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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충청연회 감리사 해외연수를 다녀와서 (5월 30일 - 6월 9일)
충청연회 홈피에 올렸던 여행기를 카페에 옮겨 보았습니다.
여행국가 : 독일 - 체코 - 폴란드 - 슬로바키아 - 오스트리아 - 슬로베니아 -
크로아티아 - 오스트리아 - 독일
글쓴이 : 전종태
첫째날(5월 30일)
새벽기도를 마치고 짐을 챙긴 후에 곧바로 당진 신터미널로 갔다. 마침 먼저 와서 기다리던 당진서지방 송천기 감리사 부부와 함께 우리 내외는 반갑게 수인사를 나눈 후에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잠시 조는 듯하였는데 어느새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인천공항에 도착하였다. 약속된 시간과 장소에 감독님 내외를 비롯하여 감리사 내외분들이 속속 도착하였다. 가이드의 안내와 함께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에 짐을 먼저 부치고 잠시 후 오전 12시 30분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졸음이 오기 시작하였다. 비행시간은 11시간 30분이었다. 도착시간 한국 시각으로는 밤 12시 50분 현지시각으로 오후 5시 50분, 예정시간보다 50분 정도 늦게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비행기가 도착하였다. 처절한 검색대를 통과한 후에 마침내 독일에 입국하였다. 그런데 쉴 새도 없이 곧바로 남부 뉘른베르그라는 도시로 4시간 동안을 이동하여 호텔에 도착하였다. 호텔에 여장을 풀기가 무섭게 잠을 청하였다. 독일과 한국의 시차는 -7시간이었다. 시계를 반대로 7시간을 되돌려 놓은 후에 잠을 잤다.
둘째날(31일)
아침 6시 30분 모닝콜 소리를 듣고는 간신히 일어나 보니 고국에서는 벌써 오후 1시 30분이었다. 아이쿠 새벽기도 시간이 지났구나! 그래도 잠시 아내와 함께 새벽기도 아닌 새벽기도를 하였다. 첫날은 이렇게 정신없이 지나갔다. 잠시 기도시간을 가진 후에 곧바로 짐을 꾸려야만 하였다. 오전 8시 30분에 또다시 체코 프라하로 출발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호텔식으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한 후에 버스에 몸을 실었다.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까 5시간이나 걸려 체코 프라하에 도착하였다. 체코는 크리스탈로 유명한 나라였다. 중세 종교전쟁이 이곳 체코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30년 전쟁이 끝나게 된 곳도 이곳 체코였다. 체코 인구의 35%가 카토릭이고 3~5%만 개신교인이라고 한다. 1600년 초반 15세기 말에만 하더라도 대부분이 개신교였는데, 1621년 체코의 페르디난도 왕 때에 30년 종교전쟁으로 인해 “카톨릭을 믿든지 아니면 체코를 떠나라”고 개신교를 핍박하여, 지금은 35% 이상이 카토릭 교인이라고 한다.
오전에는 프라하 신시가지의 최대의 번화가인 바슬라프 광장과 체코의 카를 4세가 1406년에 완성한 당대 최고의 토목물인 카를브릿지(다리), 예술적 치장으로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비트성당의 외관을 돌러 보았다. 그리고 카를 브릿지를 건너 구시가지로 가서 시계탑과 체코의 종교개혁자인 얀후스 동상 앞에서 간단하게 사진을 찍고는 현지식으로 저녁을 떼우고는 호텔로 왔다. 몸이 지칠대로 지쳤다.
오랜시간 비행기를 타기도 하였지만, 애매한 시차를 적응하기도 전에 계속되는 투어 스케줄 때문이다. 또다시 무거운 가방을 방으로 옮기며 몸을 씻고는 잠을 청한다. 이번에는 잠이 잘 오지를 않는다 몸은 몸시 피곤한데도... 이번 감리사 부부 해외연수는 그래서 연수인 모양이다. 다음 날이면 폴란드로 이동하여 오이비엥칭이라는 곳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는 신들러리스트라는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유대인 포로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는 곳이다. 부부가 함께 손을 맞잡고 교회와 성도들 가정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하고 있는 일행들을 위해 기도하고는 잠을 청한다. 몸은 몹시 피곤한데도 깊은 잠이 오지를 않는다. 그래도 잠을 자야지...
셋째날(9월 1일)
벌써 해외연수 셋째날이다. 모닝콜 소리를 듣고 잠이 깼다. 오늘은 현지 시간으로 오전 7시 30분에 출발하여 버스로 6시간을 이동하여 체코 국경을 넘어서 폴란드 오이비엥칭까지 간다. 장시간 버스로 이동하게 되어서 의미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는 여론에 따라 감리사들이 돌아가면서 각자의 삶과 목회에 대해서 소개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20분에서 30분 정도로 자신의 걸어온 삶과 목회에 대해서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어석하게 여겨서 조금은 재미있는(?) 이야기 위주로 나가다가 어느 덧 진지하고 은혜로운 분위기로 간증이 되었다. 가이드가 먼저 체코 프라하에 얽힌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한 후에 감리사들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오이비엥칭에 거의 가까이 갈 때까지 간증이 이어졌다. ‘나는 나가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내 순서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함께 웃기도 하고,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면서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다시 가이드가 마이크를 잡고 폴란드와 오이비엥칭에 대해서 소개하기 시작했다. 오이비엥칭이라는 지명은 폴란드식 이름이다. 세계 제2차대전 당시 독일군들이 이곳을 점령하고는 이곳의 이름을 아우슈비츠라고 불렀으며, 이곳에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어느 덧 버스는 이곳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했다. 첫눈에 잔혹한 과거를 말해주듯 왠지 음침하고 절망적인 수용소의 모습에 마음이 침울해진다. 이중으로 쳐진 전기 철조망, 붉은 벽돌 수용소 건물들 ...!
이곳은 1994년 미국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거 감독이 이곳을 배경으로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를 제작 방영함으로 더욱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영화를 전에 본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시류에 맞춰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는 기회주의자 오스카 쉰들러라는 한 독일인이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 공장을 인수하기 위해 나찌 당원이 되고 독일군에게 뇌물을 바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그러나 쉰들러는 유태인 회계사인 스턴과 친분을 맺으면서 냉혹한 유태인 학살에 대한 양심의 소리를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게 될 유태인들을 구해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독일군 장교에게 빼내는 사람 숫자대로 뇌물을 주는 방법으로 유태인들을 구해내려는 계획을 세우고 스턴과 함께 구해낼 유태인들의 명단,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를 만든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무려 1,100명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빼돌리는 일을 한다. 폴란드에 있는 독일군 무기도금 공장에서 일을 시킨다는 명분으로. 숸들러는 있는 재산을 다 쏟아 유대인 한명 한명을 돈으로 빼낸다. 그리고 그 공장으로 보낸다. 그는 그렇게 하여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무참하게 죽게 된 유대인들을 구해내게 된다. 2차대전 끝인 1945년, 공장에서 일하던 유대인들은 마침내 자유인이 되는 감격을 맛보게 되었다. 극적으로 살아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금니를 뽑아 쉰들러에게 감사의 반지를 만들어 준다. 반지를 전해주는 한 유대인이 반지에 새겨진 글을 설명한다. 탈무드에 나오는 격언이다. “한 사람을 구함이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반지를 받은 쉰들러는 그 반지를 자기 손에 끼면서 괴로운 듯 이렇게 흐느낀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거야! 어쩌면 더 살릴 수도 있었을거야! 좀 더 구할 수 있었어! 너무 많은 돈을 낭비했어...” “왜 이 차를 커트한테 팔지 않았지! 열 명은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이 배지를 보게. 금배지이지 않나, 최소한 두 사람은 더 구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 반지를 팔았다면, 한사람은 더 구할 수 있었을텐데...!” 전도할 때에도 이런 마음을 갖고 전도를 한다면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었을까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 역사는 결코 잊어서도 안되고 잊을 수도 없는 것을 이번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돌아보면서 느낀 점이다. 폴란드 정부는 2차대전 당시의 처참한 수용소의 모습을 그대로 잘 보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을 높이 평가하여 유네스코에서도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고난의 역사의 현장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아직 그 역사적인 흔적들을 보존하는 데에는 많이 미흡하다고 아쉬움이 드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이제 우리 일행은 수용소를 뒤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돌려 유럽 최초의 지정 문화도시로서 많은 관광자원이 보존되어 있는 폴란드의 옛 수도였던 크라카우라는 도시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얼마나 갔을까, 놀랍게도 그 옛날 중세 대때 건물들과 도시 풍경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크라카우라는 도시가 한 눈에 들어왔다. 먼저 현지식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후에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바벨성의 외관을 둘러보고는 단체로 사진을 찍었다. 옛날 모습이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도시일수록 유네스코에서 관리하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자동차에서 내려서 working-Time(걸으면서 관광)을 하게 되는데 도보로 성을 한 바퀴 돌고는 중앙광장으로 들어섰다. 저녁 때가 되어 식당으로 가서 폴란드의 유명한 요리인 콜롱카라는 음식으로 요기를 하고는 곧바로 호텔로 들어가서 여장을 풀었다. 우리 부부는 하루 종일 버스 타고, 걷고, 타고 계속되는 강행군에 지치면 안되는데 하면서 스스로을 달래면서 여기까지 무사히 인도해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제 서서히 시차가 적응이 되는 것일까? 샤워를 하고 눕자마자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넷째날(2일)
오늘 아침은 현지 시각으로 오전 5:30분에 일찍 잠이 깼다. 아직 모닝콜이 울리기까지는 1시간이나 남았다. 어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경험으로 혹시 간밤에 악몽을 꾸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지만, 다행히 깊은 잠을 자고나니 피로가 싹 가신 것 같다. 새벽마다 주의 종의 부부가 여행을 편안히 잘 다녀올 수 있도록 중보기도하고 있을 성도님들이 떠올랐다. 물론 고국의 시간으로는 이미 낮 12시 30분이다. 잠깐 부부가 손을 맞잡고 고국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 가정 그리고 우리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오늘 하루의 투어일정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도록 기도하였다.
호텔식으로 아침을 먹고는 이내 버스에 몸을 싣고는 역시 폴란드의 비엘리치카라는 곳에 있는 소금광산으로 이동하였다. 이 소금광산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지금은 폐광이 되었지만 한 때는 엄청난 양의 소금을 채굴한 곳이기도 하다. 폐광이 된 후에 그곳에서 일하던 광부들에 의해서 순전히 리모델링 되어서 아름다운 지하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지하 135m를 엘리베이트를 타고 내려간 후에 약 2시간 30분 동안을 걸어서 얼마나 더 들어갔을까? 깜짝 놀랄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에는 아름다운 샹드리에가 불을 밝히고 있는 넓은 광장이 있었고 카페를 비롯하여 갖가지 기념품 상점들이 즐비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일행은 그곳에서 단체로 사진을 찍고는 광부들이 일을 마치고 광산 밖으로 나갈 때 한꺼번에 5-6명 정도 타고 다녔던 광부용 엘리베이트에 타고 밖으로 나왔다.
중식 후에는 폴란드 국경을 통과하여 약 4시간 정도 버스로 동유럽의 알프스로 불리워지는 슬로바키아의 타트라는 도시로 이동하여 곧장 숙소인 콜로바르트 호텔에 도착하여 가볍게 호텔식으로 저녁을 떼우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호텔 베란다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만년설의 모습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그 광경을 한참 바라보고 있노라니 하루의 피로가 싹 가시는 듯하였다. 대충 짐을 미리 꾸려놓고는 샤워를 하고는 쉬고 있는데, 후배 감리사님들이 방으로 들이닥쳤다. 우리 방에 커피포트가 있기 때문이다. 컵라면과 믹스 커리를 미리 준비해온 보람이 있었다. 컵라면과 커피를 나누면서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갖고는 뿌듯한 맘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섯째날(3일)
오늘은 숙소가 있는 타트라에서 버스로 장장 5시간 이상을 이동하여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를 향하였다. 가이드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대한 안내가 잠시 있은 후에 우리 일행은 어제에 이어 감리사들이 돌아가면서 간증을 시작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다들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오늘날 목회자가 된 것처럼 보이는데... 왜 그리도 기구한 사연들이 많은지... 때로는 눈시울을 적시며 때로는 웃으면서 어느덧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였다.
헝가리는 한반도의 약 2/5의 크기이며, 인구는 약 1,000만명으로 로마카톨릭 인구가 67.5%이고 신교는 20%이며 나머지는 그리스 정교를 믿는다고 한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식집에서 점심 요기를 하고는 중세의 건축양식인 로마네스크와 고딕양식이 절묘하게 혼재된 독특한 양식의 어부의 요새를 관람하였다. 그리고는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로마네스크양식으로 건축된 성이슈트반 성당을 구경하였다. 내부의 화려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저절로 났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다. 헝가리를 독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소련병사들을 기념하여 세운 자유기념비와 영웅광장을 둘러보았다. 헝가리의 부다 왕국과 부다페스트를 사슬다리로 연결하고 있는 아름다운 다뉴브강에서는 유람선을 타고 다뉴브 강의 아름다움을 만끽하였다. 다뉴브강은 라틴어로 독일어로는 도나우 강이다. 유럽에서는 볼프강에 이어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요한 스트라우스(Johann Strauß) 2세가 작곡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 혹은 ‘다뉴브 강의 물결’로 널리 알려져 있는 강이다. 그런데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것은 버스가 강에 다니는 것이다. 관광을 목적으로 배의 외관을 버스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굴라쉬라는 헝가리 특식으로 저녁을 먹고는 근처에 있는 호텔에 투숙을 하였다.
여섯째날(4일)
다음날 아침, 버스로 4시간을 이동하여 음악과 예술의 도시인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이동하였다. 비엔나는 영어이며,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빈으로 통하였다. 카톨릭 인구가 90%이며 신교는 6% 남짓 된다고 한다. 오스트리아는 2차 세계대전으로 입은 피해가 매우 극심한 나라였다. 국토의 2/3가 알프스 산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역사가 매우 깊고 음악과 건축을 비롯한 문화. 예술이 매우 발달하였으며 특이할 점은 오스트리아 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으로 노벨상 수상자는 세계 5위인 나라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 나라 출신이라는 것도 이번에 알았다. 이 나라는 왈츠와 요들의 고장으로 낭만주의 음악, 바로크 음악, 궁정 음악 뿐만 아니라, 현대음악과 같이 전 분야에 수많은 걸출한 음악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수도 비엔나는 베토벤, 요한 스트라유스 2세, 슈베르트, 하이든의 활동지였으며,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의 출생지이자 활동지였으며, 폰 카라얀, 구스타프 밀러, 카를로스 클라이버와 같은 세계적인 지휘자도 배출하였다. 비엔나 필하모니오케스트라는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이다. 우리 일행은 오랜만에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러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하였다. 독일에서부터 동유럽 지역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음식이 매우 짜다는 것이다. 주식이 감자와 돼지고기였다. 나는 매끼마다 고추장을 의지하여 식사를 하였는데 오늘 점심은 안심(?)하고 먹을 수가 있었다.
식사 후에 우리 일행은 먼저 아름다운 정원이 양탄자처럼 펼쳐있는 셀부른 궁전을 둘러보았다. 이 궁전은 1619년 신성로마제국의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 도중 “아름다운 샘”(schononner brunnen)을 발견한데서 유래하여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이 궁전은 비엔나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으로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적인 건물이다. 궁전의 화려한 실내를 둘러보노라면 당시의 통치자들의 삶의 양식을 엿볼 수가 있었는데, 궁전의 화려함 뒤에는 단절과 고독의 흔적을 보게 되는 것 같아 결코 그들의 삶의 양식이 부럽지만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는 일찍 독일에게 항복함으로써 전쟁의 피해를 덜 받았고, 그 결과 수많은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서 잠시 예정에 없던 비엔나 시립공원을 찾았다. 시립공원 담장을 따라 가다보니 이 공원이 꽤나 나이 들었다는 걸 말하듯 아치형의 석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석문을 들어서자 탁트인 전경에 건물들 사이에서 답답했던 숨이 탁 하니 풀어진다. 색이나 장식은 제각각이었지만 길을 따라 심지어 높이까지 짜맞춘 듯 각진 빈 시내의 건물들만 보다가 녹음이 우거진 공원을 보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그래서 인지 공원 여기저기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다. 공원도심의 복닥복닥 숨막힐 듯 천편일률적인 형태의 건물들에 빈 시민들도 지치는지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나와서 휴식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벤치에 앉아 여름바람을 쐬며 책을 읽고 있는 사람, 한 손에 빨간 풍선을, 한손엔 금방이라도 줄줄 녹아내릴 듯한 아이스크림을 들고 방정맞게 뛰어다니는 아이, 그 뒤로 유모차를 밀며 아이야 뛰던 말던 자신들의 이야기에 푹빠진 부부, 강아지와 산책을 즐기는 노년의 남과 여,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하였다. 잠시 후에 멋스럽게 수염을 말아올린 황금빛 동상이 내리쬐는 여름 햇빛에 빛을 발하고 있었다. 빈 관광 자신에서 빠질 수 없는 곳, 오스트리아 동영상에서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곳 바로 시립공원 안에 있는 바이올린을 켜는 황금빛 요한 스트라우스의 동상이다. 왈츠의 황제 요한 스트라우스 1세다. 이 황금빛 동상을 보고 있으면 비엔나가 음악의 도시임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황금빛 요한 스트라우스의 동상이 있는 시립공원을 뒤로 한 채, 우리 일행은 고대 그리스 신전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 오스트리아의 국회의사당을 방문하였다. 의사당 건물 앞에는 지혜의 여신을 상징하는 아테네의 대리석상이 떡하니 서있었고, 여신은 왼손에 창을 들고 오른손에는 승리의 신 나케를 얹고 있는데 이는 지혜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발아래 샘물은 오스트리아를 흐르는 다뉴브, 인 엘베, 볼타바 등 네 강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이처럼 건물 하나를 건축하는데도 여러 가지 상징과 의미를 생각하는 오스트리아 인들의 예술성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일행은 다음날을 기약하고는 숙소로 발길을 돌렸다.
일곱째날(5일)
오늘은 주일이다. 비록 시차가 7시간이어서 제 시간에 새벽기도를 하지는 못하였지만, 우리 부부는 기상하자마자 아침 기도회를 가졌다. 어제 너무 많이 걸어서일까! 몸이 무겁게 느껴지지만 부랴부랴 짐을 챙기고는 떠날 채비를 하였다 오늘은 버스를 많이 타게 되는 날이라고 한다. 먼저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성을 투어한 후에 다시 버스로 국경을 통과하여 크로아티의 수도인 자그레브로 이동한다. 그라쯔 성과 자그레바는 크로아티아의 자랑거리인 폴리비체 국립공원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라고 한다. 그라쯔는 유명한 헐리우드 영화배우 였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역임했던 슈와츠 제너거가 이곳 출신이라고 하여 이곳 사람들은 자부심이 많다. 우리 일행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라쯔 성 전망대에 올라서 한눈에 구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마치 그림 속에 나오는 평화로운 도시를 보는 듯하였다. 우리 일행은 한인이 운영하는 중국점에서 점심을 하고는 그곳 야외에서 은혜롭게 주일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에 우리 일행은 곧바로 버스에 몸을 싣고는 국경을 통과하여 크로이디아의 수도인 자그레바로 향하였다. 후에 슬로베니아를 거쳐서 다시 이곳의 국경을 통과하여야 한다고 하는데, 오스트리아로 들어오는 국경 쪽은 차량들이 줄을 늘어서 있었는데, 우리가 가는 쪽의 국경이 아니라서 천만 다행이었다. 가이드의 말로는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발칸반도의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 쪽으로 많이 휴가를 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4시간 정도를 버스를 타고는 늦은 시간에야 자그레바에 도착하여 우리 일행은 곧장 호텔로 들어와서 여장을 풀었다.
여덟째날(6일)
간밤에 잠을 푹 잔 덕분일까! 아침에 기분이 상쾌하다. 여유있게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는 우리 일행은 자그레바를 출발해서 버스로 약 4시간 정도 걸려 폴리비이체에 도착하였다. 이곳의 자랑거리인 폴리비이체 국립공원이 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의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크고 작은 호수와 폭포, 야생동식물, 그야말로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공원이었다. 최근에는 수많은 유럽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이날도 국립공원이 발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많았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는 연신 카메라 서터를 눌러대게 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유명한 송어구이로 중식을 하고는 버스로 다시 4시간을 이동하여 크로아티아의 국경을 통과한 후 슬로베니아의 포스토니아로 이동하여 숙소로 향하였다.
아홉째날(7일
장시간 이동하였기 때문일까! 간밤에도 정신없이 단잠을 잔 것 같다. 너무나 상쾌한 아침이다. 멀리 말로만 듣던 알프스 산이 마치 병풍처럼 늘어서 있다. 아침의 기분을 갖고 우리 일행은 자연미술관이라고도 불리우는 토스토니아 야마 동굴을 관람하기로 하였다. 이 동굴의 총 길이는 20km로서 세계에서 가장 두 번째로 큰 종유석 동굴이라고 한다. 관광객들에게는 약 4km만 개방하고 있는데 감사하게도(?) 우리 일행은 약 2.5km를 6칸자리의 열차(청룡열차 비슷)를 타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1.5km를 걸어서 들어갔는데, 형형색색의 종류석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동굴 보호를 위해서 조명을 약하게 해서 사진을 찍어도 잘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이 동굴에는 프로메테우스(일명 인면어)라고 하는 도룡농이 살고 있는데, 크기는 20~30cm정도이고 몸 전체가 투명하였다.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동물이라고 하였다. 이놈의 정면 얼굴 생김새가 마치 사람의 얼굴을 닮았다고 하여 인면어라고 하는데, 그렇게 생각해서 일까 정말 사람의 얼굴처럼 보였다. 동굴 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조금은 쾌쾌한 냄새로 역겨움을 조금 느꼈는데, 다시 열차를 타고 나올 때에 너무 상쾌하였다.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로 1시간 30분을 이동하여 줄리앙 알프스의 진주라 불리우는 블래드 호수의 아름다운 전경을 배경으로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듯이 너나 할 것 없이 아름다운 호수와 호수 위에 자리잡은 블레드섬과 블레드 성을 배경으로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모차르트의 고향이며 사운드 오브 뮤직의 촬영지인 오스트리아의 짤즈부르그로 향하였다.
슬로베니아 국경을 넘어 4시간 정도를 왔을까 우리 일행은 짤즈부르그에 도착하였다. 알프스의 맨 북쪽 끝자락, 오목한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짤즈부르그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선 만년설 산을 배경으로 다소곳이 앉아 있는 자그마한 이 도시의 아름다운 도시에 반하게 된다. 도심에서 개울처럼 자그마한 짤자흐 강을 건너 구 시가지의 남쪽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호엔 짤즈부르그 성은 중세의 향기를 그대로 풍기고 있는 도시였다. 짤즈부르그는 직역하면 ‘소금의 성’이라는 뜻이다. 알프스는 수 천 만년 전 바다 밑바닥이 융기작용에 의해 위로 솟구쳐서 형성된 산악지대로서, 솟구칠 때 바닷물이 같이 따라 올라와 고인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굳어져 암염이 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소금을 채취해서 짤자흐 강을 따라 오는 배들을 해적질 하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룸으로서 형성되었다. 그 후 이웃 지방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소금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게 되었고 이곳의 영주이자 대주교는 소금을 채취하여 나가는 상인들에게 염세를 부과해 많은 부를 축적함으로서 높은 곳에 요새처럼 성을 만들고는 귀족들과 함께 이곳에 거주하며 이곳을 다스려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고 한다. 이곳 짤즈부르그는 모자르트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모짜르트는 생전에 2층 한 칸만 세들어 살았다고 한다. 2층에 문이 열려진 집이 바로 그곳이다. 지금은 모짜르트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모차르트는 또한 9살 때 이미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생전에 그는 무려 53개의 완전한 교향곡과 11개의 단편을 남겼다. 이외에도 많은 교회음악과 미사곡, 그리고 장송곡을 남겼고, 주옥같은 피아노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모차르트는 7살 때에 이곳 짤즈부르그에 있는 대성당에서 오르간을 연주하여 이미 그의 천재성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미라벨 정원으로 가서 아름다운 정원을 연신 사진에 담았다. 미라벨 정원은 볼프 디트리히 주교가 당시 평민의 딸이었던 살로매 알트를 너무 사랑하여 주교의 신분임에도 그녀와의 사이에 16명의 아이를 낳고 짤자흐 강 주변에 알텐아우라는 궁전을 짓고 행복하게 살았는데, 카톨릭 종교단체와 시민들의 반발로 결국 말년에 요새에 감금당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후대 주교들은 이 일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궁전과 정원 이름을 미라벨이라고 바꾸었던 것이다. 이후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레미 송을 불렀던 무대가 되어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우리 일행은 아름다운 미라벨 정원을 보고 오후에는 짤츠부르그의 아름다운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호웬 짤즈부르그 성으로 갔다. 우리 일행은 트로페르반이라는 케이블카를 타고 성에 올라가 아름다운 짤즈부르그의 도시전경과 도시를 가로지르며 유유히 흐르고 있는 잘즈흐 강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특히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폰트랩 대령의 집을 멀리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이곳 호웬 성은 1681년 현재와 같은 완전한 요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한때는 감옥, 군부대 등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성 여기저기에 중세에 사용되었던 고문실과 고문도구, 그리고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성의 가운데의 조그만 광장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두 그루 있고 그 앞에 우물이 하나있는데, 후에 슈베르트는 이곳을 방문한 다음 비엔나로 돌아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작곡했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보았네..." 우리 일행은 모자르트와 사운드 오브 뮤직의 도시 짤즈부르그를 뒤로 한 채 숙소인 호텔로 향하였다.
십일째(8일)
오늘로서 해외연수 십일째를 맞는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보니 알프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알프스를 감상하면서 약 2시간여 동안 버스로 이동하여 독일 남부의 중심도시인 뭰헨에 도착하였다. 뭰헨에 도착하자마자 가이드가 나쁜(?) 뉴스를 전해주었다. 며칠 전부터 독일에 슈퍼박테리아(신종 장출혈성박테리아)가 야채에서 발견되었으며, 사망자도 생겼다고 한다. 가이드가 독일에서 가능하면 야채는 먹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독일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음식이 짜고 고작해야 소시지에 감자 요리(감자도 짜게 나옴) 뿐이어서 먹을 것이 별로 없는 터에 야채까지 먹지 말아야 하니 이제 고국에서 이때를 위해 준비해온 비상식량(?)을 마음껏 먹어치워야 할 것 같다! 뮌헨(München)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도시로, 인구수로 독일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도나우 강의 지류인 이자르 강을 끼고 있다. '뮌헨'이란 이름은 '수도사'를 뜻하는 고대 독일어 Mönche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히틀러가 이곳에서 나치스 운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뭰헨의 신시청사가 자리잡고 있는 뭰헨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마리엔 광장으로 갔다. 광장을 둘러싸고 신시청사를 비롯하여 프라우엔 교회 등 관광 명소가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차량 통행을 금하고 있는 광장 주변에 늘어서 있는 고급 부티크 및 레스토랑을 둘러보면서 노천 카페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겼다. 광장 중앙에는 뭰헨 시의 수호신이라고 불리우는 마리아의 탑(marensaule)이 그 위용을 자랑하듯 서 있었다. 특히 신시청사는 네오 고딕양식의 건축물로서 이곳에는 글로겐슈필이라고 하는 시계탑으로 유명하였다. 매일 11시에만 시게탑에 걸려 있는(?) 시계가 울리는데, 시계탑에 있는 창문이 열리면서 사람 크기만한 인형들이 나와서 인형극이 펼쳐진다. 우리 일행은 수많은 사람들(?) 틈에 끼여 시게가 울릴 때를 기다리면서 인형극을 보았다. 인형극이라야 그냥 인형들이 창문을 지나가는 정도였는데, 사람들은 환호를 하고 야단들이었다.
사실 뭰헨을 내내 여행하면서도 마음은 편치를 않았다. 그것은 뭰헨이 우리 평창과 함께 2018년 동계올림픽 경쟁 상대국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두 번 실패의 고배를 마셨던 평창이 이번에는 프랑스의 안시와 함께 독일의 뭰헨을 상대로 유치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대체적으로 평창이 유리하다는 소문이다. 조금은 안도가 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애국심의 발로일까 평창이 압도적인 표차로 선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오는 7월 6일 아프리카 더반에서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가 최종 결정된다.(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은 7월 6일 오후 10시 35분(현지시각) IOC 위원들의 전자비밀투표 방식으로 시작돼 6일 자정이 지난 무렵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이 개최 도시를 공식 발표했다. 1차 투표에서 평창은 63표를 얻어 25표를 얻은 뮌헨과 7표의 안시를 압도적으로 따돌림으로 대한민국의 ‘평창’ 2018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이 되었다.)
우리 일행은 간단하게 현지식으로 점심을 먹고는 다시 이동하여 숙소가 있는 뉘른베르그로 향하였다. 도중에 가이드가 숙소가 변경되었다고 하여 뭰헨에서 2시간 20분 정도 걸려서 숙소가 있는 노드링겐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다. 예정에 없던 곳이라서 의아해 하였지만, 다니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마을의 상징인 종탑에 오르니 아담한 마을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원형의 마을이 온통 붉은 지붕뿐이다. 90m나 된다는 종탑이 너무 높아 사진을 찍기도 힘이 든다. 평일인데도 마을에서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너무나 조용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잠자고 있는 중세의 어느 작은 마을에 와 있는 느낌이 었다. 우리 일행은 가즈런히 길가에 들어서있는 기념품 가게에 들러서 간단한 기념품을 사고는 발길을 재촉하여 만찬이 준비되어 있는 식당으로 갔다. 오늘 저녁은 독일식 소시지가 특식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소시지가 소시지가 아니라, 소태였다. 감자라도 먹을까 하여 맛을 보았는데, 감자 역시 소금에 절인 것만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준비해온 컵 라면을 가방에 꺼내는데,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컵 라면 파티를 하였다. 너무나 맛있게 만찬을 하였다. 둘이 먹다가 하나 사라져도 모를 정도였다(?) 컵 라면으로 요기를 하고는 숙소로 향하였다. 내일이면 아쉬움과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대감을 안고 숙소에 들었다.
아, 참 빠진 곳이 있다. 뮌헨에서 뉘렌베르그로 가는 길에 아우구스부르그라는 곳을 우회해서 지나쳤다. 이곳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지 7곳 중에 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도시는 유럽 도시 중 가장 오래된 도시이며,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침략하면서 군사도시(병참도시)로 세워졌다고 한다. 당시 귀족들 대부분 로마 캐톨릭 교인이었다. 1515년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절대적으로 지지했던 도시로서 1500년~1600년대까지 계속된 종교전쟁이 1601년 종결되고 베스트팔랜 조약을 체결하여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이대부터 개신교(특히 루터교)를 인정하게 되었고, 소상인들이 몰려들면서 문화예술이 발전하게 되었고, 한 때는 이 도시의 상인들이 황제보다 부자였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노드링겐의 호텔로 이동하여 내일이면 아쉬움과 집으로 돌아간다는 기대감을 안고 숙소에 들었다.
십일일째(9일)
오늘 마지막 날이라서인가! 아침 모닝콜이 울기기도 전에 일찍 우리 부부는 잠이 깼다. 그동안 가는 곳마다 구입한 간단한 기념품들과 선물들을 가방에 정리를 하였다. 호텔 로비에서 로텐부르크를 거쳐서 공항이 있는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투어하면 오늘 일정이 끝난다고 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우리 일행은 다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로텐부르크까지 가는 고속도로를 아웃 토반이라고 하였다. 버스를 타고 한참을 달리는데 독일의 고속도로를 왜 아웃토반이라고 하는지를 잘 알 것 같았다. 달리는 차들의 속도를 제한하지 않는 코스의 도로라고 해서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1시간 30분 정도 달렸을까 로텐부르크에 도착해서는 시청사와 성야곱 교회를 차례로 둘러보았다. 특히 성야곱 교회는 1300년부터 190년이 걸려 완성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로텐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상징적 교회라고 한다. 내부에는 리멘슈나이더의 걸작 나무조각으로 된 <최후의 만찬>이 걸려있고, 특히 성스러운 피의 제단, 프란찌스쿠스 제단 등 15세기의 여러 제단과 파이프로 된 오르간이 불거리였다. 우리 일행은 다시 2시간 20분 정도를 버스로 달려서 마지막 도시인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였다. 원래는 프랑크푸르트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뢰머광장과 구시청사, 그리고 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마인강 남쪽 주변에 즐비한 박물관 거리를 투어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우리 일행 중에서 아직 선물을 사지 못한 분들이 많아서 그분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에 못이겨 시내 투어는 생략하고 가이드가 곧장 기념품을 파는 가게로 안내를 하였다. 저마다 기념품을 사고 보니 어느덧 시간이 흘러 비행장에 가야할 시간이 되었다. 우리 일행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향하였다. 출발 시간은 오후 7시였는데, 두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11박 12일의 여정을 마치고 집으로 가게 되는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김치 생각이 간절하다. 드디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스르르 잠이 온다. 이 비행기에서 잠을 자고 나면 내일 아침이면 고국 하늘 아래 인천공항에 도착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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