謁함은 뉘 시켜서리오? 來謁去參誰所使
九泉에도 응당 祖孫의 정이 매어 있다오.7) 九泉應係祖孫情
영조 24년 무진년 (1748년 1월 1일 20세)
혼례를 올리기 위해 집을 떠나 처가가 있는 용성(지금의 남원)으로 출발하
6) 박순철·노평규·김영 역, 국역 이재유고Ⅰ, 신성출판사, 2011, 11면. 7) 이재난고 1책 1권, 64면.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83 -
는 날 지은 시다. 특이할 점은 시 속에서 혼례와 관련된 내용을 드러내지 않
았다는 것이다. 제목에서도 용성으로 간다는 내용이 있을 뿐, 용성이 어디인
지는 말하지 않고 있다. 용성은 남원의 옛 지명인데, 첫 구의 鵝山은 이재의
선산이 있던 태인 용두산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8) 月谷은 남원에
있는 처가 마을의 명칭이다. 3구에서 ‘來謁去參’이라고 한 것은 혼례를 올리
기 위한 여정을 떠나기 전에 선산에 拜禮한 것을 말하는 듯하다.
정월 초하루에 혼례를 위한 여정을 떠난 이재는 초사흘에 처가인 남원 월곡
에서 혼례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그가 초이튿날 새벽에 지은 시를 살펴보자.
「나그네 마음」「客懷」
客舘에서 설날을 보내고 나서 客舘經元日
비로소 서쪽 달을 쳐다본다네. 初看月在庚
마음은 西海로 가는 길속에 意中西海路
시름은 저 멀리 강 소리 밖에. 愁外遠江聲
儺禮 鼓聲 마을의 어느 곳인가? 儺鼔村何處
새벽 거위소리에 꿈도 쉬이 깨었네. 晨鵝夢易驚
작은 병풍의 남은 촛불 그림자 小屛殘燭影
太半은 귀향 바라는 마음이라네.9) 太半是歸情
영조 24년 무진년 (1748년 1월 2일 20세)
이 시에 대해서 이재는 “정월 초사흘(戊子), 이날 저녁 깊이 잠들지 못했
다. 김설산 아저씨와 형 노엽실은 繞客인데 내 성씨의 至親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라고 주석하고 있다.10) ‘繞客’은 ‘儀賓’이라고도 하는데 혼례를 위
8) 박순철·노평규·김영 역, 국역 이재유고Ⅰ, 신성출판사, 2011, 18면에 “泰仁 龍
頭山에 가서 기제를 지냈다.”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재의 선산이 泰仁의
龍頭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9) 이재난고 1책 1권, 65면. 10) 이재난고 1책 1권, 65면.
“同月初三日戊子, 是夕不牢. 金叔薛山盧兄爗實爲繞
客, 吾姓之無至親可嘆也.”
南冥學硏究 제49집
- 284 -
해 신랑과 같이 온 사람을 말한다. 국역 이재유고Ⅰ의 이재선생연보에 의하면 이재는 1748년 20살 되던 해
정월에 창원 정씨와 혼인했다고 한다. 이를 참고 한다면 앞서 지은 시는 혼례
를 치르기 위해 집을 떠나면서 지었고, 이 시는 혼례 하루 전날에 지은 시다. 주목할 점은 두 시 모두 혼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는 것이다.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두 詩 사이에 있는 몇 편의 시들도 주위 경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할지언정 배우자에 대해 궁금한 점이나 앞으로의
결혼 생활에 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11) 그래서 이 시 또한 연보에서 얻은
사전 정보와 ‘설날[元日]’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그저 여행길에서 고향을
그리는 정도로만 취급되었을 수도 있다. 이 무렵이 이재가 혼례를 올린 시기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아래의 시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재난고를 보면 정월 초나흘 날 취한 손님이 이재에게
呼韻하여 이재가 이에 답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아래의 시는 서로 두 번씩
시를 주고받은 다음 세 번째 呼韻에 이재가 응답한 시다.
「절구」 「絶句」
어느 때 월하노인 서책 살펴서 何時月老撿冊書
지금 맑은 강 강가 초막에 왔나? 今到淸江江上廬
여러 현인 마주하여 좋은 말로 접대하니 共對諸賢接軟語
내 마음 山海에서 除鋤를 얻었다네.12) 寸心山海得除鋤
영조 24년 무진년 (1748년 1월 4일 20세)
앞서 두 차례 시를 주고받은 뒤 손님은 다시 “어제 吉禮를 뜻으로 삼아 짓
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면서 韻字를 불렀다.13) 이에 이재는 위의 시를 지었
11) 이재난고를 살펴보면 인용한 두 작품 사이에 「宿綾巖」·「雲巖江」·「午憩葛潭
驛」·「上寒峙望普賢峰」·「望八公山」 등 다섯 수의 시를 남기고 있는데 모두 여행
길에서 본 경치와 감회를 읊었을 뿐 혼례와 관련된 내용은 찾을 수 없다.
12) 이재난고 1책 1권, 65면. 13) 이 시의 주석에 “又呼三字曰: ‘以昨日吉禮爲義可也.’”라고 되어있다.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85 -
다. 시에 등장하는 월하노인이란 단어나 운자를 부른 손님의 말을 통해서 보
면 정월 초사흘에 혼례를 올린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혼례라는 중대한 일을 치르면서도 이재는
결혼생활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아내에 관련된 내용을 한 줄도 남기지 않았
다. 이재는 당시 어떤 마음이었을까? 왜 이재는 결혼에 대한 언급을 자제했
을까?
예로부터 혼례는 인생에 있어 중요한 과정이며 설렘과 부담을 동시에 느
끼게 한다.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이 된다는 설렘도 있지만 그에 상응하는 책
임을 져야한다는 부담감 또한 느끼기 마련이다. 이재는 20살의 청년이었다.
호남의 양반가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총명함으로 주목받으며 학업과 과거준
비에 매진했다. 하지만,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는 못한 상태였고 시간은 흘러 어느덧 혼례
를 올릴 나이가 되었다. 집안에서 맺어준 처녀와 혼례를 치르기 위해 남원으
로 향했지만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던 이재는 이루어 놓은 것 없이 혼례
를 올리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 날은
신랑이 어떤 사람인지 시험을 받는 자리기도 했기 때문에 詩에서도 결혼생
활에 대한 내용이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후에도 아내에 대한 언급은
이재난고에 속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
데14) 다만 객지에서 받은 家書에 아내가 死産한 뒤에 건강이 좋지 않다15)
14) 20세 무렵에 지은 「夜雨吟病, 適夢室人, 志懷」라는 작품이 있긴 한데 여기서도
아내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은 보이지 않는다. 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 속 齋
室 적적하고 외론 문도 닫혔는데, 솔 바람소리 처량하여 나그네 베개 시끄럽네.
버드나무 봄바람 속에 호숫가에서 꿈꾸는데, 배나무꽃 피어나고 밤비 내리는 수
남촌. 거문고 줄은 노래해도 마음은 겹겹이라, 달빛에 無端히 한 차례 바라보네.
만 리 하늘 끝에 풀꽃들은 푸르른데, 누굴 위해 슬퍼하며 문득 넋을 옭매나? [山
齊寂寂掩孤門, 松韻凄凄旅枕喧. 楊柳春風湖上夢, 梨花夜雨水南村. 琴徽有曲心三
疊, 月色無端望一番. 萬里天涯芳草錄, 爲誰惆悵便鎖魂.]”
1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1책 4권, 422면. (1764년 8월 17일, 36세) “十七日丙申. 曉, 發行至延朝院. 朝飯, 逢鄭男. 得見父主下書, □□□□ 行病滯之
南冥學硏究 제49집
- 286 -
라는 기록이 눈에 띌 뿐이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 이재는 38세에 음보로
장릉참봉에 임명되고 任地에서 처음 벼슬길에 나아간 감회를 담아 「越州歌」
라는 작품을 지었다. 「월주가」는 총 9章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章은 10구로 구성되어 있다.
「越州歌」라는 제목은 자신의 任地인 寧越에서 따왔다. 비슷한 경우로 51세
에 木川현감이 된 뒤에는 「木州雜歌」라는 시조를 짓기도 했다. 「월주가」에
서는 자신을 비롯해 아버지·어머니·동생·누이·아내·아들·딸을 순차적으로 노
래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아내를 노래한 7장을 살펴보도록 하자.16)
머리카락 반쯤 센 조강지처, 有妻槽糠髮半宣
젊어서 초췌하더니 이에 병석에 누웠지. 少也枯悴仍沈綿
農家의 온갖 일 달게만 여길 뿐, 農家百事只甛耳
종일 주방에 있어도 죽조차 차지 못하네. 永日入17)廚無餘饘
세상에서 물정 어둡고 게으른 자 누가 나와 같을까? 世間迂慵孰似我
잠시도 그대를 편히 해주지 못했네. 使君不曾晷刻
해마다 西行하니 재봉할 일 넘쳐나, 西行歲歲漫裁
등잔 아래 다듬잇돌 옆, 멀리서도 가련하네. 燈下砧邊遙可憐
오호라! 일곱째 노래여! 노래 더욱 괴로우나 嗚呼七歌兮歌益厲
목을 빼고 겨울옷 오기만 기다리노라.18) 引領但俟寒衣傳
영조 42년 병술년 (1766년 8월 24일 38세)
이재는 20살 되던 해에 동갑내기 아내와 혼례를 올렸다. 결혼 초기에는 처
가와 본가를 오가다가 본가에 정착한 이후로 아내는 남편 없이 거의 모든 살
故也. 因審父母主氣候俱寧, 家內並安. 惟室人, 以初十日經産女子, 所産旋夭, 母亦
病, 未及健, 可念也. 是午歸庭.”
16) 「월주가」와 이 후 등장하는 「亡室遺具小題」에 대한 번역과 해석은 이상봉
(2015b)을 참조했다. 17) 탈초본 이재난고에는 ‘八’로 되어 있지만, 초서본 확인결과 ‘入’이었으므로
‘入’으로 해석했다. 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1책 7권, 629면.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87 -
림을 도맡아 했다. 전술한 것과 같이 이재가 학업과 과거시험·관직생활을 이
유로 오랜 기간 동안 고향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재는 아내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두었다. 원래는 3남 4녀였지만 아들
한 명은 8개월 만에, 딸 둘은 각각 여덟 살과 열한 살 때 병으로 잃었다. 이
재는 아내의 死産이나 출산, 자식의 夭折 상황에서도 아내의 곁에 있지 못하
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아내는 곁에 있어주지 못하는 남편을 원망하는 대
신 객지에서 벼슬살이를 하는 남편을 위해 衣食을 마련하느라 힘쓸 다름이
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되는 旅宦을 그만두고 싶지만 부모
님의 기대와 자신의 소망을 위해 함부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마음 아프지만 고향에서 보내는 아내의 도움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위의
시에서 어려움 속에 고생하는 아내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이재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후에 이재는 꿈속에서 병색이 있는 아내를 만나고는 혹시 무슨 일이 있
는 건 아닌지 걱정하기도 하고19) 胎證을 앓고 있는 아내가 고생한다는 소식
을 듣고 마음아파 하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20) 아내는 이러한 이재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1776년 9월 10일 48세의 나이로 이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
Ⅲ.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추모
아내는 남편과 떨어져 홀로 시부모를 모시며 평생을 보냈고 그런 가운데
서도 낯빛이나 말에 슬퍼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다.21) 이처럼 고마운 아
1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1책 8권 698면. (1767년 3월 18일 39세)
“是夜, 夢室內悄悄有病色, 旁無諸稚, 何也?”
2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2책 10권, 149면. (1768년 7월 5일 40세)
“昨日家書中, 聞室人, 以胎證病甚. 又困於麥飯, 可笑可憐 寒士之妻也.”
2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4책 22권, 409면. “蓋自是六年, 千里契闊, 無南
冥學硏究 제49집
- 288 -
내였기에 이재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다음 「記亡室生卒」이라는 글을 지어
아내를 추모했다.22)
이 글은 아내의 출생에서부터 혼례의 과정·결혼생활 그리고 세상을 떠난
무렵의 상황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특히 아내에 대해 묘사하기를 “성품이
유순하고 위엄 있는 몸가짐은 넉넉해서 털끝만큼도 남에게 각박하거나 해치
려는 마음이 없었고 한 번도 경박하거나 경솔한 행동이 없었다.”고 했다.23)
「記亡室生卒」을 지은 다음, 이재는 아내의 시신과 함께 넣을 髢髻·복주감
투[㔶頭]·반지·언문편지 등을 챙기고 나서 아래의 시를 썼다.
「죽은 아내가 남긴 물품에 짧게 짓다.」 「亡室遺具小題」
백세로 죽을 때까지 함께하려 했건만 百歲終偕盡
삶과 죽음은 누가 길고 짧은가? 存亡孰短長
오직 함께 묻히자는 약속 따라 惟應同穴約
霞帔와 襻帶 길이 잊지 않으리.24) 帔襻永無忘
영조 52년 병신년 (1776년 48세)
「記亡室生卒」로 이미 아내와의 만남부터 이별까지를 자세히 기록했기 때
문에 시는 길게 쓰지 않았다. 그저 먼저 떠난 아내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짧은 오언시에서 28년을 함께 한 아내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이재는 아내를 떠나보낸 뒤에도 꿈속에서 아내를 만나거나 아내의 생일이
復同室之娛. 其以每歲受暇七旬而歸觀, 則日限有定, 驟散又悤悤矣. 君非不以悵, 而亦不形于色辭.”
22) 이지양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문집총간 전집, 속집을 통틀어서 현존하는 「亡
室行狀」은 겨우 26편에 불과 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재가
아내를 위해 행장을 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아내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름
하기 충분하다. 이지양(2011), 32면 참조. 2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4책 22권, 408면. “性度柔順, 儀觀豊碩, 無一
毫刻薄忮害之心, 無一時浮薄輕遽之容.”
2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4책 22권, 411면.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89 -
나 기일이 되면 시를 지어 그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아래의 시를 보자.
「17일 새벽에 대궐에 가서 謝恩肅拜 하려는데 홀연히 죽은 아내 淑人이 곁에
있는 꿈을 꾸고 잠에서 깬 후 느낌을 기록하다」
「十七曉, 將詣闕肅謝, 忽夢亡室淑人在側, 覺後志感」
그 누가 천리 먼 길 따라오게 했을까? 誰敎千里遠來隨
성근 머릿결 넉넉한 모습 완연히 젊은 시절이네. 疎髻豊儀宛少時
땅속에서 삼년 만에 오늘 밤 만난 것은 地下三年今夜面
응당 내가 御殿에 감을 기뻐하는 것이리. 秪應嘉我赴丹墀
西泮의 남은 밤, 달도 이미 저물었고 西泮殘更月已低
栢山에는 새 풀 자라 꿈에서도 길 못찾네. 栢山新草夢仍迷
다른 날 한 잔 술이 어찌 官酒겠는가? 他時一酹何官酒
흰 머리칼로 회포를 몰아 또 홀로 시를 짓네.25) 白首羇懷且獨題
정조 2년 무술년 (1778년 2월 17일 50세)
38세에 장릉참봉으로 처음 출사한 이후 계속 벼슬생활을 하던 이재는 43
세 때 사포서별제에 제수되지만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過限을 이유로 파직
당한다.26) 이때의 파직 이후 이 해 12월에 부친상을 당하고 이듬해 7월에는
스승인 金元行(1702∼1772)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이재에게는 시련의 연속
이었던 시기였다. 아버지 상을 마친 뒤, 1774년 46세의 나이로 응시했던 廷試에 낙방을 했는
데 이듬해에는 자신의 출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趙晸(1719∼1775)이 사망
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1776년 1월 5일이 되어서야 익위사익찬에 제수되
었다는 소식을 고향에서 듣게 되지만, 이 또한 몇 가지 이유로 부임하기도 전
에 파직당하고 만다. 그리고 이 해 9월 10일에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불운이 계속되던 가운데 1778년 초에 사복시주부에 제수되고 2월
2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4책 24권, 521면. 26) 유영옥(2008), 48면.
南冥學硏究 제49집
- 290 -
17일에 숙배를 하게 되었는데, 숙배하는 날 새벽의 꿈에 아내가 나타났던
것이었다. 이재는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고 다시 벼슬을 하게 된 것을 축하하
기 위해 아내가 삼년 만에 꿈속에 나타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 외에도 이재는 장릉령 시절에 꿈에서 아내를 만난 뒤, “헤어진 지 3년
에 4번 꿈꾸니, 저승과 이승 마음 전부 식진 않았네.”라며 아내를 그리워하
기도 했고,27) 1778년 9월 10일 객지에서 맞은 아내의 기일에는 “偕隱28)하
여 흰머리 되길 기약했더니, 그댈 보내고 이제 벌써 일 년이라지. 無端한 세
상사는 악마의 놀이런가? 내일 새벽 네 아이 생각에 오래도록 슬퍼하네.”라
며29) 아내의 기일을 챙기지 못하는 무력함과 아비 없이 어머니 제사를 올릴
자식 생각에 슬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재에게 무엇보다도 슬프게 느껴졌던 것은 현감이 된 자신의 모
습을 아내가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아내가 떠난 3년 뒤인 1779년 8월
에 목천현감에 제수된 이재는 고향에서 올라오시는 어머님을 맞을 준비를
한창 하고 있던 10월 22일 새벽에 아내를 만나는 꿈을 꾸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이날 밤, 새벽이 될 무렵에 죽은 아내 淑人이 젊은 날의 용모와 服飾으로
나와 함께 어머니[大夫人] 처소에 이르는 꿈을 꾸다가 갑자기 깨어났다. 서
글픔이 얼마나 극심했던지. 내가 이제 관아에서 부모님 맞을[迎親] 행차를
감독해 다스리면서 죽은 아내의 神主 또한 배행해오려고 했는데, 아마도 저
2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5권, 25면. (1778년 5월 18일 50세)
「夢亡室在驪江志感」, “一別三年夢四回, 幽明情義未全灰. 驪江爲有西流水, 終夜
揚靈達漢來.”
28) 左傳, 「僖公二十四年」. 춘추 시대 晉나라의 介子推가 세상의 무도함을 비관
하고 은거하려 하자, 그의 모친이 "나도 너와 함께 숨어 살리라." 하고, 마침내 함
께 숨어 살다 죽은 고사에서 온 말이다.
2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6권, 288면. (1778년 9월 10일 50세)
「志感幷序」, “偕隱曾將白首期, 哭君今已再回朞. 無端世事還魔戱, 長慟明晨想四
兒.”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91 -
승과 이승 사이에 이치상 서로 감응하는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일까? 내 홀로
거처하며 잠 못 이루다가, 우연히 이런 꿈을 꾸게 되었으니, 아침을 기다려
기록해두고 잊지 않으려 함을 나타내고자 한다.30)
이렇듯 현감이 된 뒤에도 꿈에서 조차 아내를 잊지 못하던 이재는 현감이
된 이후 처음 맞이한 아내의 생일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2월 4일은 바로 죽은 아내의 생일이다. 병중이지만 감흥이 일어, 이에 절구 2
수를 쓴다」
「二月四日, 卽亡室生辰也. 病枕興感, 爰有二絶」
그대 아는지? 생일이 바로 오늘인 것을. 知君懸帨卽今辰
二柏山 서쪽에 풀은 다시 봄이네. 二柏山西草又春
斗郞31)만 와서 나를 지켜 주지만 惟有斗郞來守我
지난 세월 슬픔을 서로 감당 못하네. 不堪相對悵前塵
조강지처 29년 동안 糟糠二十九年間
이별에 신음하며 다만 괴로웠지. 離別呻啾只苦顔
녹봉은 끝끝내 소실에게 돌아가니 淸俸到頭還小室
유유한 하늘 뜻은 무단하기만 하네.32) 悠悠天意亦無端
정조 4년 경자년 (1780년 2월 4일 52세)
처음 혼례를 올릴 무렵부터 38세에 장릉참봉으로 출사하기 전까지 이재는
아내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고, 때문에 아내에 대한 고마움도 그다
지 드러나지 않았다. 아내를 살뜰하게 챙기고 애정을 표시하는 것은 당시 양
반들로서는 어색한 일이었기에 이재 또한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는
3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1권, 126면. (1779년 10월 22일 51세) “是夜向曉夢, 亡室淑人, 以少日容服, 與余偕詣大夫人所, 遽然而覺. 愴然何極. 余
今方自衙上, 董治迎親之行, 而亡室神主, 亦將陪發, 豈幽明之間, 理有相感而然歟?
余旣獨處無寐, 偶得此夢, 待朝記之, 以示不忘.”
31) 당시 18세였던 이재의 둘째 아들 斗龍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2권, 195면.南冥學硏究 제49집
- 292 -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고생 끝에 장릉참봉으로 출사하면서 부터는 아내에 대한 감
사와 애정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아내와 함께 死産과 자식의 夭
折을 겪게 되면서 부터는 더욱 아내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
다. 그리고 이러한 애정은 아내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꿈속에서 아내를 만
나거나 아내의 기일·생일 등을 맞을 때면 자주 표출되었다.
아내는 혼례를 올린 20살 때부터 세상을 떠난 48세까지, 벼슬살이 때문에
객지를 떠도는 남편을 위해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자식들을 돌보며 생애를
보냈다. 두 차례나 死産을 겪었고 출산한 3남 4녀 중 1남 2녀를 일찍 잃었지
만 슬픔을 이겨내고 가정에 헌신해 주었다. 고생 끝에 이재가 처음 출사하게
되었을 때에도 가문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격려해 주었을 뿐 어떤 불평의 말
도 하지 않았다.33)
그런 아내였기에 곁에서 도움을 주지 못하고 벼슬살이로 떠돌기 만한 이
재로서는 고마운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아내가 살아 있었을 때에도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늘 마음 한편에는 아내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
었다. 이재가 더뎠던 출사와 평탄치 않았던 벼슬살이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
고 견뎌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아내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34)
Ⅳ. 小室에 대한 애정과 고마움
소실은 정식 아내 외에 함께 사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妾·別室·副室·작
은집 등과 통용되는 말이다. 이재는 장릉참봉 시절이던 39세 무렵부터 의식
3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4책 22권, 409면. “余蒙恩拜莊陵參奉, 將行, 君言: ‘榮養二親且其始矣. 終若獲依國典, 官供吾父母祭需, 則雖死猶幸, 子必勉
之.’”
34) 이상봉(2015b), 411면.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93 -
주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기 위해 소실을 두는 것을 고려했지만, 고향의 가
족들도 마음에 걸리고 경제적인 사정도 여의치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가 아
내가 세상을 떠나고 喪期를 마친 49세가 되어서야 면앙정 宋純(1493∼
1583)의 후손을 소실로 들이게 되었다.35)
문숙자는 그의 논문에서 “초취 부인이 사망해도 그 시기가 50대 후반이라
면 재혼 사례는 많지 않고, 30대 초반에 正妻가 사망하면 재혼이건 삼혼이
건 관계없이 다시 혼인을 감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던 것이다.”라고
했다.36) 이재의 경우 아내를 잃었을 때 48세였고, 아내와의 사이에서 2남 2
녀를 이미 두고 있었으므로 재혼을 하지 않고 소실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실을 들였던 1777년 12월은 이재가 布衣 상태였으므로 소실과 함께 생
활을 했지만, 이듬해 2월에 사복시주부로 임명되면서 이재는 다시 홀로 객
지생활을 해야 했다. 소실은 아내가 떠난 자리를 대신하여 고향 본가의 일을
돌봐야했기 때문이었다. 이재가 처음 소실을 언급한 것은 그가 사복시주부에 임명되고 얼마 되지
않아 지은 「沙橋吟」이란 작품에서였다. 43살에 사포서별제에서 낙직한 이
후 횟수로 8년 만인 50세가 되어서야 복직을 한 자신의 감회를 담은 이 장편
시에서 이재는 “동서남북 사이에, 누가 내 樂을 그르다 하리? 아내 있어 부
엌에서 밥을 잘 짓고, 아들 있어 산에서 땔나무 잘 하는데.”라며37) 아내의
자리를 대신하는 소실의 생활상을 노래했다. 그런데 새로 들인 소실은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지 4개월 뒤인 6월
19일에 동부도사로 재직하면서 지은 시에서는 “약한 아내 병 많고 작은 아
이 혼자인데, 내 동생은 쇠약한 나이라 또한 매우 곤란하네.”라며38) 소실의
3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9책 51권, 439면. “初五日. 至宋家(潭陽大秋
里), 幅巾道袍入內定位拱立, 妾再拜, 余一擧袖, 作揖以答, 後再拜. 又擧袖以答, 妾
獻酌. 又令以瓷杯.”
36) 문숙자(2006), 15면 참조. 3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4책 24권, 514면. (1778년 2월 14일 50세)
“東西南北間, 孰非吾所聊. 有婦廚能炊, 有子山能樵.”
南冥學硏究 제49집
- 294 -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 이재는 소실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소실은 편치 않은
몸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부터 이재에게 필요한 물품을 만들어 보내며 그를
도왔다.39)
그로부터 두 달 뒤 이재는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새벽에 소실 꿈을 꾸고. 절구 두 수」 「曉夢小室. 二絶」
줄 끊어진 3년간 鳳은 凰을 곡하더니 絃斷三年鳳哭凰
흰머리로 위로하는 건 小室[秋娘]40)에 의지하네. 白頭相慰賴秋娘
하늘 끝 멀다고 어찌 情도 없으랴? 天涯豈是無情緖
등불 켠[燈髻] 새벽에 홀로 방에 있네. 燈髻殘更忽在旁
팔순의 어머니를 너도 알겠지. 八耋高堂爾亦知
봉양하려는 이 마음 기약 어겨 어쩌나? 此心求養奈愆期
헛된 밥 먹으며 홀로 가을비에 싸여 虛食獨擁涼秋雨
한 뜨락 성긴 낙엽 창자를 어지럽히네.41) 一庭疎葉攪膓時
정조 2년 무술년 (1778년 8월 9일 50세)
첫째 수에서는 3년 전 아내를 잃은 슬픔을 언급하면서 백발이 된 지금에
와서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이 소실밖에 없다고 말한다. 둘째 수에서는 지금
까지 벼슬을 위해 떠돌고 있는 이유는 모두 어머니 봉양 때문이라고 말하면
서 소실에게 그 마음을 알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시 속에서 이재는 아내가
떠난 슬픔을 소실의 존재로 대신하면서 아내가
3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6권, 179면. (1778년 6월 19일 50세) 「曉雨志感. 六絶」 제4수. “弱妻多病小兒單, 吾弟衰齡亦太艱. 目下飢窮兼姉妹, 相
思無處不憂端.”
3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6권, 193면. (1778년 윤6월 24일 50
세) “光州京主人來傳, 潭陽京主人所齎, 六月二十四日潭陽宋君日運書, 及其兄井
邑日佐, 弟贊旭聯書, 及小室所送新襪一對. 乃作先達兼答書送去.”
40) 唐나라 때 金陵의 소녀 杜秋娘이 15세에 李錡의 妾이 되었던 고사를 인용하여
소실을 秋娘이라 부르고 있다. 全唐詩 卷520, 「杜秋娘詩序文」 참조. 4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6권, 250면.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95 -
어머니를 봉양한 것처럼 소실 또한 어머니를 잘 봉양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소실과 함께 생활한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자신은 다시
객지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빈자리를 소실이 채워줄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재는 소실이 아내의 역할을 잘 해주리라 기대하는 만큼 소실의 형제들
과도 가족처럼 교유하며 지냈고42) 소실의 사촌들도 이재가 임지로 떠날 때
전별하며 친분을 유지했다.43) 이러한 교유관계 속에서 이재는 소실이 마음
에 들었던지 소실을 위해 가락지를 사며 즐거워하기도 했다.44) 이 무렵에
이재는 장릉령을 제수받게 된다. 동부도사의 임기가 끝나면 현감으로 진급되기를 갈망했던 이재에게 장릉
령은 만족할 수 없는 관직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 현감직을 기대하지 말고
낙향해야할지 아니면 조금 더 기다리면서 기회를 엿볼지 깊이 고민하게 되
었다. 이즈음 소실에게서 온 언문편지를 받고 아래와 같이 절구 다섯 수를
지었다.
「近日에 小室로부터 받은 언문 편지에 애써 노력하여 장차 영화롭게 봉양할 수
있기를 기약한다는 말이 있었다. 情勢는 본디 그렇지만 역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지라, 부질없이 절구 다섯 수를 쓴다」
「近得小室諺札, 有僶勉且期致榮養語. 情勢固然, 亦非乃所知, 漫成五絶」 4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6권, 303면. (1778년 10월 1일 50세) “十月朔日丁巳. 午間至秋里. 小室拜見. 其諸兄宋君日運日旭(今名贊旭卽先達), 日
□, 童弟, 及其伯兄文玉之子, 喪人潤□與日佐二子潤臣·潤喆, 迭相來見.”
4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6권, 304면. (1778년 10월 8일 50세) “宋日顯(小室從兄), 詩一鷄一來餞.”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6
권, 304면. (1778년 10월 10일 50세) “初十日丙寅. 乃行, 小室拜辭, 諸宋來別.”
4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7권, 324∼325면. (1778년 11월 5일
50세) “是日, 貸韓上舍五兩錢內, 一兩二分貿曆, 三分買鑷子. 一錢二分, 分貿白鐵
指環一雙,(六分) 赤銅指環一雙,(五分) 共用一兩一錢七分. 盖指環之白鐵者, 以送
于柳女, 赤銅者以應小室所請爾. 仲建言, 爲其繼室, 二兩買玉柄, 女粧刀, 又一兩三
錢, 買純銀指環, 余亦對說此事一笑.”
南冥學硏究 제49집
- 296 -
첫 추위에 헤어지고 춘분 돌아오니 初寒一別轉春分
꽃 움트고 빈산엔 해 절로 저무네. 花動山空日自曛
도리어 괴이해라, 司馬令45) 같은 신세 却怪身同司馬令
文園病46) 단서는 지극히 분분하네. 文園病緖極紛紛
편지는 어여쁘게도 내 어머니 염려하고 尺書憐爾念吾親
榮孝의 기약은 말마다 참되구나. 榮孝相期語語眞
백년 家學이 苟字는 아닐텐데 家學百年非苟字
어느 곳 쫓아 수레 먼지에 절하리오. 欲從何處拜車塵
3년 동안 만난 것은 열흘 남짓인데 三歲逢場十日餘
마음 알아줌과 얼굴 마주 봄은 비교컨대 어떠한가? 知心知面較何如
때가 오면 斗邑도 외려 딴 일 되리니 時來斗邑猶餘外
오래 도록 부끄럽네, 공부가 그에 미치지 못한 것이. 長愧工夫未化渠
산 북쪽 수운향을 소요하자며 逍遙山北水雲鄕
금슬 좋던 예전 기약에 늙은이 눈물 떨어지네. 琴瑟前期老淚滂
晩年의 淸閑을 장차 너와 함께하며 向晩淸閑將共汝
온 정원과 울타리에 芳蔊와 뽕나무 심으리. 滿園芳蔊滿籬桑
가득가득 구슬 비취와 겹겹의 비단 盈盈珠翠疊疊紈
貧家의 井臼와 편안함이 어떠한가? 爭似貧家井臼安
세간 烟霧의 질박함 보지 못해 不見世閒烟霧質
예부터 奚官47)에 골몰함이 많았지.48) 從前多少沒奚官
정조 3년 기해년 (1779년 1월 29일 51세)
45) 漢의 司馬相如를 가리킨다. 그는 文園令을 지냈다. 46) 문원령을 지낸 적이 있었던 사마상여가 늘 소갈증을 앓아서 병을 핑계로 閑居
하였으므로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려는 생각을 ‘文園病’으로 나타냈다. 47) 奚官은 晉나라 때 말 기르는 일을 담당하던 관직이다. 이재는 정조 2년 (1778
년, 50세) 1월에 輿馬·廐牧 및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는 사복시의 주부가 되었
는데 이 때문에 자신을 奚官이라고 했다. 4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28권, 418면.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97 -
소실이 보낸 언문편지의 내용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이재가 남긴 시 제
목에 따라 유추해보면 소실은 현감이 되어 어머님을 영화롭게 봉양하기 위
해 더욱 노력하자는 취지의 글을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둘째 수에서
이 사실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셋째 수에서는 부부의 연을 맺은 지는 횟수로 3년이지만 함께 있었던 날
은 열흘 남짓 밖에 안 되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소실을 칭찬하고
있다. 넷째 수에서는 소실과 금슬 좋게 나누었던 기약을 떠올리며 장차 晩年
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이 시를 지은 지 7개월 후인 1779년 8월에, 이재는 그토록 바라던 현감직
을 맡게 되었다. 현감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이재는 직무수행을 위
해 바로 목천으로 떠났고 어머니와 소실을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10월이
되어서야 목천으로 합류했다. 그런데, 목천에 온가족이 모인지 얼마 되지도
않은 11월 27일에 소실은 병이 들고 말았고49) 12월 14일에는 소실의 허리
와 배에 기가 뻗치는 증상이 있어서 이재가 직접 살펴보기도 했다.50)
간헐적으로 병을 앓던 소실은 이듬해 4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
했는데 이재는 4월 5일부터 4월 19일 까지 소실의 증상과 처방한 탕약·먹은
음식 등을 자세히 기록해놓고 있다.51) 한동안 잠잠하던 소실의 병은 6월 12
일 경부터 다시 심해졌는데 이번에는 거의 절명할 정도까지 앓았다.52)
그래서 이재는 6월 13일과 14일에 걸쳐 소실을 돌보느라 거의 한 숨도 자
지를 못했다.53) 설상가상으로 6월 15일에는 목천현감에서 파직되었는데,
4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2권, 124면. (1779년 11월 27일 51세) “自昨夕, 小室有病.”
5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2권, 153면. (1779년 12월 14일 51세) “夕後, 入視小室腰腹氣升之病.”
51)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2권, 234∼244면. 5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3권, 266∼267면. (1780년 6월 12일
52세) “小室氣升危急, 不得已用針于手足及頭部, 稍覺降安, 旋復氣升, 又降還復
升, 升則欲絶, 連用洪醫所命藥二貼及白䓀莄韭汁. 又疑其猶屬胎病, 而性甚拗滯, 不肯明言, 奈何?”
南冥學硏究 제49집
- 298 -
이재는 이튿날인 6월 16일에 祠堂에 「告廟文」을 올려 파직 당하게 된 전후
사정을 고하고는54) 6월 22일에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떠났다.55)
이러한 와중에서도 다행히 목숨을 건진 소실은 이후 황윤석 弟婦의 제사
를 위한 祭需를 후하게 보내어 이재를 감동시키기도 하고56) 판단하기 어려
운 일을 서로 의논해서 처리하는 등57) 서로를 더욱 신뢰하는 사이로 발전하
게 되었다.
Ⅴ. 나오는 말
혼례를 올릴 무렵 이재의 시에서는 아내나 결혼생활에 대해 아무런 감정
도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그가 남긴 시나 기록을 통해 이재가 얼마
나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소실 또한
고향에서 아내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고 이에 대해 이
재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이재는 아내와 소실 모두에게 고
5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3권, 267면. 5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3권, 268면. (1780년 6월 16일 52세)
5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33권, 275면. (1780년 6월 22일 52세)
5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7책 40권, 652면. (1787년 4월 9일 59세) “命封二十日弟婦金氏祭需, 來月初一日外姑祭需, 幷依或代錢. 弟婦忌日, 盧大甥
所錄, 而誤列于今月十九日矣. 小室遽幸提醒, 重爲之勸曰: ‘沒而無子, 尤可惻也. 依先祀封送, 亦何妨焉.’ 余感其言而行之.”
5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7책 40권, 666면. (1787년 4월 15일 59세) “余旣定以明曉發行, 而夜間, 黃大憲, 與行中給唱黃三得來告, 以爲: ‘新官案前分
付內, 舊官案前未發行之前, 吾不可以先送奴子上京云. 蓋新舊官俱有應收刷馬價
矣. 而一時並收, 亦各自有先後, 今午小人等, 固請於刷馬價中, 除本宅應來人及馬
三匹各價九兩外, 其餘四馬價, 各先給九兩之一半, 其一半則欲待渠等上來以給. 或
明日追收, 飛傳以爲明再明趁納行次之計矣. 本邑民爲極惡, 明日若聞案前離發, 必
無沒數收納之望矣. 明日若差緩行, 行至巳時間, 則邑內場市, 方可以沒收完. 而新
案前, 亦不日汲汲, 收其刷錢, 付送京奴矣.’ 余以語羽漢, 又以語小室, 皆曰: ‘應然.’
乃許以明日巳時間發行.”
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299 -
마운 마음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내와 소실에게 보인 애정의 양상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처
럼 보인다.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아내에 대한 이재의 염려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그가 장릉참봉에 제수되면서 부터였다. 이재가 혼례를 올린 나
이가 20세이고 장릉참봉이 된 나이가 38세이니 거의 18년간은 아내에 대해
무심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이재는 18년간을 무심하게 있다가 38세가 되어서야 아내를 염려하는
글을 남기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을까? 앞 장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아내를 살뜰하게 챙기고 애정을 표시하는 것은 당시 양반들로서는
어색한 일이었기에 이재 또한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
다. 그런데 이런 이유 이외에 다른 원인은 없었을까?
이재 나이 38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38세는 이재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오른 나이다. 이전에는 앞
날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막막한 삶을 살고 있다가 드디어 관직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인생의 목표 중에서 첫 단계를 올라서게 되자 그 기쁨을 위해 희생해준 아
내가 떠올랐고 그래서 「월주가」 속에서 아내가 겪었던 그간의 고생을 묘사
했을 것이다. 또한 38세부터 본격적으로 객지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는 科擧
나 학업을 위한 여행과는 비교할 수 없이 고된 일이었고 몸소 고난을 겪으면
서 부모님·아내·자식과 같은 가족들에 대한 애정이 더욱 깊어졌으리라 생각
된다. 그리고 36세에 객지에서 아내의 死産 소식을 듣고, 39세에 총명했던
딸 갑항을 잃은 것도 아내에 대한 이재의 애정이 더욱 견고해지는 계기가 되
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소실에 있어서는 아내와는 달리 만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서부터 詩를 통
해 애정을 표현했는데 이에 대해서도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이유는 아내를 염려하고 아꼈던 이재의 마음이 고스란히 소실에게
옮겨갔기 때문으로 보인다. 아내에게 다 표현하지 못했던 감정이 여운으로
南冥學硏究 제49집
- 300 -
남아 있다가 아내 역할을 훌륭히 대신하는 소실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이 아
닐까 추측된다. 두 번째 이유는 소실을 들인 후 바로 관직을 시작하게 되었
기 때문일 것이다. 관직 때문에 이재는 소실과 떨어져 지내야 했고 그 때문
에 더 자주 소실의 존재를 일기 속에서 언급하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투 고 일 : 2016년 02월 10일
심사기일 : 2016년 03월 01일〜03월 23일
게재확정 : 2016년 03월 24일
參 考 文 獻
1. 原典資料
黃胤錫, 頤齋亂藁(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1책), 금영문화사, 1994.
黃胤錫, 頤齋亂藁(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2책), 뿌리출판사, 1995.
黃胤錫, 頤齋亂藁(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4책), 정아인쇄사, 1998.
黃胤錫, 頤齋亂藁(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5책), 뿌리문화사, 1999.
黃胤錫, 頤齋亂藁(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6책), 뿌리문화사, 2000.
黃胤錫, 頤齋亂藁(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7책), 유성인쇄공사, 2001.
黃胤錫, 頤齋亂藁(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이재난고 9책), 유성인쇄공사, 2003.
2. 硏究論著
김경숙(2006), 「紫霞 申緯의 아내와 딸에 대한 인식 고찰」, 한국고전여성
문학연구 제13권, 한국고전여성문학회. 김대하(2012), 「頤齋 黃胤錫의 시 연구」, 공주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도형(2010), 「頤齋 黃胤錫의 문학론 : 序跋을 중심으로」, 국어문학 49
집, 국어국문학회. (2013), 「이재 황윤석 문학론 연구」,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석사학위
논문. 김보경(2003), 「이색의 여성인식-여성 묘주 묘지명을 중심으로」, 漢文學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301 -
報 제8집, 우리한문학회. 김승룡(2004), 「고려 후기 지식인의 아내 이야기-무신집권기부터 원 간섭
기까지」, 동양한문학연구 제20집, 동양한문학회. (2007), 「頤齋 黃胤錫 연구의 추이와 관제 ‘실학’에서 ‘일상’으로」, 동양한문학연구 제25집, 동양한문학회. 문숙자(2006), 「조선후기 양반(兩班)의 일상과 가족내외의 남녀관계-노상
추(盧尙樞)의 <일기(1763-1829)>를 중심으로-」, 古文書硏究 28집, 한국고문서학회. 박명희(2007a), 「頤齋 黃胤錫의 시에 나타난 有機體的 자연관」, 東方漢文
學 第33輯, 동방한문학회.
(2007b), 「頤齋 黃胤錫의 天文 관찰과 시적 含有」, 古詩歌硏究 第
20輯, 한국고시가문학회.
(2014), 「頤齋 黃胤錫의 시조 漢譯詩에 나타난 指向 의식과 의의」, 한국고시가문화연구 34집, 한국고시가문화학회. 박순철·노평규·김영(2011), 국역 이재유고Ⅰ, 신성출판사. 박재금(2003), 「이규보의 시문에 나타난 여성인식」, 漢文學報 8집, 우리한
문학회. 박종덕(2015), 「이응태 묘 출토 한글 편지의 음운론적 연구-원이 엄마가 사
용한 16세기 방언의 실체」, 동아시아고대학 제38집, 동아시아고
대학회. 백원철(2008), 「頤齋 黃胤錫 漢詩의 實學文學的 照明」, 한문학보 18집, 우리한문학회. 안대회(2005), 「초정(楚亭) 박제가의 인간면모와 일상-소실(小室)을 맞는
시문을 중심으로」, 韓國漢文學硏究 36집, 한국한문학회. 유영옥(2008), 「鄕儒 黃胤錫의 泮村 寄食과 卜妾」, 동양한문학연구 27집, 동양한문학회. 이상봉(2008a), 「黃胤錫 한시에 나타난 孤意識 연구」, 부산대학교 교육대학南冥學硏究 제49집
- 302 -
원 석사학위논문.
(2008b), 「황윤석 詩論 연구」, 동양한문학연구 26집, 동양한문학회.
(2014), 「청년 황윤석의 한시에 나타난 經世 포부와 자기 반성」, 동
양한문학연구 39집, 동양한문학회.
(2015a), 「이재 황윤석 한시의 두보시어 활용 양상」, 대동한문학 43집, 대동한문학회. (2015b), 「황윤석 한시에 나타난 가족애의 양상」, 한문교육연구 45
호, 한국한문교육학회. 이지양(2008), 「황윤석, 仕宦을 위해 떠돈 시간의 내면풍경」, 고전과 해석 5집,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11), 「조선조 후기 사대부가 기록한 아내의 일생」, 인간 · 환경 · 미래 7집, 인제대학교 인간환경미래연구원. 정수미(1999), 「朝鮮時代 祭亡室文 硏究」, 경성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정창권(2003),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 사계절.이재 황윤석의 아내와 小室에 대한 사랑
- 303 -
Abstract
Love of Hwang, yun-seok(黃胤錫) for his wife and concubine
Lee, Sangbong
<Pusan National University lecturer>
This paper aimed to investigate the consciousness about spouse
that Hwang, yun-seok(1729∼1791), who was local nobleman had at
that time through the record, especially korean poetry written in
chinese character, about his wife and concubine.
This paper was especially focused on the work that has been
written to portrait his wife and concubine among his poetry. He
married Changwon Chang, who lived in Namwon at the age of 20 and
spent away from his wife for the state examination and academic from
the age of 24.
He was in charge of the work of Jangneung Royal Tomb at the age
of 38 from that time he lived far away from home for a long time so
he left to his wife the housework.
Because he could not support his parents and could not stand by his
children he was very sorry about that. Furthermore, his wife had done
all the housework so which had made him very sad and these feelings
were emerged in his diary.
His wife had to endure great hardship such as delivery·stillbirth·the
decease of children alone besides the housework while he lived far
away from home. She died at the age of 48 in the hardship so could 南冥學硏究 제49집
- 304 -
not enjoy the glory of his promotion to present governor together and
he felt very sorry about that. So recalling the past with her he
revered the memory of his wife when the birthday or anniversary of
her death comes.
People advised him to have a concubine for housekeeping when he
was in charge of the work of Jangneung Royal Tomb and he also was
concerned about that but because of family problem and financial
burden he couldn’t have a concubine until he had passed the time of
Remembrance period for his wife.
As concubine had to support his mother instead of his wife, he still
had to live far away from home alone. Fortunately, he could promote
to the governor of Mokcheon two years later and could live with his
family but concubine got sick and groan with pain.
He always had been concerning her disease and called in a doctor
and dosed up her. Concubine, also, did her best to manage her family
affairs. When he was be in a public office or not, she tended a home
well so he was very appreciative of her efforts.
keyword: Hwang yun-seok(黃胤錫), Yijaenango(頤齋亂藁), korean poetry
written in chinese character, wife, concubine
첫댓글 옛 선조님들의 처(아내)와 첩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이 글을 옮겨 공유하고자 합니다.
전실(前室)과 후실(後室)의 관계에서
후실은 첫부인을 여의고 두번째이후 새로 맞이한 부인을 말하니
첩과 혼동하지 말아야 하는데
여기에서는 후실이라 하지 않고 첩과 같은 의미로 소실(小室)이라 하였으니
소실과 첩의 구분이 또 모호해집니다.
낙민선생님께 다음과같이 여쭈어 보았습니다.
<본부인과 작은부인등 첩과의 구분에 대한 설명을 청하옵니다>
에 대한 답글을 아래에 옮겨 놓았습니다.
樂民(장달수)21.04.30 08:45
이재는 20세에 창원정씨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낳았고 부인은 48세에 죽었습니다.
이재는 두번 결혼을 하지 않았고 측실은 2남 1녀를 낳았습니다.
처는 육례를 갖추어 맞이하는 부인을 말하며 부인이 죽고 나서 결혼한 부인은 재취. 재취가 죽고나서 결혼한 부인은 3취라 합니다.
첩은 통칭 측실이라 하며 부실.소실. 소가(작은댁).등으로 불리며 양인의 딸을 첩으로 삼으면 양첩. 노비나 기생을 첩으로 삼으면 천첩이라 하였고
양첩에서 얻은 자식은 서자.서녀. 천첩에서 얻은 자식은 얼자 얼녀라 했습니다.
서자는 과거에 응시 할 수 있으며 관직에 나갈 수 있었습니다(단 6품직 정도)
서자는 주로 서녀와 결혼하였으나 명문가의 양첩 소생 서자는 양인의 딸과도 결혼 했습니다
樂民(장달수)21.04.30 08:27
율곡선생의 서녀는 신독재 김집의 측실(첩)이 되었고.
이순신의 서녀는 윤효전(백호 윤휴의 아버지)의 측실이 되었습니다
★추기 :
낙민선생님의 답글 2개를 여러분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우리 카페글에도 복사해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