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새로운 사유
- 2023, 5, 6, 입하(立夏)
사람들은 “철이 없다.”, “철이 든다.”고들 말하면서, 절후를 알아야 한다고 한다. 절후에 따른 삶은 자연에 따른 삶이다. 그런데 삶은 가정이나 사회에 규준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이라 여긴다. 그 삶은 가정과 사회가 만든 방식과 제도에 따른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 규칙은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하루의 오전, 오후, 저녁의 규칙일 것이고, 일주일은 사회 제도에 맞는 월화수목금일하고 토요일은 반공일(半空日)이고 일요일은 쉰다(휴일, 休日)고 한다. 한해는 4계절에 따라 먹거리, 잠자리, 옷입새가 달라진다.
삶의 양태들을 겉으로 보아도 누구나 다르다. 먹거리도 다르다. 끼니를 라면으로 때우는 것과, 고깃국을 일상으로 먹는 것 사이에는 삶의 정도와 삶의 터전도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삶의 터전에 대한 이야기로는 국회의원이었던 노회찬(1956-2018)이 말한 6411번 새벽 버스에 타는 서울시민들을 강남인이 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고 있다고 하였다. 강남에 아침에 출근하는 이는 정상인간이고, 잡일을 하는 새벽인간은 투명인간인 셈이다.
학문에서도 상층형이상학에 기대는 자들은 스스로 착하게 산다고 하지만, 역사상으로 얼마나 거꾸로 된 사고를 하는 자들이었던가. 프루동이 말한 부자란 도둑놈, 종교를 빙자한 정치 사기꾼, 매국노, 매판자본가, 일제와 미제 부역자, 숭미자와 종일자 등등은 매판언론과 더불어 언제나 큰소리로 자기들 사고가 옳다고 한다. 뭐라고, 뭐라고 말한다. 행위는 달리 문제제기한다. 그들은 행위와 달리 말한다는 점에서 파라노이아로 환상에 빠진 자들이다. 하늘나라가 좋으면 가면되지, 왠 의미가 많은지, 온갖 의미를 다 붙여 말한다. 도대체 이런 전도된 사고가 판을 치는 사회가 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과거완료 문장으로 써야 할까? 그럼에도 인민 속에서 심층형이상학은 시나브로 노력하면서 실재성을 확장해 간다. 노력은 자연과 더불어 앞으로 나아간다. 실재의 지속적 진행은 현재형이다.
절후에서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은 항상 춘분, 하지, 추분, 동지보다 한 달 보름 앞선다. 통상 춘분부터 봄으로 여긴다면 입춘은 한 달 보름 앞서서 봄을 알린다. 자연의 흐름을 인간이 뒤로 돌릴 수 없어서 필연인데, 영화에서 슈퍼맨이나 마술인 또는 악마들은 지구를 되돌리고, 늙은이를 얘기로 되돌리고, 또는 오랜 과거의 역사로 되돌릴 수 있는 것처럼 보여 준다. 변화 없는 영원이 편린(片鱗)들을 죽 이어서 있어 왔다고 하는데, 영원하다고 하니 그런가 한다.
삶의 변화에서 보면, 오랜 시간의 흐름은 편린들을 흐리고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지층들 속에서, 역사서들의 페이지 속에서, 또한 한 인간의 추억들 속에서 그 편린들 자체는 추억처럼 불변이다. 옳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파내고, 끄집어내고, 끌고 다니는 자들이, 자기들에 맞게, 흐릿하고 반투명의 얇은 막들을 색칠하여 그림을 분명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왜곡하고 변형한다. 이 변형된 편린의 그림들이 영원한 것이라고 주장할 때 이들은 형상형이상학(종교)의 환상에 빠진 것이다. 착각이 아니라 환상이라고, 편린의 환영을 실재성이라고 주장한다. - 이들은 착각에 빠져, 간단한 예로, 올림포스의 신들은 떡볶이를 먹을 것이고 하늘나라에 신들이 너무 좋아서 발가벗고 있다고 한다면, 이게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신도들은 순대 먹는다고 다른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자들이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신도들의 이야기가 유머가 되고, 반대자들의 이야기는 풍자가 될 것이다.
자연의 순행이 매번 다시 돌아온다고, 50년 전의 입하(立夏)나 작년의 입하(立夏)가 올해의 입하와는 다르다. 그럼에도 상식(常識, 5관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인식)은 그 입하가 그 입하이지라고 하면서, 같은 입하라고 한다. 한 평생에서 철 들고 나서 50여년을 거친 여러 입하도 마찬가지로 여긴다. 그런데 수 만년을, 수 백 만년을 지난 자연이 마찬가지가 아니라고 안다. 자연이 변하였다고, 배워서 또는 다시 인식해서 아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로부터 내부의 재인식의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변화과정을 느끼고 알면서, 그 과정을 하나로 이어가는 자기 나름의 동일성(정체성)을 유지하는 양식(良識, 방향을 갖고 추론하는 인식)을 갖는다고 한다. 동일성을 갖는 길이의 시간은 선(線)으로 표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추론의 한계 또는 한계를 넘는 구분의 양식이 있을 것이다.
천구의 운행이든 자연의 진행과정이든 하나의 선(線)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상식을 넘어서 양식을 통해서 과거를 일렬로 배열할 수 있고, 미래를 순서로 배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믿음이 양식(bon sens)이라고 하는데, 그 믿음에는 인간의 지성 또는 이성이 – 부정방정식과 함수 작업을 계산할 수 있듯이 - 작동하고 있고, 당연히 인식적 기능을 인간의 주체가 다룰 수 있다고 여긴다. 벩송에 따르면 여기서 전도된 사고의 오류가 시작된다.
말하자면 우주와 자연이 사물의 운동과 물체의 운동방식을 따라 형성되었다고 상식과 양식으로 믿고, 그 추론의 능력으로 지성(이성)이 인간에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주의 운행과 물체의 운동을 수학적으로 무한까지 계산가능하게 알 수 있다고 여긴다. 이것은 전도된 사고의 한계이기도 하다. 원리주의자는 우주와 자연이 물체의 방식으로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래로 물질은 물체처럼 작용-반작용하는 부분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있어도 규칙상 모든 것이 정지해 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삼는다. 모든 움직임은 외부의 충격이 있어야 움직인다고 생각하듯이, 운동은 정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여긴다. 상대성에 따라 움직이는 물체에서 상대적으로 같이 움직이면서도, 서로에 비교해서 안 움직이는 것으로 여긴다고 바꾸었지만, 양식은 어떤 움직이든 움직임이란 선(線)으로 계산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편하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우주와 자연의 움직임과 다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생명체의 움직임인데, 생명체도 물체인 한에서는 자연 법칙에 종속된다. 그럼에도 살아있는 생명, 영혼은 다른 움직임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될 때, 그러면 이런 움직임은 어디서 시작하고 어디서 왔는가? 이 시작의 기원과 이유는 지성이 물체의 규칙과 법칙을 고안해내기 이전에도 있었고, 인간에게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아메바, 해파리, 개미, 소에도 있다. 지성은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규칙과 법칙 나아가 수학적 원리가 먼저 있었던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이 물질계를 아는 방식과 생명계를 아는 방식이 같지 않는 것은 마치 자석의 남극의 방향과 북극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과 비슷하다. 두 방향의 새로운 방식을 아는 것을 벩송은 고등양식이라 부른다. 양쪽 생각 중에 생명계를 51%, 물체계를 49% 정도 사유하면 좋을 같은데. 50 대 50의 해결에 어려움을 갖는다. 인간의 긴 역사는 물질계와 지성, 인간적 이기심의 주체의 사고가 성립되었다고 여기다가, 새로운 사유에 의해 사고방식이 줄어드는 과정이 되었다.
사회와 제도에서 북극사고가 지배하던 2천 5백년을 넘어서 남극사유를 말하니 사람들이 어리둥절하여 남극사유도 북극사고의 복사판이라고 여긴다. 삶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북극 사고의 극한에서 이데아, 관념, 초자아, 하늘나라 등이 있는데 비해, 남극 사유에 의하면 그것들은 상징(수학적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남극사유는 삶과 움직임이 실재이며, 북극 사고에서는 죽은 나라(천국)과 부동(정지)이 기준이다. 후자에서는 이런 상징계를 실재계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 착각의 기원은 이야기로 하면 간단하다. 하늘나라는 실재하고 여기 현실은 가상이라 덧없다는 종교의 독단적 가르침에 따라 상징은 실재라고 여기고, 여기 변화하는 현실의 움직임을 가상이라 여긴다. 그래 왔으나, 이정도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상징은 선이고 실재는 악이라고 하며 또한 우파의 사고처럼 상징을 다루는 것이 자유와 정의라고 생각한다. 우파는 실재를 다루고 행동하는 이를 빨갱이 또는 비이성이라고 한다. 종교집단과 같은 우리나라 우파의 착오와 오류는 철학을 일본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으로부터 전수되었기에, 인민의 활동을 소요, 폭동, 반란으로 여긴다. 그런데 새로운 사유는 인민의 성장이래로 자유와 평등 그리고 세계시민사상 또는 동지애에서는 저항(레지스탕스), 봉기, 항쟁, 혁명을 미덕으로 삼는다.
인간성에 관하여, 이기주의를 은폐하고 인간주의를 우월로 삼는 이들이 스스로 위마니스트(humaniste)라 부른다. 이에 비해 개인이 혼자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서로가 상부상조에 의해, 더 나아가 자연의 조화에 부응하여 자유와 평등을 실현하려 노력하는 자들은 스스로 위마니떼르(humanitaire)라고 한다.
자유의 실현에서도 인간이 인간을 상품으로 대하는 자를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라고 하는데 비해, 인간의 자연성(the human nature)을 실현하려 노력하며 자연 속에서 자유를 누리려는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가 있다. 인민의 혁명을 해본 사회에서는 휴머니스트나 리베랄리스트를 조롱으로 삼고 있으며, 이에 비해 세계시민주의(코스모폴리탄), 인류애의 실현, 사해동포주의 동지애 등을 주장하는 휴머니떼르와 리베르떼르라고 부른다.
인류는 자연 속에서 자기 본성을 실현하려 노력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먼저 그려 보이지 않고서, 여기 실재성에서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노력하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하는 이가 드물어 보이지만, 새로운 사유를 하는 것이 어려워 보이는 듯하지만, 사람들 속에서 죽 이어져왔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이다. (3:24, 56P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