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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0 총선' 75주년...역사적 의미는
1948년 제헌국회 구성...남한 단독 실시는 해방정국서 불가피한 선택
대부분의 교과서와 관련 정보들이 '5.10'을 '분단의 시작' 인양 기술
'제주 4.3'은 '5.10 저지'를 위한 좌익의 궐기에서 비롯됐음을 알아야
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국회의원 총선거가 실시됐다. 전국 1만3272개 중 한 투표소의 내부 모습이다. /국가기록원
5월 10일마다 중요한 일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5.10’은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날이다. 한반도 유사 이래 처음으로 출신·성별을 넘어 모든 보통 내지 보통 이하 모든 사람들도 사람대접을 받기 시작했음을 상징한다. 이 날, 선거 4대 원칙(보통·평등·비밀·직접)에 충실한 ‘보통선거’(common suffrage)가 이뤄졌다.
제도화된 보통선거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어떤 ‘피바다’를 건너왔는지 보면, ‘5.10’의 세계사적 의미가 도드라진다. 인간존엄의 평등이 상식으로 뿌리 내린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8세기 말 프랑스혁명 전후의 계몽주의 흐름과 더불어 제출돼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실화됐다. 인류 최초의 근대공화국 미국조차 건국 초엔 ‘백인남성, 21세 이상, 재산소유 및 납세능력자’에 선거권을 한정시켰다. 흑인·원주민과 여성에게 투표권이 확대된 것은 20세기 전반의 일이다.
김영삼 정부 시절 ‘역사 바로세우기’ 이래 보수층이 민족해방론 역사관에 포섭되면서, 100년전 항일빨치산식 세계관 가치관의 포로가 됐고 ‘5.10’과 대한민국의 의미도 폄훼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교과서 및 관련 정보들이 ‘5.10’을 분단의 시작인양 기술하는데, 그 전후 사정을 알아야 할 때다. 자유민주공화국을 위한 단독선거가 ‘해방정국’ 좌·우 대립의 혼란 속에 ‘불가피한’ 유일의 선택지였음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좌우익의 ‘협상’이나 ‘중도’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다. 그 이상을 쫓았다면 한반도 전체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음을, 동유럽이나 중남미 동남아의 현대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제주 4.3의 비극이 바로 ‘5.10 저지’를 위한 좌익의 궐기에서 비롯됐음을 분명히 짚어야 한다. 대한민국 수립을 막고자 ‘5.10’을 방해한 것이다. 좌익의 대한민국 건국 ‘필사저지’가 4.3의 본질인데, 그로 인한 책임을 왜 대한민국과 건국대통령에게 떠넘기나?
1948년 5월 10일 선거 당일 수류탄 테러 등으로 전국에서 18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투표율은 95.5%에 달했다. 아직도 안 깨진 기록이다. 오전 7시~오후 7시 1만3272개 투표소에서 투표가 진행된 끝에 총 198명이 당선됐다. 당초 남북한 인구비례로 국회 300석이었으나, 북한지역에 할당된 100석을 유보한 채 남한 측 200석을 목표로 진행된 것이다. 같은달 31일 제헌국회가 열렸으며, 헌법제정을 거쳐 드디어 그해 8월 15일 정부가 수립된다.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 ‘대한민국’의 탄생이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운동사 속 존재감에 걸맞게 책임이 물어져야 할 인물은 김구(1876~1949)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해 단독정부 수립에 협력하지 않겠다." 선거준비가 한창이던 4월 19일, 김구는 이렇게 말하며 방북했다가 빈손으로 돌아왔다. 이후 침묵한 것은 북한의 인민공화국 준비상황과 군사력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자타공인 ‘애국자 김구’, 다만 여기서 ‘국’이 과연 자유민주공화국이었나 묻지 않을 수 없다.
김구는 2차대전 종식 직후의 국제정세 파악과 서구근대문명 및 자유민주공화국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이른바 ‘좌우합작파’ ‘민족주의 중도세력’은 남한 단독정부론에 냉담했으며, 이미 미군정에 의해 불법화된 남로당은 김일성의 ‘통일정부수립’ 주장에 동조했다. 비공산계열이 김일성에게 말려들게 만든 대표적 지도자가 김구다. 김구 연구의 학술적 성과는 이승만학당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상당히 축적돼 있다.
당시 ‘5.10’ 반대 명분이던 ‘분단 영구화’ ‘군정 연장의 합리화’ ‘외세 배격’등의 논리를 뚫고 선거가 치러지고 대한민국이 태어난 것은 이승만 한사람의 정세관과 뚝심 덕분이었다 할 만하다. 일본패망 이후, ‘5.10’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이르기까지 우연인듯 필연은듯 기적 같은 장면이 거듭된다. 모스크바3상회의 결의에 따라 열린 미소공동위원회가 양 진영의 반목으로 1947년 8월 12일 결렬, 한반도문제가 표류하게 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국제연합(UN) 총회 개막 제2일째 국무장관 마샬을 통해 ‘코리아의 독립’을 정식 의제로 상정시켰다. 21일 UN 운영위원회를 거쳐 23일 잇따라 본회의에서 의제 채택을 통과시킴에 따라, 총회 제1차(정치)위원회에 한국문제가 정식으로 부의, 심의됐다.
미국은 1948년 3월 31일 이전 UN임시위원단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 실시를 주장한 반면, 소련은 1948년 초까지 먼저 한국에서 외국군 동시철수를 주장하며 날카롭게 대립했다. 11월 14일 총회 본회의에서 미국측 안을 43:0(기권 6)이라는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함으로써 모스크바협정이 규정한 5개년 신탁통치안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묵살당한다. 한반도문제 처리에 새로운 방향이 설정될 계기가 열린 것이다. UN 결의에 따라 총선거 감시를 위해 UN 임시위원단이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화민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등 9개국으로 구성된다. 이 때 소련 내 중추적 연방이었던 우크라이나가 불참을 선언하며 빠졌다.
1948년 1월 12일 UN 정치위원단이 서울 덕수궁에서 첫 회동을 가지고 임무에 착수했다. 그러나 1월 24일 소련군정당국이 이 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부함에 따라 북한지역에서의 업무가 불가능해진다. UN은 이런 상황을 보고받고 그 해 2월 26일 위원단이 한국 내의 가능한 활동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게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접근 불가능한 북한지역을 미뤄둔 채 남한지역만 선거를 실시하도록 국제사회의 동의가 이뤄진 것이다. 이승만 주도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재빨리 독자적인 총선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지방조직 정비에 나섰다. 덕분에 1947년 9월 하순까지 읍·면 단위까지 대한민국 건국을 향한 총선거 열망이 무르익는다.
1948년 3월 10일부터 선거대책이 본격 협의됐다. UN 임시위원단 메논 의장이 ‘1948년 5월 첫주’로 정했고, 그 뒤 미군정 책임자 하지 J.R. 중장의 요청에 따라 5월 9일로 정해졌다가, 일요일이라는 이유로 5월 10일로 변경 확정됐다. 3월 17일 미군정 법령 ‘국회의원선거법’이 공포돼 3월 20일~4월 9일 20일간 유권자 813만2517인 중 96.4%(784만871인)가 선거인 등록을 마쳤으며, 그 대부분이 투표에 참가했다. 또 한번 ‘5.10’의 정당성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만 21세 이상 성인에게 선거권, 만 25세 이상자에게 피선거권이 인정됐으나, 식민지에서 막 벗어난 신생독립국다운 일부 제한은 있었다. 일제시대 작위를 받았거나 제국의회 의원이었던 자에겐 선거권을, 판관·임관 이상, 경찰관·헌병·헌병보, 고등관 3등급 이상인 자, 고등경찰 출신, 훈(勳)7등 이상 수여자, 중추원의 부의장·문참의 등에게 피선거권을 주지 않았다.
1선거구에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 총 948인이 입후보해 평균 4.7:1의 경쟁률을 보였다. 부(府)·군 및 서울시 구(區)를 단위로 하고, 인구 15만 미만은 1개 구, 인구 15만~25만은 2개 구, 인구 25만~35만은 3개 구, 인구 35만~45만 미만의 부는 4개 구로 해 200개 선거구만 확정했다. 북한지역을 끝까지 총선에 포함시키려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