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의 베고니아 사랑 / 김선례
여러분은 어떤 사랑이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해와 양보, 희생이 따르는 기독교적인 아가페사랑, 남녀 간의 에로스사랑, 정신적으로 교감하는 플라토닉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본능적인 사랑 등 아마 밤이 새도록 이야기해도 끝나지 않는 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은 사랑 속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행복과 불행을 겪기도 합니다. 어떤 방식과 형태든 그 사랑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 입니다. 어느 사랑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지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남자를 평생 동안 그리워하며 사랑하고도 이루지 못하고, 절절한 사연을 지니고 죽은 한 여인의 무덤 앞에서, 그녀의 이름을 애달픈 마음으로 불러 보았습니다. 강아. 조선의 중기 때 시인이며 정치가였던 송강(松江) 정철(鄭澈)을 사랑한 기생입니다.
몇 년 전 여름, 우연한 기회에 ‘정철문학제’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는 고장에 송강이 부모님의 시묘를 지내며 살았었고, 송강과 강아의 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송강마을. 문학행사에 송강과 강아가 400여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재회하는 무희들의 퍼포먼스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는 이들이 살아서나 죽어서도 이루지 못했던 사랑의 아픈 사연 때문에 마음속 깊이 각인 되었었나봅니다. 사랑의 목마름을 채우지 못한 여인 강아. 굴곡 많았던 송강의 인생역정 만큼이나 기구했던 강아의 순애보가 갈바람에 나뒹구는 낙엽 같아 나의 마음을 아리게 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의 사나이들이 불나방처럼 뛰어 들게 했던 한양기생 초요갱, 모든 남자의 꽃이 되리라했던 송도기생 황진이, 물결이 마르지 않는 한 혼백도 죽지 않으리라했던 논개, 율곡 이이와 플라토닉 사랑에 빠졌던 황주기생 유지 등, 시대를 풍미했던 기생들의 사랑이야기는 흥미롭게 많이 전해져옵니다. 송강 정철하면 당대의 가사문학의 대가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기생 강아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는 아마 없는 것 같습니다.
송강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을 때에 16세의 동기(童技)인 강아를 만났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쉰을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송강은 강아의 귀밑머리를 풀어 주었습니다. 님을 향한 그녀의 일편단심과 운명은 그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송강(松江)의 여자라 하여 강아(江娥)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지아비로 모셨던 행복한 시절도 잠깐, 송강이 도승지가 되어 서울로 가면서 이별을 하였습니다. 밝은 달빛은 창문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데 홀로 남은 강아는 임을 향한 그리움에 얼마나 많은 밤을 하얗게 지새웠을까요? 송강이 혹여 찾아주지 않을까 기다리며 백옥 같은 정절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강아가 송강을 사모했듯이 그는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으로 강아를 마음에 둘 여유가 없었겠지요.
강아는 눈물을 삼키며 송강을 떠나보낸 10여 년 동안 그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강계로 귀양 갔다는 소식에 밤낮을 가리지 아니하고 수천 리 길을 달려갔습니다. 강계에서 송강과 잠깐의 해후를 하고난 후, 강아에겐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귀양에서 풀려 한양으로 떠났습니다. 강아의 운명적인 얄궂은 사랑은 계속됩니다. 그녀는 송강이 있는 한양을 향해 남쪽으로 가다가 왜적에게 잡힙니다. 그 시절은 임진왜란 때였습니다.
이때 송강의 제자인 이량(李亮)을 만나게 되고, 그녀는 몸을 바쳐 일본군 대장인 고니시(小西)를 유혹하여 평양성 탈환에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고니시에게 몸을 더럽힌 강아는 더 이상 송강을 섬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소심(素心)이란 법명으로 불가에 귀의 하였습니다.
송강은 정치적인 모함을 받아 사직하게 되고 빈한과 회한 속에서 살다가 죽게 됩니다. 정권이 바뀌어 송강의 신원(伸寃)이 이루어지자 강아는 송강마을에 와서 그의 묘소를 돌보다 여생을 마치게 됩니다. 강아의 묘는 송강의 묘소 바로 밑에 있지 못하고 그곳에서 왼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송강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 사람들은 사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갈라놓은 골짜기라 해서 이를 ‘삼천리 골’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의기(義技) 강아(江娥)’라고 대리석 비문에 힘차게 새겨져 있습니다. 송강을 아름답게 사랑했던 그녀의 숭고한 일생을 존경하는 후손들의 마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종6년에 송강 묘소는 충북 진천으로 후손들이 옮겼습니다. 송강의 부모님 묘소와 강아의 무덤은 오늘날 까지 송강마을에 남아있습니다. 비록 평생을 바쳐 사랑한 낭군인데 함께 지낸 시절은 얼마 되지 않고 맺지 못한 사랑의 아쉬움을 안고 송강마을을 오늘도 외롭게 지키고 있습니다. 죽어서나마 사랑하는 임과 가까이 있고자 했던 강아의 바램도 허락지 않았던 현실이 원망스럽습니다.
강아의 비석 뒷면에는 송강과 이별할 때 써 주었다는 ‘자미화(紫微花)’ 시가 새겨있었습니다. 자미화 꽃봉오리 터지는 봄이 올 때마다 강아가 생각나면 송강은 풍류객답게 적당한 취기에 시조가락 읊으며 그리움을 달랬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느 동산에 가득한 자미화 봄빛
다시 보니 여인의 얼굴은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말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이 모두 다 네 고움을 사랑하리.
골짜기의 칙칙한 기운을 느끼며 강아의 사랑에 빠져있는데 마른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새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삼천리 골에 강아가 환생하여 구슬피 님을 그리며 부르는 사랑의 노래일까요? 나는 강아의 초라한 무덤을 어루만지며 “당신의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사랑이었습니다. 그분과의 고귀한 사랑은 영원할 것 입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그러나 송강의 텅 빈 가묘를 뒤로하고 송강마을을 내려오는 내 마음은 왜 그리도 허전했을까요? 베고니아 꽃잎의 엇갈린 사랑 같아 한동안 씁쓸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