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35> 서장 (書狀)
증종승(曾宗丞)에 대한 답서
눈앞에 다가오는 것에 속지 않을뿐
"다만 화두 위에서 살피십시오. 살피고 또 살피다가 잡을 곳도 없고 재미도 없어서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여 답답함을 느낄 때에 바로 힘을 써야 합니다. 절대로 다른 것을 쫓아가지 마십시오. 다만 이 갈피를 잡지 못하여 답답한 곳이 바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어서 천하 사람들의 혀를 꺽어버릴 곳입니다. 결코 소홀히 듣지 마십시오."
현재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선법(禪法)을 보통 간화선(看話禪)이라고 한다. 간화선이란 화두를 살피는 것을 선의 공부로 삼는다는 말이다. 간화선은 그 창시자가 대혜종고(大慧宗杲) 선사인데, 바로 이 {서장}에서 자성(自性)을 깨달아 선문(禪門)에 들어가는 새로운 방편으로 간화(看話) 즉 화두 살필 것을 주창했던 것이다.
화두란 공안(公案)이라고도 하며, 주로 선사들이 문답한 일화 가운데 그 뜻이 분명히 드러나지 않은 말이나 행위를 가지고 하나의 문제로 삼는 것이다. '화두를 든다[擧話]' 혹은 '화두를 살핀다[看話]' 하는 말은 화두를 문제로 삼는다는 말이고, '화두 위에서 의심을 부순다[話頭上破疑]' 혹은 '화두를 깨닫는다[悟話]' 혹은 '화두를 뚫어낸다[透話]' 하는 말은 그 문제가 풀렸다는 말이다. 화두의 문제가 풀렸다는 것은 곧 화두의 본질을 파악했다는 말이며, 화두의 본질을 파악했다는 말은 곧 마음의 본성(本性)을 파악했다는 말이다.
화두의 본질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고 공부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절대로 어떤 경계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화두의 의미를 뜻으로 이해하거나 어떤 느낌이나 생각의 틀 속에 머물러 있어서는 화두를 뚫어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화두는 자성을 밝혀내는 방편인데, 자성은 오직 직접 체험할 수 있을 뿐, 어떤 식으로든 규정되거나 관념적으로 파악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화두의 본질이 무엇인가? 화두의 참 뜻이 무엇인가? 하고 의심하고 의심하여 가되, 생각나고 느껴지는 모든 답들을 물리치기를 계속하는 것이 바로 화두를 공부하는 바른 방법이다. 이런 의심을 오랫 동안 놓지 않고 생각 물리치기를 계속하여 그 의심이 더욱 깊어지고 간절해지면, 자신이 믿고 의지하였던 모든 것들이 허물 허물 녹아 사라지고 마음은 의지할 곳이 없어 막막하고 답답하게 되어서 마치 자기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자신이라고 할 만한 존재도 없이 캄캄하고 깊은 골짜기 위에 위태하게 서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 바로 이런 곳에서 힘을 잃거나 돌아서지 말고 계속하여 앞으로 나아간다면, 예기치 못했던 순간에 문득 광명이 모습을 드러내어 갑자기 의심이 사라지고 갑갑함이 사라지며 몸이 가볍게 된다.
이 때에는 가슴에서 숨길을 가로막고 걸려 있던 장애물이 떨어져나간 것처럼, 다만 상쾌하고 가벼울 뿐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가슴 속에서 대립되고 쪼개져서 아픔을 주던 조각들이 하나도 없이 사라진 듯 하고 마음은 텅 비어서 도무지 잡을 것이 없지만, 조금도 불안하거나 막막하지 않고 오히려 날아갈 듯이 상쾌할 뿐이다. 이때까지 무거운 짐으로 매달려 있던 화두나 조사(祖師)의 말과 부처의 가르침도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고 그저 말끔할 뿐이다. 이제 화두는 뚫린 것이고 화두 위에서 의심이 부서진 것이다.
이 곳에서 보면 눈 앞에 나타나는 형형색색의 사물과 다종다양한 일들이 빠짐 없이 모두 하나의 근원에서 나오고 하나의 근원에 자리잡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어떤 물건이나 어떤 일도 이 곳에서는 모두 녹아서 이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매사가 오직 이것의 활동일 뿐 다른 일이 없다. 늘 지금 이 순간 이것의 활동으로 살아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어리석음과 지혜를 말하지도 않고, 중생과 부처를 말하지도 않으며, 깨달음이니 견성이니 하는 생각도 없고, 가르치고 배운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눈 앞에 다가오는 것에 속지 않을 뿐이다.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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