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터진 푸른 샘
이동아
가난은 곰팡이의 안쪽에서만
집을 짓는다
십이 년,
몸에서는 피보다 모래가 흘렀다
기울어진 밑창으로
나는 아직 문 쪽을 더듬었다
성 밖이라는 말은
칼보다 먼저 살에 닿았다
명의의 종이는 먼지가 되었고
약봉지를 스친 자리마다
문 하나씩 더 잠겼다
해가 벌판의 가장자리를 태울 때
갈증은 낮은 옷자락을 물고
기어갔다
그때
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보이지 않는 전류 하나가 지나갔다
마른 뼈를 관통하고
새던 생명을 멎게 했다
끊긴 맥 위에서
푸른 샘이 터졌다
늦게.
굽은 허리가 펴지는 자리
저녁이 고였다
흘린 것이 아니었다
비어 있던 내가
조용히 채워진 것이었다
──────────────
문이 잠긴 뒤에
열두 해 동안
나는 새고 있었다
마지막 문을 만졌을 때
문이 아니라
내 안에서
샘이 열렸다
사람들은 기적이라 불렀지만
나는 늦게 도착한
나의 몸을 만져 보았다
──────────────
세상은 몸에서 무언가가 계속 빠져나가면 그 사람의 삶도 함께 닳아 없어진다고 믿는다. 오래된 병명, 닫힌 문, 사람들 바깥에 세워진 이름은 한 존재를 결핍으로만 읽게 만든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익숙한 해석을 뒤집는다. 새어 나간 것은 생명의 전부가 아니라, 더 이상 몸 안에 머물 수 없었던 오래된 어둠이었다. 피와 모래, 먼지와 잠긴 문은 실패의 목록이 아니라 한 사람이 끝까지 걸어온 표면의 기록이다.
이 시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반전을 만든다. 구원을 바깥에서 내려오는 사건으로 그리지 않고, 어깨와 옷자락 사이를 스친 보이지 않는 전류로 옮긴다. 손은 거대한 문을 열지 못했지만, 작은 옷자락에 닿는 순간 자기 안의 감각을 되찾는다.
이 시의 힘은 상처를 지우지 않은 채 상처의 방향을 바꾸는 데 있다. 끝내 이동하는 것은 피가 아니라 존재다. 늘 새고 있던 사람은 어느 순간 샘의 자리로 옮겨 간다. 그래서 마지막의 ‘채워짐’은 설명이 아니라, 굽은 허리가 펴지고 저녁이 몸 안에 고이는 촉감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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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뼈를 지나는 것들
이동아
곰팡이가 자라는 자리에만
가난이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십이 년—
피가 아니라 모래가 새어 나갔다
밑창은 기울고,
손가락은 찾아낼 수 없는 것을 더듬었다
성 밖이라는 말은
살을 베는 것보다 먼저 닿는다
명의의 처방은 먼지였고
백약이 스친 자리마다
또 다른 문이 닫혔다
해 저문 벌판,
타버린 갈증이
낮은 옷자락 끝을 붙잡고 기어갔다
순간—
보이지 않는 전류 하나
마른 뼈를 관통했다
새던 생명이 멎고
끊긴 맥 위로
푸른 샘이 터졌다
늦게.
굽은 허리가 펴지는 자리에
저녁 노을이 고인다—
흘린 것이 아니라
채워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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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류
십이 년이 기울어져 있었다
손끝 하나
닿은 자리에서
마른 뼈가
방향을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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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치유를 사건으로 읽지 않고 물리학으로 읽는다. '전류'라는 단어가 제목에 앉는 순간, 이 여성의 열두 해는 방전된 회로가 된다—흐르지 못하고 고여서 썩어가는 에너지. 우리는 치유를 채움으로, 기적을 빛으로 이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 시는 다르게 읽는다. 아픔의 본질은 피가 아니라 모래였다—흘러내리되 돌아오지 않는 것, 쌓이되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것. '성 밖'이라는 말이 살을 베는 것보다 먼저 닿는다는 진술에서, 시는 배제의 폭력이 신체적 고통보다 먼저 사람을 무너뜨린다는 걸 조용히 선언한다. 그 해 저문 벌판 끝에서 기어간 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의 관념이 아니라 '타버린 갈증'—고갈된 몸 자체였다. 전류는 손끝이 닿는 그 순간 흘렀다. 보이지 않게, 설명 없이. 푸른 샘이 터지는 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끊긴 맥 위로 솟는다—아래서부터.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늦게 터지는 것이 가장 깊은 것이다. 저녁 노을이 고인다는 마지막 행은 정지가 아니라 완성이다. 흘린 것이 아니라 채워진 것처럼—그 '처럼'이 아포리즘이다.
마른 생애에 전류가 흐를 때
이동아
십이 년 기울어진 밑창 하나
생의 바닥을 긁고 왔다
궁에서 새는 것은
피가 아니라
모래시계 속
마른 생애의 가루
명의의 처방은
먼지로 흩어지고
백약이 스친 자리마다
가난은 곰팡이처럼 번졌다
성 밖이라는 말은
살을 베는 통증보다 깊다
해 저문 벌판 끝
타버린 갈증 하나
낮은 옷자락을 붙잡고
기어간다
절망의 가장자리
손끝이 닿은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전류 흐르고
순간—
천둥이 불꽃으로 내려와
마른 뼈를 관통할 때
새던 생명 멎고
상처의 입술이 닫히며
끊긴 맥 위로
푸른 샘 하나
늦게, 터진다
굽은 허리 펴지는 자리
돌아선 길 위에
저녁 노을이
고인다
압축시
마른 생애는
모래처럼 흘렀다
모든 처방이 먼지가 된 자리
손끝 하나
절망 끝에 닿았을 때
보이지 않는 전류
천둥이
몸속으로 떨어지고
끊긴 자리에서
샘이
늦게 터졌다
긴 공감 (핵심 반전)
우리는 오래도록
아픈 곳을 고치려 애쓴다
더 좋은 처방,
더 나은 방법,
조금 덜 아픈 길을 찾아
그러나 어느 순간
알게 된다
문제는 상처가 아니라
말라버린 시간이었다는 것을
흘러야 할 생이
굳어버린 자리에서
아무리 덧바르고 채워도
살아나지 않는 이유를
그래서 마지막에는
고치는 일을 포기하고
겨우,
닿는다
절망의 가장자리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
그때 비로소
우리가 붙든 것이 아니라
어떤 흐름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핵심 반전은 여기다
살아나는 것은
내가 버텨낸 결과가 아니라
이미 흐르고 있던 것에
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복은
쌓아 올린 끝에서가 아니라
완전히 끊어진 자리에서
늦게, 시작된다
기울어진 밑창이 닿은 자리
이동아
십이 년 기울어진 밑창,
생의 바닥 긁고 왔다
궁에서 새는 것은
피가 아니라
모래시계 속
마른 생애의 가루
명의의 처방은
먼지가 되었고
백약 무효의 자리마다
가난이 곰팡이처럼 번졌다
성 밖의 고립은
살 찢는
통증보다 깊은 유배
해 저문 벌판
타버린 갈증 끌고
낮은 옷자락 끝으로 기어간다
절망의 끝에 닿은 손끝
거기, 보이지 않는 전류 흐르고
순간—
천둥이 불꽃으로 내려와
마른 뼈 관통한다
생명 새던
상처의 입술 닫히고
끊긴 맥 위로
푸른 샘 하나 터진다
굽은 허리 펴지는 자리
돌아선 길 위에
저녁 노을이 고인다
손끝에서 열린 샘
기울어진 밑창으로 생의 바닥 기어가니
백약 무효한 자리마다 가난만 피어나고
절망 끝 손끝에서 푸른 샘이 터지네
혈루증 여인
이동아
십이 년 걸어온 밑창이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궁에서 새어 나가는 것은
붉은 피 아닌
모래시계 속 빠져나가는
마른 생애의 잔해들
명의의 처방전은
텅 빈 곳간의 먼지가 되었고
백약 무효한 자리마다
가난이 곰팡이처럼 피어난 곳
성 밖의 고립은
살 찢는 통증보다
서늘한 유배지다
해 저문 허허벌판
타버린 갈증 끌고
생의 바닥 기어
낮은 옷자락으로 향한다
절망의 끝단에 닿은 손가락 끝
생명의 고압선이 흐르는 지점
순간
천둥 같은 불꽃이
마른 뼈 관통한다
생명 유출하던
묵은 상처의 입술이 다물리고
끊겼던 맥박 위로
푸른 생명샘 터져 오른다
굽은 허리 펴고
돌아선 길 위로
비로소
평온한 저녁 노을 고인다
십이 해 기운 삶, 기울어진 밑창으로
마른 시간 흘리다 옷자락 끝을 붙잡아
번개 스친 그 순간, 푸른 샘 다시 솟네
지점(地點)
이동아
십이 년 걸어온 밑창이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궁에서 새어 나가는 것은 붉은 피 아닌
모래시계 속 빠져나가는 마른 생애의 잔해들
명의의 처방전은
텅 빈 곳간의 먼지가 되었고
백약 무효한 자리마다
가난이 곰팡이처럼 피어난 곳
성 밖의 고립은
살 찢는 통증보다 서늘한 유배지다
해 저문 허허벌판
타버린 갈증 끌고
생의 바닥 기어
낮은 옷자락으로 향한다
절망의 끝단에 닿은 손가락 끝
생명의 고압선이 흐르는 지점
순간
천둥 같은 불꽃이
마른 뼈 관통한다
생명 유출하던
묵은 상처의 입술이 다물리고
끊겼던 맥박 위로
푸른 생명샘 터져 오른다
굽은 허리 펴고
돌아선 길 위로
비로소 평온한 저녁 노을 고인다
접촉
열두 해 기운 밑창 유배지를 기어가다
절망의 끝단 닿은 손가락 끝 불꽃 튀어
생명샘 터진 길 위로 노을빛이 고이네
혈루(血淚), 고압선의 꽃
이동아
십이 년 걸어온 밑창이 비스듬히 기울어 있다
자궁에서 새어 나가는 것은 붉은 피가 아니라
모래시계 속 빠져나가는 마른 생애의 잔해들이다
명의의 처방전은 텅 빈 곳간의 먼지가 되었고
백약이 무효한 자리마다 가난이 곰팡이처럼 피어났다
성 밖의 고립은 살 찢는 통증보다 서늘한 유배지
해 저문 허허벌판 타버린 갈증 끌고
생의 바닥 기어 낮은 옷자락으로 향한다
절망의 끝단에 닿은 손가락 끝
생명의 고압선이 흐르는 지점
순간 천둥 같은 불꽃이 마른 뼈 관통한다
생명 유출하던 묵은 상처의 입술이 다물리고
끊겼던 맥박 위로 푸른 생명샘이 터져 오른다
굽은 허리 펴고 돌아선 길 위로
비로소 평온한 저녁 노을이 고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