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11:1~14
본문의 말씀은 유대 분봉왕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것에 대해 세례 요한이 책망함으로 감옥에 투옥 되었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감옥이 주는 두려움 때문인지 아니면 예수님이 자신이 감옥에 갇혔는데도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으신것에 대한 분노인지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면회를 온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니까"라고 묻게 한다.
세례요한이 순전히 예수님의 메시야성을 의심해 이런 말을 했다고 보기엔 일련에 그가 예수께 했던 말과 행동과는 너무나 매치가 안된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대한 원망과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신적 능력으로 자기를 풀어 달라는 호소를 반어법적으로 표현한것이 아닐까 한다.
세례요한은 태아때부터 예수님을 위한 택정함을 받은 선구자로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집에 방문했을 때에도 엘리사벳의 태중에서 역시 태아인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 태동을 했던 자이다.(눅1:41,44)
이제 6,7개월차된 뱃속의 태아가 임신초기의 인간의 형상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의 태아인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뻐 뛰어 놀 정도라면 그가 태아때부터 얼마나 영적 감각이 타고 나게 발달 했는지 알수 있다.
그는 공생애 시작 전의 예수님을 대속제물로 오신 메시야로 알아보고 '세상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다.(요3:29)
그리고 나는 그의 신발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했고 성령이 오시기도 전인 상태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는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베푸실 것이라고 말 했다.
아마도 예수께 성령에 대해 듣지는 않았을 텐데, 그의 영성은 그전 까지의 선지자와는 확실히 차별화 된 면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라 했을 때도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찌 나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냐며 만류 했다.
또한 그는 예수께 세례를 베푼 후에도 영적감각으로 예수께 성령이 임하는 것을 직접 보았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자라"라는 하나님 음성을 들은 사람이다.
그런데 이랬던 그가 아무리 감옥에 갇혀 있다 한들 어이없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아니면 다른이를 기다니오니까"라니...
그는 아마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불의하고 타락한 자들을 심판하실 메시야를 기대했기에 자기가 당한 일에 무심한 예수님께 단단히 실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 (사 35:5, 6 42:7, 61:1)을 인용하여 자신이 메시야임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전하게 하신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자가 살아나며 복음이 전파된다하라"
사실 예수님이 말씀을 굳이 하실 필요 없이 세례요한도 이사야의 메시야에 예언과 그에 부합되는 예수님의 메시아로의 행적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다음 연결되는 말씀에서 설명이 된다.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한자는 복이 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메시야로서 믿었지만 인류의 대속주되신 참본질로서 메시야보다 자기를 위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메시야를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 자신을 실족시키는 자가 자기를 핍박하는 헤롯안디바나 헤로디아가 아닌 자기가 믿는 구세주인 예수님이 된것이다.
여기서의 이 세례 요한의 나약하고 이기적인 신앙관은 현재 우리들의 신앙과 너무나 닮아 있다.
평소엔 세례요한처럼 대담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악에 타협치 않고 강직한 믿음을 보였던 사람도 자신에게 이해할수 없는 불행한 일이 닥치면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런 어려움을 허락하시지?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것에 대한 댓가가 고작 이것인가?"
그렇기에 예수님은 누구든 나를 위하여 실족치 않는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 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 군중들에게 세례요한이 위대한 선지자였음을 증거 하신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 나갔더냐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러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나은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재미있게 수사학적 표현을 하셨는데 첫번째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광야로 나갔더냐'라는 표현은 요한이 광야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복음을 전파한 것과, 그와 비교되게 지조없이 바람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대인의 신앙관을 빗대어 세례요한의 강직함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그 사람은 왕궁에 있다'는 표현도 같은 연장선에 있는 말씀으로 세례요한이 부드러운 고급천으로 지은 옷을 입은 유대 귀족들과 달리 광야에서 약대털 옷을 입고 나실인으로서 청렴하고 구별된 생활을 했음을 말씀하신것이다.
그리고 세번째에 예수님은 군중들 앞에서 말라기3:1절을 인용하시며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이며 지금까지 의 선지자중 가장 나은 선지자임을 증거 하신다.
그런데 그 다음절엔 또 이해하기 힘든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중 세례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여자가 낳은자중 가장 큰자인데 어떻게 천국에서는 가장 작을 수 있을까?
우선 여자가 낳은자 중 가장 크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롯해 쉽게 이해 할수 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 시대에 난 마지막 선지자로 직접적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이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께 직접 물로 세례를 베푼자이기도 하다.
물론 예수님이 받은 세례는 죄인된 우리가 받는 회개의 세례와는 틀리다.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우선적으로 메시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는 예식이었고, 후대의 성도들에게 성찬과 같은 성례의 표본이 되시기 위함이셨다.
그리고 영적으로 본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닿는 것은 무엇이든 거룩해지기 때문에 예수께서 몸을 직접 물에 담그시므로 앞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의 물을 정화하기 위함이기도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친히 세례요한에게 요청해 세례를 받으셔야 했다.
그래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였던 세례요한이 감히 창조주이신 예수님께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그것 하나만으로 예수님께 여자에게 난 자중에 가장 큰자란 호칭을 얻을 만하다.
그는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권능을 행한것은 아니었지만 주의 사자로서 주의 길을 예비 했기에 역사상 세례요한보다 더 중요하고 위대한 인물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천국에서 가장 작은 자이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라고 하신것처럼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태어났으나 율법아래 있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로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대속제물의 어린양으로 인류의 죄를 사하실 것과 그가 베푸실 성령세례에 대해 알았지만 안타깝게 그 은혜을 누리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다.
우린 가끔 우린 어른들로 부터 옛이야기를 듣거나 할때 지금 시대에 태어난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는 그것과는 비교할수 없는 은택이며 큰복인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볼품없고 나약한 자라도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입고 성령을 받은 자라면 세례요한보다 큰자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천국은 우리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시어 여신 성령의 시대, 은혜의 시대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이시기도 하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은혜는 돈이 있건 없건 귀하건 천하건 따지지 않고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은혜이지만 아무나 획득할수 있는 은혜는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주 재밌는 표현을 하신다.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자가 빼앗느니라"
여기서 침노로 번역된 헬라어로 '비아제타이'는 폭력을 쓴다라는 뜻을 지닌 '비아조'의 중간형 수동형이다.
그리고 '침노하는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비아스타이'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자를 의미한다.
이렇듯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는 데에는 열정을 넘어 그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오직 미친듯이 그것만을 얻기 위해 사는 삶이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천국 가면 좋지'가 되면 결코 안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을 버려서라도 획득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천국인 것이다.
몇년 전에 탈레반에게 점령당한 아프카니스탄을 탈출하는 난민들을 TV를 통해 본적있다.
그들은 남아있으면 죽는다는 일념하에 위험하게 뜨는 비행기에 매달려 그곳을 떠나려했다.
우린 그와 같은 절박함으로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예수님께 매달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탈레반은 사단이고 아프간은 그들에게 점령당한 땅이다. 그래서 그 땅에 남아 있으면 죽기 때문에 오직 아프간 난민처럼 우린 예수님께 올라타야 하는 데 사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한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ㅡ주님의 산 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