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줏빛 紫
이 빛을 보면 불안하다
몸 아픈 곳을 짚어내는 빛이며
깊게 스며들어 뼛속까지 아린 자주 감자고
혓바닥까지 늘어진 자목련 꽃잎이며
피 터지게 싸우고 난 수탉의 볏이다
구구절절, 피 멍든 생들은
처음부터 그런 빛 그런 몸 지녔으니
더 아플 것 없겠다 쉽게 말하지 마라
세상이 온통 자줏빛이다
누구는 상처를 꽃으로 읽지만
나는 벌써 꽃이 상처로 보인다
앞날
산비탈 잡목 숲을 향해 그가 손짓한다 연달래 피었다고, 붉지도 희지도 않아 물에 헹구어 낸듯한 꽃, 햇빛에 속 비치는 아사헝겊 같다 나는 진달래 밖에 몰랐는데 수달래도 있단다 갑자기 입 안에 꽃 이름이 줄을 선다 진달래는 붉고 연달래는 연하다 그 다음 수달래라니, 진한 진달래에서 연한 연달래 사이로 몇 걸음 걸어가다 주춤한다 흰색이라고? 소복 같고 소색나비 같고 흰 머리칼 할미꽃 등허리 같은......앞날이 급박하게 나를 잡아당긴다 진달래 다음이 연달래 그 다음 수달래라면 이 걸음 너무 빠르다
멈춰라! 그곳은 아직 멀고 꽃은 이제 막 피었다
허무맹랑
입이 없으면 생이 가벼울 거라 생각했는데 먹지골목, 줄지어선 간판 불빛에 하루살이 떼가 까맣게 붙어있다 막무가내 제 하루를 다 걸고 거래 중이다 위험천만하다 입과 가까워진다는 건
치매 앓던 노인이 먹을 걸 이불속에 감춰두었다 얼마나 깊이 감추었는지 자신도 잊고 가져가지 못한 게 죽은 뒤에 다 나왔다 아무리 긁어 먹어도 냄비 바닥에 굴러다니는 생선 눈알처럼 결국엔 남기고 갈 것을
입 하나에 매달려 살았나 며칠 금식을 했을 뿐인데 실밥이라는 말에도 사무친다 톱밥, 꽃밥, 실밥이라는 말은 나비 날개 놓아 주듯 가볍게 밥을 놓아주는 일 아닌가 공중을 밥으로 채우고 저절로 공복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인데
젖통을 양쪽에 안고 살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금식하는 동안 내게 와서 표류하던 그 많은 밥때가 차곡차곡, 마른 나뭇잎처럼 쌓였다 부스럭, 자꾸 허기를 들추는 바람에게 모른 척 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걸려있다
어쩔 수 없이 내 그림자와 헤어져야겠다 좁은 길에 물지게를 지고 빠져 나가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지고 가던 물지게가 가로로 턱, 골목 입구에 걸려 있는 걸 십자가를 진 사람처럼 그 자리에 못 박혀 있는 걸
오래 전 골목길에서 보았던 뒷모습이 오도 가도 못하고 내게 걸려 있다 차라리 오동나무에 걸렸으면 보랏빛 오동꽃에 얼굴이나 묻지 서벅대는 오동잎에 발바닥이나 씻지 그 사람 고개 돌리면 천 번쯤 바뀌었을까 내 얼굴
천사의 도시
아무 생각 없이 앞 사람을 따라 가다
걸을 때마다 날개 뼈가 움찔거리는 걸 보았다
걷는데도 날개가 필요하다니,
순간 공중이 환해졌다
천사를 따라가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걸음이 가벼워졌을 거다
새소리가 노래든 울음이든 상관없다
천사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날개인데
우린 벌써 공중을 잃어버렸다
날려고만 하지 않으면 추락할 일도 없을 테니
앞만 보고 따라가면
오늘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게 될까
그런데 앞 사람이 갑자기 뒤돌아본다
천사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세상에, 그렇게 복잡한 가면은 본 적 없어서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 했다
그러고 보니 비상구 계단이 공중에 걸쳐져 있고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들이 공중에서 쏟아져 내려오고 있다
어두워서 좋은 지금
처음 엄마라고 불러졌을 때
뒤꿈치를 물린 것 같이 섬뜩했다
말갛고 말랑한 것이 평생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어디든 도망가고 싶었다
너무 뜨거워서
이리 들었다 저리 놓았다 어쩔 줄 모르다가
나도 모르게 들쳐 업었을 거다
아이는 잘도 자라고 세월은 속절없다
낯가림도 없이 한 몸이라고 생각한 건 분명
내 잘못이다
절대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이 복음이었나
앞만 보고 가면
뒤는 저절로 따라오는 지난날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깜깜 무소식이다
그믐이다
어둠은 처음부터 나의 것
바깥으로 휘두르던 손을 더듬더듬 안으로
거두어들였을 때 내가 없어졌다
어둠의 배역이
온전히 달 하나를 키워내는 것,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좋은가, 지금
선물
전봇대가 십자가처럼 줄지어 서 있습니다
처형할 사랑도
순교할 사랑도 없는 만경평야에
검은 새떼가 어떤 맺힘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날아옵니다
지독한 날개의 힘!
온 세상을 다 덮고도
지나가는 고양이 등에 도둑 도둑 어둠을 얹습니다
무슨 혈연처럼 무조건 한 떼가 되어버린
이것이 내 것인가
남의 것인가 구별 없이 뒤섞인 표정들
찾으러 온 걸까요
알게 모르게
조금씩 빈틈을 다 내주고도 가득 받았다고 생각되는
감염, 어쩌면 감전일지도 모를
만경평야는 지금 어둡습니다
그 많은 날개를 한꺼번에 못 박고 제 풀에 적막해지는데
퍼럭, 바람이 펼쳐보려다 얼른 덮어요
모두 캄캄해지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 같은데
십자가만 빛납니다
무얼 받았나
절대 손바닥을 펴 보면 안됩니다
오, 어쩌면 좋아
뼈만 남은 사연이 함께 굴러 갈 동안
바퀴 따라가는 생은 모두 급하네
벼락같은 속도를 얻었으니
저게 모두 발자국이라면 내 발자국도 흔적 없을 터
차라리 눈발이거나 서릿발같이
가볍거나 아득했으면 좋겠네
구부러진 노인이 오그라든 유모차를 밀며 가네
서둘러 당도할 곳이 있기나 한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요란한 발걸음으로 지나가는데
가만 보니 소리만 있고 동작이 없네
고비마다 손발 떼어주고 오장육부 다 내주고
어느 밤중 깜박 잠들어 꿈인지 생시인지도 모르고
둘, 둘, 굴러 집 찾아가는 엄마들
똑같은 표정 똑같은 모습으로 지나가네
어쩌면 좋아, 아무렇지 않게 멀어져 가네
잡으려고 해도 손이 없는데
가볍고 아득한 이 온기는 어떻게 돌려주나
어둠은 지나간 모든 것들의 그림자
그저 스쳐가는 슬픔인 줄 알았는데
오, 오, 오, 오, 동그랗게 내가 굴러가네
잊을 건 잊어야지
노인요양원 치매센터에
모든 걸 다 잊은 몸들이
오직 하루 세끼 챙기는 힘으로 버티고 있다
꼬박 꼬박 꼬박 악착같은 허기가 그들을 놓지 않는다
거처란
밥을 해결하는 곳, 그곳이 바로 절명지 아닐까
처음부터 우리는 허기의 먹이였으니
머리부터 차례로 들이밀며
온 몸 고스란히 그 입 속에 갖다 바치느라
평생 먹는 일이 최선이었다
무엇을 먹는지 무엇에 먹히는지
고통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잊어버린 사마귀처럼
아내 얼굴도 남편 얼굴도 까마득히 잊은 채
끄덕 끄덕 끄덕
말없이 밥만 떠 넣는 저 무표정
덩그러니 남은 몸은 허기의 부표같다
안개주의자
물가의 길들은 연약지반 구간이 많다
눈물이 많은 사람이 속이 무른 것처럼, 그 옆에서는
항상 속도를 줄여야 한다
안개는 침묵속의 양떼,
조심스럽게 지나가야 한다
흐려지는 입김 속에서도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포도당같은 믿음으로
어느새 나는 소심한 안개주의자가 되었는데
안개도 모르면서
안개와 통하다니, 누구에게 한 다발 안길 수도 없고
모른 척 달려가기엔 너무 위험한
네 속에서 오래 막막했으나
네 속을 벗어나도 막막하긴 마찬가질 거다
흰 양이 검은 양을 낳을 때도 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는 다만 지나가는 사람, 눈물 짓무르는 가장자리를
조심스럽게 밟고 지나가야 한다
박소유 시인 약력
1988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1990년 현대시학 등단
시집 <어두워서 좋은 지금>
첫댓글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연달래 너머 수달래꽃으로 피어나셨군요. 축하합니다
누구는 꽃을 상처로 읽지만 나는 벌써 꽃이 상처로 보인다
요즘은 여기 저기 상처가 많네요, 축하드립니다
거처란 밥을 해결 하는 곳... 허기의 부표 같을...우리의 생!!
잘 감상하고갑니다
축하 드립니다!!
어두워서 좋은 지금,
뒤는 저절로 따라오는 지난날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깜깜 무소식...
밑줄 그어 놓은 시집을 생각합니다. 축하합니다.
축하 드립니다.
ㅎ
편편마다 절창입니다.
시인님 축하드립니다.처음 엄마라고 불려졌을 때 뒤꿈치 물린것같이 섬뜩...,
가슴 아린 명시들 감상 잘했습니다. 시인님의 특강시간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