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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느니라
(요 3:1-7)
시작하는 말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있던 우리 인간(죄로 죽었던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새 사람, 즉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거듭난다”로 번역된 원어는 요 3:3, 7과 벧전 1:3, 23에 보여지는데, 원어는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새로이 받는 신앙경험을 가리키고 있다.
성경에 거듭난다는 것은? ①새 생명을 얻는 것이다(롬6:4). ②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고후5:17). ③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다(갈6:15). ④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입는 것이다(딛3:5-6). ⑤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이다(요1:13, 3:9, 5:1, 4, 18). ⑥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1요3:14). 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⑦마음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다(롬12:2). ⑧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다(벧후1:4).
거듭남의 효과는 지속적이다.. 바울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롬6:4),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든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이라”등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롬6:8, 갈2:20) 지속적인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는 말씀은 지속적, 향상적, 성장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거듭남이란 지속적인 “성결, 거룩함”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기초하여 마지막 천국의 입성으로 완성될 것이다.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유대인들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할례의 유래는 아브라함이 99세 때 그와 그의 자녀들과 하나님 사이에 맺은 “계약의 표”로 받은 데서 시작된다(창17:9-14). 먼 훗날에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수5:2). 그곳 이름을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길갈”이라 지었다.
결례(潔禮)란 헌아식(獻兒式)으로 생후 33일 만에 결례를 행한다(레12장). 결례의 제물은 양 두 마리를 제물로 바치는데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대신한다(레12:8). 아기 예수님의 부모는 비둘기 두 마리를 대신했다(눅2:24). 한 마리는 절대 복종을 의미하는 번제 제물로, 다른 한 마리는 절대 헌신을 의미하는 속죄 제물로 드렸다. 이 결례는 첫 아들을 하나님께 헌아하기 위함이요, 또 하나는 산모를 정결케 하기 위함이다. 안식일마다 회당이나 성전에 나가서 안식일을 지키고 해마다 예루살렘에 가서 유월절을 지킨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니고데모는 모범적인 유대인이었다. 니고데모는 신약성경에 5회 나온다(요 3:1; 요 3:4; 요 3:9; 요 7:50; 요 19:39).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었으나 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니고데모는 유대의 산헤드린 공회의 70인 장로회의 일원으로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그이 이름은 “백성의 승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한 선생”으로, 이것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 교육을 위한 특별한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여러 가지 모범적인 유대인으로서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그는 세상 적으로 행복의 조건을 두루 두루 갖추었다. 누가 보드라도 대단한 선생이요, 산헤드린 회원이며, 사회적인 지도자였다.
그러나 니고데모가 흠과 티가 없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흡족함이 없었다. 자기 자신의 지위와 영적인 상태에 대하여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바리새인들은 부활 신앙이 있었지만 그것은 막연한 희망사항이었다. 확신이 없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육은 하나님과 원수다(롬8:7). 오로지 자연적인 방식으로 태어난 자들은(요1:13) 세상에서 왔으며(요8:23,15:19), 세상에 속하고(요14:17,19,22), 아래에서 났으며(요8:23), 마귀에게서 태어났고(요8:44), 로고스(말씀)의 빛을 깨닫지 못하고(요1:5), 그를 영접하지 않으며(요1:11),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요3:19, 20),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요8:47).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요8:19,15:21),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한다(요3:3). 어두움 가운데 다니며(요12:35), 빛을 미워하며((요3:20), 죄의 종노릇을 한다(요8:34). 하나님의 나라를 보거나(요3:3), 믿거나(요5:44, 12:39),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요8:43), 그리스도께 나오거나(요6:44), 성령을 받거나 할 수 없다(요14:17, 바빙크 교의신학 4권 P47).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4-6). 사도 바울은 자신의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을 밝히고(고백) 있다.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
육으로 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거듭남(위로부터 남)이 필요하다. 거듭나는 것은 위로부터 나는 것이다(요3:3, 31, 8:23, 19:11,13).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이다(요1:13, 요일2:20, 3:9).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요3:5). 즉 성령으로 나는 것으로(요3:6,8) 성령의 정결케하는 사역은 물로서 상징되고(겔36:25-27, 마3:11), 신비롭고 놀라와서 그 누구도 이러한 사역의 기원과 본질을 알지 못한다(요3: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
물로 거듭나야 하리라.
①물을 성령으로 보았다(calvin). 이 해석은 하나의 참고로 삼는 것이 좋겠다. 대다수의 학자들이 칼빈의 견해를 따르지 않는다. 연구해 볼만한 견해이기는 하다.
②물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다(Ironside). 바울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
야고보는 “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약1:18).
사도 베드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
③물을 물세례로 보았다(Augustine, Chrisostom, Westcott, Bernard, Godet, Plummer). 이 견해는 다른 성경 구절과(겔36:25, 막16:16, 행2:38, 딛3:5-6) 궤(軌)를 같이 한다. 당시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물세례를 베풀고 있었다. 우리 주님은 세레요한의 외형적인 물세례를 부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정하셨다. 세례요한의 물세례는 유형 현실교회의 물세례로 발전했다. 현실교회의 모든 거룩한 의식(儀式)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관하신다.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1:2)고 말씀하셨다. 세상의 것인 물위에 하나님의 신이신 성령이 운행하실(Hoovering)때 천지가 새로운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령을 불어 넣으실 때 아담(남자)이 되었다.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실 때 여자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에덴에서 추방하셨다. 그들은 에덴 동편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을 섬기며 물로 씻어 깨끗케 하는 신앙생활을 했을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리라.
우리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3,5).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를 물(세례)로 씻어 정결케 하신 후 성령을 불어 넣으실 때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된다.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는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다. 사람이 두 번(거듭)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듭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을 설명할 수는 있는가? 우리 주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그러나 바람이 분다는 증거는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의 생활과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5-7).
거듭난 자들은
거듭난 자 다운 생활을 한다.
구원파(救援派) 교도들은 만나자마자 “당신 거듭났느냐?”라고 묻는다. 거듭났다고 대답하면 거듭난 “생년월일”을 대라고 한다. 순간 머뭇거리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스스로 자기의 생년월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에게 들어서 생년월일을 알게 된다.
①. 믿음으로 살아간다.
우리 주님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4-15).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 뱀에게 물렸을 때 장대위에 높이 달린 뱀을 쳐다 볼 때 살아났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을 때 구원받는다.
우리 주님은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3:18).
우리 주님은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사도 바울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②. 신령한 젖을 사모한다.
우리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사도 베드로는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다윗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40:8).
③. 그리스도를 닮아 간다.
그리스도를 롤 모델(role model)로 삼는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15).
④. 밝은 빛으로 나아간다.
우리 주님은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요3:21). 악을 행한 자는 자기의 악행을 숨기기 위하여 어둠을 좋아한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자기의 행위를 나타내기 위하여 빛으로 나온다.
속초 해수욕장은 해마다 쓰레기로 몸살을 앓았는데 2019년도 여름에 1억짜리 조명탑(공설운동장같이)을 2개나 세워 해수욕장을 대낮같이 밝게 하였더니 쓰레기 투기가 절반 이상으로 줄었다고 한다.
⑤. 정결의식(예식)에 동참한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요3:2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정결예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지키셨다. 그리고 세례와 성만찬식을 제정하셨다. 중생한 자들은 유형교회의 모든 정결의식에 즐거이 동참한다.
⑥.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다윗은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시51:12-13).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승천하시기 직전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⑦. 형제를 끝까지 사랑한다.
사도요한은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요 3:14-16).
끝맺는 말
사도 바울 이래 조지 화이트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90)는 가장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추앙받는다. 영국 영적 부흥을 이끌었으며 웨슬리보다 탁월한 설교를 했다. 미국에서 활동할 당시 그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영적 대각성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그는 친구 찰스 웨슬리로부터 사고전환(思考轉換)의 계기가 되는 책을 받았다. 책을 읽으면서 “중생”에 대한 글을 읽기 시작했다.
열흘 뒤 그가 어느 다리를 건널 때였다. 한 여인이 자살하기 위해 다리 위에서 뛰어 내리려 했다. 화이트 필드는 “거듭나야 한다”(요3:7)는 메시지와 함께 요한복음 3장을 모두 읽어 주었다. 그녀는 “이제 믿습니다. 다시 태어난 것을 믿습니다. 나는 구원받았어요”라고 큰 소리로 고백했다.
여전히 화이트필드는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를 고심했다. 그러던 중 어떤 책에서 거듭남은 “하나의 선물”이라는 글을 읽었다. 동시에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을 묵상했다. 동시에 침대에 머리를 파묻고 “그렇습니다. 주님 목마릅니다.”라고 울부짖었다. 어렴풋이 “화이트 필드, 네가 구한던 것을 이미 가졌다. 믿기만 해라. 그러면 다시 거듭날 것이다.”
죽기 전 마지막 설교에서는 “어느 때 보다 거듭남의 진리를 확신합니다. 거듭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받지 못합니다.”라고 설교했다.
어느 친구가 “거듭남에 고나해 수없이 설교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요한복음 3:7절을 인용하며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짧게 대답했다(말씀의 힘 P147-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