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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우라명상원(Aura Meditation Center) 원문보기 글쓴이: 광규
단군조선(壇君朝鮮) 47대(2-7대) (제2부 - 2장)
● 일본 열도로 도망한 협야노
무신10년(BC2173) 두지주(斗只州: 우수주 또는 소시모리 라고도 불렸으며 이곳에 우수국牛首國이 있었고 맥국이 있었다. 맥국은 조선국명朝鮮國名이었는데 부여국의 선조이다. 현, 하북성河北省 창주滄州로 비정한다.) 의 예읍(濊邑: 부족 추장)이 반란을 일으켜 여수기(余守己)에게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를 베게 하였다. 이때부터 그땅을 소시모리라 하다가 지금은 음이 바뀌어 우수국(牛首國)이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陝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 일본열도) 에 웅거하면서 스스로 천왕(天王)이라고 칭했다. 단군조선(壇君朝鮮)때 반란 (反亂)를 일으킨자의 후손(後孫)이 일본열도(日本列島)에 들어갔다는 역사의 기록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대목이다. 일본열도 역시 단군조선(壇君朝鮮)의 영토였음을 암시하는 기록이다. 계미45년(BC2138) 9월 단제가 붕어하여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즉위하였다.
● 하(夏)나라의 조공 사절
제4세 오사구(烏斯丘: BC 2137-BC2099)단군 갑신원년(BC2137) 맏아들 구을 (丘乙)을 태자로 삼고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봉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몽고족이 오사달의 후손이라 한다. 이해 가을에 하(夏)나라 사절이 입조(入朝)하여 조공(朝貢: 옛날 종주국에게 속국이 예물을 바치는 일)을 하고 신서(神書)를 구해갔다. 무자5년(BC2133) 원공패전(圓孔貝錢: 구멍이 뚫린 조개모양의 돈)을 만들었다. 경인7년(BC2131) 장정 30인을 파견하여 선박(船舶) 을 살수(薩水: 산서성 문희현聞喜縣에서 발원發源하여 황하가 꺾기는 곳의 영제시 永齊市를 경유經由, 황하 黃河로 들어가는 강江으로 난하, 살수라고 불렀던 현재의 속수涑水로 추정함)에서 건조케 하였다. 계사10년(BC2128)에 궁전을 크게지어 건청궁(乾淸宮)을 25년만에 완성했다. 동서가 600간 남북이 100간이였다. 임인19년(BC2119) 하(夏)나라 왕 상(相: 하나라 5대 왕)이 백성들에게 덕을 잃어 단제께서 식달 (息達)에게 명하여 이를 정벌(征伐)하였다. 천하(天下)가 이를 듣고 모두 복종하였다.
● 제2의 평양성
계모20년(BC2118)에 평양성(平壤城)을 쌓았다. 이때 쌓은 평양성은 제2의 평양성(平壤城)으로 장당경(藏唐京)인 평양성(산서성山西省 임분시臨汾市) 동북쪽에 있는 홍동(洪桐)에 쌓은 평양성으로 보인다. 신유38년(BC2100) 6월 단제께서 붕어하시니 양가(羊加: 벼슬이름)인 구을(丘乙) 이 즉위 하였다.
제5세 구을(丘乙: BC2100-BC2084) 단군 원년(BC2099) 맏아들 달문(達門)을 태자로 삼고 아우 세 사람을 번왕(藩王: 제후국의 왕)에 봉(封)하였다. 태백산(太白山: 불함산, 장백산, 묘향산, 백두산)에 단(壇: 제단)을 쌓고 사자(使者)를 보내 제사를 지냈다. 계해2년(BC2098) 5월 황충(蝗蟲: 메뚜기)이 크게 일어 밭과 들에 가득했다.
● 달력법은 동이(東夷)에서
을축4년(BC2096) 처음으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사용한 책력(冊曆)을 만들고 조선역서(朝鮮曆書: 조선의 달력)가 시작되고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한해의 시작으로 했다. 서량지(徐亮之)가 지은 <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의 기록에,“中國曆法 始於東夷 造曆者羲和子也 系出殷商 東夷先公也 東夷造曆之 事實無疑問矣(중국력법 시어동이 조력자희화자야 계출은상 동이선공야 동이조력지 사실무의문의) 중국의 달력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사람은 희화자이다. 그의 계통은 은나라 상나라의 동이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책력이 동이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시인하는 대목인 것이다. 병인5년(BC2095) 봄에 하(夏)나라 학사 두사람이 력서(曆書)와 두건갑자기(斗建甲子記)를 가지고 조정(朝廷: 임금이 정치를 집행하는 곳)에 들어왔다. 기사8년(BC2092)에 신독(身毒: 천축국의 전신으로 감숙성, 청해성, 신강성, 서장성 일대)나라 사람이 표류하여 동해빈(東海濱: 산동성과 하남성 경계에 있던 천연호수로 당시에는 동해, 발해, 거야택, 대야택의 해변가)에 닿았다. 신미10년(BC2090)에 흉년이 들어 창고에 쌓아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다.
● 천체의 운행을 관측
갑술13년(BC2087)에 감성관(監星官: 천체를 관측하는 관리)에게 혼천기 (渾天機: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기계)를 만들게 하여 천도(天度: 하루동안 하늘이 움직이는 단위)와 합하게 하였다. 정축16년(BC2084)에 단제께서 고역산(古歷山: 위치 불명)에 행차하여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주위에 근수(槿樹: 무궁화)를 많이 심고, 그해 7월에 단제께서 비류강(沸流江: 내몽고 지역)을 지나 강동(江東: 비류강의 동쪽)에서 붕어하시어 그곳에 장사하였다. 비류강은 비류수(沸流水)를 뜻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의 최초의 도읍지(都邑地)였던 졸본천(卒本川: 흘승골성)과 가까이 있는 강으로 보인다. 졸본천은 압록수 (鴨綠水)의 동북쪽이라 했으니 산서성山西省에 있는 현재의 분수(汾水: 당시의 압록수)의 동북쪽으로 내몽고 지역으로 추정된다. 후에 북부여(北扶餘) 영토가된 곳으로 몽고의 부이르 호수란 설도있다. 태자가 제위(帝位)에 오르니 제6세 단군이시다. 제6세 달문(達門: BC 2084-BC2048) 단군 계미6년(BC2078)에 맏아들 한속(翰粟)을 태자로 삼고 을지선(乙支仙)을 수재(首宰: 최고의 재상)로 삼고 연석천(淵石泉)을 상장(上將: 최고의 장수)으로 삼았으며, 진무경(陳無競)을 섭사직(攝司職)으로 삼고 관기을(關基乙)을 숙정사(肅政使)로 삼았다.
갑신7년(BC2077)에 천리마 (千里馬)를 바치는 자가 있었는데, 단제께서 이르시기를 “천자(天子)는 다니는 길이 일정하니 경사로운 일에는 하루 40리, 사사로운 일에는 하루 50리다. 국기(國旗)는 앞에있고 따르는 자는 뒤에있어 혼자서 다닐 수 없으니 내가 천리마를 타고 혼자 어디를 가겠는가.” 하시고 이르시기를“나에게 헌납하는 말을 받지않는 것은 사방에서 와서 바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셨다. 을유8년(BC2076) 갈모후(葛毛侯)가 반란 (反亂)을 일으켜 단제께서 장수를 보내 평정(平定: 난리를 평온하게 진정시킴) 하였다. 정해10년(BC2074) 하(夏)나라 조공사절(朝貢使節)이 왔다. 무자11년(BC2073) 팔부루(八夫婁)를 상장(上將)으로 삼고 삼군(三軍)을 독려하게 하였다.
● 열국회의와 신선술
임자35년(BC2049) 열국의 왕후(王侯)를 상춘(常春: 길림성 장춘長春)에 모이게하니 큰나라가 2, 작은나라가 20, 추장이 3,624였다. 단제께서 신지(神誌: 역사를 기록한 직책)인 발리(發理)로 하여금 서효사(誓效詞)를 짓게하였다. 그 시(詩)에 이르기를, “ 진한(眞韓)은 나라안을 안정 시키고 모한(慕韓: 마한)은 왼쪽을 보살피며 번한(番韓: 변한)은 남쪽을 대비하니 저울 그릇은 백아강(白牙岡) 이고 저울대는 소밀량(蘇密浪)이며 저울추는 안덕향(安德鄕)이다. 계축36년 (BC2048) 단군께서 돌아가시니 태자인 한속(翰粟)이 즉위하였다.
제7세 한속(翰粟 혹은 한율: BC 2048-BC1994) 단군 원년인 갑인년(BC2047) 맏아들 우서한(于西翰)을 태자로 삼았다. 을묘2년(BC2046) 궁성(宮城) 동쪽에서 감천(甘泉: 맛있는 물)이 솟아났다. 계해10년(BC2038)에 방사(方士) 윤파노 (尹巴奴)가 신선술(神仙術)을 말하였으나 단제께서 믿지않았다. 무인25년(BC2023)에 온백(溫伯)이 단제께 하(夏)나라를 얻는것이 좋겠다고하니 단군께서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은 군자(君子)의 도리가 아니며 영토를 얻기위해 생명을 해치는 것은 어진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하(夏)나라 왕이 이 일을 전해듣고 사자(使者)를 보내 사례하였다. 기묘26년(BC2022) 큰 흉년이 들어 창고의 곡식을 풀었다. 신축48년(BC2000) 백성의 세금을 반으로 감했다. 정미54년(BC1994) 단제(壇帝)께서 붕어(崩御)하시여 태자가 즉위하니 제8세 단제시다.
단군조선(壇君朝鮮) 47대(2-7대) (제2부 - 1장)
조선(朝鮮)을 세운 왕검(王儉: 환검)단군은 아들이 셋 이였다. 첫째가 태자 (太子)인 부루(扶婁)이고 둘째는 부여(扶餘) 셋째가 부유(扶宇)이다. 왕검(王儉) 단군이 붕어(崩御: 천자가 죽음, 제후가 죽을때는 ‘홍’이라하고, 대부가 죽을때는 ‘졸卒’, 선비가 죽을때는 ‘불록不祿’, 서인이 죽을때는 ‘사死’라함 )하니 태자인 부루(扶婁: BC2240-BC2181)가 제 2대 단군(壇君)이 된다. 신축원년(BC2240)에 백성과 함께 산업(産業)을 다스리니 한사람도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지 않았다. 여러왕들의 잘 잘못을 살피고 상벌(賞罰)을 신중히 하였다. 농사와 누애치기를 권장하고 기숙사(寄宿舍)를 설치하여 학문을 일으켰다.
● 동이(東夷)를 칭찬한 공자
임인 2년(BC2239) 단제(壇帝)께서 소련(少連) 대련(大連)를 불러 나라를 다스리는 길을 물었다. 소련과 대련은 상(喪)을 잘 치루어 사흘동안 게을르지 않고 석달동안 느슨하지 않고 한해가 지날때까지 슬퍼하고 애통해 하였으며 삼년동안 슬픔에 젖어있었다. 이때부터 상(喪)을 치룸에 다섯달로 그치던것을 오래될수록 영광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내용이 공자(孔子)의 제자들이 쓴 것으로 알려진 <예기>에도 잘 나타나있다. <예기禮記> ‘잡기하 雜記下’의 기록이다. 孔子曰:少連大連善居喪 三日不怠 三月不解 期悲哀 三年憂 東夷之子也 (공자왈:소련대련선거상 삼일불태 삼월불해 기비해 삼년우 동이지자야) “ 공자가 말하기를: 소련과 대련은 부모상을 잘치루었다. 3일동안 태만하지 않았고 3개월간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1년간 슬피 애통해하고 3년간 근심하였다. 소련대련은 동이사람이다.” 필자는 공자가 했다는 이 말을 여러차례 되세겨 보았지만 소련,대련 형제와 동이(東夷)를 칭찬하는 뜻으로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공자는 BC515년경 사람이다. 공자 자신이 살던 시대보다 약 1,800년 전의 단군조선 (壇君朝鮮)땅에 살던 효성(孝誠)이 지극한 소련,대련의 일화를 제자들에게 가르친 공자가 동이(東夷)의‘이(夷)'자를 ‘오랑케 이(夷)’라고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오랑케 이(夷)라고 우리 동이족(東夷族)의 단군조선 (壇君朝鮮)을 비하 (卑下)한 사람이 어떻게“나도 구이(동이)의 나라에 가서 살고싶다.”라고 했겠는가! 인(仁)를 가르치던 공자(孔子)의 인격(人格) 으로 보아 공자가 한말이 아니라고 믿어진다. 이(夷)자를 ‘오랑케 이’라고 한것은 먼 후대에… 필자의 생각으로는 당(唐)나라와 명(明)나라때의 작품(作品)으로 보인다.
● 최초의 밭문서와 달력
계묘3년(BC2238) 9월 조서(詔書: 왕의 뜻을 일반에게 알리기 위하여 적은 문서)를 내려 머리를 땋아서 목을 덮도록하고 푸른옷을 입게 하였다. 쌀되와 저울을 모두 통일하도록 하였다. 경술 10년(BC2231) 4월 밭을 나누고 밭문서를 만들어 백성들로하여금 사사로운 이익을 구하지 못하게 하였다.
임자12년(BC2229) 신지(神誌: 역사를 기록한 직책)인 귀기(貴己)가 칠회력 (七回歷: 달력의 일종)과 구정도(邱井圖: 세금징수를 위한 행정구획도로 생각됨)를 만들었다. 무술58년(BC2183) 단제께서 붕어하였는데 이날 일식(日蝕)이 있었다. 태자 가륵(嘉勒)이 즉위했다.
가륵(嘉勒:BC2183-BC2137)은 단군조선의 제3대 단군이다. 대야발(大野勃) 어른이 쓴 <단기고사>에 의하면,“첫 해에 맏아들 오사구(烏斯丘)를 태자로 삼고 아우 가록(嘉祿)을 사달(斯達: 아사달)왕으로 삼아 도읍(都邑)을 구월산(九月山) 장당경(藏唐京)에 정하였다.”라고 기록하고있다.
● 평양성(平壤城)이 장당경
구월산이 어디인지 위치를 알 수 없으나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아사(阿斯)는 음이 아홉(九)에 가깝고 달(達)은 음이 월(月)과 같아서 아사달이 구월산(九月山)으로 와전(訛傳: 잘못 전해짐)된 것이다.” 라고 되어있다. 장당경(藏唐京)은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최초에 도읍(都邑)한 산서성 (山西省) 임분시(臨汾市)에 있던 평양성(平陽城)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인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서 가륵단군 원년인 BC2183년에 동생 가록 (嘉祿)에게 비왕(단군을 보좌하는 왕)으로 아사달을 맡기고 다시 평양성으로 도읍 (都邑)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왕검단군(壇君王儉)이 처음 도읍한지 150년후에 왕검의 손자인 가륵단군 (嘉勒壇君)에의해 단군조선 (壇君朝鮮)의 초기 도읍지 (都邑地)였던 평양성(平陽城) 으로 다시돌아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 한글창제는 가륵단군때
경자2년(BC2181) 지방마다 말이 서로 다르고 상형문자(象形文字: Hieroglyphic, 뜻글자)인 진서(眞書: 배달국때 만들어진 녹도문으로 현재의 한자漢字의 전신)가 있다해도 열가구(十家口)가있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워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 박사에게 국문정음(國文正音: 가림다문加臨多文 혹은 가림토加臨土글자라함) 38자를 만들게했다. 이 국문정음이 바로 한글의 전신인 것이다. 신축3년(BC2180) 신지(神誌)인 고글(高契)에게 명하여 배달유기(倍達留記: 배달국의 역사, BC3898-BC2333)를 편수케 하였다.
● 한(漢)나라가 만든 흉노족
갑진6년(BC2177) 열양(列陽)의 욕살(당시의 벼슬로 <단기고사>에는 요동태수라고 기록됨) 색정(索靖)에게 명하여 약수(弱水: 경도 97도 위도 41도쯤으로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하천으로 현 대륙지도에도 약수라고 글자한자 틀리지않고 그대로 남아있으며 중공의 장성長城이 약수밑으로 지나간다.)로 유배하였다. 이가 흉노(匈奴)가 되었다. 단군조선(壇君朝鮮)은 9환(九桓: 환인의 9 형제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연방국(聯邦國)이다.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은 그 뿌리가 고산족(高山族)이면서 유목족(遊牧族)이다. 우리는 장자(長子)로 이어진 민족으로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에서 갈려나간 지족(支族)으로 지금의 내,외 몽고에 살던 유목생활(遊牧生活)만을 주로하던 훈족(Hun clan: 몽고족)을 한(漢)나라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제외한 모든 민족은 오랑캐란 뜻에서 흉노(匈奴)라고 불러 흉노가 된것으로 흉노(匈奴)는 우리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과는 가까운 혈통(血統)으로 보아진다.
병오8년(BC2175)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켜 단제께서 이를 지백특 (支伯特: 티베트로 현, 서장성西藏省)에서 정벌하였다. 4월 초여름 단제(壇帝)께서 불함산( 不咸山: 이두어로 해와 달이 넘나든다는 뜻으로 백두산을 말함)에 올라 민가(民家)에서 나오는 연기를 보고 연기가 적은집은 조세(租稅)를 줄이도록하여 세금의 차이를 두었다.
단군조선(壇君朝鮮) 47대 (제1부 - 2장)
• 산서성은 단군조선의 중심지
산서성(山西省) 서북쪽에서 발원한 두 하천(河川)중 하나인 습수 (상건하)는 하북성(河北省) 서북부를 지나면서 열수(영정하)와 합쳐 천진(天津)을 거쳐 발해만 (渤海灣)으로 흐르고, 또 하나는 말갈백산(靺鞨白山)의 분원천지(汾源天池) 에서 발원(發源)하여 산서성 태원(太原)과 그 아래 임분시 (평양성)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황하(黃河)로 들어가는 고구려(高句麗)때는 압록수(鴨綠水)라고 불렀고 또 다른 이름으로 당취수, 마자수, 대요수, 고려(高麗)때는 안민강, 혼동강이라고 불렀으며, 현재는 분하(汾河) 혹은 분수(汾水)라고 부르는 강(江) 이다. 따라서 산서성 (山西省)은 단군조선(壇君朝鮮)이 개국될 당시 중심지역(中心地域)이며, 이를 뒷바침하는 근거로 <사기>에서 말한 “낙랑(樂浪)과 조선(朝鮮)이란 이름은 단군조선의 하천(河川)이던 습수, 열수, 산수에서 비롯된 듯하다.”란 대목인 것 이다. 낙랑(樂浪)은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 북부를 포함하여 산서성 남.동부 패수(浿水: 현 망하)가 흐르는 패수현 일대로 낙랑(樂浪)은 단군조선의 건국당시인 BC 2333년 경 부터 존재하던 이름인 것이다.
• 한반도(韓半島)에대한 최초의 기록
정사 50년인 BC2284년 왕검께서 풍백(風伯: 입법담당)인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치수(治水: 물을 다스림)를 하도록 하였다. 우수주(牛首州: 맥국이 있던 곳으로 필자는 현 하북성 창주滄州로 비정한다)에 그당시 홍수(洪水)를 다스린 업적비가 있다. 무오 51년(BC2283)에 운사(雲師: 사법담당)인 배달신(倍達臣: 왕검의 셋째 아들 부유)에게 명하여 강화(江華: 한반도 강화)의 전등산에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제천단(祭天壇)을 마리산(摩璃山)에 만들게하여 장정 8,000명으로 일하게 하였다. 동방민족(東邦民族)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풍속이 단군왕검 (壇君王儉)때 부터라고 기록하고있다. 지금으로부터 4,294년 전에 한반도 강화에 대한 기록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단군조선(壇君朝鮮)때에 지나대륙 (支那大陸)과 한반도(韓半島)는 동이(東夷) 민족이 같은 언어, 생활, 양식, 습관, 역사를 함께하고 있었다는 뜻이되는 것이다.
• 우(虞)에게 오행치수법을 가르침
단군왕검은 갑술67년(BC2267)에 태자(太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하(夏) 나라를 세운 우(虞:우임금)에게 도산(塗山: 안휘성 현 숙주宿州로 비정함)에서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 금, 수, 목, 화, 토의 오행 법에의한 홍수를 다스리는 법)를 가르쳐 주고 국경(國境)을 정하여 유주(幽州)와 영주(營州)가 조선(朝鮮)의 땅이 되었다. 또 회대지방(淮岱地方: 강소성)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지방정부)를 두어 다스리고 이를 우순(虞舜:순임금)에게 감독하게 하였다. 유주(幽州)는 황하 북부 하남성(河南省) 서부일대와 산서성(山西省) 남부일대를 말하며, 영주(營州) 는 황하(黃河)북부 하남성(河南省) 동부 일대를 뜻한다. 동이배달한민족사 (東夷倍達韓民族史)에 자주 등장하는 유주(幽州)와 영주(營州)는 이렇게 단군조선 때부터 우리의 강역(疆域)이였던 것이다. 다시말하면,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과 하남성(河南省)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나(支那:China) 대륙이 단군조선(壇君朝鮮) 의 영토였던 것이다.
• 오해의 소지가있는 <서경>의 기록
<서경書經>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있다. 帝舜 歲二月 東巡守 至于岱宗柴 望秩于山川 肆覲東后(제순 세이월 동순수 지우대종시 망질우산천 사근동후)“순임금이 이해 이월에 동쪽을 순수(巡守: 천자가 제후에게 가는것이고, 제후가 천자를 찿아뵙는것은 술직述職이라함)하고 대종(岱宗: 산동성의 태산)에 이르러 제사를 모시고 차례로 산천에 제사지내고 마침내 동쪽 천자를 만나뵈었다.”그동안 재야사학자란 분들조차도 “사근동후(肆覲東后)"를 “동쪽 제후들을 만나다”로 해석해왔다. 잘못된 해석이라 보아진다. 후(后)자는‘임금후’또는‘천자후'란 글자로 보아야하고,‘제후’라고 할때는 제후후(侯)자를 써야한다. 순(舜)임금은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임명한 지방정부(분조)를 감독하는 감독자 (監督者)로서 회대지방(강소성)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아 동쪽인 회대지방의 제후들을 만나본 것이니 순수(巡守)란 표현을 썼던 것이다. 산동성(山東省)은 원래 배달국(倍達國)의 영토이고 단군조선의 고유(固有)의 영토임을 알고있었다면 이토록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 없었을 것으로 본다. <서경>에 정확한 날자는 기록되어있지 않지만 이때 천자인 왕검단군(王儉壇君)이 산동성(山東省)에 있는 도성(都城)에서 생활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 왕검(王儉) 말기에 12성을 쌓다
경자 93년(BC2241)에 천하(天下)의 땅을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리고 삼한(三韓)은 64족을 포함하였다. 웅백다(熊伯多)를 봉(封)하여 마한(馬韓) 이라하고, 치두남씨(蚩頭男氏)를 봉(封)하여 변한(弁韓)으로 임명하였으며 겸직(兼職)하여 우(虞)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요중(遼中)에 12개의 성(城)을 쌓으니 험독(險瀆), 영지(令支), 탕지(湯池), 용도(용道), 거용(渠용), 한성(汗城), 개평(蓋平), 대방(帶方), 백제(百濟), 장령(長嶺), 갈산(碣山), 여성(黎城)이 그것이다. 단군왕검 당시의 마한(馬韓), 변한(弁韓)의 한(韓)은 단군(壇君: 하늘에 제사를 지낼때 주인主人이자 천자天子란 뜻)를 보좌하는 왕(王)을 뜻한다. 당시 단군조선(壇君朝鮮)의 광활한 영토를 셋으로 나누어 다스린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단군 (壇君)을 보좌하는 마한(馬韓:마왕), 변한(弁韓:변왕)은 항상 단군의 도성(都城)과 가까운 곳에 함께 있어야 한다. 제22대 색불루단군(索弗婁 壇君: BC1285-BC1237)때에 삼한(三韓)을 삼조선(三朝鮮) 이라했으며 이때부터 진한, 마한, 변한의 영토가 나누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색불루 단군때인 BC1285년 5월 제도를 개정하여 삼한(三韓)을 삼조선 (三朝鮮)이라했다. 조선(朝鮮)이란 관경 (管境)을 말한다.”라고 기록하고있다. 관경(管境)이란 “ 맡아서 다스리는 경계”란 뜻으로 비로소 진한(辰韓: 진조선), 마한(馬韓: 막조선), 변한(弁韓: 번조선)이 독자적으로 다스리는 영토(嶺土)가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경자 93년(BC2241) 3월 15일 단제(壇帝: 왕검)께서 봉정(蓬亭: 정확한 위치를 알수없으나 필자는 산동성에 있던 한 지명으로 추정한다)에서 붕어(崩御: 천자가 세상을 뜸)하시니 교외 10리쯤 떨어진 땅에 장사 지냈다. 백성들이 마치 부모님 돌아가신듯 마음속에서 잊지못했다. 태자 부루(扶婁)가 단군(壇君이 되었다.
단군조선(壇君朝鮮) 47대 (제1부 - 1장)
조선(朝鮮)을 건국한 단군왕검(壇君王儉:BC2333-BC2241: 왕검은 이두어이고 왕검을 환검桓儉 이라고도함)은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의 성산(聖山)인 태백산(太白山: 백두산) 아래서 BC2370년 5월2일 인시(새벽 3시-5시사이)에 태어났다. 왕검의 아버지는 배달국(BC3898-BC2333) 18대 환웅(桓雄)인 거불단( 居弗檀)이다. 이암(1296-1364) 어른이 쓴 <단군세기>에 의하면, 당시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기록한 것으로“단군 왕검은 신인(神人)의 덕(德)이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 하였다. 14세되던 갑진년인 BC2357년에 웅씨의 왕은 그가 신성 (神聖)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비왕(裨王: 왕을 보좌하는 왕)으로 삼아 대읍(大邑: 큰나라를 뜻하며 필자는 산동성(山東省) 태산泰山이있는 제남시濟南市로 추정 한다.)을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무진년인 BC2333년 제요도당(帝堯陶唐:요임금) 때에 단국(檀國:웅씨의 왕이 다스리던 배달국의 제후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檀木)의 터에 이르니 온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제(天帝)의 아들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환(九桓: 환국桓國을 세운 환인桓仁의 형제 9명의 후손들을 뜻함) 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神)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 왕검이라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帝位: 단군의 자리)에 있기를 93년이였으며 130세까지 사셨다."라고 되어있다.
• 최초의 도읍지 평양성
<삼국유사> ‘고조선’편에 의하면, <위서魏書: 위수>를 인용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壇君王儉 以唐高(堯)卽位五十年庚寅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忽山 又今彌達(단군왕검 이당고(요) 즉위50년경인 도평양성(금서경) 시칭조선 우이도어백악산아사달 우명구홀산 우금미달) 단군왕검은 당요가 즉위한지 50년이 되는 경인년에 평양성(지금의 서경)에 도읍을 정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불렀다. 다시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기니 그곳을 궁홀산 또는 금미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동안 필자가 연구한 바에 의하면 왕검단군 (王儉壇君)의 최초의 도읍지(都邑地)인 평양성(平壤城)은 산서성(山西省) 임분시 (臨汾市)로 이곳 평양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國號)를 조선(朝鮮) 이라 한다음 다시 도읍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로 옮기는데, 백악산 아사달은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으로 보고싶다. 산서성은 BC2707년경에 배달국(倍達國)의 자오지(치우) 천자(天子)에의해 개척한 땅으로 배달국을 이은 단군조선의 입장에서는 산서성(山西省)은 새로운 땅이다. 황제헌원의 5대손인 요(堯)임금의 도읍지(都邑地)였던 임분시의 평양성(平壤城)을 단군왕검이 접수하여 이곳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것으로보인다.
이맥(李陌) 어른이 쓴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요(堯)임금의 덕이 날로 쇠퇴하자 서로 땅을 다투는 일이 쉬지않았다. 단군왕검은 마침내 우순 (순임금)에게 명(命)하여 땅을 나누어 다스리도록 병력을 파견하여 주둔시키더니 함께 요임금의 당(唐)나라(산서성 임분시의 평양성)를 치도록 약속하니 요임금이 마침내 힘이딸려 순임금에 의지해 생명을 보전하고 나라를 양보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요(堯)임금의 평양성(平壤城)을 평정 (平定)한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할 수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있다. <맹자>에 의하면,“舜南面而立 堯率諸侯北面而朝之瞽瞍亦北面而朝之 (순남면이립 요솔제후북면이조지 고수역북면이조지) 순(舜:순임금)이 남쪽을 향해 서자(立:임금이됨) 요(堯:요임금)는 제후들을 거느리고 북쪽을 향해서 조(朝:단군조선)의 왕검를 뵈었고, 고수(순임금의 아버지)역시 북쪽의 단군왕검을 뵈었다. 요(堯)는 단군조선의 순(舜)에게 나라를 넘겨주면서 순(舜)과함께 황하강(黃河江) 남쪽 하남성 (河南省)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하남성에서 보면 산서성(山西省)은 당연 북쪽인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의 본문 기록에 ‘지금의 서경’이라고 한 것은 김견명(金見明) 스님이 <삼국유사>를 지을 당시인 고려(高麗) 25대 충렬왕때인 1274년경의 시점(時點) 으로 <명사明史>의 기록과 일치한다. <명사>에 의하면, 后唐時 王建代高氏 從居松岳 曰東京 而以平壤爲西京(후당시 왕건대고씨 종거송악 왈동경 이이평양 위서경) “ 후당때에 고려왕건이 고구려의 고씨를 대신하였고 송악으로 도읍을 옮겨 동경 이라하고 따라서 평양은 서경이라 했다.”
• 아사달(阿斯達)의 위치
아사달은 이두어(吏頭語)로 ‘새로운 땅’ 혹은 ‘새로운 산’이란 뜻으로 아사달의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紛紛)하다. 함경남도 백두산(白頭山), 흑룡강성 하알빈밑 완달산(完達山), 하남성 낙양(洛陽), 강서성 남창(南昌), 하북성 창려(昌黎), 산서성 홍동(洪桐)등으로 아사달의 위치가 통일되어있지 않다.
사마천의 <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이다. “ 集解張晏曰: 朝鮮有濕水 洌水 汕水 三水合爲洌水 疑樂浪 朝鮮 取名 於此也 (집해장안왈: 조선유습수 열수 산수 삼수합열수 의낙랑 조선 취명어차야) 집해에서 장안이 말하기를 조선에는 습수 열수 산수의 세 물이 있는데 이것이 합쳐서 열수가 되었다. 아마도 낙랑과 조선은 여기에서 이름을 딴것인듯 싶다.” 라고되어있어, <사기>에 기록된 본 내용은 단군조선의 핵심 강역을 찿는데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습수(濕水)는 산서성 태원(太原) 서북부 관잠산(管잠山)이 있는 녕무현(寧武縣)에서 발원(發源)한 현재의 상건하 (桑乾河)이며, 열수(洌水)는 북경(北京)를 휘감고 돌아가는 현 영정하(永定河)로 상건하가 산서성 서북부에서 발원하여 하북성 서북부에서 영정하와 만나 천진(天津)을 지나 현재의 발해만(당시의 직례만)으로 흐르는 하천(河川)으로 단군조선 (壇君朝鮮) 당시에는 열수라고했다. 산서성(山西省) 서북부 관잠산 근처에 옛날에는 말갈 백산(靺鞨白山)이 있었다. 현 지나대륙지도(支那大陸地圖)나 중국고금지명사전 어디에도 이 백산(白山) 이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곳에 백두산 천지(天池)와 비슷한 분원천지(汾源天池)가 있다. 백두산 천지처럼 이곳 분원천지에서 압록수(鴨綠水)가 발원한다. <신당서>‘동이전'의 기록이다.“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 號鴨綠水 曆國內城西 與鹽難水合 又南至安市 入於海 而平壤在鴨綠東南 以巨艫濟人 因恃以爲塹(유마자수출말갈지백산 색약압두 호압록수 력국내성서 여염난수합 우남지안시 입어해 이평양재압록동남 이거로제인 인시위위참) 마자수는 말갈의 백산에서 시작되며 색이 오리의 머리 색깔과 같아 압록수라 부른다. 국내성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해지고 서남쪽 으로 안시(안시성)에 이르러 바다 (황하)로 흘러 들어간다. 평양성은 압록의 동남쪽에 있어 큰배로 사람을 건내고 믿음직한 참호 역할을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말갈백산 (靺鞨白山)이 백산(白山) 즉, 백악산 (白岳山) 이며 아사달(阿斯達)이 현, 산서성 (山西省)의 수도인 태원(太原)을 뜻하는 것이다. 악(岳)은 ‘큰산’이란 뜻으로 악(岳)과 산(山)은 같은 의미이다. 다시말하면, 백산(白山)이나 백악(白岳)은 같은 뜻이다. ‘역앞’을 역전(驛前) 이라하면 되지만 우리 말의 특성상‘역전앞'이라고 이중으로 표현한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이와같이 백악(白岳)이‘백악산'으로 중복 표현된 것이다.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 상고사는 9,700년
● 한민족사(韓民族史)란 ?
단제 신채호 선생은 “ 역사란 아와 피아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다.” 라고 했고, 웹스터(Webster) 사전에는 “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라고 정의 하고있다. 또한 한민족사를 지은 이중재 선생은 “역사(歷史)란 집을 짓고 살면서 벼농사를 많이 짓고 산 조상들의 삶과 지혜를 기록한 것이다.” 라고 했다. 따라서 같은 지역에 살고 같은 말을 하며 생활, 양식, 습관, 문화, 역사를 같이하는 인간 집단인 우리 한(韓)민족의 역사가 다름 아닌 한민족사(韓民族史)인 것이다.
● 상고사(上古史)는
상고사(上古史)는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단군조선(壇君朝鮮), 북부여(北扶餘), 동남부여(東南扶餘),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 백제(百濟), 대진국(大震國: 발해) 까지를 말한다. 약 9,700년 동안의 우리민족사를 동이배달한민족 상고사(上古史)라 한다. 역사의 3대 요소를 사람(人), 장소(場所), 시간(時間)이라 한다. 고려때 까지도 아시아 전 대륙을 지배했으나, 백제가 망하고, 고구려가 망하고, 고려가 망하면서 조상들의 옛 고토(古土)를 빼앗기고 한반도(韓半島)로 쫒겨온 비참한 신세가 된 것이다. 역사적 인물과 시간은 정확히 알고있으나 조상들의 옛 영토를 빼앗겼기 때문에 장소 즉 당시의 강역(疆域)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 우리 민족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지금까지 필자는 당시의 강역(疆域)을 찿아내는데 노력해오고 있다.
● 지명 조작과 역사서 분실
지나(支那: 중국의 옛 이름, China)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옛 지명을 없애고, 지명을 옮기고, 지명을 다른 이름으로 바꾸고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중공(中共)은 80년대 초에 3,700자의 한자(漢字)를 바꿔버려(간자체) 우리가 알 수 없는글자가 되어버렸다. 춘추전국시대인 BC 770 - BC 233때에 노, 위, 정, 진(秦), 조, 채, 연, 송, 제, 진(晉), 초, 진(陳), 12개의 열국이 서로 패권 다툼을 한다. 진나라가 3개 있는데, 진(秦)은 섬서성에, 진(晉)은 하남성에, 그리고 진(陳)은 안휘성에 있었다. 진시황(BC259 – BC 210)이 BC221년에 지나대륙(支那大陸)을 통일하고나서 승상 이사의 말을듣고 세상의 모든 역사서를 불태우고 학자 460명을 땅속에 생매장시킨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이름하여 “분서갱유”라 한다.
● 사마천의 <사기>등장
강소성 패현 사람인 유방( BC 247 – 195)이란 걸출한 사람이 한(漢)나라를 세우고 대대적인 역사서를 편찬하기에 이르렀을때, 지나(支那: China)의 역사서중 가장 으뜸 이라고 하는 사기(史記)는 사마천(司馬遷: BC 145 – 86)이란 사람이 16년에 걸쳐쓴 역사서로 황제헌원(BC 2697)부터 서한 무제때까지 약 3,000년 간의 역사를 기술한 것으로 총 130권으로 되어있다. 이 사기(史記)를 쓸때 서경(書經)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삼국지> ‘왕숙전’의 기록을 보면, 사마천이 <사기>에 경제(景帝: 제6대 왕)와 무제(武帝: 제7대 왕)의 잘 잘못을 기록했다가 무제가 노(怒)하여 효경본기 (孝景本記)와 무제본기(武帝本記)를 삭제하고 그 때문에 사마천은 부형(腐刑: 남자를 거세하는 형벌)에 처해졌다. 이런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사마천 (司馬遷)은 비교적으로 사실에 가까운 기록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서경인 환시래(西傾因 桓是來)
사마천의 사기(史記) 본문 제 2권에 다음과 같은 글이있다. 西傾因桓是來 (서경인환시래) “ 서쪽이 기울어졌기 때문에 환(桓)이 왔다” 이다. 분명히 환(桓)이란 사람들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왔다는 뜻이다. 당시는 경도(동경) 80도를 경계하여 서장성(西藏省) 남쪽에 곤륜산( 7282 m) 과 신강성(新疆省) 윗쪽에는 천산(승리봉 7439m)이 있는, 80도를 기준하여 서쪽은 요서(遼西)라 하고, 동쪽은 요동(遼東)이라 했다. 감숙성 삼위산(三危山)에서 길림성과 함경북도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 장백산, 불함산,묘향산,백두산)인 이곳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약 10만년 전부터 살았는데, 그들중에 한분이 BC 8936년에 신강성에 있는 천산(天山)에서 도(道)를 통한 사람으로 그를 가리켜 환인(桓因: 한인) 이라고도하고,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한다.
● 한(桓), 한(韓), 한(漢)의 의미
환(桓)은 굳셀환, 클환으로 “고산족”이란 뜻이고, 한(韓)은 우물난간한, 나라이름 한으로 “유목민”이란 뜻이며, 한(漢)은 은하수한, 물이름한으로 “하천민”이란 뜻이다. 다시말하면 우리 한(韓)민족은 고산족이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하고 농사를 짓고 사냥을 하던 민족이다. 이 안파견 즉 환인은 고산족들 중의 장자 즉 장손이였다. 안파견은 형제 9명으로 이를 사서에서는 구환(九桓)이라고 한다. 이 장손을 백이(伯夷)라고한다. 이 백(伯)자는‘맏형백', ‘큰아버지백’, ‘우두머리백’이다.
● 동이배달한민족
여기서 이(夷)자는 하늘( 一)에서 내려온 활을 잘쏘는 (弓) 사람(人)이란 뜻이다. 이렇게 훌륭한 뜻을 지닌 이(夷)즉, 맏형이고, 우두머리인 백이(伯夷)들은 광명(光明)을 숭배하는 민족으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광명 즉 해를따라 계속 이동했기때문에 이 백이에게 동이(東夷)라는 명칭이 붙었다. 따라서 우리 한(韓)민족을 정의 하면, 고산족이면서 동북아시아에서 유목생활과 사냥을 하면서 농사를 짓고살던 장자, 즉 장손으로 광명(해)를 숭배한 민족으로 동쪽으로 계속 이동해온 하늘에서 내려온 활을 잘 다루는 지금으로부터 약 11,000년 부터 살고있던 민족이다. 때문에 한민족보다는 “동이배달한민족”이라 명명해야 옳다.
● 동이(東夷)가 인류의 뿌리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이런 기록이있다.
東邦曰夷 夷者柢也(동방왈이 이자저야)“동방에있는 동이들이 인류의 뿌리다.”言仁而好生(언인이호생)“말이 어질고 젊잖은 도덕군자다.”萬物柢地而出(만물저지이출)“만물이 땅밑에있는 뿌리에서 자라나듯이 동이들이 만인류의 철학사상의 뿌리다.”( 본문해석은 율곤 이중재 선생 저서에서)
천(天), 지(地), 인(人) 삼원일체(三原一體) 사상이 동이배달한민족 (東夷倍達韓民族)의 우주철학사상(宇宙哲學思相)이다. 우리 민족은 하늘에서 시작된 민족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식이란 뜻에서 천자(天子)라 하고, 천손족(天孫族)이라한다. 지나(支那)의 채옹(蔡邕)이란 사람이 쓴 < 독단獨斷>이란 저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있다. 天子夷狄之所稱 父天母地 故稱天子(천자이적지소칭 부천모지 고칭천자) "천자는 이적(동이東夷)의 명칭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기 때문에 천자(天子)라 한다.”
● 한국(桓國: 환국)은 최초의 나라
이들 동이배달한민족은 경도 80도 서쪽인 파미르고원( The Pamirs)을 떠나 동쪽으로 계속 이동하여 BC 8936년에 흑수(黑水)와 태백(太白)사이, 현 흑룡강성(黑龍江省) 하알빈밑 완달산(옛날에는 파나류산임)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환국(桓國)을 세워 5,038년간 존속했다. 당시 환국의강역은 남북 5만리 동서 2만리로, 12연방국을 가지고 있었던 정통국이였다.
● 배달국과 단군조선
BC 3898년 음력 10월 3일에 환웅천황(桓雄天皇)이 배달국(倍達國)이라는 나라를 세워 1,565년간 실존했던 두번째 등장한 우리조상이 세운 나라다. 배달 (倍達)이란 도(道)를 통했다는 뜻이다. 어떤 사서(史書)에는 배달은 “ 밝다”“ 밝은”의 뜻이라고도 해석 한 학자들도 있다. 필자는 둘다 옳다고 생각한다. 무진년인 BC 2333년에 환검 (왕검)단군께서 아사달( 이두어로 새로운땅, 새로운 산으로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에 도읍(都邑)을 정한후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고 47대 단군들이2,096 년 동안 통치하던 나라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에의해 고조선(古朝鮮)의 이름으로 신화(神話)라고 비하(卑下)했지만 단군조선은 실존했던 국가이다.
● 민족사의 역사역년(歷史歷年)
2011년 현재를 기준하여 동이배달한민족사의 역사 역년(歷年)은 환기(桓紀: 환인 부터): 1094년, 배달기(倍達紀: 환웅천황 부터):5909년, 치우기(蚩尤紀: 치우천황부터): 4,738년, 단기(壇紀: 단군왕검 부터): 4,344년 이다. 앞으로 우리 한민족(韓民族) 즉, 동이배달한민족사(東夷倍達韓民族史)의 역사역년은 배달기(倍達紀)인 5,909년을 사용해야 옳다. 신시개천(神市開天; 나라를 다스리기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이 BC3898년 음력 10월 3일이며, 환웅시대(桓雄時代)인 배달국(倍達國)의 역사기록이 여러 사서(史書)에 언급되어있는데 반하여 환국(桓國)에 대한 기록은 많지않아 더 연구해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음력 10월 3일을 동이배달한민족의 설날로 지정하고 이날을 기념해야 한다. 유태인들은 한 해의 시작 (그들의 설)을 10월로 하고있다. 우리 동이배달한민족의 문화가 그들에게 전파된 것으로 보여진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은 현재도 진행되고 있다
제후국(諸侯國)이였던 주(周)나라가 자신의 상국(上國)인 은(殷: 상)나라를 멸 (滅)하므로서 지나(支那: 많은 가지의뜻으로 중국의옛이름)는 지축(地軸)이 흔들 리는 대 변화가 일어난다. 서백창( 주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주나라를 일으키 고 동생 주공단(周公旦)에게 노(盧)나라를, 동생 소공석(召公奭)에게 연(燕)나라를, 숙선(叔鮮)에게 관(管)나라, 숙도(叔度)에게 채(蔡)나라, 그리고 강태공(姜太公) 에게 제(齊)나라를 주어 제후(諸侯)로 삼는다. 이들은 모두 황하강 (黃河江) 아래 하남성(河南省) 안에 한정되어 있었던 아주 작은 나라들 이다.
• ‘춘추필법’이란 말의 유래
당시 그들의 땅은 50리에서 100리 정도에 불과한 나라였다. 당시 노(魯: BC722-BC662) 나라의 연대기(年代記: 중요한 사실을 연대의 순서에 따라 기록함) 를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라는 이름으로 다시 편찬(編纂)하면서 ‘춘추필법’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자(孔子: BC551-BC479)란 사람이 노(魯: 하남성에 있었음)나라에서 아버지 숙량흘 (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의 아들로 태어난다. 숙량흘이 70세때 공자를 낳고 72세에 세상을 뜨니 이때 공자는 3살이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나이가 많은 선생밑에서 배웠다 고 한다. 공자가 14세때는 어머니마저 사망하여 홀홀 단신 고아가 된다. 17세때 말단 관리(官吏)가되어 일하면서 노(魯)나라 대학 (大學)에서 주공단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시경詩經>과 <서경書經>를 공부한 것으로 되어있다.
공구(孔丘: 공자의 이름)가 <춘추>를 쓰면서, 노 나라의 환공(桓公)이 은공(隱公: BC722-BC712)을 살해(殺害)하고 왕(王)이된 사실을 감추고 기록하지 않았고 소공(昭公: BC541-BC510)이 신하인 계씨에게 쫒겨난 사실도 숨기고 기록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자신의 나라인 노(魯)나라의 수치(羞恥)를 감추기 위한 것이였다. 爲國諱恥 尊華壤夷 詳內略外 ( 위국휘치 존화양이 상내략외 ) “ 자국을 위하여 수치를 감추고 지나는 높히고 동이는 깎아내리며 지나의 역사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남의 역사는 간단하게 기록한다.” 이러한 사상(思想)이 공자(孔子)의 <춘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서 ‘춘추필법’이란 말이 유래(由來)된다.
• ‘춘추필법’의 실상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예를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주천자(周天子)(주나라 왕)가 정후(鄭候: 정나라인 제후국)의 화살을 맞고 다친일을 기록하지않았고
(2)송(宋)나라 태종(太宗)이 거란(契丹)과 싸우다가 화살에 다친 사실을 기록하지않고
(3)한(漢) 무제(武帝)가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그곳에 낙랑, 진번, 임둔, 현도, 한사군
(漢四郡)을 만들었다는 <한서: 반고>의 허위 기록과
(4)<사기>의 武王奉箕子于朝鮮 (무왕봉기자우조선 )“무왕이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 는‘봉작설封爵說’의 허위 기록
(5)한(漢)무제가 위만조선이 망한 BC107년부터 BC98년까지 고구려(高句麗) 6대 태조대왕궁(太祖大王宮)과의 9년 전쟁에서 고구려에 참패(慘敗)한 사실을 감추고 기록하지 않은 것.
(6)“단군조선 23대 아홀단군(阿忽壇君) 을유2년인 BC1236년에 은(殷)나라 27대 무을(武乙)왕을 벌하기 위하여 은나라 성책을 부수고 회대(淮岱: 하남성, 안휘성, 강소성 일대)땅을 평정하고 엄(淹), 서(徐), 회(淮)땅을 제후로 봉하였다.”는 기록을 사마천의 <사기>에는, “ 帝武乙無道 爲偶人 謂之天神 天神不勝 乃僇辱之 武乙獵於河渭之閒 暴雷 武乙震死(제무을무도 위우인 위지천신 천신불승 내륙욕지 무을렵어하위지한 폭뢰 무을진사) 은나라 무을왕은 황음무도(荒淫無道: 주색에 빠져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하지않음)을 좋아해 천신을 모독하고 무도(無道)한 짓을 서슴치 않았다. 어느날 황하 (黃河)와 위수(渭水)로 사냥을 나갔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다.”라고 당시 사실을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진실을 감추고 빙빙 돌려서 은유적(隱有的) 으로 치사(恥事)하게 표현한 것. 여기서 천신(天神)은
단군조선(壇君朝鮮)이며 벼락맞아 죽은것은 전쟁중에 죽은것이다.
(7)당(唐)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안시성(安市城) 전투에서 고구려(高句麗) 양만춘 (楊萬春) 대장군의 화살에 눈알이 빠진 사실을 숨기고 이질, 늑막염으로 죽었다고 허위 거짓 기록한 점.
(8)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성인 ‘연(淵)’씨를 당나라X들이 천개소문(泉蓋蘇文) 으로 기록하여‘천(泉)’씨로 둔갑시켜 놓은 일.
(9) 당 나라가 고구려 장군 대중상(大仲象)을 걸걸중상(乞乞仲象)으로, 그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을 걸걸조영(乞乞祚榮)으로 대(大)씨성을 당시 말갈족의 성씨인 걸걸(乞乞)로 바꿔 고구려(高句麗) 후손을 말갈족(靺鞨族)으로 사서(史書)에 기록한 일.
(10) 당(唐)나라가 713년에 일방적(一方的)으로 대진국(大辰國) 황제(皇帝) 대조영(大祚榮)에게 ‘좌효위대장군 발해군왕겸 홀한주도독’이란 벼슬을 주었다고 사서에 엉터리로 기록하여 ‘발해(渤海)’란 국호(國號)를 임의로 만든 것
(11)단군조선(BC2333-BC237), 고구려(BC231-668), 백제(BC213-660), 신라(BC57-918), 대진(발해)(698-957), 고려(918-1392)의 역사(歷史)와 관련된 산서성(山西省)에 있던 모든 지명(地名)을 명(明)나라때 하북성(河北省) 으로 모두 옮겨놓고 지명조작(地名造作)한 점. 하북성(河北省) 에 있는 현재의 진황도 (秦皇島)와 산해관(山海關)은 한마디로 가짜임.
(12) 명(明)나라가 역사를 왜곡(歪曲)하기 위하여 있지도 않은 사실을 날조 (捏造)하여 <삼국연의; 삼국지>, <수호전>, <열국지>등 엉터리 역사소설 (歷史小說)을 만든것. 소설 ‘삼국지’는 중국의 사대사서(四大史書) 중의 하나로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와 내용이 많이다름.
(13)근세 청(淸)나라가 영국, 러시아등 서양(西洋)의 나라들과 교류(交流)할때 某國稱臣奉貢(모국칭신봉공) “모국이 신하를 칭하고 받들며 조공을 했다.”는 식으로 허위 기록한 점.
(14) 1912년 중화민국(中華民國) 건립후 일본과 합세하여 1926년 부터 본격적인 역사왜곡 (歷史歪曲), 지명조작(地名造作)한 것. 일제(日帝)에의해 지나대륙의 지명이 한반도로 옮겨지고 지나(支那)는 우리 역사와 관계되는 많은 지명(地名)을 다른 이름들로 수없이 바꾸고있는 점.
(15) 동이(東夷)의 이(夷)자는 본래 하늘(一)에서 내려온 활(弓)을 잘 다루는 사람(人)이란 뜻으로 천자(天子)나 천손족(天孫族)을 뜻한 것이며, 이 이(夷)자는 ‘동이 이(夷)’자로 해야 옳은데 ‘오랑캐 이(夷)’라고 비하(卑下)한 점.
(16)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원래 이름은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며 2002년 2월 부터 중공 공산당 정부가 직접 실시한 3조원의 예산을 투입한 5개년 계획으로 2006년에 이미 완성된 프롸줵 (Project)이다. 동북공정은 우리 동이배달한민족(東夷倍達韓民族)의 역사인 고구려, 대진국(발해)의 역사를 지나(支那)의 것이라고 조작(造作), 날조(捏造), 왜곡(歪曲)한 것이며 우리땅 간도(間島)( 흑룡강성黑龍江省, 길림성吉林省, 요녕성遼寧省, 연해주沿海州)를 되돌려 주지 않으려는 고도의 술수(術數)라는 것.
(17) 내몽고 적봉시(赤峰市)에서 배달국(BC3898-BC2333)과 단군조선(BC2333-BC237)의 것으로 추정되는 적석묘(積石墓)와 많은 유물(遺物)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홍산문화’라 한다. 홍산문화(紅山文化)는 황하문명(黃河文明)인‘앙소문화仰韶文化’보다 1,500년이 앞선 문화(文化)라 한다. 발굴(發掘)된 이 유물들은 분명히 동이(東夷)의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탐원공정探源工程’ 이라하여 우리 동이배달한민족 (東夷倍達韓民族)의 문화 문명을 자신의 것이라고 조작하고있는 점.
• 한국도 정부차원서 대처해야
이 밖에도 허위 엉터리 기록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비록 거짓으로 조작, 왜곡, 날조한 기록이라 할지라도 세월(歲月)이 흘러 60년 100년이 지나면 그 엉터리가 바로 정사(正史: 바른 역사)가 되는 것이다. 지나인(支那人)들은 그 원리(原理)를 너무나 잘 알고있다. 그들의 역사 (歷史) 기록을 보면 지금까지 그런식으로 해왔었기 때문이다. 더 늦기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민간차원(民間次元)이 아닌 정부차원(政府次元)에서 동북공정 에 대처해야 한다. 동북공정, 탐원공정, 이들 모든 공정은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연속인 것이다. 지금 이시간에도 춘추필법(春秋筆法)은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事實)을 잊지 말아야 하며 지나의 사서(史書)를 읽을때는 반드시 춘추필법(春秋筆法)에의해 쓰여진 점을 감안(勘案) 하여 해석(解釋)하여야 한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은(殷: 상商)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달기(妲己)라는 미희(美姬)와 놀아나 정사(政事)를 돌보지않고 매일 술로 방탕한 세월을 보낸다. 주지육림 (酒池肉林)이라하여 연못을 파서 그곳에 술을 가득 채우고, 나무 가지에 고기를 매달아놓고, 술과 고기로 배를 체우면서 매일같이 향락(享樂)만을 즐겼다.
● ‘기자’는 누구인가?
주왕에게는 숙부(叔父: 작은 아버지)가 2사람 있었는데, 한사람은 비간(比干)이고 또 한사람은 기자(箕子)이다. 그리고 이복(異腹: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름) 형제인 미자(微子)란 사람이 있었는데, 공자(孔子)는 이 세사람, 비간, 기자, 미자를 은삼인(殷三仁), 즉 은 나라의 인자(仁慈)한 세사람이라고 한바있다.
은나라 마지막 주왕(紂王)이 이렇게 정사를 돌보지 않고 술과 계집으로 방탕한, 타락된 생활을 하자, 숙부인 비간이 3일동안 식음을 전폐(全閉)하고 조카인 주왕에게 잘못을 간(諫: 임금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말함)하자, 주왕은 비간더러,“너의 심장은 보통 사람의 심장과는 다른 성인(聖人)의 심장이 분명하다. 내가 그것을 확인해보겠다.”라고 하고, 비간(比干)을 죽여 심장을 갈기 갈기 찢는 패륜(悖倫)을 저질렀다. 주왕은 포락지형(炮烙之刑)이라는 형벌을 가했는데, 포락이란 불에 달구어진 동(구리)으로 만든 기둥을 숯불위에 걸처놓고 달구어진 그 기둥위로 걸어가도록 한 형벌이다. 이토록 정치가 타락으로 극에 달한 은(殷) 나라는 주(周)나라에 의해 기묘년인 BC 1122에 망한다.
주(周)나라 무왕은 재위 11년에 5천 군사(軍士: 군인)로 은(殷)나라를 멸한다. 당시 은나라는 황하북부 하남성(河南省) 기현에 있었다. 주나라가 처들어오자 주왕은 자살하는데, 무왕(武王)은 자살한 주왕의 시체에 화살 3개를 꼽고 주왕의 목을 잘라, 주왕의 목을 백기(白旗: 흰깃발)에 메달므로 은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주(周)나라는 은나라의 제후국이였지만, 단군조선(壇君朝鮮)때문에 제후국에게 망하게된다. <시경 詩經>과 <맹자 孟子>의 기록에, “상지손자기려불억 상제기명후우주복 (商之孫子其麗不億 上帝旣命候于周服) 상의 손자들은 수없이 많았으나 상제(단군조선의 단군을 뜻함)가 명(命)을 내려 주나라에 복종하게 하였다.”란 뜻이다.
은(殷)나라가 망하고 주(周)나라가 일어서면서, 주나라 무왕(武王)은 당시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箕子: 은나라 주왕의 숙부)를 감옥에서 풀어준다. 이때 감옥에서 풀려난 이 기자가 단군조선(壇君朝鮮)으로 망명하여 단군조선에서 왕이되었다는 것이 기자조선의 실체이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란 말이 나오게된 동기는 한(漢)나라때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에 근거한 것이다. <사기>를 인용하면,“ 무왕봉기자우조선 (武王封箕子于朝鮮)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였다.”는 기록때문이다.
● 기자조선은 왜 허구인가?
기자조선이 허구(虛構)임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서漢書>를 지은 반고(班固)는 무왕의 봉작설을 쓰지않았다. <한서>의 기록을 보면, 있지도 않은 내용도 살을 붙여 <사기>보다 더 자상하게 기록된 곳이 많다. 주나라 무왕의 ‘기자봉작설’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대 사건이였다. 그토록 중차대한 사건을 기록하지않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기자봉작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 남송(南宋)때 범엽이 지은 <후한서> ‘동이열전’의 기록에, 昔箕子違衰殷之運 避地朝鮮 ( 석기자위세은지운 피지조선) “옛날 기자가 은나라의 운(運)이 다하여 조선으로 피했다.”라고 되어있다.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했다는 말은 없다. <후한서>는 지나(중공)의 4대 사서(史書)의 하나다.
세째: 공자(孔子)의 7대손인 공빈(孔斌)이 지은 ‘동이열전’에 의하면,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 은태사기자유불신어주조지심 이피거어동이지) “은나라 큰스승 기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않고 동이땅 (단군조선을 뜻함)으로 피신해 살았다.”라고 되어있다. 기자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던 은(殷)나라의 신하로, 은(殷)나라가 망하자 단군조선(壇君朝鮮)으로 피신한 것이다. 여기서도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는 기록은 없다.
네째: 기자가 은(殷)나라의 감옥에서 단군조선에 망명한 때는 BC1122 년경이다. 당시 단군조선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변한(弁韓)으로 나뉘어 있었던 때이다. 단군조선의 변한(弁韓: 번조선) 에서 기씨(箕氏)가 왕 노릇한 것은 변한왕 74대중 69대인 기후씨(箕詡氏: BC390), 70대 기욱씨(BC346), 71대 기석씨 ( BC321), 72대 기윤씨(BC296), 73대 기비씨(BC277), 그리고 74대 기준씨(箕準氏: BC243)로 기자(箕子)로 부터 기후씨까지는 약 730년의 연대차이가 난다. 다시말하면, 기자가 단군조선 즉 변한(번조선)의 왕이된 것이 아니고 , 기자가 단군조선에 망명한후 약 730이 지난후에, 그의 후손인 기후씨가 변한의 69대 왕이된 것이다. 따라서 기자(箕子)가 조선(朝鮮)의 왕이된 사실은 없다.
다섯째: 기자를 다른 이름으로 서우여(徐于餘)라고도 한다하는데, 만약 기자의 이름이 서우여이기때문에 ‘기자조선’이란 말이 나왔다면, 그것은 동명이인 (同名異人)으로 역사의 기록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한단고기>의 기록를 보면, 단군조선 제21대 소태단군(蘇台壇君: BC 1337)이 나이가 많아 어지러워진 국정을 감당할 길이 없어, 종친인 서우여에게 국정을 맡기려했다. 제22대 단군(壇君)이된 색불루(索弗婁)단군(BC1285)의 반란으로 좌절된다. 이 서우여는 단군조선 (진한)의 19대 종년단군(BC1435)의 동생인 청아왕 종선의 증손으로 색불루에게 반기를 들어 군사를 일으키려고하자, 색불루는 서우여에게 변한을 다스리는 권한을 줄테니 싸움을 그치자고했다. 서우여가 이 제안을 받아들여 변한 (변조선)의 30대 왕이된다. 이때가 BC1397년의 일이다. 변한의 30대 왕인 서우여(徐于餘)는 기자(箕子)가 아니다. 동명이인(同名異人)이며 약 163년간의 연대차이가 난다.
여섯째: <서경書經> ‘홍범편’에 은(殷)나라 기자(箕子)가 주나라 무왕(武王)에게 잘못을 고치도록 말한 글로써, “天乃錫禹洪範九疇(천내석우홍범구주) 천(天: 왕검 단군)으로부터 하나라 우왕이 신서(神書)인 홍범구주, 즉 9가지 규범을 받았다.”라고 되어있어, 주(周) 무왕이 홍범구주를 배척하므로 기자가 무왕과 변론하고 기자의 조상이 살던 번조선(番朝鮮: 변한)땅으로 도망간 것이다.
당시 번조선(변한)땅은 현 산서성(山西省)이며 기자(箕子)의 선조가 살았다는 곳은 산서성(山西省: 단군조선의 중심지)에 있는 태행산(太行山) 부근이다. 다시말하면 기자의 선조 역시 단군조선의 백성이였다. 기자가 조선으로 도망한 것은 자신이 살고있던 은나라가 은(殷)나라의 제후였던 주(周)나라에 망한 동시에 은나라 국교(國敎: 한 나라의 근본 종교)인 “수두교”가 주나라 무왕에의해 압박을 받으므로 “수두교”의 종주국(宗主國)이며 조국(祖國: 조상의 나라)인 단군조선 (壇君朝鮮)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周)의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封: 임명)했다는 <사기>의 기록은 진실 (眞實)이 아니며,“기자조선이 있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짖말이다.
● 위만에게 쫓긴 기준의 변신
번조선(番朝鮮: 변한) 땅에 대대로 살던 기자(箕子)의 35대 후손인 기후(箕詡)가 쿠테타(Coup d’etat:무력정변)로 번조선 왕이되어 6대를 내려가 기준(箕準)에 이른다. 연(燕: 황하아래 하남성河南省에있던 아주작은 나라)나라 왕 노관(盧綰)이 한(漢)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망명할때, 노관의 부하인 위만(衛滿)이란 자가 번조선에 망명을 요구했으나 단제(壇帝: 북부여 해모수)께서 허락하지않았다. 그러나 변조선왕 기준이 실수하여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고 상.하 운장을 떼어 위만에게 봉(封)했다. 강도(强盜) 위만이 망명온지 불과3년만에 번조선을 멸망시킨다. 이때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쫓겨 한(韓: 마한)의 땅에서 한왕(韓王)이 되어 자신의 성(姓)인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꾸고, 자신의 40대 조상인 기자(箕子)를 문성대왕으로 추존하며, 모든 기씨(箕氏) 조상을 한왕(韓王)으로 추존(推存: 추앙하여 존경함)한다. 그리하여 기준(箕準)은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始祖)가된다. 청주(淸州)는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가아니고, 지나대륙 산서성(山西省) 상당으로 현 장치시(長治市)이다. 이렇게 추존된 기자(箕子)와 청주한씨 후손들이 이씨조선의 사대주의자 (事大主義者) 들과 함께 엉터리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만들게된다. 그후 일본X들과 일제 식민사학자 들에의해 동이배달한민족사 (東夷倍達韓民族史)가 왜곡 날조된 것이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