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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2년 11월 정평부사 정수현, 함흥민란의 참핵관으로 참가하다
□ 함흥민란의 원인
ㅇ 원전 : 임술록 [壬戌錄] (1958년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 제8집)
ㅇ 壬戌錄> 鍾山集抄 > 北祥錄(안핵사 이참현 일기) > 정평부사 정수현
환곡은 구휼을 위한 곡식을 저장하였다가 흉년이 들면 봄에 백성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목적으로 만든 제도이다. 후일 원곡에 이자(6개월간 1~2부, 년간 2~4부)를 부쳐, 이식(이자 증식 분: 모곡이라고 함)을 지방재정에 충당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심한 경우 년 5부의 고리대로 운영되었으니 장리라고도 불리었다.
흉년이 들면, 원곡조차 갚을 길 없어 도망자가 속출하고 환곡의 손실분도 누적되어 지방재정도 부실화되어 갔다. 때로는 손실 누적 분을 동리나 남아 있던 주민들이 연대하여 갚도록 하고, 환곡을 강제로 떠안기도 하였으니, 백성의 원성도 쌓여갔다. 세도정치로 인한 조정의 무능과 관료, 수령, 이속들의 부패를 참을 수 없어 철종 13년인 1862년 임술 년 초부터 71개 고을 이상에서 농민의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를 임술민란이라고 하였다. 조정은 이에 놀라 각 지방에 안핵사를 보내 사건을 수습하는 한편, 삼정을 개선하고자 이정청을 설립하여 개선책을 내놓았으나 시행의 어려움으로 곧바로 파기되고 구제도로 복귀하였다.
함흥민란 역시 1862년 10월 24일 환곡에 대한 문제가 발단이 되었다. 농민들이 함흥관아에 침입하여 관아를 부수고 감옥의 죄인을 탈출하게 한 소동으로 영남지방의 안핵사 경험이 있는 호군 이참현이 안핵사로 파견되었으며, 그해 7월에 함흥 남쪽의 정평부사로 임명되어 재임 중이시던 정수현공도 참핵관으로 함께 참여하게 되었다. 이 기록은 임술록 모음집 중, 안핵사 이참현의 일기를 기록한 북상록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 함흥민란의 일지(안핵사 이참현의 임술록에서 발취)
ㅇ 1862년 11월 2일
壬戌 至月(十一月) 初二日, 咸境監司 李鍾愚狀啓, 咸興亂民輩, 以罷邊督捧事, 今月二十四日, 齊入府內, 揮打營屬, 毁獄放囚, 遊爛民家之魁首李冕用·朴宗辰·李敬涉三漢, 爲先梟首警衆, 按覈之節, 令廟堂稟處, 自底溺職, 萬萬惶懍, 恭竣重勘事。 傳曰, 頑民悖習, 又出於豐沛之鄕, 所謂訴冤, 直敢行稱亂耳, 此不加倍懲創, 何以折其萌, 而鎭方來之囂乎。 當下捕捉中三漢, 雖已用法, 伊日光景, 安有首從之別, 更爲嚴覈登聞, 分年捧邊之知委民間者, 與釐廳節目, 有牴牾處, 其委折一體, 具由登聞事, 廟堂論理, 勿待罪事回諭。
함경감사 이종우의 장계 도착, 함흥민란의 무리, 파변독봉사
“10월 24일 민란배들이 일제히 부내에 진입하여 영의 관리를 구타하고 전옥(감옥)을 부수고 죄수를 풀어주었습니다. 난동주범자 이만용, 박종진, 이경섭 3인은 효수하여 민중에 경계로 삼았습니다. 난의 조사에 즈음하여 조정에 보고 드리며 직무를 감당하지 못함에 만만 황공하오며, 신중히 조사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전하 말씀이, 거친 무리들의 나쁜 풍습이 풍폐(함흥) 지방에 또 발생하였다. 소위 민원이 직접 난으로 일어났으니 배로 징벌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하면 민란의 싹을 자를 수 있겠는가? 이를 진정시키는 묘방이 나와야 할 것이다.
현장에서 3명의 주모자는 법으로 처벌하였으나 그날의 형편을 살펴 주동자와 뇌동자를 구분하고 엄히 조사하여야 할 것이다. 여러 해 변방의 행정은 민간에 위임해 다스려왔는데 관아의 조목과 서로 어긋나는 곳이 있으므로, 그 위임의 문제점을 재고하여야 할 것이다. 조정의 논리는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회유하는 것이다.
初三日,備邊司啓曰, 法紀雖弛, 民俗雖頑, 豈意岐豐鄕里, 有此振古所無之變乎。 彝性喪矣, 常分蔑矣, 鬧聒於長吏公堂, 已是干紀之悖習, 而況節於旬按之地, 堂陛截嚴, 而直入府衙, 毁破窓壁, 肆氣群哄者, 與叛逆何異哉。 凶從悖類, 首從何論, 而情節般究, 在法亦然, 首犯三漢, 雖已用律, 諸囚推覈, 不宜少緩。 行護軍 李參鉉, 按覈使差下, 令該曹口傳單付, 使之當日馳驛, 窮査嚴核, 分輕重以聞。 雖以道伯言之, 變起營下, 至及營內, 不能禁止於未亂之前者, 亦可以辭其責乎, 施以刊削之典。 判官 尹庚鎭, 以其近民之官, 致此無前之變, 不可置而勿論, 令該府拿問嚴勘何如。 傳曰允。
ㅇ 1862년 11월 3일
비변사에서 계하기를 “ 법과 기강이 해이하고, 민심이 거칠다고는 하나, 어찌 풍향리에 전에 없던 변고가 발생한단 말입니까? 심히 이성이 상실되고 법도를 업신여기는 일입니다. 감사가 근무하는 곳에 소란을 피우는 것 자체가 법을 어기는 악습인데, 하물며 순사가 근무하는 그곳에서, 관아의 섬돌계단이 지엄하거늘 관아를 침입하여 창벽을 부수고 행패를 부린 무리들은 반역과 진배없는 일입니다. 불순한 무리들에 대해 수종(首從:주동자와 뇌동자)을 어떻게 가릴 것인가는 정황과 규정을 살펴보아야 하니 법에 있는 바와 같습니다. 비록 주모자 3인은 법에 의거 처벌하였으나 나머지 죄인들도 엄히 심문하여 조금도 방심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행호군 이참현을 안핵사로 내정하고, 이조에 인사발령을 분부하시어, 사실을 엄히 조사하고 경중을 가려야 할 것입니다. 감사가 말했듯이 감영에 변이 일어나 감영 내에 침범하였다 하니, 난이 발생하기 이전의 담당자일지라도 난을 금지하지 못하였으므로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판관 윤경진은 대민 담당관으로서 전에 없는 민란에 이르게 하여 조치가 불가피하므로 의금부에 잡아들여 엄히 문초하여야 할 것입니다“하니 상께서 윤허하셨다.
吏曹口傳政事, 咸興府 按覈使單李參鉉, 當日單付後, 趨造金虎門, 門限已遏, 由門入去于政院, 曺鍚輿·黃鍾顯, 以承旨坐直矣。 肅拜後, 有入侍之命, 入侍時, 上曰, 向以三南事, 尙此驚駭憧憧于中, 豈意關北豐沛之鄕, 又有此駭悖之變。 千百爲群, 卽入營庭, 罔念堂陛之截嚴, 至有窓壁之打破, 尤非三南之可比也。 卿在按使之地, 下去後善爲究覈, 有罪者一一摘拔, 無罪者無至橫罹可也。 賤臣曰, 關北之變, 甚於今夏三南, 不勝驚懍矣, 遐土民俗, 所畏憚者惟方伯, 而暋不知戢, 哄動三衙 惹鬧宣堂, 有此犯分之擧, 下去後殫誠究覈, 而恐未能對揚萬一, 尤切悚惶矣。 上曰, 都因紀綱, 墮壞而然也, 賤臣曰, 臣今夏奉使嶺外, 而其時民亂, 雖曰甚悖, 亦未有突入營門, 打破窓壁之事矣, 上曰, 皆由於方伯 守令之不善對揚而然也, 民生之困瘁積怨, 厥惟久矣。 上曰, 俄有屢屢, 而必須於有罪無罪之間, 罔有一民呼冤可也, 賤臣曰, 敢不十分審而愼, 臣威不足而鎭壓, 明不足而鉤覈, 恐未能對揚明命, 益爲之悚蹙矣。 上曰, 時値隆
이조 임시인사발령. 함흥부 안핵사 내정 이참현. 당일 내정 후 금호문(창덕궁에 있는 승정원 서행랑문)을 따라 나섰는데 궁궐 문이 이미 막혔으므로 유문을 통하여 승정원에 가니 숙직하는 승지 조석여와 황종현이 있었다.
숙배 후 입시하라는 명이 있어 입시하니 전하 말씀이 “그동안 삼남지방의 일로 놀라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또다시 관북의 풍폐지향(함흥지방)에 이와 같은 민란이 발생하였다. 일천백여 인이 무리 지어 관아의 뜰에 들어왔다. 감영의 섬돌계단이 지엄하거늘 창벽을 부수었으니 삼남지방의 소요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경은 안핵사에 임명되었으니 나가서 잘 조사하여 샅샅이 살피고 죄가 있는 자를 밝혀내고 죄가 없는 자는 황당한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
신(이참현)이 답하길 ” 관북의 변란은 금년 여름의 삼남지방에 비하여 심한데 놀라움이 큽니다. 어찌 현지주민들이 두려워하는 사람이 방백(관찰사)이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삼아(감영, 중군영이 있는 곳)와 선당에 난동을 부리는 것은 범죄행위로서, 현지에 내려가 정성을 다하여 조사토록 하겠으나 만에 하나 기대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스럽습니다.
상 말씀 “모두가 기강이 무너지고 땅에 떨어짐이라” 이참현 왈 “ 신이 금년 여름에 영남의 안핵사로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영문에 들어와서 창벽을 부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전하 말씀이 “ 다 방백과 수령이 잘못해서 발생하는 일이다. 민생의 고달픔이 누적되어 원이 되는 것이라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내가 누누이 말하듯이 유죄무죄지간에 반드시 민원이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이참현)가 말씀드리길 “ 십분 살펴 신중히 하겠습니다. 신은 위엄이 부족하나 진압하고, 밝음이 부족하나 구핵하겠습니다. 다만, 명명백백하게 밝히라는 명을 수행하지 못할까 두렵고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ㅇ 1862. 11. 4일
3일 밤 대궐출입폐쇄로 성중에서 유숙, 4일 아침 영상 댁 예방, 귀가후 친지내방
ㅇ 1862. 11.5일 : 가족, 지인 송별
<안핵사 이참현 여정>
1862.11.6. 아침 한양 출발, 송우(松隅) 점심, 영평 양문역(永平楊門驛) 宿
1862.11.7. 철원 풍전역(鑯原 豐田驛) 점심, 금화(金化) 宿
1862.11.8. 금성(金城) 점심, 창도역(昌道驛) 宿
1862.11.9. 신안(新安) 점심, 회양(淮陽) 宿
1862.11.10. 철원(鐵嶺) 점심, 고산관(高山館) 宿
1862.11.11. 안변(安邊) 宿
1862.11.12. 원산(元山) 점심, 문천(文川) 宿
1862.11.13. 고원(高原) 점심, 영흥(永興) 宿
1862.11.14. 금파원(金波院) 점심, 정평(定平) 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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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日, 金波院中火, 定平宿, 自金波過草院時, 聞該驛察訪, 是西道人, 而因病身故云, 故停車路左, 招問驛吏, 則已爲含歛, 而喪人則適下來在傍云矣, 護喪之節, 以惕念之意, 申飭以過。 至數里, 路逢巡使之子李直閣喬翼, 卽其上京之路也, 班荊數語, 略聞近日營下動靜, 則姑晏然云。至定平, 府使 鄭秀鉉 出見, 亦將以參覈當赴咸興云。
ㅇ 1862.11.14.일(금파역 점심, 정평 숙박)
금파를 지나 초원역을 지날 때 역의 찰방(역장, 종6품관)에 대해 들으니 서도 사람인데 몸이 아프다하여 길의 좌측에 가마를 멈추고 역리를 불러 물으니 이미 염을 치뤘다 한다. 상인(상주)이 내려와 맞으니 상중인지라 삼가는 마음으로 지나왔다. 몇 리를 지나 노상에서 순사(감사)의 아들인 직각(直閣:규장각 벼슬) 이교익을 만났다. 상경하는 중이라고 한다. 몇 마디 말을 나누고 근일 감영의 동정을 간략히 들었다. 곧 날이 저물었다. 정평에 이르니, 부사 정수현이 맞는다. 역시 장군출신으로 참핵관(함흥민란 조사관)으로서 함흥에 부임한다고 한다.
ㅇ 1862.11.15일
十五日, 行望賀禮於客舍之庭, 仍發二十里至咸興南地境, 自南地境三十里至南門, 又値南地境埸市之日, 路傍看者塡街塞路, 別無遮前白活者, 亦皆兩行羅坐, 不爲擡頭直視, 此則今夏嶠南所未睹之美俗也。 自南門直入通判政堂, 是歇泊處也, 旬餘氷雪之程, 未之一日休息, 今到此地, 宛如還家之樣, 可以調病, 而明愼哀敬, 職務不輕, 衿懼之思, 已發於開覈之前, 暖屋豐餼, 非所安也。 巡使以廢務之餘, 又因寒感, 不得來見云, 夕飯后入見, 夜深始還, 通判亦出見敍阻。 以始抵咸興覈事, 待明爲始之意, 修啓發送付家書。 中軍 金泰郁入見。
정평부 객사 뜰에서 망하례를 행하고, 출발한 후 20리를 지나 함흥의 남부지역에 이르렀다. 남부지경에서 30리를 가니 남문에 도달했다. 남부지역 장날인데 길가는 한산하고, 불순분자를 별도로 단속하지 않았다. 모두 양쪽에 늘어앉아 머리를 들어 직접 바라보지 않는데, 이는 금년 여름에 남쪽(嶠南所)을 바라보지 않는 풍습에 따른 것이다. 남문으로 들어서 통판이 근무하는 관아(通判政堂)를 통과하니 바로 숙박 장소이다.
빙설 계절에 10여 일 간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이곳에 왔는데 마치 집에 돌아온 듯하다. 병을 다스려야겠지만 삼가 조심스럽고 직무가 가볍지 않으며 걱정스런 마음이 앞선다. 안핵(심문 조사) 이전인지라 기운이 따스한 거처인데도 편안치가 않다. 순사(巡使:감사)는 남은 직무를 폐하고 날씨가 추운관계로 부득 내방하였노라 하여 저녁식사 후 접견했다. 밤이 깊어 돌아왔는데 통판(通判) 역시 찾아왔다. 처음에는 함흥 안핵사직을 거절했는데 대명의 뜻으로 맡게 되었다. 장계를 손보아 발송하고 집에 편지를 송부하였다. 중군(中軍) 김태욱을 입견하였다.
<함흥성의 정문 남화문(南華門)>
ㅇ 1862.11.16일
十六日 飯後始開覈, 而略問當初事端, 則釐廳蕩還歸結之㑹, 頒示一邑, 則民人輩, 認以雖今春所受之還, 亦將一竝蕩減矣, 巡使以三分二則除耗, 三分一則代錢出令, 民間甚疑怪, 皆不順納。 自營府推捉各面都尹
아침식사 후 조사를 시작하였다. 당초의 사건발단을 간단히 들으니, 이청(釐廳, 함흥감영)은 환곡을 (일부) 탕감하고 (남은 부분은) 결세(토지세) 납부제로 전환한다는 것을 한 고을에 알렸는데, 주민들은 비록 금년 봄에 받은 환곡도 장차 모두 탕감 받을 것이라 알고 있었다. 순사는 3분의 2는 탕감(除耗:납부를 면제)하고 3분의 1은 돈으로 납부하도록 명하였는데, 민간인은 이에 의심을 품고 모두 순순히 납부하지 않았다. 이에 영부에서는 각 면의 도윤(都尹 : 면장)을 추착(推捉: 잡아 옴)하였다.
則坪社路近, 故已先推閱, 而山社則路遠, 始於十月二十四日下來, 而小民輩以等訴次, 皆爲下來。 五六十名先入府庭, 則通判曰, 衆人喧嘩之聲, 無以卞知, 皆近前又許登中階, 而一醉漢欲上軒, 則通引推下。 以是相梗, 通引逃走, 衆漢隨登, 通判入避房中, 衆漢以杖擊雙窓, 雙窓墜下, 暄嘩一場。 遂退出, 乃入鄕廳, 適座首不在, 打碎一場, 又退出入中營, 中營適値五里外, 將臺試射之日, 無一人遮防, 惟意打破, 又向布政司大門, 直入中三門, 羅卒輩擧皆逃散, 又直入宣化堂階下, 時已黃昏。 堂上之燈燭初擧, 巡使避入寢房, 亂民又直入公事房, 吹燈燈滅, 以杖揮之, 巡使避入於澄淸閣, 亂民又惟意打破窓戶, 一無完者, 夜深退去,
평지 面(坪社)은 길에서 가까우므로 우선 추열(推閱: 심문함)하였다. 산지 面(山社)은 길에서 멀기 때문에 10.24일에 오도록 하였는데, 주민이 무리지어 민원제기 차 모여 왔다. 50~60명이 먼저 관아 뜰에 들어오매, 통판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 소리가 매우 소란스러워 알아들을 수 없으니 모두 중간 계단까지 다가오도록 허락하였는데, 취객 한명이 마루에 올라오려고 하므로 통인이 밀어 내렸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다투다가 상황이 험악해지자 통인은 도주하고, 폭도들(衆漢)은 따라 올라오자 통판이 피한 방으로 들어와서 뭉둥이로 쌍창을 부수어 떨어뜨리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겨우 쫒아냈는데, 이들은 여기서 나와 향청(鄕廳)에 들어갔다. 좌수(座首:향청의 우두머리)가 부재중이므로 집기를 때려 부수고 물러나와 5리 떨어진 중영(中營)으로 진입하였다. 때마침 장대에서 활 사격이 있는 날이었으므로 누구하나 이를 막아서는 자가 없었다.
때려 부순다는 생각으로 포정사(布政司;감사가 근무하는 관아) 대문에 들어서 중삼문을 지나니 나졸들이 놀라 일제히 도망하므로 선화당 계단아래까지 진입하였다. 이미 황혼에 이르러 대청의 등촉을 들고 순사는 침실로 피하였다. 난민은 사무실에 들어와 등불을 끄고 뭉둥이를 휘두르므로 순사는 등청각으로 도피하였다. 난민은 창호를 때려 부수었다. (정신이) 온전한 자는 한 명도 없고 밤이 늦어서야 물러갔다.
< 선화당(宣化堂) >
遂於整頓後, 搜得城中各站, 捉來七十餘人, 此是公都㑹前一日也, 科儒多集, 亦不無行人之留宿於店幕者, 捕捉之際, 官屬及捕校, 各持器械, 一竝撲打, 不分玉石, 而又爲通奇於鑄所。 都監官 吳弘烈, 欲借各爐中, 京人健實者幾千人, 弘烈屢次靳持, 至翌日朝, 始揀京人五百名, 以助官差中軍。 乃具甲胄, 出往萬歲橋頭, 縳打往來行人, 一竝捕捉, 又至爲百餘人, 當場被打者, 頭碎脚折, 而刻下致斃者, 亦至七八人, 竝卽推閱於宣化堂之庭, 各施牢刑, 或至四五次, 李冕用·朴宗允·李敬燮三漢, 卽爲梟首警衆, 其餘諸漢, 自中營, 又施牢嚴問, 擧皆稱冤, 而只云觀光者, 不過十餘人。
겨우 정돈 후에 성중 각 참에 수색이 시작되었다. 70여명을 잡아왔다. 당일은 공도회(公都㑹:지방향시) 1일 전이어서 유생이 많이 모여 있었으므로 점막에 유숙하는 행인은 없었다. 체포 시 관속과 포교는 각자 무기를 소지하고 일제히 구타하므로 옥석을 가릴 수 없었고 주소(鑄所)에 통지하였다.
주소(상평통보 등 주화 등을 주조하는 곳)의 도감관(都監官:감독관) 오치열은 노(쇠 녹이는 용광로)에서 일할 사람으로 서울의 건실한 기 천명을 고용하려고 하였으나 누차 이를 연기해 왔는데, 다음 날 한양인 5백 명을 뽑아서 조관(助官)으로서 중군에 차출하여 일제히 무장시키고 만세교 입구로 나아가 왕래하는 행인을 구타하고 백여 명을 일제히 잡아들이니, 얻어맞고 머리 터지고 다리가 부러지는 등 현장에서 치사자(致斃者)가 7~8명 속출하였다.
모두 선화당 뜰에서 심문하고 더러는 우형(주리 트는 형벌)을 4~5차례 행하였다.
주동자인 이만용(李冕用) 박종윤(朴宗允) 이경섭(李敬燮) 3인(三漢)은 즉시 효시하여 군중에 경계를 보였다. 나머지 무리들은 중영에서 각각 우형의 심문을 당했는데 대부분 민원을 호소하였다. 단순 관광자라 말하는 자는 십여 명에 불과하였다.
< 만세교(萬歲橋) >
梟首之際, 巡使· 中軍· 判官, 竝坐於布政門, 先斬三漢, 以其疑懼危怯, 不敢出坐於沙場而然也。 懸三魁之首於西門, 屯聚之民, 猶不散, 及懸於萬歲橋柱, 營府之屬及京人, 皆蓬頭以踏印紙一丈, 裹頭各持刀鎗, 束立於營庭, 自有兵亂以來, 未有之爻衆也。
효수할 때, 순사, 중군, 판관은 포정문에 좌정하고 먼저 3인을 효시하매 모두 겁을 먹고 사장(沙場:형장)에서 일어서질 못했다. 서문에 3명의 효수된 죄인의 머리를 매달았는데 모여든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았다. 다시 만세교 다리 기둥에 매달았다. 영의 관리들과 한양사람들은 관인을 찍은 종이 1장에 쑥대머리가 되었다. 과두(시체머리의 두건)로 도창(刀鎗)을 지지하여 영의 뜰에 묶어 세웠다. 병란 이래 이런 경계를 보인 일은 없었다.
城村之民驚懼蟄伏, 路無行人者至三四日, 場市間米柴不出, 城中甚渴窘, 三四場以後, 始稍稍來集, 而一境知有按覈之行, 有罪無罪, 擧皆惶懍, 無以鎭靖, 甚危懍也。 參覈官 定平府使 鄭秀鉉 ·洪原縣監 韓鎔基, 眼同開覈, 捧罪人等初招, 本府有罪人囚徒案, 枷囚者二十三名, 保囚者五十名, 按名捉上, 皆被重刑重打者也。 滯囚已過數旬, 又値嚴沍, 項痿枷重, 匍匐入庭, 人鬼不分, 慘不忍見, 冬日甚短, 至夜四鼓始掇。
성촌사람은 두려움으로 칩거하여 3~4일이 지나도록 길에 행인이 없었다. 시장에도 곡식과 땔감이 나오지 않았다. 성중이 갈군(渴窘)되었고, 3~4 장(5일장 3번, 보름이 지난 전후일)이 자나서야 조금씩 모여 안핵(按覈:조사)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유죄 무죄를 모두 두려워하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
참핵관 정평부사 정수현, 홍원현감 한용기는 현장에 참석하여 조사를 시작하고 죄인 등을 첫 대면하였다. 본부 작성 도안(죄수목록) 중 칼을 쓴 죄수(枷囚者)는 23명, 감옥 수감자는 50명으로 잡혀온 자는 모두 중형 중타자(중형을 대상이거나 심하게 맞은 자) 들이다. 잡혀 온지 이미 20여일, 추위에 얼고 목은 저리고 칼은 무거우니 기어서 뜰에 들어선다. 사람과 귀신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으로 눈뜨고 볼 수가 없다. 겨울 낮은 매우 짧아 밤 사고(四鼓:사경 밤 2~4시)에 조사를 마쳤다.
ㅇ 1862.11.17.일 ~ 11.29일
十七日, 捧罪人昨日未畢之初招, 又査保囚諸漢, 各各捧招, 則或以公都會科儒下來, 或以親固買藥次下來, 或以過路宿站, 或以將向他邑者, 竝皆橫罹, 俱有的據之證, 故竝卽疏放者, 爲三十九人, 人心始得稍安。 其中一人, 自言是科儒云, 故問能做乎, 對曰, 能賦, 遂給紙筆曰, 以汝今日所遭爲題, 而呈納數句也, 其人植枷於地, 執筆良久, 書進二句曰, 赴都會而被捉, 果不知於民亂, 幸相公之按節, 望玉石之明卞。 余曰, 汝之所作, 雖不邊邊, 亦足以發明, 故今玆特放, 須益着力於工夫, 而勿陷於如此橫罹也, 其人僕僕而去, 聞出三門外, 謂其親知人曰, 雖登科之喜, 未足以過於此, 此盡稽古之力也。 重囚推覈, 難於用杖, 而且諸囚之被重打於當場, 又經屢次牢刑, 無以加施刑杖, 故或有一二次施威, 而不施一杖, 只反覆詰問, 以是之故, 得情雖難, 而被囚者之族戚姻黨, 在外觀望者, 始乃恬然, 多有感服之樣, 一境安頓, 極可幸也。
十八日, 捧罪人再招。 十九日, 捧罪人再招。 二十日, 捧罪人再招。 二十一日, 捧罪人三招。 二十二日, 捧罪人三招。 二十三日, 捧罪人三招 二十四日, 面質。
二十五日, 始修啓。 啓本先出草件, 字樣及行數, 一依啓本, 而使各人裂幅分寫。 夕巡使出見。 二十六日, 書役。 逃走罪人柳君一捉來, 是巨魁云。 二十七日, 書役。 二十八日, 書役, 逃走罪人金良坤自現。 二十九日, 書役, 至夜始訖, 仍封啓發送, 夜至回鼓矣。
11월 17일, 어제 1차 조사를 다 마치지 못했으므로 각각 다시 불러 조사하였다. 혹시는 지방 향시에 과거보러온 유생이라거나, 친고 약을 사러왔노라 말하는가 하면 여행객, 또는 타읍에 가던 길이라는 등 모두 뜻밖의 재앙이라고 하면서 각각 증거를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풀려난 자가 39명에 이르렀다. 드디어 인심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 중 한 명은 과거보러 온 유생이라 하므로 글을 지을 수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부(賦:시가)를 지을 수 있다 한다. 붓과 종이를 주어 오늘 당한 바를 주제로 쓰라고 하니 몇 구절을 써서 제출한다. 그 자는 땅에 칼을 의지하여 오래 동안 붓을 쥐고 두 구절을 썼는데 가로되, “도회에 나와 잡히게 되었는 데 실로 민란인줄 알지 못하였네. 다행이 재상께서 조사하게 되셨으니 옥석을 명백히 가려주소서(赴都會而被捉, 果不知於民亂, 幸相公之按節, 望玉石之明卞)” 내(안핵사 이참현)가 말하길 “너의 글은 비록 변변치 못하나 진실을 명백히 함에는 부족함이 없다. 그래서 특별히 방면하니 모름지기 공부에 진력하여 이러한 재앙을 당하지 말라”하였다. 그 자는 그저 감사, 감사를 말하면서 나갔다. 듣자하니 삼문 밖의 친지들이 말하길 “ 비록 과거에 합격하는 기쁨이 있을지언정 이보다 더하지는 못하리라” 하였다 한다. 이는 학문과 지식의 힘이다.
중죄인을 심문할 즈음, 모든 자가 현장에서 심하게 맞고 누차 우형을 당하였으므로, 형장을 사용할 수 없었다. 혹 한두 차례 으르기는 했지만, 매질 한 대 대지 않고 반복하여 구두 힐문하였다. 이런 연유로 범죄의 실정을 알아내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피죄인의 가족친척과 구경꾼들은 처음에는 긴장하였다가 대다수 감복하여 일견 안도하고 극히 다행이라 여겼다.
11.18일, 11월 19일 2차 심문하였다.
11월 20일 ~ 23일 3차 심문하였다. 11월 24일 대면 질문하였다. 11월 25일 장계를 손질하고 계장을 여러 장 필사하였다. 저녁에 순찰사를 접견하였다. 11월 26일 보고서 작업, 도주죄인 류군일이 잡혀왔다. 주동자라고 한다. 11월 28일 보고서 작업, 도주죄인 김양곤이 자수하여왔다. 11월 29일 밤늦도록 작업을 끝내고 장계를 봉하여 발송하였다.
啓本
啓本紙, 聯幅凡三十八幅, 而初幅書啓目, 次幅以下列書各罪人問招, 又其下, 書跋辭, 末段書罪人分等論斷。 所謂跋辭, 非但生疏戛戛, 而至於分等, 則斷人性命也, 下筆之際, 輒垂頭良久曰, 此漢宜於生, 而若置於死, 則積冤也, 宜於死, 而若置於生, 則失刑也, 何以則上無乖於王章, 下無損於陰德, 明愼平允, 一一得當乎, 如是之際, 不覺背汗。 凡輕重論斷, 爲三十餘人, 而所謂柳君一者, 已是爛熳於各招, 營府之論, 皆曰可殺, 三招·四招, 至于面質, 而當場作亂之際, 未及下來, 中路被捉, 仍卽被囚, 自獄逃走, 故毫無同亂之跡, 而以平日行事, 有氣力有口辯, 又出官門, 曾經鄕任, 今番還民等訢之擧, 未可謂全無指揮者也。 營府之意, 猶恐其或生, 而渠亦以魁納侤, 故分等論斷之文, 始不少貸, 屢回思量, 則無執贓於當場, 而驅之於必死者, 甚乖當, 故添入當場之無躬犯一句, 以待處分, 而又書修正之際, 柳哥·全哥, 次第添出, 割付列錄, 窘塞莫甚。 且多日失睡, 眩暈倍劇, 浩汗之文書, 無以照檢, 多少做錯, 理必不無也, 狀啓中十人, 以放送懸錄, 故竝押
入庭下, 分付放送, 則皆合掌再拜, 揮淚不成語, 可謂九死而十生者也, 眞不忍對見。
< 계 본문 >
38폭, 초폭 계목(목차), 다음 폭 각 죄인 문초내용, 다음은 서문, 마지막은 죄인의 양형과 근거이다. 발문에서 언급하기를 “비단, 생소한 일이나 등급과 형량을 가린다는 일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니, 글을 써내려가면서 문득 문득 오랫동안 머리를 들고 생각하였다. “마땅히 살아야 할 자를 죽이면 원한이 쌓이고, 마땅히 죽어야할 자를 살리면 형벌을 잃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위로는 왕장(법)에 어긋남이 없게 하고 아래로는 음덕을 해치지 않고 명신평윤, 마땅한 바를 얻을까! 이러한 생각에 등에 땀이 흐르는 것도 느낄 수 없다.
경중을 논하는 대상자는 30여명으로 유군일(柳君一)에 대한 심문결과가 뚜렷하므로(함흥) 영부에서는 명백히 사형이라 말한다. 3차, 4차 심문과 대면심문 결과 난동 당시에는 현장에 없었고 길에서 잡혔다는 것은, 난중에 감옥에서 도주하였기 때문이며, 추호도 난동에 참가한 흔적이 없다. 평일행사처럼 기력과 구변을 있었다. 관문을 나가서는 이전에 향임을 맡았는데 금번 백성들의 환곡에 대한 소청 건에 대하여 지휘가 전무하였다. 영부의 의도는 생사여부에 끼치는 영향을 두려워하는 점을 고려해, 우두머리에게 주범이라고 거듭 다짐 주었기 때문에 양형을 논하는 부분은 적지 않게 관대하게 임하였으며 여러 차례 숙고하였다, (장계에는) 현장에서 또는 마땅히 죽어야 할 자에 뇌물을 요구하거나 정당치 못한 행동이 없었으며 스스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한 구절의 각서를 첨입하였다. (장계결과의) 처분을 기다리는 바이다. 유가, 전가는 그 양형논거를 별도 첨부하여 논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군색함을 피할 수 없다.“
여러 날 잠을 자지 못하여 머리가 어지럽고 문서의 량이 방대하여 상세히 검증하지 못하였다. 다소의 착오가 없지 않을 것이며, 장계 중 방면할 10명의 명단을 적어두고 서명 날인하였다. 입정하여 방송(풀어 줌)을 분부하였다. 모두 두 손 모아 재배하고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한다. 가히 구사십생한 자들이다. 정말 마주 바라볼 수가 없다.
ㅇ 1862.12.1일 ~ 12.13일 병 : < 이하 생략 >
捧還出令之後, 一境民情, 不信營府之令, 終不寧靖, 故作榜文曉諭於各社。 文曰, 今番民撓, 雖是前古未有之亂, 而原其民心, 豈欲稱亂而然哉。 朝令屢下, 民未能詳知, 而始有等訴之議, 當場激變, 卽出於無知妄作, 故按獄之際, 務從平允久, 而茲又推本而洞諭之, 咨爾一州大小民人, 其各明聽焉。 恭惟我聖上憂勤一念, 拳拳于民, 慨八方之凋弊, 痛三政之紊亂, 乃命廷臣, 設廳釐正, 始所云蕩還者, 非蕩其今春分給之還, 而蕩其由來年久, 指徵無處之逋還也, 歸結云者, 元結應納之外, 每結二兩式加排, 以作蕩逋耗穀給代之用也, 而各邑之指徵無處者, 太半是吏奴三班之逋, 則蕩逋之惠, 只歸於三班而已。 近年結價, 夤緣市直之高翔, 年各不同, 較之十年以前, 則已不爲不高, 而今若復加二兩於每結之頭, 則加捧之害, 只歸於民, 大非矯捄之本意。 且欲以見在之穀, 全數執錢於三年之內, 而國不可無穀, 則以執錢之錢, 更貿他
穀, 爲積儲之計, 然而設始之新貿也, 年久之換色也, 必將大害於民, 而其所生弊, 當與還穀無異, 故乃又有復舊規之令, 其曰舊規云者, 卽我祖宗朝流來之良法美制也。
봉환(환곡상환) 령을 발표한 후에도 주민들은 營府(영부)의 령을 믿지 못하고 사태가 불안해지자, 방문을 작성하여 각 마을에 알리게 하였다. 방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금번 소요는 전에 없던 일로서 본래 주민의 마음은 어찌 난이라 칭하기를 바라겠는가? 朝令(조령)을 자주 내리어도 상세히 알지 못하여 처음에는 무리지어 소원하고 격변이 일어 부지불식간 일어난 일(無知妄作)이다. 전옥탈출사전의 조사 일은 될 수 있는 대로 공평히 처리하고 근본을 밝혀 이를 동리에 알리니, 대소 거민들은 각각 똑똑히 살펴보라.
성상께서는 걱정과 근심뿐이며, 백성에 정성을 다하고, 전국의 폐단을 개탄하시고, 삼정의 문란을 가슴아파하시면서 조정신료에 명하여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도록 하셨다. 처음에 환곡을 탕감하는 바로 시작하여, 금년 봄에 분급하는 것은 탕감하지 않는다. 탕감하는 사유는 너무 오래되어 징수할 곳이 없는 환곡결손분이기 때문이다.
귀결을 말하자면, 원래 결세(토지세) 이외의 분(환곡의 비탕감 부분)은 매 결당 2량씩 납부(加排:가배)함으로써, 체납한 모곡(耗穀:환곡 원금)을 이로 대체한다. 각 읍에서 징수하지 못한 것은 태반 이노삼반(吏奴三班)의 체납 분으로서, 탕감혜택은 삼반(문관, 무관, 음관)에 국한한다. 근년 결의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 매년 마다 같지 않으니 10년 이전과 비교할 때 높지 않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不爲不高). 그래서 금번 매 결당 2냥을 더한즉, 추가로 납부하는 손해는 백성에 부담되겠지만 바로잡고자 하는 본뜻은 아니다.
남아 있는 곡물은 모두 3년 이내에 금전으로 바꾸고, 나라에서는 곡식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므로 현금화한 돈으로 다시 다른 곡식으로 바꾸는 것은 적저술책(축재수단)이며 새로운 교환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오래 동안 유지된 환색(교환제도)으로서 장차 백성에 손해를 끼치고 폐단이 발생할 것이므로 환곡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법령으로 복귀토록 한다. 구 법령은 조선의 가장 훌륭한 법제임이라.
春糴秋歛可繼於病糧, 舊儲新捧不匱於換色, 以至耗落色名色, 其所不可無者, 亦理勢之必然也, 行之已久, 農民有賴, 而挽近百弊皆出於還, 故一自釐正之後, 文簿之幻弄, 升斛之濫滑, 一切嚴防。 自邑而遵行營門之令, 自營而宣布朝家之令, 積久之弊, 其將次第釐去, 則豈不是環東士食還之民, 至願大幸, 而雖以今年咸州一境論之, 耗條之爲營府支放, 卽是幾百年通行之例, 而民人之所共知也。 本穀之營倉輸納, 亦是已例, 而數十年來, 又軫輸納之弊, 本穀則納于所食之倉, 而只以耗條輸納者, 不可無支放故也, 而民人之所共習熟也。 此則雖欲變通而不可得者, 而其餘單代及代錢, 一從民願, 此皆明春民人還復受食者, 則各以所農之穀, 不論穀名之爲何, 以一石而代一石者, 便民力也, 各以詳定之價, 不論市直之高下, 以代錢而納一石者, 紓民力也。 廟堂有從便之處分, 營門有曲念惠澤, 其所排定, 至及於此, 其各勉勵, 早卽磨勘, 豈非公私之幸, 而歲色垂暮, 厫鑰末下, 揆以糴法, 寧容若是。
봄에 산 쌀을 가을에 주는 춘적추렴은 병폐를 이어가는 것이고 오래된 곡식을 새로 수확한 곡식으로 거둬들이는 것은 환색과 다를 바 없다. 환곡의 이자(耗落色) 부분은 없앨 수 없는 부분으로서 이 제도가 지속되어 농민에게 전가되니 모든 폐단(百弊)은 환곡에서 시작되었다. 이정청이 설치된 이후부터는 문부(문서)의 환롱(교묘한 교란)과 말과 되의 장난은 일체 엄단한다. 고을부터 감영의 규정을 준수하고, 관아로부터 조정의 법률을 알리고 실천한다. 오래 쌓인 폐단은 장차 모두 제거하여 관리의 벌이가 백성에게 돌아오니 어찌 천만 다행이 아니겠는가? 비록 일부 함주 지방에서 논란이 되었으나 모조(환곡 증식 분)가 관아의 재정원천이라는 것은 기 백년 간 관례로서 주지하고 있는 바이다.
본곡을 영창에 수납하는 것은 이러한 예이며, 수십 년 이래 수납의 폐단이 안타까우나, 본곡은 바로 식량창고에 납부하는 것이며, 모조(모곡)를 납부한다는 것은 재정상 불가피하다는 것을 백성도 다 아는 바이다.
이러한 즉 부득이 계속 (환곡을) 변통하려는 사람은 나머지 갚을 부분을 금전으로 대신한다. 내년 봄에 환복하는 사람은 농사지은 곡식으로 곡식종류에 불문하고 1석은 1석 대금으로 치루도록 할 것이니 개인의 재력에 달려있다. 1석 가격은 시장가격의 고하를 막론하고 상정하는 가격에 따르니 이도 개인의 재력에 따른다. 조정에서는 편함에 따라 처분하도록 할 것이고, 감영에서는 불합리함이 있으면혜택을 검토할 것이니 (그 배정하는바 이와 같고) 각각 노력하여 조기 마감토록하면 공사 간 다행이 아니겠는가. 매년말의 형편이나 실정을 살피어 곳간 열쇠를 풀어 지급하고 쌀사는 법(糴法 적법)을 잘 관리하여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이다.
大抵民亂之事, 明白洞言, 則當爲八路之羞, 含容不語, 則滋長一州之愚, 不得不略略布告, 是所謂口舌以代斧鉞者也。 民有恒言, 父母官家, 然而父母主恩, 官家主法, 等級截嚴, 又況節旄旬宣之地, 體貌之尊嚴, 果何如, 而一時三衙, 庶頑同撓, 犯分蔑綱, 莫此爲甚。當場屠戮, 於汝何惜, 而罪止三魁, 驛書馳奏, 遂有按覈之命, 當日激變, 雖諉山九社之愚蠢, 經營等訴, 卽是通一邑之和應。
대저 민란은 명백히 팔도의 수치임을 말로 형용할 수 없다. 한 지방의 잘못을 부득불 요약하여 알리니 부월(강경진압)을 글로서 대신함이다. 항간에 부모와 나라를 말할 때, 부모는 베풀음을 주로 하고 나라는 법으로 주관하니 등급(형량을 정함)은 지엄하다, 하물며 節旄旬宣之地(이성계의 발상지인 함흥지방)의 체면과 존엄은 정말로 어떠한가. 감영과 병영이 소재하는 곳에서 소요를 일으키고 범죄자가 통치권을 능멸하니 이보다 심할 수는 없다. 당장 도륙한다면 여러분에게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참수는 3명의 주동자에 국한하였다. 역참의 장계가 잇달아 올라와, 조사의 명을 내렸다. 9개 마을의 우매한 준동이 있었는데, 불만을 가진 한 고을의 일이 (타 고을에) 널리 통보되어 일어난 것이다.
鉤鉅株連, 固當鋤治之無遺, 而第念地僻俗貿, 令用之下, 未詳旨意之何居, 衆訴之際, 遂致變亂之無前, 可哀而不必誅也。 只以現囚各招, 分等馳啓, 以待判付之回下, 而從玆以後, 更或有一民之興訛造訕, 煽動指揮者, 是暋不知畏, 必殺無赦者也。 父母之於子也, 恩愛雖切, 至過愛生驕, 不聽敎訓, 則始而警責之, 不責之而不聽, 則笞罰之, 笞罰之而終不悛其惡, 則乃至於割愛之境, 而不但笞罰而止, 此乃爾等家常易知之事也。 爾等驕民也, 若以今覈之平允, 忸於悖習, 不畏王章, 則非常之恩, 固不可常常有之, 而自底誅戮, 悔將曷追。 以此榜文, 各各惕念翫讀, 勿復拒納公穀, 貽撓於營府, 勿復通文聚會, 得罪於公家, 使五百年豐沛之鄕, 滌去今日陋俗, 而咸歸於熙皡之域, 豈不嘉哉。 故玆布諭, 詳宜知悉。
한사람의 선동에 여러 사람이 연계되어 당초 호미로 막을 일을 깡그리 무시하고, 영이 시행되는 와중에,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지 않고, 무리지어 민원을 제기하는가 하면, 전에 없는 변란을 일으키니 참으로 애석하고 마땅히 주살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현재 죄를 조사하여 등급을 나누어 계를 올리고 주상(임금)의 회시를 기다리고 있다.
이제부터 혹여나 없는 사실로 비방하거나 선동하는 주동자는 두려움을 모르고 날뛴다면 용서 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부모 자식 간에야 비록 은애가 단절되고 지나친 사랑이 교만을 낳아 교훈을 듣지 않으면 처음에는 이를 나무라지만, 야단쳐도 듣지 않으면 매로 벌한다. 때려도 뉘우치고 깨닫지 못하면 남남지간의 지경이 되고 매질도 그치게 된다. 이러한 것이 일상적인 가정사이다. 소요을 일으킨 무리들이 금번 조사가 끝나고도 나쁜 풍습을 뉘우치고, 법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특별 은택은 없이 주륙을 면지 못할 것이며 후회해도 늦으리라.
이 방문을 읽고 다시는 공곡 납부하기를 거부하거나 감영에 소란을 일으키지 말 것이며, 다시는 통문하여 집회를 열거나 공가에 죄를 짓지 말 것이다. 오백년 풍폐지향으로서 금번의 나쁜 풍속을 씻고 밝고 화락한 지방으로 복귀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러한 뜻을 알리니 주지함이라.
ㅇ 1862.12.14일 병
ㅇ 1862.12.15일
以重囚之未盡的確, 自廟堂, 請按覈使從重推考, 柳君一·韓學辰·朴榮辰, 竝更査, 使之卽速登聞, 其餘在囚諸漢十三名刑配, 十名懲勵放送·問備雖是薄警, 而錯謬至此, 不勝悚蹙, 當爲更覈, 而非但夜深, 且巡使, 認以啓下則當發, 而料其回還日字, 不出今明, 爲設酒杯, 以爲送別之地, 盛意難孤。 夜深暫往宣堂, 月色滿庭, 天氣不甚寒, 正好一暢, 而食素念佛, 雖未追於古人携妓張樂, 寔不忍於此時, 與通判鼎話, 酒數巡還歸。
중죄인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조정으로부터 안핵사에게 신중한 추고를 청하여 왔다. 유군일, 한학진, 박영진은 모두 속히 불러 조사하고 나머지 죄인 13명은 유배, 10명은 크게 꾸짖고 주의를 주어 방송하였다.
착오 난 부분은 매우 송구스럽고 야밤일지라도 다시 조사하였다. 순사(감사)는 임금님의 재가가 나면 바로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그 회환 날자를 헤아려 금명은 아니기 때문에 송별하는 술자리를 마련했다. 야심한데 훤당에 나가니 달빛이 뜰에 가득하다. 날씨는 그리 차지 않고 화창하다. 식사는 생각이 없고(食素念佛), 비록 기생과 음악이 딸린 것은 아니지만 이때에 연회는 좀 어색하다. 통판과 애기를 나누고 몇 잔 술을 기울인 후 처소에 돌아왔다.
ㅇ 1862.12.16.일
十六日, 更査柳君一等三漢, 初招·再招。 十七日, 更査柳君一等, 三招·四招。 十八日, 封啓發送書役, 亦非不浩汗, 而慮其遲遲, 一邊捧招, 一邊書役, 故四畫夜而畢。
유군일 등 3명을 추가조사, 2차 심문하였다. 12월 17일 3차, 4차 심문하였다. 12월 18일 서류작업을 마치고 장계를 발송하였다. 양이 방대하지 않을 수 없고 작업속도는 더디어 한편으로 조사심문하고 한편으로 서류작업을 병행하다보니 4주야 만에 끝내게 되었다.
ㅇ 1862.12.17.일 ~ 12.29일 병
ㅇ 1862.12.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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偶與巡使, 言及民亂之時, 而八路之民志不靖, 意外無前之撓, 處處相續, 豈非運數所關耶。 巡使曰, 此州之事, 亦甚異矣, 十月之初山九社, 晴晝有雷響大發, 散野之牛畜, 皆驚駭走逸, 坪社則無雷聲, 其後山民, 有此作撓, 罹患偏甚, 坪社之民, 皆晏如, 已甚可怪。 雖以營內言之, 莅營之不幾月, 朝起視之, 則有馬走行於宣堂後軒, 退廳之上, 九月·十月之間, 有狐夜鳴, 有雉飛入於宣堂大廳樑上, 此等災異, 往往先見, 則是豈偶然這事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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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순사를 만났는데, 민란이 났을 때를 언급하였다. 그 당시 팔도의 백성들의 정서가 불안했는데 의외로 전에 없던 소요가 방방곡곡 계속 이어졌으니 어찌 운수소관이 아니겠습니까? 순사 왈 “우리 함흥의 일도 참으로 괴이합니다. 10월초 산골 9사에 백주대낮에 천둥소리가 크게 울리고 산과 들의 가축이 놀라 흩어지고 달아났습니다. 평지마을에서는 천둥소리도 없었습니다. 그 후 산골마을 사람들이 소요를 일으키고 걱정이 심해졌습니다. 평지마을 사람들은 모두 평온한데 참으로 괴이합니다. 비록 영내의 일인데 몇 월인가 아침에 일어나보니 선당 뒷마루에 말이 달려 퇴청한 적이 있고, 9월 10월 지간에는 밤에 여우가 울고 꿩이 선당에 날아 들어와 대청의 대들보위에 앉아 있는 등 이러한 일들이 발생하여 재앙의 전조를 보인 것이 우연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다.
< 함흥본궁(咸興本宮)>
첫댓글 스크랩으로 옮겨왔는데 수정이 않되어 스크랩을 삭제하고 일부 고쳐서 다시 올렸습니다. 1862년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전국적인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함흥민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조선시대로 돌아가 봅니다. 이 후속편으로서 민란의 수습결과는 '25번' 글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