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후 6시, 매주 일요일 오전 8시와 오후 1시. 약 20년 전, 지상파 3사에서 애니메이션을 편성한 시간대다. 이들 애니메이션은 국적을 불문하고 현재 2, 30대 젊은이로 성장해 있는, 당시 초등학생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붙잡아 두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는 애니메이션의 감칠맛을 더해 주는 것은, 능숙한 연기로 캐릭터에 개성을 불어넣는 성우들의 몫이다. 하지만, 요즘 방송에서는 성우의 존재감을 느끼기가 어렵다. 수 년 전, tvN에서 방영된, <재밌는 TV 롤러코스터>의 <남녀탐구생활> 코너를 통해 서혜정 성우가 인기를 끈 것이 전부다. 그렇다면, 그 많던 성우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미디어스는 KBS 24기 공채 성우로 현재 한국성우협회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김영진 성우와의 기자 회견을 통해 한국 성우계의 실상을 들었다. 김영진 성우는 <도전! 골든벨>, <대결 노래가 좋다>, <KBS스페셜> 등 유명한 프로그램에서 내레이션을 맡았고, 2002 KBS <연예대상>에서는 베스트 엔터테이너상을 받았을 정도로 지금까지도 활발히 활동하는 프리랜서 성우다. 그의 기자 회견에 따르면 KBS는 매년 12명을, EBS는 2년 주기로 4명을, 온미디어는 2년 주기로 8명을, 대원방송은 2년 주기로 10명 혹은 11명을 뽑는다고 한다. SBS는 성우 공채를 한 적이 전혀 없었으며, MBC는 성우 공채가 중단된 지 10년이 넘은 상태다.
특히 KBS 성우 공채 시험에는 매회 2천 명 가량의 여성과 8백 명 가량의 남성이 응시하는데, 여러 단계를 거친 끝에 남녀 모두 6명씩 뽑힌다고 한다. 전속 기간에는 4대보험과 고정 월급제가 적용되는데, KBS 성우의 최초 고정 월급은 95만 원이고, 2년차가 되면 103만 원으로 올라가지만 보너스 수당은 따로 없다고 한다. 이 2년이 지나면 프리랜서로 전환한다는 미명으로 버린다고 한다. 이렇게 새로운 성우를 뽑고 버리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다. 프리랜서로 전환되는 순간부터 성우들은 스스로 밥벌이를 해야 한다. 모든 공채 성우가 일할 수 있을 정도의 일거리가 없으니, 수요·공급의 법칙이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프리랜서들의 수입은 천차만별이다. 한국성우협회 성우 등급 분류표에 따르면 만 10년차 미만은 B급으로, 10년차 이상은 A급으로 분류되는데, 프리랜서 성우가 50분 분량의 라디오 연속극에서 목소리 연기를 할 경우, A급 성우는 편당 24 ~ 25만 원을 받고, B급 성우는 그 절반 가량을 받는 반면, 전속 성우는 1만 5천 원 미만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을 두고 싼 값에 고급 인력을 쓰고 버린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로 김영진 성우는 기회가 꾸준히 주어진다는 측면에서 성우 공채가 활발히 이루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그렇지 않다며 전문적인 배우가 설 자리가 줄어드니, 차라리 안 뽑는 것이 낫다고 토로했다.
지상파 방송 4사와 애니메이션 방송사가 지원하는 노조 발전 기금은 매년 70억 원 정도라고 한다. 75억을 750명의, 한국성우협회에 가입되어 있는 성우들이 나눠 가지면 연 수입이 1인당 1천 만 원 정도다. 하지만 이는 평균치일 뿐, 앞서 제시한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각각 벌어들이는 돈은 심하게 차이가 난다. 이 750명의 한국성우협회원 중 100명이 버는 돈이 나머지 650명의 그것보다 더 많고, 다시 이 중에서 50명이 버는 돈이 전체 수입의 절반 정도라고 한다. 김영진 성우는 3년의 전속 기간을 포함해 올해까지 20년 가량을 활동해 왔다. 반면, 배한성, 박영남, 기경옥 등 유명 성우들은 30년 이상 활동하기도 한다.
하지만 워낙 활동 기간이 서로 달라서 딱 어느 정도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 기수에서 10% 정도밖에 살아남지 못하니,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입지를 제대로 다지지 못하면 활동 기간이 짧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KBS 성우극회에는 꼭 한 분야만 해야 된다는 규칙은 없지만, 대부분의 소속 성우들은 분명한 장르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10명 정도의 성우가 다양한 장르에서 일을 많이 하고, 내레이션 전문은 50명 정도이며, 300명 정도는 애니메이션, 외화 등 더빙을 맡고 있는 상황이다. 본인이 마음을 먹고 특정 분야로 진출하기 보다는 초기에 여러 분야를 두루 맡으면서 적성을 찾는 편이라고 한다.
더구나 KBS는 공영 방송임에도 공채 성우들이 프리랜서로 전환된 후에는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고 한다. 혹자는 '적자생존', '능력껏 벌어먹는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김영진 성우는 한 기수에서 살아남는 이가 10%도 안 되고, 목소리 연기 자체가 전문성 있는 분야인 탓에 성우들은 직업을 바꾸기도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고 토로했다. KBS 성우극회원 450명 중 425명 정도가 프리랜서인데 라디오 연속극은 거의 전속 성우로 운영이 된다고 한다(프리랜서 비중은 20% 미만). 25명 정도가 라디오 일의 80~90%를 맡는 셈인데, 1, 2년차이기 때문에 연차 높은 선배 성우보다는 연기력이 낮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공채 성우 시험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6~7년이며, KBS 성우극회는 새내기 성우의 평균 연령이 30대 초반 정도라고 한다. 새로운 직장을 구할 준비를 하기엔 늦은 시기다. 이직, 전직이 어렵다는 뜻이다. 이렇게 고스란히 실업자가 되는 것이다. 김영진 성우는 한국성우협회를 대표해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수 차례나 KBS에 했지만, 노력하겠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는 프리랜서가 된 동료들 가운데 안착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거의 대부분 성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며 신인을 발굴하는 것 자체는 좋지만, 워낙 많은 성우가 실업자가 되는 구조라 차라리 뽑는 인원을 줄여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상황이다.
김영진 성우는 프리랜서라는 구조적 문제 개선 및 성우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외산 연속극, 라디오 연속극, 애니메이션)의 편성 확대 요청을 하기도 했다. 지상파에서 방영되는 정규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이 예전보다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그리고 KBS는 라디오 연속극을 만드는 데 1년에 2억 5천 내지 3억 원 정도를 들인다고 한다. 텔레비전 연속극의 경우, 대하극 및 역사극 한 편에도 수십 억 원이 들어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게다가, KBS는 일요일 심야 시간대에 영화를 편성했는데 이는 시청자들더러 보지 말라는 소리다. 그 다음 날인 월요일에는 모두가 출근 혹은 등교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행정 처리를 엉터리로 해 놓고는 시청률이 낮다, 광고가 안 붙는다는 변명만 할 뿐이다. <셜록>은 아예 자막 방송을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상파 방송에서는 자국어 더빙이 상식으로 통해야 한다. 자막을 읽기 힘들어하는 노인 및 자막을 아예 읽지 못하는 시각 장애우를 위한 기본적인 '음성 제공 서비스'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국어 보호 차원에서도 그렇다. 자국어 보호는 어느 나라에서나 통념으로 굳어져 있기 때문에 굳이 법제화할 필요가 없다. 미디어 소외계층 및 국어 보호 차원에서 자국어 더빙은 꼭 필요하다. 그래서 한국성우협회는 자국어 더빙 쿼터 법제화를 준비하고 있는 상태다.
유선 방송 및 위성 방송, 파일 공유 사이트 등 원어로 보고 싶은 시청자들을 위한 경로가 많이 마련되어 있음에도 지상파에서 자막 방송을 하는 것은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대부분의 다른 나라에서 자국어 더빙이 상식으로 통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며, 일부 매니아 계층의 반응에만 기댄 미디어 담당자들의 횡포다. 성우는 목소리로 연기하기 때문에 쉽게 뜨기가 어렵지만, 단순한 목소리 배우이기 전에 성우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말로써 지키는 문화 전사이며, 라디오 연속극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는 등장인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민족 정신'임을 명심해야 한다.
극장 애니메이션 목소리 연기를 아이돌 가수가, 교양 프로그램 내레이션을 배우들이 맡는 등 여타 영역 종사자의 활동이 활발해진 데에는 익숙한 목소리에 대한 시청자들의 욕구가 깔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전문 성우는 말을 정확히 구사할 수 있고 연기도 가능한 전문성을 지니고 있다. 알맞은 소리를 찾아내는 감각도 뛰어나고 전달력도 좋다. 따라서 전문 성우야말로 순수 대중 문화를 이끌어가는 장르의 장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방송사와 영화 제작사들은 전문 성우에게 배역을 맡길 때에는 '출연료를 좀 내려 달라'며 이른바 '출연료 후려치기'를 일삼았다.
필자는 돈을 더 주면서도 연기력이 부족한 이들을 기용하는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노련한 성우들은 영화 한 편의 목소리 연기를 하는 데 반나절밖에 걸리지 않는다. 프로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오로지 극의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는 성우를 대하는 제작진들의 태도가 불쾌할 뿐이며, 상식적으로 정상적인 결과물을 내놓기를 바랄 뿐이다. 문화부와 한국 지상파 방송사들은 이렇게 한국 성우계가 여러모로 힘든 상황에서도, 작년 3월에 한국고용정보원이 759개 현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직업 만족도 설문조사'에서 성우가 만족도 높은 직업 2위로 꼽힌 사실을 감안하여, 배우라는 자부심만으로 온갖 핍박을 참고 견뎌내는 전문 성우들이 성우이기 전에 인간다운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전문 성우에 대한 처우 개선책을 강력, 신속하게 펴 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