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선생님께서 오셨는데 사당동에서 인사동까지 모시고 가야 하거든. 지하철을 탈까 아니면 택시를 타는 게 좋을까? 딸아이에게 질문을 하였다.
딸아이는 생각해볼 일도 아니라는 듯 말하였다. 당연히 택시를 타고 가야지 연세가 일흔을 넘으셨다면서. 딸아이의 말이 맞는다고 맞장구를 쳤으면서도 나는 지하철을 타기로 결정하였는데 그 이유인즉슨.
첫째로 선생님께서 미국 그 넓은 땅에서 장거리 사진을 찍으러 다니실 만큼 건강하다는 것이요 둘째로는 낯선 서울의 지하철 풍경과 그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과 함께 섞여보는 일이 선생님께는 새로운 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요. 셋째로는 오랜만에 뵙게 되기도 하거니와 여러 친구들과 함께였던 다른 때와는 다르게 선생님과 단 둘이라는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은 덜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사당역은 2호선과 4호선이 교차하는 역이므로 넓고 혼잡하였고 동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방향표시를 따라 미로 같은 지하철 역내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자주 오지 않는 역이므로 나도 낯설었고 혹 길을 잃을까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걸어가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는 4번 출구 쪽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동안, 보았다. 어깨 쪽이 제법 굽기는 했으나 노인이라고 하기에는 몸피가 단단해 보이는 남자가 자동차들이 줄을 지어 달려가는 서울 거리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 아 그래 찬미야!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나이든 분들에게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큰언니 연세가 일흔 여덟인데다가 줄줄이 세살 터울의 언니오빠들이 여섯 명이다. 일흔 다섯의 둘째언니와 연세가 같으신 선생님은 내게는 오빠뻘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선생님이 한결 편하고 친근감이 느껴졌다. 사당동에서 2호선을 타고 교대로 가서 3호선을 갈아타야 하는 사십여 분간의 시간이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날은 J의 사진 전시회 오픈식이 인사동에서 있을 예정이었고 나는 선생님을 모시고 그 장소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J. 선생님이 한국에 오신 이후로 은근히 궁금해 한 것은 물론이고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접적으로 내비치던 제자였다. J 본인이야 떠올리기조차 싫어할 만큼 암울했던 초등학교 시절이지만 그 시절에 버팀목이 되어주셨던 선생님 입장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그 제자에 대한 궁금증이 앞서고 있음을 나는 능히 짐작하였다.
반면에 J는 우리처럼 단순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제자가 아니었다. 그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고 지내다가 갑자기 무슨 면목으로 선생님께 전화를 하고 뵙느냐는 것이었다. J의 입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J의 사진 전시회가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내가 자연스럽게 선생님을 전시회로 모시고 가고 그곳에서 편안한 만남을 주선하기로 하였다. 나는 선생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기 위해 인사동에 거의 다 이르러서야 J의 사진 전시회임을 알렸다. 내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선생님께서는 매우 놀랍고 기쁜 표정을 지으셨다. 그래? 정말? 그런거야? 누군가 기뻐하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그보다 몇 배의 기쁨이 내게도 확장되어 일어나는 일이다.
정장에 바바리 차림의 선생님은 일흔 중반의 노인이라기보다는 육십 대 중후반의 중년으로 보였다. 몸피가 조금도 줄지 않은데다가 날카로운 콧날과 또렷한 시선, 아직 여유 있어 보이는 머리숱을 지니고 계셨다. 지하철이 만원이어서 선생님께서 앉을 자리가 없다는 게 처음에는 죄송했지만 곧 자리 하나가 비었고 다시 곧 자리가 또 비었다. 노약자 좌석이었지만 나란히 나는 선생님 옆에 앉을 수 있었다.
가까이서 뵈니 보청기를 끼고 계셨다. 한 쪽 귀가 어두워졌단다. 세월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다. 시끄러운 장소에서는 말소리가 잘 들리지가 않는단다. 지하철은 조용하지가 않다. 나는 제안을 하였다. 이곳에서는 선생님만 말씀하세요. 제가 잘 들을께요. 내 말에 선생님께서 허허 웃으셨다. 그 정도는 아니란다. 소소한 가정사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인사동에 이르렀다. 지하철은 머뭇대지 않아서 좋다.
인사동 길을 걸어갔다. 이 저녁에 이곳으로 나와 이렇게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더군다나 미국에 살고 계시는 초등학교 적 스승님과 함께 말이다.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선생 친구들 많지만 나처럼 제자가 인사동으로 전시회를 보러 가자고 하는 제자는 하나도 없지. 다들 부러워하지.
사과 상자에 사과를 담아놓은 그대로를 실제 그대로인 것처럼 그림으로 묘사한 화가의 전시회장에 들렀다. 마치 밖으로 사과가 떨어져 나올 것 같기도 하고 한 개를 집어 얼른 한 입 베어물어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킬 만큼 사과의 빛깔과 광채가 사실적이었다. 그 그림과 함께 선생님 사진을 찍어 가장 반가워할 친구. S에게 보냈다.
S, 우리들처럼 오랜 시간 선생님을 모른 척 하지 않고 전화와 메일로 선생님과의 연결 끈을 놓치지 않았던 단 한명의 기특한 제자였다. 건강도 그리 좋지 않고 직장과 가정사로 바빴지만 마음이 변덕스럽지 않았으며 나에게는 특히 솔직담백한 친구였다. 선생님과는 벽이 없이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제자이니만큼 누구보다도 기뻐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젊은이들을 자주 만날 수가 있었는데 인사동 거리와 잘 어울렸다. 아마도 한복을 빌려주는 곳이 있는 모양이었다. 남녀 한 쌍이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걸어오는데 사진작가이신 선생님께서 어찌 그냥 지나치시랴. 양해를 구하였는데 다행히 멋진 포즈까지 취해가며 사진을 허락해 주었다. 선생님께서는 꽤나 꼼꼼하게 여러 번 셔터를 눌렀으며 참으로 즐거워하셨고 만족해하셨다.
J의 전시장으로 가는 동안 약간은 어색해진 분위기 탓일까. 무심코 나는 말하였다. 이번 방문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고 카페에 올리신 선생님의 글 때문에 가슴이 먹먹했어요.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흐른다 싶었는데, 울먹이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니? 나도 그 글을 쓰면서 울었단다. 나이 먹으니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르지. 자신이 없어지는구나.
잠시 슬퍼지기는 했지만 그 슬픔은 곧 잊을 수가 있었다. 사진 전시장에서 선생님은 J를 만난 기쁨으로 들떠 계셨으며 그곳 사진작가들과 자유롭고 활기차게 어울리셨다. 초등학교 시절 반장이었던 제자 B가 퇴근 후 꽃다발을 두 개나 들고 기쁜 얼굴로 달려왔으며 사진작가인 제자 C도 이미 두 개의 약속 장소를 거쳐 어렵사리 참석했다. 선생님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우리도 행복했다.
지하철로 사당동까지는 나와 함께, 버스를 타고 조암 집으로는 홀로 선생님께서는 무사히 귀가하셨다. 감기 기운이 있었던 나는 그날의 고만한 일로 끙끙 앓았는데 그 다음날 선생님 목소리는 전화기를 타고 쩡쩡 울려왔다. 어제 고마웠다. 네가 딸 같더구나. 재치가 부족한 나는 그 칭찬에 어울리는 답변을 하지 못하였는데
이제야 소리 높여 말해본다. 그 정도 체력이시라면 소라도 한 마리 너끈히 잡을 힘이십니다. 눈물을 보이실 때가 아직은 아닙니다. 선생님! 화이팅!
-2016년 10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