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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7월 8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황의찬목사)
하나님의 지팡이
출4:18~31
<에피소드···순종(順從)>
김장환 목사님과 미국인 사모님 트루디. 그 아들 김요셉 목사, 김요한 목사.
김요셉 목사가 아들을 낳았다.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항렬 자가 끝 자로서 ‘종’이었다. 그래서 ‘종’
자 앞에 여러 글자를 대입해 본다. 금종, 은종, 동종, 민종, 현종 등등. 그런데 마땅한 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좋은 글자들은 이미 주위의 친척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심 끝에 ‘순’자를 찾았다. 순·종,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고, 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다는 뜻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김요셉 목사가 부모님께 달려갔다. “아기 이름을 순종이라고 하
고싶어요. ‘순 · 종’ 좋지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할머니 트루디 사모님이 한 마디 하
셨다고 한다. “그 애가 어떻게 ‘순종’이냐? ‘잡종’이지!” 해서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고 합니다.
트루디 사모님은 왜 이런 유머를 했을까요?
외모부터 혼혈임이 드러나는 아이의 이름을 ‘순종’으로 지으면 주위로부터 오히려 더 놀림감이
될 것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은 피해가는 것이 좋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지요. 결국
그 손주의 이름은 ‘순종’이 아닌 다른 이름, 아마 ‘민종’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잡종이냐 토종이냐 순종이냐, 이런 것 말고, 순종, ‘어른의 뜻에 순순하게 복종하는 것’이
라는 의미의 순종, 요즘에는 참으로 순종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순종하는 모습을 보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휘녕이가 교회에서 놀고 있을 때, 할머님이 뭔가를 들고 가시다가, 휘녕이에게 “휘녕
아 이것 큰 집에 좀 갖다 줘라!”하시는데, 휘녕이가, “에이! 싫어”하면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휘녕이에게 타일렀습니다. “할머님 말씀에 순종해야지!” 그리고 며칠 후에 보니까
휘녕이가 비닐 봉투를 달랑달랑 들고 교회 앞을 지나가기에 “어디 가냐?”하고 물었더니, “할머니
심부름, 큰 집에 갖다 주랬어요!” 얼마나 그 모습이 이쁩니까?
순종하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모세의 순종>
미디안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세도 처음에는 이리 빼고, 저리 빼고, 여간 뺀질거린 것이 아
니었습니다.
“내가 왜 그 일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내가 하나님 만난 일을 그 사람들이 믿어줄 리가 없습니다.”
“보낼만한 사람을 보내세요. 저는 아닙니다.”
“저는 말을 어눌하게 하기 때문에 안 됩니다. 말 잘하는 사람 찾아보세요 하나님!”
온갖 구실은 다 갖다 붙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꾹꾹 눌러 참으시면서 모세가 순종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 모세가 순종하기로 결단을 내렸습니다.
(18절)『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
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이 아직 살아 있는지 알아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이드로
가 모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모세가 순종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세는 순종하기로 마음이 기울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자신이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이미 나이 80에, 지금까지 소시민으로서 그냥저냥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처가살이 하면
서 나름대로 알콩달콩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에게 엄청난 프로젝트를 맡기시는
겁니다. 그 프로젝트가 무엇입니까?
지금 애굽에서 노예로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1백만이 넘는 자기 동족을 구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대단히 막중한 사명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라시는 겁니다.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사람들 틈에서 나름대로 알콩달콩
살아가는데, 어느 날 누가 와서 자꾸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지금 예배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처음 예수님 믿기로, 예수님께 순종하기로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입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①“그래, 이 길이야, 내가 지금까지 찾아 방황했던 길이 바로 예수 믿는 길이다!” 하면서 믿기 시
작했습니까? 아니면, 교회로 인도하는 사람의 체면, 또 한편으로 교회에 다니고 싶은 생각도 아주
조금은 있었고, 또 주변에 예수 믿은 친척들보면서 부러운 마음도 없지 않았고, 이렇게 ②주변의
여러 정황이 예수 믿도록 되어 있어서 반신반의하면서 교회로 발길을 옮기셨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2번일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의 결단으로써 믿음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믿기 시작한 데에는 우리의 결단 말고도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땡겨 주시므로 가능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믿음마저도 완전히 자기의 결단으로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지금 전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의 끈질긴 전도에도 꿈쩍하지 않는 사람들 중 대
부분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도 교회 가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아! 전화 하지 말고, 문자 보내지 말고, 기다려줘, 내가 나
가야겠다고 결심을 굳힐 때까지 기다려 줘!”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대답 앞에 저는 절망할 때가 많습니다.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닌데, 자기의 완전한 결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저렇게 자기중심적이 되었구나, 사람들이 저렇게 강
퍅하고 완악하게 되었구나!
어느 정도 마음이 있고, 주변의 권유가 간곡하면, 그쯤하고, 교회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데, 그
래야 구원이 있는데, 현대인들이 너무나 자기의 판단만을 믿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100퍼센트, 완전히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을 때 나갈 터이니 기다려!”
그런 때는 없습니다. 그런 때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그걸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순종”의 기회
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순종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구원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아야겠다고 했을 때 가능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서 온갖 즐거움을 다 즐
기고 나서 죽기 바로 직전에 회개하고 구원을 받겠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도 밑지는 장사는 안 하십니다.
모세의 순종을 한 번 보십시오.
순종하기로 결단을 내리고 장인에게 가서 자기 민족들이 있는 애굽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장인
으로부터 허락을 받고도 또 순종의 길로 선뜻 나서지 못하고 밍기적 거립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또 말씀하십니다.
(19절)『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목숨을 노리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
최종적으로 이 말씀을 듣고 드디어 모세가 담보짐을 쌌습니다.
(20절)『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
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하나님이 모세가 순종의 길에 나설 때까지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습니까?
모세 때문에만 하나님이 그렇게 애를 쓰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어땠습니까?
지금 예배하는 온고을 교회 성도님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예배의 자리에 나오
도록 하시기까지 하나님은 이렇게 노심초사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은 것 거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 쉽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믿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구
원이 얼마나 귀합니까? 우리가 믿게 된 믿음, 우리가 얻은 구원, 그것을 위해서 예수
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자, 이제 순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우리가 순종의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조치해 주십니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어떻게 해 주시는지, 순종하는 모세에게 어떤 것을 해 주시는지 봅시다.
Ⅰ. 하나님의 지팡이를 쥐어 주심 (당근)
하나님은 말씀에 순종하는 길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귀한 선물을 하나씩 주십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성경책이라는 귀한 선물을 주십니다. 성경책을 통해
서 하나님은 은혜도 주시고,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시고, 하나님의 백성
들에게 권능을 주십니다.
모세에게는 구체적으로 어떤 선물을 주시는지 봅시다.
먼저 하나님은 모세에게 ‘하나님의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는 어떤 지팡입니까? 모세가 양을 치던 때 쓰던 지팡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하나님의 지팡이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순종의 길로 들어서면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섭리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로 뱀이 되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모세의 양
치는 지팡이는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로써
앞으로 엄청난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지팡이로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열 번의 기적을 베풀게 하십니
다. 어디 이뿐입니까? 이 지팡이로 홍해 바다가 갈라지게 하시고, 바위를 쳤을 때, 물이 나게 하시
고, 이 지팡이로 적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모세와 똑같은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의 삶이 절망에서 희망으로, 고통에서 기쁨으로, 죄악에서 생명으
로 변화가 됩니다.
- 내 아들 내 장자로 삼으심
(22~23)『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보내 주어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보내주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쥐면, 우리가 순종의 길로 나서면, 내 아들 내 장자가 되어 하나
님을 섬기게 됩니다. 그러나 순종의 기회, 구원의 기회를 놓치면, 우리는 네 아들 네 장자 의 신세
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 아들 내 장자 로 인정을 받느냐, 아니면 네 아들 네 장자 가 되어 죽게 되느
냐는 순종이냐 불순종이냐의 차이에서 시작합니다.
- 사람을 붙여 주심
또 우리가 순종의 길로 들어서면 하나님은 필요한 사람을 붙여주십니다.
(27절)『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
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이미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에게 형 아론을 대변인으로 붙이시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약속을 하나님은 틀림없이 지키십니다. 아론은 모세에게 친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친형인
아론으로 하여금 모세를 어떻게 모시도록 합니까?
(16절)『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
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동생 모세를 형님 아론에게 하나님 같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었다고 손 위 사람들에게 군림하게 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필요하시면 그렇게 하십니다.
순종의 길, 믿음 길, 구원의 길에 들어서기만 하면,
우리에게 이렇게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지팡이’가 쥐어집니다.
Ⅱ. 순종의 자세를 확실하게 하심 (채찍)
순종의 길로 들어섬에 따라 이렇게 어마어마한 축복만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당연히 의
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면 어찌 된다는 것도 본
문에서는 보여 줍니다.
(24~26절)『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 이로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
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이 문구는 성경의 대표적인 난해 구절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구가 왜 이곳에 있는가를 묵상할 때, 순종의 길에서 만나는 책임과 의무로 보
고자 합니다.
사실 모세가 하나님께 순종의 길로 나설 때,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가족 간의 문제입니
다.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섰다면, 이제 가족들의 태도가 그에 맞
게 변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 까지 살아왔던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미션을 수행할 수 없습
니다.
오늘날 대표적으로 목회자의 가정을 실례로 들 수 있습니다.
특히 저와 같이 다 늦은 나이에 목회의 길로 들어선 경우 더욱 그 문제는 심각합니다.
나이 50이 되도록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목회의 길을 나섰습니다. 그러면 아내
와 아이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동안 지내왔던 부부관계의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아내도 자녀들도 따
라서 변해야 합니다. 오늘날 이 문제는 목회자들이 겪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꼽힙니다. 가족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목회를 포기하는 사례도 있습니다.
남편이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는 데, 아내가 뒤따라 주지 못하면 주저 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했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입니다.
특히 모세는 이방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이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모세의 가정은 완전히 보
링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에 버금가는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모세의 이 고통을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세는 이방여인을 만나 아들 둘을 낳았는데, 하나님과의 할례 언약을 지키지 못한 아들이 있었
습니다.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앞장 섰는데, 그 아들 중에 할례를 받지 않은 아들이 있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함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 본문의 의도입니다.
이방 여인, 믿음이 없는 여인, 십보라가 결국은 손수 아들의 포피를 벗겨서 남편의 발 앞에 놓으
며 고백합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 이로다
이 말은 이 당시의 신앙 고백 주문입니다. 이방 여인의 입에서 이 고백이 나온 것은 대단한 사건
입니다. 아내 십보라가 비로소 하나님의 지팡이를 쥔 모세의 사모가 된 것입니다.
이 문제 해결이 되지 않으면 어찌 됩니까?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6)
이 말씀은 비단 위대한 지도자, 또는 목회자의 가정에만 해당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안 믿는 집에서 믿는 자가 나오면 이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됩니다.
이 문제 때문에 도중에 좌절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국에서는 제사 문제
때문에 갈등이 불거집니다. 제사 상에 절을 하냐, 마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런 문제들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기도로 해결해야 합니다.
예배로 해결해야 합니다.
모세는 비로소 하나님의 지팡이를 쥐고 자기 동족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권능을 자기 민족의 장로들 앞에서 행했습니다.
그래서 백성이 믿었습니다.
(29~31절) 합독 후, 이들이 믿은 이유는 “말씀과 기적(30절)”때문. 머리 숙여 경배
··· 모세가 아닌 하나님께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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