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회자 모임]
인생의 기반 2020. 1. 17. 이현래 목사
성경에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7:24)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베드로에게는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말씀하셨다.
또 바울은 ‘광야에서 따르는 반석’이라는 말을 썼다. 물이 없을 때 모세가 그 반석을 쳐서 생수를 먹였는데, 그것을 따르는 반석이라고 표현했다. 그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해서 물을 먹어서 그런지 그런 표현을 했다. 반석은 집을 짓는데 기초로 최고로 좋은 것이다. 뉴욕이 고층 빌딩들이 많이 있는데, 바닥이 암반이라는 말을 들었다. 바위로 된 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옛날에도 100층짜리 집을 지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여의도도 비슷하다. 섬이 된 이유가 그 밑에 반석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으로 63빌딩을 여의도에 지었다. 만일 그때 돈이 좀 더 있었더라면 여의도 땅을 팔지 않고 뉴욕처럼 했더라면 아주 명소가 될 수 있었는데, 돈이 없으니까 반을 잘라서 아파트를 지어 버렸다. 서울시의 모든 상업빌딩을 전부 여의도로 모아 놓았더라면 뉴욕보다 훨씬 큰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때는 땅을 팔아야 되었기 때문에 팔고 말았다. 그래서 아파트가 들어오고 말았다. 참 아쉬운 일이다. 구미 공단도 처음에 실리콘 벨리를 만들려고 박대통령 때 시작했는데, 빨리 분양이 안 되니까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것을 팔아서 아파트를 지었다. 공장도 무공해 공장만 지으려고 했던 것인데, 그것이 안 돼서 이것저것이 들어오는 바람에 실리콘밸리가 못 되고 말았다. 돈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된다는 그 말씀을 드리고 싶다. 어떤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어야 오래간다는 말도 있다. 모래로 기초를 하면 아주 단단하다고 한다. 땅을 파고 모래를 집어넣으면 기초가 아주 좋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이해할 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 아주 좋은 방법이다. 대구교회도 깊은 곳에는 맥반석이 깔려 있다. 거기까지는 기초를 안 해도 될 만큼 깊은 곳에 있다. 지금 지하수를 뽑아 쓰는데, 150미터에서 뽑아 쓰고 있다. 너무 깊이 들어 있다. 깊이 지하수를 팔 수 있는 그런 곳이라 할 수 있다. 좌우간 반석이 있으면 집을 짓기가 좋은 것 같다. 내가 서울 영천이라는 곳에 살았다. 거기가 옛날에 유명한 와우아파트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대형공사를 한 곳이 그곳이다. 5층 아파트를 짓는데 땅이 모두 돌이다. 석비레라고 하는 돌인데 꼭 화강암이 썩은 것처럼 되어 있다. 겉은 부슬부슬하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아주 단단하여 깨지지 않는다. 그것을 장비도 없던 시대였으니까 곡괭이로 겨우 파야 1미터 정도 밖에 못 판다. 팔 수가 없다. 바위는 차라리 다이나마이트를 넣어서 깨면 되는데 이것은 그것도 아니다. 깨질 때는 모래처럼 깨진다. 그런데 파기는 바위보다 훨씬 더 어렵다. 거기에 집을 지었는데 풍화작용이 일어나니까 밑에서 부식해서 아파트가 무너지는 와우아파트 사건이 생긴 것이다. 지금은 그것을 다 철거하고 다르게 지었다. 하여간 기초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집을 짓는 데는 기초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이것이 모든 일에 다 같은 것 같다. 인생도 기초가 튼튼해야 되고, 집도 기초가 튼튼해야 되고,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우리 인생도 왜 이렇게 잘못 되었는가? 기초가 잘못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인격을 지켰어야 되는데, 그 인격을 버렸으니까 기초가 없는 인생이 되었다. 그러니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반 학문은 말할 것도 없다. 과학은 해부학과 같은 것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아주 과학적이다. 계속 실험을 해서 입증해 나가는 방식이다. 인문학은 그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에 기초를 두었다. 철학에 기초를 두었기 때문에 갈수록 복잡해진다. 이 사람이 이렇게 말해 놓으면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어디 가서 심판을 받을 데가 없다. 한 시대를 지배하고 가고 또 다른 시대가 오면 다른 사상이 와버린다. 신학도 그런 것 같다. 철학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갈수록 복잡해진다. 교회가 이렇게 안정이 안 된 이유는 결국 신학이 안정이 안 된 이유이고, 또 교회 자체가 기초가 잘못 되어서 흔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 와서 교회를 고쳐 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많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은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교회를 어떻게 고칠 방법이 없다. 왜냐하면 기초가 잘못되어 있는 집은 위에서 아무리 리모델링을 잘해보았자 소용이 없다. 흔들리는 것이 마찬가지이다. 나는 기독교도 기초를 다시 놓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좀 혁명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기초를 어떻게 해야 어떻게 되지 기초를 그냥 놓아두고서는 아무리 고쳐도 매 한가지가 아니겠는가? 이 생각을 한다. 신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다 거기서 거기다. 그것을 가지고 어디를 더 해 본다든지 덜해 보는 식이고 비판하는 식이지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는다. 새로운 것이 나올 수가 없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전도서의 말은 사람의 생각에서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도 해 아래는 새것이 없다. 사람이 똑 같은 데 무슨 새것이 나오겠는가? 사람이 같기 때문에 새것이라는 것이 없다. 개들이 하는 짓을 보면 옛날 개나 지금 개나 똑 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양만 다르지 똑 같다. 원리가 같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정치를 봐왔다. 똑 같다. 해방 후나 지금이나 똑 같다. 조금도 발전된 것이 없다. 공업도 발전하고 경제도 발전하고 다른 것도 발전했는데, 정치 발전은 전혀 되지 않았다. 씨가 그런 것인지 의식 구조가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똑 같다. 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도 국회는 막 싸운다. 국회는 6.25전쟁 중에도 싸웠다. 전쟁 중에도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부산까지 내려가서 말이다. 부산만 한 방 밀면 끝날 것이었다. 그때 만일 인천상륙작전을 하지 못하고 미군들 도착이 늦었더라면 부산이 한 방이면 나가떨어질 판이었다. 영천 방호선이 무너지면 바로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었다. 대구는 다부동 전투에서 실패했으면 그냥 부산까지 직통해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런 형국인데도 싸웠다. 나라는 뒷전이고 정쟁이 더 중요했다. 조선 왕조가 그래서 망했다. 나라는 형편이 없이 망해 가는데 그 안에서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나뉘어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라가 되겠는가? 일본 사람들이 안방에 들어올 때까지 계속해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버릇이 지금도 똑 같다. 보라. 조금도 틀리지 않다.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이 아니다. 자기들 파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만 생각한다. 소국 사람들의 특성인지 잘 모르겠는데, 사람이 같으면 모양은 달라도 내용은 똑 같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한국교회는 미국에 가도 한국교회이고 동남아에 가도 한국교회이고 똑 같다.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그래서 기반이라는 것이 결국 운명을 결정하는구나. 우리말에는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알고 보면 시작이 끝이다. 시작에서 끝이 결정되어 있다. 포도 씨를 심으면 시작이 포도 씨를 심는 것이 아닌가? 마지막에 추수할 때 보면 도로 포도를 거둔다. 시작이 마지막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시작이 마지막이다. 모양이 크든지 작든지 그것만 차이가 있는 것이지 내용은 전혀 변하지 않는다. 감 씨를 심어 놓으면 감나무가 나온다.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씨가 열매가 된 것 이외에는 생명 자체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교회도 시작이 전부다. 중간에 가서는 변경이 불가능하다. 감나무를 심어 놓고 중간에 감이 안 좋다고 바꿀 수 없다. 그러려면 잘라 버리고 다른 것을 접붙이는 수밖에 길이 없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도 그렇다. 예수님이 오셨어도 안 된다. 바울 사도의 논리대로 하면 잘라버리고 접붙여야 된다는 것이다. 옛 감람나무를 잘라 버리고 새로운 감람나무로 접을 붙여야 된다는 말씀했고,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결국 기독교의 근본적인 것은 죽고 부활한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죽고 부활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다시 살았다는 것 이외에는 다른 것을 말할 수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이 기초다. 사람도 어려서 잘못되면 커서 고치기가 참 어렵다. 우리말 속담에도 세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참 어려운 것 같다. 어렸을 때, 부모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은 상처가 평생을 간다. 더 어렸을 때일수록 더 그렇다. 커 가면서 부모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 학교에 가서 선생님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 이것은 아주 치명적이다. 큰 다음에는 그런 것을 자기가 이길 수가 있는데, 그렇지 못할 때 받은 상처는 아주 어려운 것 같다. 무의식 속에 그것이 박혀 있어서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럴 때는 정말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 실감난다.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 죽고 다시 나야 된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질 리가 없다. 간단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인생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단체적으로도 그렇다. 일본에 가면 높은 건물이 별로 없다. 지진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높은 건물을 지을 수가 없다.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필리핀에서는 화산이 폭발해서 난리다. 그런 곳에는 집을 짓기가 어렵다. 언제 폭발해 버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1:1)는 이 말은 굉장히 안전한 기반을 말한다. 그냥 저절로 생겼다거나 우연히 생겼으면 이것은 반석이 없는 것이다. 그냥 아무데나 집을 지어놓았다는 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전능자가 하늘과 땅을 창조했다. 이것은 우리가 전능자를 본 적이 없지만 너무나 확고한 기초를 이야기 한 것이다. 전능자가 지었으니까 아무나 지었다고 하면 확고하겠는가? 그런데 전능자가 지었다는 그 말만 확실하게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생은 안정을 얻을 수 있다. 내 인생은 전능자가 지었다는 것을 안다면 아주 쉽다. 내가 해 보니까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서 흔들렸다. 교회를 다니다가 크니까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를 가는데 왜 가야 되는지 잘 모르겠더라. 하나님이 있고 봐야 뭐가 되겠는데 그것을 모르니까 그래서 몇 년 동안 방황을 했었다. 그런데 내가 피조물이구나.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구나. 그런 것이 내 인생이구나. 이렇게 알고 나서 마음에 정리가 되었다.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 인생인데, 하나님을 어떻게 알겠는가?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내 자신이 너무 본분을 이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머릿속이 싹 정리가 되었다. 그 뒤로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 번도 헷갈린 적이 없다. 그때 시골에서 처음으로 교회생활을 긍정적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10살에 교회에 들어가긴 했는데, 그렇게 될 때는 25세 즈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쯤 비로소 확고한 기반을 얻게 되었다. 다른 것은 다 쉽다. 그때까지 세례도 안 받고 미루고 있었다. 장로교에 다녔지만 세례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교회에서 하라니까 해야겠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내가 다닌 교회는 작은 교회였다. 그때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총각이고 나이도 안 되는데 서리집사를 하라고 했다. 그것도 뭔지 모르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무엇이든지 교회에서 하는 것은 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왜 내가 이것을 해야 되는가? 이런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그러고 나니까 당연히 자연스럽게 그러면 하나님 나를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왔다. 그 전에는 그런 질문을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었다.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그런 질문이 나오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그런 질문을 하고 있으면 평생을 가도 대답이 없다. 하나님이 없는데 나를 왜 만들어 놓았습니까?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미친 짓이지 그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 맞지 않다. 자기 부모를 원망하면 말이 될 것이다. ‘왜 나를 낳았냐?’고 말이다. 요즘 아이들도 부모를 제일 괴롭게 한 것이 ‘나를 왜 낳았냐?’는 말이다. 뭘 하다가 자기마음대로 안 되면 ‘왜 나를 낳았느냐?’고 한다. ‘왜 나를 낳았느냐?’고 하면 부모는 할 말이 없다. 사람의 기초는 정말 중요하다. 적어도 부모가 나를 낳았다는 것은 확고하게 있어야 된다. 이것이 흔들려버리면 사람은 모든 것이 다 흔들린다. 우리 교회에 그런 형제가 있다. 아버지가 17살에 결혼을 해서 그 형제를 낳았다. 옛날에는 17살에 아들을 낳으면 어른들 밑에 부끄러워서 아기를 안고 다니지도 못한다. 자기 아들이지만 아들이라는 소리를 못한다. 대가족 안에 살았다. 할아버지가 있고 큰아버지가 있고 자기 아버지가 있고 온 가족이 대 가족으로 살았다. 아주 어렸을 때 한 번은 아버지가 밭에 가는데 따라 갔던 모양이다. 가면서 ‘아빠, 아빠’ 하니까 아버지가 그 어린 아들에게 ‘너 이놈의 새끼, 앞으로 아빠, 아빠하면 죽여 버린다.’는 식으로 말을 했던 모양이다. 창피하니까 아빠라고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것이 어린 아이에게는 사실대로 박혀 버렸다. 어려서는 모르고 컸는데 사춘기가 돌아오면 사람이 모든 것이 발동한다. 그때 그 생각이 난 것이다. 내 아버지는 누구인가? 이 문제가 생겼다. 그 사람에게 ‘누가 천지를 창조했는가?’와 같은 문제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얻게 되었는가 하면 내 아버지는 지금 있는 이 사람이 내 아버지가 아니고, 큰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왜? 큰아버지는 자기를 예뻐하기 때문이다. 큰 아버지가 자기 친아버지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갈등 때문에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못해버렸다. 그 형제가 대구에 와있었는데 매일 술을 먹었다. 알콜중독 비슷했다. 술을 먹고 큰일을 저지르지는 않는데 계속해서 홀짝홀짝 마시니까 중독자다. 술 먹는 사람이 그렇듯이 코끝이 항상 빨개져 있다. 그런데 내가 잘 모르고 말을 잘못해서 평생 병신노릇을 하게 되었다. 장사를 하는데 손님은 잘 받는데, 뒤에 물건을 처리하지 않아서 엉망진창이다. 속에 깊은 불안이나 갈등이 있어서 그랬는지 제주도로 귤을 사러 보냈더니 비행기에서 오줌을 쌌다고 한다. 우리는 그런 속을 몰랐다. 나도 그런 것을 모르고 소심해서 그렇다만 생각했다. 한 번은 그 형제가 장티푸스가 걸려서 죽을 뻔 했다. 그래서 내가 술을 못 먹게 하려고 장티푸스라는 병이 장이 뚫어지는 병인데 너는 앞으로 술을 먹으면 죽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후로 술을 안 먹었다. 술은 안 먹었는데 정신적 갈등은 해결이 되지 않았다. 술도 먹어야 될 사람에게는 먹어라 해야지 먹지 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이 술을 계속 먹었더라면 정신과 병원까지 안 가도 되었다. 그런데 술을 안 먹고 제 정신이 돌아오니까 갈등이 생겨버렸던 것이다. 지금도 약을 먹고 있다. 결혼을 하고 나니까 그것이 발작을 했다. 처음에 기반이 잘못되면, 기초가 잘못되면 인생이 이상하게 되는 것이다. 멀쩡한 사람이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헷갈려 버리니까 저 사람은 내 아버지가 아니고 큰 아버지가 내 아버지라고 생각해 버리니까 어떻게 되겠는가? 왜 큰 아버지가 내 아버지인가? 아버지가 군대 갔을 때, 큰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큰 아버지가 자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랬으니까 어린 나이에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겉으로는 진짜 아버지가 아버지이고, 속으로는 큰 아버지가 아버지이니까 갈등이 생겨버린 것이다. 갈등 처리가 안 되면 사람은 정신병에 걸린다. 잘못되었어도 합리화되어 버리면 괜찮다. 사람은 자기합리화가 되어 버리면 괜찮다. 자기합리화라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살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자기합리화가 안 된 사람은 안 되는 것이다. 평생을 거짓말만 하면서도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다. 자기합리화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번 거짓말을 해도 합리화가 안 되면 정신병에 걸린다. 사람은 합리화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나쁜 것인데도 어떤 경우에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런 것은 모두 기반을 흔들어서 그런 것이다. 자기 인생의 정체성을 흔들어 버리기 때문에 어떻게 할 줄 모르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똑 같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믿고 열심히 믿는다고 해도 기초가 잘못되어 버리면 이것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 교회도 열심히 해도 기초가 잘못되어 버리면 다른 길로 가 버린다. 똑 같다. 예수님이 지금 세상에 와서 교회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그렇게 한 번 생각해 보면 상당히 멀리 왔다고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교회에 와서 여기가 어디냐? 여기가 뭘 하는 데냐? 이렇게 묻지 않겠는가? 주인이시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교회에 와서 본다면 이것이 교회라고 하면 ‘교회라는 게 뭐냐?’라고 할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에게로 도로 바쳐야 한다. 도로 바쳐서 새로 만들어줘야 되지 그냥은 안 된다. 불교가 불교를 부처님에게 도로 바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라도 생각하니까 괜찮은 것이 아닌가?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종파가 많지만 천편일률적이긴 한데 모두 다 똑 같은 말을 한다. 마음을 바꾸라는 것이다.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을 수양해라는 것이다. 여기서 나온 한마음 수양회가 불교에서 파생한 것들이다. 명상을 왜 하는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참 선을 왜 하는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시작된다. 인생 문제를 보는데 있어서도 그 사람들은 그것을 가지고 보는 것이다.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슨 문제를 가지고 가도 그것은 네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냐? 원래 있었느냐? 네 마음에서 나온 것은 네가 없애면 없는 것이 아니냐? 누가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즉문즉답을 하면 스님들이나 나오지 목사들은 아무도 없다. 신학자도 대답을 못한다. 왜냐하면 신학이라는 것이 어느 한 부분을 연구한 박사니까 인생의 전반을 대답해 줄 수가 없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생각을 많이 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보통 문제는 다 해결이 되는 것이다. 들어 보시면 통쾌하게 다 대답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나는 이러저러해서 억울하다고 이야기한다. 매일 억울한 일만 생각나는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 웃으면서 그 억울한 것이 어디서 왔느냐고 한다. 그러면 할 말이 없다. 자기 마음이 그렇다는 것이다. 당신 마음이 그러니까 당신이 알아서 할 일이다. 남이 어떻게 해주겠느냐고 한다. 뺨을 한 대 얻어맞았는데 너무 분해서 못 살겠다 한다. 뺨 맞은 것은 간단한데 계속 분하니까 분한 것이 문제다. 그것을 상담하니까 분한 것이 어디서 왔느냐고 한다. 그것이 다 마음에서 오지 않았느냐고 한다. 어지간한 문제는 자기들에게 아주 쉬운 것이다. 스님들 말은 들어 보면 다 똑 같다. 화엄경도 있고 법화경도 있고, 불교 방송을 들어 보니까 여러 가지를 하고 있다. 그런데 다 똑 같다. 하나 같이 똑 같다. 마음이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이 마음心자 하나라고 한다. 나와 같이 있었던 스님이 팔만법장이 심지일자라고 한다. 마음心자 하나라는 것이다. 마음心자를 가지고 팔만대장경이 나왔다는 것이다. 마음만 제대로 깨달으면 법장이 다 그 안에 들었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굉장히 복잡하다. 믿음이 최고다. 모든 곳에 ‘믿음, 믿음’ 한다. 그런데 그 믿음이라는 것이 꼭 일정하게 있지 않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고, 인종에 따라 달라지고, 형편에 따라 달라지니까 대답하기가 아주 어렵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믿음, 믿음, 믿음으로 해서 성공한 사람도 있고, 교회가 커진 사람도 있고, 여러 경우가 있는데, 그 하나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교회의 기반이 확실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반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다. 교회는 그의 몸이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교회의 머리가 누군가?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1:10)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된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안에서 통치가 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안 된다. 교리가 다르고, 교파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다 달라서 안 된다. 사람 생각이 달라서 안 된다. 그리스도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다는 말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다.(엡1:23) 말은 맞는데 그 머리가 어떤 머리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사람의 생각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머리가 분명해야 하는데, 그 머리가 확실하지 않다. 예수를 알기는 아는데, 그 예수가 확실하지 않고 분명하지 않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 번은 한국에 온 어떤 미국 선교사와 이야기를 했다. 그 선교사가 李목사님은 다른 사람하고 뭐가 다르냐고 나에게 물었었다. 내가 할 말이 없어서 예수를 아는 것이 조금 다르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주 비웃는 조로 예수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고 한다. 누구나 예수를 안다고 했다. 더군다나 유럽계통 사람들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사람들은 문화자체가 예수문화니까 모든 것이 기독교로 통한다. 10월부터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시작된다. 미국에 갔을 때 보니까 미국은 집 앞에 정원이 있으니까 집집마다 집 앞을 온갖 장식을 해놓는다. 두 달 이상 계속 그렇게 한다. 그것이 하나의 문화이고 재미이고 기쁨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그렇게까지는 못한다. 그 사람들은 모든 것이 그렇다. 저주를 해도 ‘갓뎀(God damn)’한다. 이 사람들 속에는 그리스도를 빼고는 아무 것도 없다. 문화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모든 것이 다 그렇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다 안다고 한다. 다 안다고 하는데, 예수가 확실하지 않다. 확실치 않을 때 달밤에 본 것이니까 어두우니까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어두운 곳에서 사람을 보면 사람도 유령같이 보인다. 6.25때 내가 피란을 가면서 겪은 일인데 마지막 차를 타고 해남 남창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거기에서 손님들 한쪽은 완도읍으로 들어가는 다리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그쪽으로 차를 타고 갔다. 우리는 거기에서 나와서 땅 끝까지 가야했었다. 그때는 땅 끝이 어딘지 몰랐다. 땅 끝까지 가는 길이 없어서 그냥 바닷가로 계속 갔다. 다 어른들이고 나만 13세 중학생이었으니까 아무 말도 안하고 바삐 갔다. 깜깜한 밤에 나는 뒤에 쳐져서 낙오가 되면 큰일이니까 애를 먹고 뒤따라가는 것이다. 나는 동서남북을 모르는데, 나 혼자 떨어지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때 앞에 가는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니까 유령같이 보였다. 사람도 희미하게 보이면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른다. 예수도 희미하게 보이기 때문에 귀신이라고 했다가 사람이라고 했다가 하는 것이다. 예수를 신이라고 하기도 하고,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는 이유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환희 보인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환희 보이지 않으니까 어느 때 보면 신같이 보이고, 어느 때보면 사람같이 보인다. 성경을 읽어보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는 예수를 보고 제자들이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막4:41,마8:27)고 했는데. 이것은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물위로 걸어오신 예수를 보고서 ‘이분은 사람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자기와 똑 같은 사람이다. 밥 먹어야 하고 잠도 자야하고 똑같다.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니까 이분이 물위로 걸어간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렸다. 제자들도 예수를 따라가면서 많이 헷갈린 것 같다. 어느 때는 이렇게 보이고, 어느 때는 저렇게 보이고 그랬다. 변화산에 갔을 때는 엘리야와 모세와 예수 셋이 나란히 서있는 것을 보았으니까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은 저 사람이 누구기에 저렇게 있을까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는가?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하면 헷갈리지 않을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예수를 보고 저 사람은 이렇다고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제일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갔을 때는 예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자기들 생각에 전혀 없던 사람,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모른다고 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가기 전부터도 모른다고 했다. 홍포를 입고 얼굴을 가려놓고 채찍으로 때리면서 네가 그리스도거든 내가 누군지 알아맞혀봐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내가 누군지 알아맞혀보라고 했는데, 예수는 아무 말도 못했다.(마27:27~31참조) 이 광경을 볼 때 베드로는 얼마나 속이 터졌겠는가? 또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막14:61)고 물었을 때는 “내가 그니라.”(막14:62)고 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헷갈렸던 것이다. 매를 맞고 있는 사람은 누구이고,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는 누구냐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를 어두운 달밤에 본 것 같다. 이런 기초위에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거나 이런 기초위에 내가 교회를 세우면 그 교회가 온전하게 되겠는가?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확실한 것이 있어야 하는데, 확실하지 못했으니까 이런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확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인 것이지 사람이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들대로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기도하고 금식기도하고 있다. 요즘 교역자들은 금식기도를 다 하는 것 같다. 우리 친구도 했었다. 금식기도를 할 때는 목숨을 걸고 한다. 금식기도를 해본 사람의 말로는 마지막에 가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생각도 다 없어지고 음식냄새만 난다고 한다. 조금만 더하면 죽는다. 그런 상황까지 가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보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뭔지를 모르니까 아무리 해도 도로 마찬가지고 도로 마찬가지다. 그때의 그 기분, 완전히 힘이 다 빠졌을 때, 힘이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맑은 기분이 든다고 한다. 평소와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맑은 기운이 있는데, 또 그 기운을 찾아간다고 한다. 금식기도가 끝나고 물 먹고 미음 먹고 밥 먹고 하면 도로 옛사람으로 돌아오는데, 그때 굶었을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또 나게 된다고 한다. 결국 인생의 기초문제는 심각하다. 교회의 기초문제도 심각하다. 성경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증거가 있는데, 이것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 성령으로 잉태된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자고로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그분이 나타냈다. 여러 가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났다. 이만큼 확실히 봤으면 헷갈리지 않아야 한다. 뒤따라 다니면서 이 정도까지 확실히 보았으면 내가 모른다고 하겠느냐는 것이다. 너도 저 사람 편이 아니냐고 하니까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 마26:74)고 했다. 이 말은 베드로가 비겁해서 한 말도 아니고 두려워서 한 말이 아니다. 진실한 말이다. 헷갈리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아는지 알지만 헷갈린다. 신학교에 가서 문서비평이니 역사비평이니 양식비평이니 하는 것을 한참 듣다보면 아무것도 없어진다. 신학교에 1학년 들어오면 목사고, 2학년 때는 장로고, 3학년 때는 집사고, 4학년 때는 평신도가 된다는 말이 있다. 다 쪼개놓고 나니까 비판하고 나니까 아무것도 없다. 근본이 희미하니까 머리 좋은 사람들이 쪼개고 비판해버리면 아무것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우리가 예수를 왜 깊이깊이 알아야 하는가? 이것 때문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히12:2) 그분을 확실히 알아야 내가 온전하게 되지 그분을 모르고는 내가 아무리 온전케 되려고 해도 안 된다. 이런 것은 불교와 마찬가지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보고 참다운 기독교인이 되어보려고 노력하는 이 모든 것은 불교에서 수양하는 것이나 다들 바가 별로 없다. 이렇게 노력을 하면 남이 볼 때 상당한 수준에까지 이를 수는 있지만 내 생명은 바꿔진 것이 아니다.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내가 바꿔진 것은 아니니까 우리는 평생 예수를 파고들어서 깊이 뼈 속까지 확실히 알아야 된다. 내가 왜 자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말하는가? 그것이 다른 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비판하더라도 이것만은 사실이다. 다른 것은 다 해석이니까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 그 머리 좋은 사람들이, 몇 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사람들이, 지지고 볶으면 비판받지 않을 것이 별로 없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게 비판을 하더라도 거부할 수 없는 부인할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은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었다.’는 이것이다. 볼트만이라는 신학자가 성경의 모든 것이 신화일지라도 이것만은 사실이라고 했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역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지금도 역시 똑같다. 어떤 사람이라도 십자가에 못 박아놓으면 내려올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사실이다. 다른 것은 사람이 생각해서 해석한 것이니까 똑 같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고, 저렇게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과학은 실험을 하기 때문에 거짓말이 안 된다. 뭘 해도 실험을 해서 증명을 해야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없다. 그런데 신앙이나 인문학은 실험을 할 수 없으니까 자기도 속고 남도 속는다. 그래서 그런 비판학, 비평학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이것만은 변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왜? 그것은 지금 당장도 있기 때문이다. 콩이 만 년 전에 생겼다거나 억만년 전에 생겼든지 간에 관계없이 그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금 콩이 있기 때문이다. 콩은 이렇게 이렇게 생겼다. 콩은 이렇게 심고 이렇게 수확한다는 이것을 만 년 전 사람이 했거나 아프리카 사람이 했거나 아시아 사람이 했거나 누가 했든지 간에 이것은 사실이다. 왜 사실인가? 지금 콩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홍해바다를 건너왔다는 것을 비판하는가? 그것은 지금은 그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보증하겠는가? 이스라엘 사람만 보증하기 때문에 홍해를 건너왔다는 그들의 말은 얼마든지 비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만나가 있는가? 없다. 금 항아리에 만나를 넣어두고 영구히 대대로 보존하라고 했다. 유태인들은 우리보다는 그래도 더 실감나겠지만 우리는 그런 것을 모른다. 그래서 이런 것을 비판하려면 끝이 없다. 우리의 신앙에서 우리의 믿음에서 우리의 삶에서 증거가 되면, 그때 한 말이 이 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렇게 못하면 밤중이다. 내가 홍해를 건너는 경험이 있을 때, 이것이 이렇다고 생각되어야 되지 그것을 객관적으로 역사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아무리 들어도 안 된다. 지금 없기 때문이다. 지금 안 되는 것은 신화이다. 그때는 있었는데 지금은 안 된다는 것은 신화가 된다. 기독교가 비판하는 사람들 앞에 나가면 다 조각조각이 되어버린다. 자유주의 신학을 한 어떤 사람은 1년 내내 창세기 1장을 가지고 해도 시간이 모자란다고 한다. 구절구절 분석을 해서 이 구절은 어디서 왔고, 이 구절은 어디서 왔다는 것을 연구해서 이것은 계시가 아니고 신화라고 하니까 듣다보면 헷갈려서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린다. 내게 물이 덮인 경험이 있어야 하고, 내게 빛이 온 경험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것이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 그렇지 않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증명한다는 것은 그것을 반대할 사람들이 또 그만큼 있다. 그런데 한 가지 거부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만은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도 있기 때문이다. 콩이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라는 것은 거부할 수 없다. 왜 그런가? 지금 콩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사람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과 일치해야 된다. 우리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항상 밤중이다.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은 ‘예수가 죽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내려오지 못했으니까 죽은 것이다. 만약 내려왔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만은 확실하다. 이 확실한 기초위에 내 인생도 있고, 교회도 있는 것이다. 그 기초 위에 있어야 된다. 어떤 사람은 어떤 은사 위에 기초해서 교회를 세운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교훈 위에 교회를 세운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교리 위에 세운 사람이 있고, 여러 가지다. 이런 것들은 모두 비판될 수 있고 다 무너질 수 있다. 왜 그런가? 사람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이것만은 바꿀 수 없다. 나도 지금 십자가에 못 박히면 죽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얼마만큼 유명하고 얼마만큼 똑똑하고 얼마만큼 위대한 사람도 똑같다. 거기에서 우리는 평등을 느낀다. 인간은 하나구나. 사람은 하나구나. 이것을 느낀다. 이론적으로 사람은 평등하다고 아무리 해도 안 된다. 공산주의도 평등을 주장한다. 자기들은 그것이 평등이라고 하는데, 자본주의에서 볼 때는 그것은 평등이 아니고 완전히 독재이고 억압이다. 그래서 각자 자기대로의 생각을 기반으로 할 수는 없다. 내가 아무리 굳센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확고한 기반 위에 서있지 않으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보통 바람에는 거뜬하던 집이 태풍이 불면 넘어지는 집도 있다. 서양에서는 토네이도가 지나가면 자동차고 집이고 다 공중으로 날아간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7:25) 반석 위에 지은 집은 무너지지 않지만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다 무너진다. 비가 오고 창수가 와도 무너지지 않을 반석 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무너질 수 없는 집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자신의 인생일 때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데 나는 안 죽으면 헛일인 것이다. 예수님이 내려왔는데, 나는 못 내려온다고 해도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이 안 내려왔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내가 그러니까 믿게 되는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도 다 똑같다. 예외적인 사람이 없으니까 우리가 서 있는 이것이 확고한 기반인 것이다. 물론 다른 것도 많다. 그런 것도 좋지만 만일 그런 것들 위에 집을 지어놓는다면 태풍이 불어오고 토네이도가 불어오면 날아가 버린다. 기독교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서 온갖 방법들을 동원하는데, 그 방법들이 졸렬하고 유치하다. 자기는 기반이 확실하지 못한데, 그것을 가지고 우기고 있는 것이니까 정말 우스운 일이다. 우리 인생의 기반을 확실하게 둬야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게 되고, 교회도 기반이 확실해야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교회가 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했다. 천주교회는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다고 했다. 베드로가 1대 교황이라고 한다. 개신교는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세운다고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한 고백 위에 세워진 것이다. 우리가 만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를 증명하지 못하면 토네이도가 불면 날아간다. 아무리 베도로에게서 기초해서 시작하여 교황권이 있다고 해도 그 교황권이 면제부나 팔고 있으면 그것이 베드로에게 기초한 것이 되겠는가? 안 된다. 우리는 무너지지 않을 곳에 기초를 박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인생이 그것밖에 안되는가? 하나님 아들이 그것밖에 안는가? 이렇게 할 수 있다. 확고하게 말하면 이것이 반석 이상으로 확고하다. 인생은 그 자리가 내 인생의 자리다. 그것이 내 인생이다. 이것은 옳고 틀리고, 좋고 나쁘고, 부끄럽고 부끄럽지 아닌 문제가 아니다. 세상이 볼 때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바울이 부끄럽다는 말을 두세 번 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1:16)라고 했는데 이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예수를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그분의 복음을 그로 인한 복음을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말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거나 날아갔으면 왜 부끄러웠겠는가? 십자가에서 못 내려오고 못 날아갔으니까 부끄러운 것이다. 그래서 세상이 볼 때는 부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을 살리는 복음이다.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당당하게 전파해야 한다. 그럴 수 있어야 복음이 된다. 만일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면 그 사람이 참사람이고,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이면 우리가 그 사람을 전해야 복음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 못한 복음을 전해놓으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사랑이 지극하신 분이고 아가페 사랑이라고 했는데, 어떤 경우에는 대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비참한 입장에 서서 ‘이럴 때 하나님 뭐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의 사랑은 뭡니까?’하고 물으면 할 말이 없다. 아무 흠도 없는 사람이 쓰러져서 비참하게 되어서 ‘하나님 왜 나를 이렇게 놔두십니까?’하면 할 말이 없다. 여러분들도 그런 상황에 있는 분에게 병문안을 가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할 말이 없다.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놓고 말하려니까 어렵다. 순천에 있는 이*승형제의 큰누님이 간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아버님이 나에게 같이 가자고 하여 그때 부득이해서 갔다. 나는 신유의 은사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그때 정말 난감했다. 그런데 어른 가자고 하는데 안갈 수도 없고 그래서 할 수 없어서 따라 갔다. 몇 시간을 가는 곳인데, 차 안에서 내내 속으로 ‘이걸 어찌해야 합니까? 내가 가면 뭘 해야 합니까?’ 했다. 가는 동안 몇 시간 내내 아무리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간암 말기로 누워있는 분 앞에 나를 앉혀놓았으니 내가 그 앞에서 뭐라고 말하겠는가? 여러분은 가서 뭐라고 말하겠는가? 참 난처했다. 그분이 참 천성이 착하신 분이다. 어려서부터 교회밖에 모르는 분이고, 정말 헌신적인 분이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암에 잘 걸린다. 가서 보니까 내가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내 이야기를 했다. 내가 어려서 병에 걸려서 이래저래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어쩔 수 없어서 그 말을 했다. 다음날 아침 출발하기 전 일찍 남편이신 원장이 쪽지 한 장을 가지고 왔다. 그 쪽지의 내용이 ‘목사님! 내가 일생에 목사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쪽지였다. 그때 내가 이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확실히 들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올라왔다. 우리가 말할 수 없을 때가 돌아온다.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를 사람을 만날 수가 있다. ‘하나님 어디 갔습니까? 하나님 어떻게 좀 안 해줍니까?’라고 하면 능력이 있다는 사람도 할 말이 없게 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할 수 없을 때가 돌아온다. 이런 것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같으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나를 이야기하겠다.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이 사람이라는 말을 하겠다. 인생의 기반이 예수에게 있어야 인생이 확실하고, 또 어디를 가도 부끄럽지 않고 당연하게 된다. 평소에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데, 해보면 그것밖에 할 말이 없다. 그 말은 ‘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목사가 아니고 사람입니다.’라는 말이다. 그 자리에서 우리가 복음이 안 되면 복음이라고 할 수가 없다. 만민이 다 살아나려면 우리가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어야 한다. 어제도 어떤 자매가 왔다. 나이가 37세이고 아주 예쁘게 생겼다. 그런데 암 수술을 해서 정신적인 고민이 생겼다. 수술이 문제가 아니고 고민이 생겨서 근심 걱정이 꽉 찼다. 처녀가 난소 수술을 했으니 애기도 낳지 못하고 딱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한다. 부모가 어떻고 자기 집안 사정이 어떻고 그런 이야기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느냐? 사람이 병이 나서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지 오늘 밤에라도 죽으면 죽는 것이지 네가 무슨 잔소리가 많느냐고 했다. 나도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지만 나는 이러고 있다. 나는 한 시간이라도 너무 아깝다. 이렇게 되니 인생이 너무 귀중하다. 1년 산 것이 10년 산 것보다 많이 살고 있다. 너는 오늘 하루라도 확실하게 살아보라고 했다. 그 자매에게 교회를 가보았느냐고 하니 가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그렇지, 우리 교회에 나오라고 했다. 하루라도 교회에 나와 보고 죽는 것이 낫다고 했다. 내가 옛날 같으면 이런 말을 못한다. 나도 죽음이 앞에 있는데 못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뭐라고 해도 괜찮았다. 처음에는 반항하더니 나중에는 조용해졌다. 내가 그런 사람밖에 안 되는 것을 나도 바탕이 죽을 사람인 것을 아니까 담대하게 이야기를 하게 된다. 나도 내일 죽을지 오늘 죽을지 모른다. 내 병에 대한 이야기를 다 했다. 너는 항암치료 받았으니 죽지 않지만 나는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네가 나보다 훨씬 낫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 자매가 할 말이 없다. 갈 때 교회를 꼭 나오라고 하니까 알겠다고 했다. 내가 조금만 여유 있으면 그 말을 못한다. 고민을 하도 해서 예쁜 자매가 얼굴을 보니 너무 바싹 말랐다.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으니 마를 수밖에 없다. 항암제 쓴 것만도 어려운데 거기에 근심걱정까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지 않았으니까 그렇지 그런 사람이 예수를 믿었더라면 거기서 기반이 확실해서 감사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잘못 믿어서 어중간히 슬쩍 믿으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닌가? 내가 그래도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내가 그래도 교회에서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이러지 않겠는가? 그 입을 틀어막으려면 내가 그 사람이어야 한다. 잘못하면 큰일 나고, 뺨 맞는다. 우리 기반이 저 밑바닥에 있으면, 내 인생의 기반이 밑바닥에 있으면, 오히려 담대해진다. 그리고 교회도 그 밑바닥에서 세워져야만 교회가 안전하다. 처음에 중국에 들어간 기독교가 실패했다. 황실로 들어갔다. 경교라는 종교가 되었는데 얼마 있다가 없어졌다. 신사들을 모아놓고 왕족들을 모아놓고 해서 좋았는데, 당나라가 망하니까 같이 망하고 말았다. 그것이 아니면 못 사는 사람이 기초가 되면 살아남는데, 그것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잘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것은 복음이라고 할 것도 없고 어떤 종교를 전한 것이니까 얼마 못가고 말았다. 다행이 한국에는 서민층으로 기독교가 들어가서 살아남아 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왕족들이 믿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지식인들이 믿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만 그것이 안 된다. 예수님 족보의 다섯 여인처럼 죽기 아니면 살기의 그 기반 위에서 그리스도가 나왔지 여유 있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다말이 오죽하면 그런 짓을 했겠는가? 라합이 오죽하면 자기 민족을 배반하고 나왔겠는가? 기독교의 기초는 그런 데서 나온 것이다. 불교처럼 더우니까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서 명상하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아주 치열한 환경 속에서 나온 것이다.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는 데서 물이 없는데서 노예생활에서 나온 것이다. 바탕이 그런데 있으니까 살아있는 것이다. 꼭 그래야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 바탕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놓고 못 내려오는 그 자리가 바탕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당연하다. 십자가에 못 박아 놓으면 다 죽는 것이지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 죽는다. 이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죽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우리 같은 사람은 죽어도 영향을 줄 수 없다. 어차피 다 죽는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은 것이다. 우리 상식으로는 죽지 않아야 할 사람이 죽은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구원이 되었고, 구속이 되었고, 복음이 되었다.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고, 이 복음이다. 그런 사람이 살 수 있는 복음이다. 우리는 그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증인이라는 말은, 그 사람을 살려내는 것이다. 부활한 사람으로 살려낸 사람들이 제자들이다. 그냥 죽었다고 해도 끝날 것인데, 그 사람이 부활해서 새로 와서 고기도 먹고 생선도 구워먹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게 해놓은 사람들이 사도들이다. 자기들 안에 무슨 경험이 있으니까 그 말을 했지 그냥 하겠는가? 거짓말을 하겠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람들이 볼 때, 세상이 볼 때, 다 버린 것을 가지고 우리가 그것을 귀중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고물상에 가면 쇠붙이가 많은데,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좋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고 다 버린 것을, 사람들이 다 쓸모없다고 한 그것을, 우리 집에 갖다 버린 그것을 가지고 새것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오리지널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오리지널이고, 우리의 기반이고, 우리의 진실이다. 우리 진실을 살아내는 것이다. 거짓된 세상에 내가 무엇을 가지고 복음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진실을 전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나는 세상이 버린 것으로 나의 주님을 삼았다. 세상이 버린 것을 나는 주님으로 삼은 것이다. 세상이 부끄럽게 여긴 것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는 사람을 자랑스러워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부끄러운 사람을 자랑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진실은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너무 통쾌하다. 원광석이 좋은 것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서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가지고 내가 그것을 귀중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자랑스럽다. 예수를 자랑하는 것은 그런 일이다. 굉장한 사람을 자랑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십자가에서 못 내려 온 사람을 우리가 자랑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이 사람이 나의 주님입니다. 나의 머리입니다. 나의 생명입니다. 나의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이렇게 자랑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로 세상을 자랑해버린다. 도로 세상은 내놓고 이것이 좋은 것이라고 하니까 듣는 사람이 모두 도로 세상이 되어 버린다. 예수는 세상으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1:23-25)고 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닌가! 이것이 우리 십자가의 복음이다. 만일 그것을 귀중한 것으로 만든다면 뭐가 귀중한 것이 없겠는가? 생각해보라. 다 버린 것을 내가 귀중하게 만들어 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부자다. 못 쓸것이 하나도 없다. “감사함(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4:4)라고 했는데 무엇을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인가? 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좋은 것을 받았는데 믿음으로 받을 것이 뭐가 있는가? 좋은 것은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받는다. 내가 생각할 때 좋은 것은 믿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받는다. 그런데 내가 믿음으로 받아야 되는 것은 이것은 버린 것인데 이것을 받으면 뭘 하겠는가하는 그런 것을 받으려니까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감사함(믿음)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었다. 이*철씨가 가진 좋은 것을 주었다면 그런 것을 가지고 복음이 되겠는가? 우리의 복음은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상한 복음이다. 고물상하는 사람처럼 다 버린 것을 가지고 만드는 복음이다. 새사람, 다시 난다는 것이 다 거기서 나온 말이다. 버린 것을 귀중하게 버린 것에서 귀중한 것을 발견한 사람이다. 밭에 묻힌 보화, 진주장사가 다 그런 것이다. 다른 사람이 다 좋다고 한 것을 내가 또 좋다고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다 싫어하고 버렸다. 아담이 다 버렸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을 시시하게 생각해서 버렸다. 이것을 가지고는 내가 못 살겠다하고 버렸다. 그런데 그것을 내가 살려낸 것이다. 예수는 그것을 살려낸 사람이다. 아담이 버린 것을 살려낸 사람이다. 이것을 살려낸다면 못 살려 낼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무엇이든지 간에 다 귀중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런 사람은 가난이 없다. 풍부하다. 무엇이든지 재료가 되니까 왜 가난하겠는가? 나는 하나님이 주신 이 은혜가 너무 크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그래서 나 같은 인생도 자랑하게 만들어주는 것이구나. 내가 자랑할 것이 없는데, 예수 때문에 자랑거리가 된다. 그러므로 내가 예수님을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을 자랑하면 내가 자랑이 된다. 생각해보라. 세상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를 자랑하면 자랑이 되겠는가? 오히려 자기가 부끄러워지고 만다. 우리는 예수를 자랑하면 내가 영광스러워진다. 내가 존귀해진다. 내가 감사가 넘치게 되고, 내가 풍부해진다. 내가 나를 말하는 것보다 예수를 말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좋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말하면 훨씬 더 부요로워진다. 나도 그런지 몰랐다. 내가 이렇게 존귀한 자인지 몰랐다는 것은 내가 예수를 자랑할 때, 그렇게 생각이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이 자랑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아무것도 없다. 형상이라는 말은 우상이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그 형상만 있는 것이 뭐 자랑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안에 불이 들어오면 내가 이렇게 자랑스러운가? 이렇게 된다. 전구가 유리밖에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느 날 전기가 들어오면 전등이 된다. 유리가 생각이 있다면 내가 이럴 수 있었나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바울이나 이런 사람이 미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 인생이 200%, 300% 올라가는 것이다. 예수를 전하니까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데 자기 인생이 올라간다. 흙이, 밭이 그러지 않겠는가?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버려지고 사람들이 무시하는 것인데, 옥수수 밭이 되어 나타나면 내가 언제 이랬던가? 이런 생각이 들것이다. 내가 뭔가?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자기 행복이다. 그 쓸모없는 흙이 얼마나 자랑스럽겠는가! 와 내가 이런 옥수수 밭이 되다니. 내가 이런 귤 밭이 되다니. 그것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이유다. 바울이 미친 이유가 그것이다. 인생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이분을 자랑하면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다.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말씀을 하면 이상한 사람 같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내가 예수를 말하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그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먹고 살게 되어 있다. 그것이 양식이 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너무 늦어서 배고플 시간이 넘었다. 제자들이 와서 배고픈데 여태까지 계셨느냐고 하니까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4:32)고 하셨다. 풍족하고 배부른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을 내가 자랑하면 내 자랑이 되기 때문에 풍족하고 자랑스러워진다. 기반! 하나님 나라는 이 기반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가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기반이고, 교회의 기반이다. 이것은 보석보다 훨씬 확고하고 온전한 것이다. 인생이 존재한다는 것도 이 기반이 있어야 확고한 존재감이 생긴다. 나는 왜 인생인가? 나는 왜 사람인가? 사람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이 이 기반위에 있다. 그분이 내 기반이 될 때다. 다시난다는 것도 거기서 난 것이다. 니고데모가 왜 다시난다는 말을 못 알아들었겠는가? 다 알아들었겠지만 그 바탕에서 다시 나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가 못 알아듣겠는가? 예수로부터 다시 나기가 다시 시작하기가 싫은 것이다. 지금 있는 데서 뭘 좀 보태주면 좋은데, 그것은 아니고 예수라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서 다시 시작하라니까 되겠는가?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은 이 기반위에서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여기서 이 기반위에서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어떻게 연합이 되겠는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당당하게 나가겠는가? 이 기반위에서만 당당하게 나갈 수가 있다.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10)가 아니고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이 기반에서 시작된 것이 하나님 나라다. 교회도 내 인생도 그렇다. 우선 내 인생이 그렇게 되어야 교회도 그렇게 될 것이다. “심령(영)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저희) 것임이요.”(마5:3)하는 말을 어려서부터 수없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한 것이지 모른다. 청계천에 판자촌의 사람들만 천국에 간다는 말인가? 이런 말도 있고 별말이 다 있었다. 그것이 아니고 인생의 가난함, 그 존재적인 가난함이 천국의 기반이다. 그 존재적인 가난함은 어디 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그 자리가 존재적인 가난함이다. 별것을 다 했지만, 하나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고, 그리스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지만, 인생의 존재적인 자리는 그 자리였다. 어떤 사람도 예외가 없으므로 그 안에 만유를 포함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하고 있다. 자기가 포함하려고 해서 포함되는 것인가? 다 그 자리가 한 자리이니까 포함이 되는 것이다.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그리스도)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9) 너무 기묘한 말이다. 바울이 발견한 말 가운데 가장 놀라운 말이다. 모든 사람을 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롬5:12) 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오고 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의가 세상에 왔나니.(롬5:12참고) 그 한 사람이 누가 그 한 사람인가? 예수 안에서 비로소 한 사람으로 발견된다. 거기서는 차별이 없다. 차별이 없게 하려고 한다고 되는가? 미국사람들은 흑인과 백인사이의 차별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없어지지 않는다. 격투기 장에서 생사를 걸고 싸우는데, 백인이 승리하면 다 일어나서 박수치고 난리다. 흑인이 승리하면 박수치는 사람이 몇 사람 없다. 비참하다. 어제도 유명한 사람이 격투기를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이 분명히 졌는데, 그 사람이 승리한 것으로 손을 들어주었다. 흑인은 아무 말도 못하고 항의도 못하고 나간다. 지금 문명국이라는 나라에서도 아직도 그것이 안 된다. 차별을 없앤다고 해서 차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박수쳐야 될 일이었다. 눈이 다 얻어터지고 끝까지 싸워서 마지막에 엎어서 이기고 있는 것을 정지시켰다. 당연히 TKO를 받는 것인데도 판정을 하는데 백인 손을 들어주었다. 인간들끼리는 평등이라는 것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평등이 가능하다. 그것이 확실한 기초이다. 예수 이야기만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끝이 없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