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구석에 있는 밭, ‘구석밧’의 천지개벽
1998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 같이 근무하던 여선생이 내게 하소연했다. 남편이 지인에게 3000만을 빌려줬는데, 이를 돌려받지 못해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 땅 1200평(3960㎡)을 대신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주 출신인 내게 그곳 부동산 시세와 투자가치를 알아봐 달라 부탁했다.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 일대에 조성된 영어교육도시 전경. 가장 앞에 보이는 건물은 국제학교 4개 중 하나인 브랭섬홀아시아(Branksome Hall Asia) 메인 건물이다. 사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나는 서귀포시 중문이 고향인데도 구억리가 어딘지 잘 몰랐다. 구억리는 마을 구석에 있는 밭, ‘구석밧’이라는 지명에서 유래했다. 얼마 후 제주에 내려온 나는 그곳 지번을 물어물어 찾아가 봤다. 맹지, 즉 사방이 길도 없는 초지였다. 주변에 물어봤는데 가격이 평당 몇만 원 안 했고, 전망도 없어 보인다고 했다.
몇 달 후 다행히 그 땅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다. 땅을 처분한 여선생은 “어쨌든 도움을 줘 고맙다”며 내게 밥을 사줬다. 헐값에 팔았지만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나는 지난 13일 대정읍 구억리 제주영어교육도시(영어도시)를 찾았다. 25년 전 찾았던 그 번지는 지금 영어도시 노른자위 땅으로 변했다. 땅값이 평(3.3㎡)당 1000만 원을 훌쩍 넘는다고 했다. 주변 부동산 중개소에 물으니, 2000년대 초반 영어도시 개발 전보다 50배에서 100배까지 올랐다고 했다. 2006년 영어도시 조성계획이 발표됐으니, 개발 5~6년 전인 그때 부동산업계에선 분위기를 파악하고 움직였을 것이라고 했다.
수도권 못지않게 투자 열기 후끈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영어교육도시에 있는 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KIS) 정문. 이 도시에는 이외에도 세인트존스베리아카데미 제주(SJA), 노스런던칼리지에잇스쿨 제주(NLCS), 브랭섬홀아시아(BHA) 등 총 4개 학교가 있다. 최충일 기자
내가 1999년 제주에 내려온 뒤 그 여교사와 연락이 끊겼다. 만일 그분이 헐값에 넘긴 땅이 100배 올랐고, 지금 평당 1000만 원이 넘는다는 걸 알면 나를 무척 원망했을 것 같다.
제주는 부동산 이슈만으로도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는 지역이다. 인구가 늘면서 부동산값도 덩달아 뛰었다. 아파트나 땅값이 급등하는 등 수도권 못지않게 투자 열기가 달아올랐다. 여기다가 2010년 부동산투자이민제를 시행하면서 제주 전역이 들썩였다. 중국 자본이 대거 밀려와 제주 중산간 지역 난개발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번에는 지난 수십년간 제주 부동산에 무슨 일이 있었나 살펴보자.
제주의 대치동...맹모삼천지교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영어교육도시는 대한민국 학구열과 맹모삼천지교 현상을 대변한다. 지난 13일 이 도시의 학교 앞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학부모 모습에서 학구열을 엿볼 수 있다. 이 도시에는 현재 세인트존스베리아카데미 제주(SJA), 노스런던칼리지에잇스쿨 제주(NLCS), 브랭섬홀아시아(BHA), 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KIS) 등 4개 학교가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 부동산 투자 열기에 불을 붙인 것은 제주영어도시다. 영어도시는 제주도 여러 대규모 개발사업 가운데 가장 성공한 케이스로 꼽힌다. 또 한국 사람들 학구열과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현상이 나타난 곳이다. 이 일대 전용면적 25.7㎡규모 아파트값은 10억대를 훌쩍 넘는다. 일각에서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과 비슷한 양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영어도시 개발은 2000년대 초반 조기 영어 연수 붐 등에 따른 비용을 줄이고 기러기 아빠 양산 같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했다. 2006년 12월 재정경제부 제주 영어전용 타운 조성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2008년부터 약 379만㎡(약 115만 평)규모에 영어도시를 만들고 있다. 영어도시 사업은 7개 학교를 설립, 인구 2만 명 규모 도시를 만드는 사업이다. 현재 4개 학교에 인구가 약 1만 명이니 목표의 절반은 달성한 셈이다.
100배까지 올랐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영어교육도시는 여전히 공사가 진행중이다. 이 도시에는 현재 세인트존스베리아카데미 제주(SJA), 노스런던칼리지에잇스쿨 제주(NLCS), 브랭섬홀아시아(BHA), 한국국제학교 제주캠퍼스(KIS) 등 4개 학교가 있다. 최충일 기자
영어도시와 주변 부동산값을 보면 사업 초창기 분양했던 택지는 평당(3.3㎡) 100만 원에서 현재 1000만원으로 10배 정도 올랐다. 근린 생활용지 역시 초기 분양 당시 평당 약 250만 원이 던 게 지금은 2500만 원 이상을 호가한다.
제주 부동산 시장이 가장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는 중국 자본이 들어왔을 때다. 중국 자본은 2010년 부동산투자이민제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으로 몰려왔다. 투자이민제도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지정된 관광단지와 관광지 내 휴양 체류 시설을 매입하면 체류를 보장하는 제도다. 이들에게 F-2 거주 비자를 발급한다.
중국 자본 리조트, 한라산 난개발 우려도
2013년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백통그룹 백통신원 제주리조트 공사현장. 한라잔 중턱 곳곳에 리조트가 들어서자 난개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중앙포토
중국 자본이 한라산 중산간(해발 200~600m) 곳곳에 리조트 개발을 추진하면서 난개발 문제가 제기됐다. 중국 투자가들은 해안보다 땅값이 싼 한라산 자락을 선호했다. 난개발 논란이 일자 정부는 2015년 11월 부동산투자이민제 적용 대상을 중문관광단지·신화역사공원 등 관광단지와 휴양목적 체류시설 등 14곳으로 제한했다. 이후 중국 자본 진출도 주춤해졌다.
그래서인지 제주 부동산 시장은 영어도시를 제외하면 완만한 하락세를 보였다. 지난 8월 21일 현재 제주지역 아파트 누적 매매가격 변동률은 지난해 같은 시기보다 -4.14%P 떨어졌다. 다만 영어도시 인근은 주택 공급이 부족해 집값이 상승중이다. 작년 10월 기준 총 4개 학교에 학생 4600여 명이 다니고 있는데 공급된 주택은 2600여 가구에 불과하다.
‘제주부동산25시’ 김종욱 대표는 “영어도시에 학교가 추가도 들어설 예정이어서 주변 집값은 계속 오를 것 같다”며 “게다가 이곳은 4층 이상 지을 수 없는 관리지역이어서 주택을 한꺼번에 늘릴 수도 없다”고 했다.
분양가 12억 원대 아파트 등장
제주도 최대 인구밀집 지역인 제주시 연동과 노형동 전경. 최충일 기자
이런 가운데 최근 제주에 분양가 12억 원대 아파트가 등장했다. 포스코이앤씨는 지난달 ‘더샵 연동애비뉴’ 견본주택을 열고 분양에 나섰다. 전용면적 69·84㎡ 총 204가구다. 이 아파트는 제주시 연동에 들어선다. 전용 면적 84㎡가 11억 7980만원인 아파트로, 3.3㎡당 분양가는 3470만 원이다. 이는 제주도 역대 최고 분양가다. 발코니 확장비·시스템에어컨을 포함하면 청약자가 부담해야 할 돈은 12억 원을 넘는다. 지난 3월 GS건설이 서울에 분양한 ‘영등포 자이 디그니티’ 보다 분양가(3.3㎡당 3411만 원)보다 비싸다.
제주시 연동은 신시가지 중심지에 속한다. 부동산 시장이 좋을 때 이 일대 전용 84㎡ 규모 아파트 값이 10억 원을 웃돌았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매매가가 하락하면서 실거래가 10억 원대를 회복하지 못했다. KB부동산에 따르면 2010년 3.3㎡당 595만3000원이던 제주도 내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2019년 3.3㎡당 1411만원4000원으로 10년 만에 137.1% 상승했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 7월 제주지역 미분양 주택은 2358가구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증가 추세에 있다. 미분양 주택의 71%는 읍면지역에 집중돼 있다. 고분양가에 따른 실수요자 감소가 미분양 주택 증가 요인으로 꼽힌다. 미분양 아파트 소진이 더디고 제2공항 건립 확정 같은 호재가 없이는 제주 부동산 시장 반등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중문골프장 최소 1500억
1978년 3월 14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제주도 서귀포시 중문관광단지 해안절벽에서 해안 절경을 바라보고 있다. 중앙포토
제주에는 수십년간 생각만큼 잘 추진이 안 되는 부동산 개발사업도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중문관광단지 사업이다.
1978년 초 제주도를 방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중문관광단지를 둘러보며 “서울 사람들이 땅만 사놓고 개발을 않지 않는 사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며 “이를 모두 파악해 국가 주도로 투자를 유치하는 방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이후 1971년 중문관광단지(320만㎡) 개발 사업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 사업은 아직 마무리되지 못했다. 호텔 등 일부 숙박시설과 상가 등은 착공을 못 한 상태다.
1981년과 현재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 전경. 과거 초가와 슬레이트 위주의 돌집이 시멘트 건물로 변했다. 사진 제주도
중문관광단지 토지를 소유한 한국관광공사는 지난 8월 초 제주특별자치도에 공문을 보내 중문단지 내 골프장과 클럽하우스로 사용하는 건물, 주차장 부지 등을 매각하겠다고 했다. 이는 지난해 11월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별 자산 효율화 계획을 의결함에 따른 후속 조치다. 골프장 매각 우선 협상자는 제주도가 선정됐다.
중문관광단지 매각 대상 토지는 전체 320만㎡ 중 절반인 156만㎡이다. 이 가운데 95만4767㎡가 중문골프장(18홀)이다. 이 골프장은 1989년 한국관광공사가 만들었다. 골프장 평가액은 15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10억 들고 제주에 나타난 중국인들
제주 부동산 전문가 김종욱(부동산학 석사)씨가 영어교육도시 과거와 현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충일 기자
제주는 변경된 투자이민제도 따른 ‘차이나 머니’를 기대하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5월 부동산 투자이민제 일몰 기한을 2026년 4월 30일까지 3년간 연장하고 투자 기준금액을 한화 5억 원에서 10억 원으로 올렸다. 여기다가 중국 정부가 3년 만에 해외여행을 전면 허용하면서 투자이민제도를 문의하는 중국인이 늘고 있다고 한다. 지난 8월 한 달간 제주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은 8만5000명으로 지난해 8월보다 7만 75000여명 늘었다.
제주에서는 한화 10억 원 이상인 휴양 체류 시설을 매입한 뒤 거주(F-2) 비자를 신청하면 5년 후에 영주권(F-5)을 보장받을 수 있다. 영주권을 얻으면 참정권·공무담임권을 제외하고 내국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공교육 입학이 가능하고 내국인과 같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제주는 여전히 저평가...활성화 흐름 반복”
제주도의 최대 인구밀집 지역인 제주시 연동 제원아파트 인근. 이 지역은 공항과 가깝고 대형 면세점 두곳이 있어 중화권은 물론 일본 등 해외자본이 가장 주목을 하고 있다. 최충일 기자
2010년 투자이민제도 도입 이후 2022년까지 총 1915세대가 1조2616억 원을 투자했다. 투자자 중 거주 비자를 발급받은 외국인은 5366명, 영주권 획득자는 1697명이다. 투자가 가장 활발했던 2013년 한해에만 콘도 558채가 팔렸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불거진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간 외국인이 사들인 콘도는 단 14채이다. F-2 비자 신청자도 2014년 한해 1564명까지 치솟았지만, 지난해에는 16명으로 급감했다.
‘제주부동산25시’ 김 대표는 “제주가 중국·일본·싱가포르·홍콩보다 지리적 여건이 훨씬 좋은 데도 저평가된 것 같다”라며 “지난 수십년간 제주도 개발 역사를 볼 때 부동산 경기는 잠시 주춤했다가 활성화하는 흐름을 반복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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