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동료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차렸다. 대한문 앞에서 1년 7개월여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이들이 희생자들과 남은 해고자들의 아픔을 함께해왔다. 그중의 한 사람, 조금 특별한 방법으로 해고자들의 상처를 보듬은 이가 있다.
와락 거리 치유단 활동가 김미성 씨. 그는 2009년, 쌍용차 대량 해고와 공권력에 의한 폭력 사태를 언론으로 접한 후부터 지금까지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왔다.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에 대해 좀처럼 반응할 수 없게 된 그들에게 김미성 씨가 한 일은 “그건 괜찮지 않은 것”이라고 끊임없이 말하는 것, 그리고 지금 그들 자신의 상처와 감정을 외면하지 않도록 만드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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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락 거리 치유단 활동가 김미성 씨. 그는 우리 자신의 상처를 살펴야만 건강한 연대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
가장 먼저 마음에 들어온 것은 해고자의 아내와 아이들 ‘와락’으로 달려갔다, 나 자신이 그들이었으므로
“처음 쌍용차 사건을 접했을 때, 나는 사실 해고자들 당사자보다 그 가족에게 가장 먼저 마음이 갔어요. 나 역시 오랫동안 가장의 실직과 해고로 인해 죽을 만큼 힘들었어요. 그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의 입장이 가장 먼저 걱정됐고, 그래서 정혜신 박사님이 해고자들과 그 가족의 심리 치유를 위해 평택에 만든 상담센터 ‘와락’으로 달려갔어요.”
김미성 씨는 “나 자신도 해고자, 실직자의 아내로 사는 것이 일상이었다”고 말했다. 결혼생활 17년 동안 남편이 직장을 옮기기를 20여 회. 당장 무엇을 도모하기도, 미래를 꿈꾸는 것도 어려운 시간, 죽음을 간절히 바라던 때도 있었다.
그는 쌍용차 사건을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야 원래 힘든 사람이었지만,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던 이들이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얼마나 힘들까.’ 그 심정을 헤아리다보니 아픔은 훨씬 생생하게 다가왔다. 안타까운 죽음도 남의 일이 아니었다.
두 딸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그는 해고자들의 가족, ‘엄마와 아이들’을 떠올리며, ‘와락’으로 달려갔다. 대한문 앞 분향소가 차려졌을 때도 함께 자리를 지켰다. 그는 “2009년에 더 많은 시민들이 연대했다면 그렇게 노동자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곳에 갈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와락 거리 치유단 활동가 제안을 받다 “내가 어떻게?”라는 질문, 그리고 “뭔가 할 수 있겠지”라는 믿음
김미성 씨가 대한문 앞에 오게 된 것은 연대 외에도 또 다른 역할이 있었다. 와락 치유단 활동가로, 현장 당사자들과 상담 전문가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종의 코디네이터였다. 평택의 와락센터가 안정되고, 혜택을 더 많이 나눠야겠다는 정서가 생기면서 ‘거리 치유단’이 제안됐고, 정혜신 박사는 김미성 씨에게도 그 역할을 제안했다.
“정혜신 박사님이 저를 보고 적임자라고 말했어요. 그분은 내가 사람들을 만나는 방식이 바로 ‘치유’라면서, 자기를 믿고 해달라고 했죠. 솔직히 처음에는 ‘이 사람이 나에게 왜 이러지? 나에게서 무엇을 보고 이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치유와 상담에 대해 공부한 적은 없지만 정혜신 박사에 대한 신뢰는 깊었다. ‘뭐가 있으니 나에게 맡겼겠지. 한번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거리로 나섰다. 김미성 씨가 해야 하는 일은 해고자들을 만나 상담에 대해 마음을 열게 하는 일이었는데, 쉽지만은 않았다. 한국 사회 정서상 상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이고, 해고자들도 상담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그냥 사람들 곁에 있는 것과 어떤 역할을 가지고 만나는 것은 달랐어요. 거리낌 없이 잘 지내던 이들도 저에게 거리감과 부담감을 느끼더라고요. 마치 숙제 안 한 학생이 선생님을 대하는 느낌? 그 과정에서 상처도 받았죠.”
마음과 마음이 만난다는 것,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용기를 갖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막상 시도했는데도 성과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김미성 씨는 처음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던 마음과는 달리 점점 자신감을 얻었다.
정혜신 박사가 운영하는 서울시 힐링 프로젝트 ‘누구에게나 엄마가 필요하다’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치유활동가로서 줄 수 있는 것이 더 많다는 것도 알게 됐다. 더불어 해고자들도 시간이 지나며 조금씩 두려움을 극복하면서, “그래, 한번 해볼게. 네가 우리에게 나쁜 것을 권하지는 않겠지”라며 마음을 열었다.
와락 거리 치유단은 올해 3월에 발족했지만 상담은 5~6월경에야 시작됐다. 그리고 그해 여름은 참으로 뜨거웠다. 김미성 씨와 해고자들은 “최소한 한번은 상담을 받고 그 다음을 선택하자”고 약속했다. 상담이 진행됐고, 경험해본 이들은 편견을 깼다. 전부는 아니지만 지금은 10여 명 정도가 정기적으로 꾸준히 상담을 받으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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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차 해고자들은 이제 그의 가족이요, 동료이며, 멘토이기도 하다. 11월 16일, 대한문 분향소에서 마지막 위령제를 드리던 날, 그는 앞으로도 이들과 함께 대한문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정현진 기자 |
쌍용차 해고자들이 마음 편히 갖는 것만으로도 족해 “외면하는 감정, 원래의 속마음을 건너뛰지 말아야 해요”
김미성 씨는 치유 활동을 하면서, 오히려 스스로 더 많은 것을 얻게 됐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자신을 믿게 됐다는 것,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혜신 박사가 자신에게서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알았다.
“정혜신 박사님이 나에게서 본 것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만나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그것은 원래 있었던 것, 잘 다듬어진 것이라기보다 생존본능이었어요. 힘들게 살지 않았다면, 이런 태도가 생기지 않았을 것 같아요. 죽고 싶은데, 그래도 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러다보니 나의 느낌, 내 생각에 충실해야만 살아갈 수 있었어요. 그렇게 해야만 했죠. 막연히 그런 태도가 편하고 좋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활동을 통해서 더 좋게 평가받고, 옳게 쓰일 수 있는 길을 찾았어요.”
‘성과’라는 말로 마음을 살피는 일의 결과를 묻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변했느냐고. 김미성 씨는 “다만 그들이 마음을 편하게 먹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상담자도 피상담자도 많은 변화를 미리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기에 상담 받는 이들에게도 “너무 큰 기대는 말라”고 당부한다. 다만 상담을 받으면서 마음이 바뀌면, 행동과 관계가 바뀔 수 있고, 그 모든 것이 연결되면 생각지도 못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격려한다.
“저 자신이 그런 경험을 했으니까요. 우리 집은 여전히 어렵고 가족 간에 갈등을 겪어요. 예를 들면, 아이는 학원을 한 곳 더 가고 싶어 하는데, 저는 하나 이상 못 보내는 형편이에요. 그런데도 요구를 해오면 짜증부터 나죠. 서로 상처를 주고받아요. 아이들과 소통이 잘되는 편인데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요즘은 소통하는 방식이 달라졌어요. 짜증을 내기 이전의 마음을 찾고 그 감정으로 소통을 하려고 해요. 서로 울면서 대화할 때도 있지만, 훨씬 편안하고 상황에 대처하는 서로의 역할을 자연스레 찾기도 해요.”
김미성 씨는 원래의 감정을 외면하고 건너뛰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짜증이 난다고 표현하는 그 이전의 감정, 이유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가 아이들에게 짜증을 냈던 것은, 미안하고 속상하기 때문이고, 더 들어가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 마음을 건너뛰는 것이죠.”
김미성 씨는 화, 짜증, 분노 이전의 속마음을 찾고 다가가면 긴장관계가 아닌 협조관계가 된다면서, “그 순간은 관계에 있어 엄청난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아니요, 그건 괜찮은 것이 아니에요” 내가 겪는 폭력을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 폭력은 재생산된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가장 많이 건너뛰는 감정은 ‘고통’이에요. 고통에 대한 익숙함 때문이죠. 그래서 웬만한 일에 대해서는 ‘괜찮다’고 말해버려요. ‘추워도 괜찮다. 경찰이 시비를 걸어도 괜찮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노출된 후라서, 괜찮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건 정상이 아니죠. 저는 일부러 ‘괜찮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해요.”
위로와 격려의 “괜찮다”와 외면을 위한 “괜찮다”는 너무도 다르다. 고통을 피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 심정을 헤아리면서도 김미성 씨가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가 당한 폭력에 익숙해지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가하는 폭력도 괜찮아지기 때문이고, 폭력이 재생산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쌍용차, 밀양, 강정마을 등 곳곳에서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이들에 대해서도 당부의 말을 남겼다. “남의 고통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은 내 고통이 있고, 공감하기 때문”이라면서 “그 마음은 너무 소중하지만, 그 마음이 진짜 도움이 될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건강하게 연대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 고통을 전가하거나 더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김미성 씨는 현장에서 연대하고 있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치유 프로그램도 제안했다고 말했다. 서로 도움이 되려면 각자가 내적 힘을 키워야 하고, 그러려면 자신의 상처를 함께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에 공감하고 투사하는 것을 넘어, 그 자리를 통해 함께 상처를 성찰해야 한다는 당부로 이해했다. 김미성 씨 역시 끊임없이 전문가들을 찾고 피드백을 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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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자는 아니지만, 기도는 해요”라던 김미성 씨는, 대한문 미사가 봉헌되는 사이, 살며시 사람들 사이에 앉아 함께 기도했다. ⓒ정현진 기자 |
치유란, 나 자신과 끊임없이 만나는 과정 치유단 활동은 나와 타인을 위한 최상의 일
“나 자신, 타인과의 수많은 대면을 통해 내 삶을 건강하게 만들 수 있어요. 그것이 치유죠. 나 역시도 그런 과정에 있고, 더 섬세하게, 더 많이 대면할수록 내 발목을 잡고 있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져요. 내가 내 삶을 결정할 자유를 찾는 것이죠.”
김미성 씨는 “치유란 내가 나 자신과 만나는 것이다. 내가 왜 상처받았는지, 상처받는 현실에 영향을 주는 내 행동이 무엇인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그 원인과 대면하는 것이고, 그것을 없애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미성 씨는 “이 일을 시작한 것은 내 성장을 위한 욕심 때문이었지만, 내 성장이 더 넓은 연대를 위한 기반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나와 타인의 성장을 함께 도모할 수 있다는 면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최상의 일”이라고 했다.
김미성 씨는 이제 쌍용차 상담이 안정되면서 울산 현대자동차, 밀양, 강정마을, 용산 유가족 등 다른 현장도 프로그램을 들고 방문한다. 인터뷰를 위해 연락이 된 날도, 밀양에 내려가던 중이었다. 지난 16일, 쌍용차 분향소가 평택 공장 앞으로 옮겨가던 날, 대한문에서 만난 김미성 씨는 앞으로도 계속 대한문 앞을 지킬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누군가는 싸움을 위해, 연대를 위해 그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