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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이 성지 - 최초의 한국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첫 사목지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632-2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
은이 성지의 의의
은이(隱里)는 ‘숨겨진 동네’, 또는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이다. 이는 그대로 박해 시대 숨어살던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룩된 교우촌의 이름이 되었다.
은이 마을은 한국교회 최초의 한국인 사제였던 성 김대건 신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간직한 곳이다. 은이 마을의 지척(咫尺)에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이 있다. 이로 인해 은이 공소에 사목활동을 하러 온 선교사 모방 신부를 만나 세례를 받았고, 이후 한국교회 최초로 성소를 받아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이 되어 마카오로 파견이 된 곳이 바로 은이 성지이다.
1845년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했을 때 페레올주교는 첫 사목 활동 지역으로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용인, 이천, 안성 지역 등지를 지정해 주었다. 이로 인해 김대건 신부는 경기 남부지방의 은석골, 텃골, 사리티, 검은정이, 먹방이(묵리), 한덕골, 미리내, 한터, 삼막골, 고초골, 용바위, 모래실, 단내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성사를 베풀고 사목 활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이며 한국인 사제가 최초로 미사를 집전하고 사목한 한국교회 최초의 본당이 되기도 한다.
은이 공소와 관련된 또 한 명의 성인은 앞에서 이야기 했던 파리외방선교회 모방 신부이다. 그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로 조선교구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조선 입국을 목전에 두고 몽골지역에서 병사하자 그 뒤를 이어 일시적으로 조선 교구를 맡게 되었다.
당시 몽골에서 브뤼기에르 주교로부터 이미 모든 사목 권한을 위임받은 모방 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가 준비했던 길을 따라 조선 입국을 서둘러 국경에서 조선 교우들을 만나고 1836년 초 마침내 조선 땅을 밟음으로써 최초로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가 되었다. 부활절을 서울 북촌에서 지낸 모방 신부는 본격적인 사목 활동에 나서 주로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의 교우촌을 방문하고 2백여 명에게 세례성사를 주었다. 이때 그의 사목 활동 중심지가 바로 은이 공소였다. 모방 신부는 1837년에 이르러서 샤스탕 신부를 맞아들여 함께 사목 활동을 함으로써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 주교가 그해 말 입국할 때 이미 조선교구의 교세가 두 배 이상으로 성장하는 등 큰 성과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모방 신부는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앵베르 주교, 샤스탕 신부와 함께 그해 9월 홍주(洪州) 근처에서 스스로 잡힌 몸이 됨(自獻致命, 自首殉敎)으로써 결국 9월 21일 새남터에서 순교의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은이 마을은 한이형(韓履亨, 1799~1846, 라우렌시오) 성인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대들보에 매달아 심한 매질과 다리를 묶고 두 발 사이에 깨진 사기그릇의 작은 조각들을 끼우고 다리에 굵은 밧줄을 감고는 앞뒤로 번갈아 가며 잡아당겨 톱질을 하여 살을 으스러뜨렸다.
이 참혹한 형벌을 참을성 있게 견디어 내자 포졸들은 감화를 받아 다른 신자들에게 “당신들도 정말 천주교인이 되려거든 한이형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런 고문을 치른 후에 한 라우렌시오는 포졸들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9월 20일에 48세의 나이로 교수형을 선고 받아 순교하였다.
은이 공소는 김대건 신부의 입국 후 첫 미사를 드린 장소이기도 하지만 김대건 신부가 죽기 전 마지막 미사를 드린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 신부가 6개월간의 사목 활동을 하던 중 고(高) 페레올 주교로부터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다. 그것은 중국에 체류하고 있는 매스트르 신부 등 서양 선교사들과 최양업 토마스 부제의 입국로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김대건 신부는 또다시 어머니와 이별을 하게 되는데, 이 이별이 어머니와의 마지막 이별이 되었다. 1846년 4월 13일 김대건 신부는 은이 공소에서 교우들과 마지막 미사를 봉헌한 후 조선 교회의 숙원 사업인 성직자 영입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띠고 길을 떠나게 된다. 은이를 떠나기 전에 김대건 신부는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험난한 때에 우리는 천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어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증거할 용맹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구합시다. 지금 우리의 주위에는 검은 마귀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일의 삶을 모르는 위급한 처지에 처해 있는 우리들입니다. 내 마음과 몸을 온전히 천주님의 안배하심에 맡기고 주 성모님께 기구하기를 잊지 맙시다.
다행히 우리가 살아 있게 된다면 또 다시 반가이 만날 날이 있을 것이오. 그렇지 못하면 천국에서 즐거운 재회(再會)를 합시다. 끝으로 내 홀로 남으신 불쌍한 어머님을 여러 교우 분들이 잘 돌보아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김대건 신부는 이 말씀을 은이 공소와 용인 지방 교우들에게 유언(遺言)으로 남기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교우들은 떠나는 신부님의 모습을 은이 성지에서 1Km 정도 떨어진 ‘중담’ 모퉁이까지 나와 눈물로 전송했다.
혹독한 박해가 끝난 개항 이후의 은이 공소 신자는 1899-1900년 200여명이던 것이 1909-1910년에는 325명으로 늘어났다. 1920년대 경제적 기반이 약하고 이주민이 많은 산골 교우촌인데도 양지면은 남곡리의 은이 공소와 배미실(현 양지성당 마을) 공소를 중심으로 3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신앙공동체를 유지하면서 본당 유치에도 적극적이었다.
1927년 남곡리에서 사목하던 박동헌 마르코 신부는 은이 지역에 신축 공소 부지로 매입한 800평의 토지가 있었으나, 산골보다는 교통이 편리한 벌터 지역에 건물을 지었다. 박동헌 신부는 은이 공소의 강당 건물을 헐어 벌터에 16간 목조건물을 지어, 배미실 공소와 은이 공소를 남곡리 공소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다. 이후 1928년 5월 경 남곡리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오늘날에는 양지 본당으로 개칭되었다.
성지조성 과정
은이 공소터는 한국 교회사 안에서 솔뫼나 미리내 이상의 귀중한 순교사적지이다. 하지만 이처럼 중요한 은이 공소터가 교회의 무관심 속에 이쑤시개 공장과 잡초만이 무성한 버려진 땅으로 변했다.
그동안 교회 내에서 잊혀져 왔던 은이 성지의 개발은 1992년 6월부터 시작된 서울대교구 주평국 신부의 ‘도보성지 순례’를 계기로 알려지고, 1996년 5월 양지 성당이 은이 공소터 530여 평을 매입하면서 시작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도 시작되고, 2002년에는 은이 성지 주변 5,200여 평 매입과 추가로 이어 2003년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을 지을 땅 1,200여 평을 추가 매입하고 그해 9월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10여 년 이상 성지 개발을 위한 부지 매입에 난항을 겪다가 2013년 비로소 성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은 장소로 추정되는 은이 공소터의 공장부지 약 6,000㎡를 매입하여 철거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은이 성지는 2015년 8월 22일 김대건 신부 사제 수품 170주년을 맞아 김가항(金家港, 진자항) 성당 복원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11시 40분 경 도착. 주일미사로 인해 상, 하 주차장에 차가 꽉 찼다. 아랫 주차장 입구에 간신히 주차를 하고 보니 11시 미사가 끝난 신자들의 차량이 빠져나가는데 지장을 주게 되어 사무장의 안내로 차가 다 빠져나가기를 기다린 끝에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성지에 들어섰다.
성지 안내도를 보면 건물이 거의 한 곳에 모여 있다. 중심에 김대건 기념관과 사무실을 겸하는 건물이 ㄷ자로 있고, 그 왼편에 성지 성전인 김가항 성당이 있다. 김대건 기념관 오른편 앞쪽에 김대건 상과 김대건 기념각이 자리하고 있고 맨 아래에 사제관 건물이 있다. 성지 건물들 건너편 숲속에 십자가의 길이 야외제대를 감싸고 있다.
김가항 성당
중국 상해의 김가항(진자항) 성당의 김가항(金家巷)이란 이름 그대로 김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골목이라는 뜻이다. 상해 황포강 건너 있는 김가항 성당은 명말(明末) 숭정년간(崇禎年間, 1628~1644) 이 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성당이다.
특히 이 성당이 우리에게 의미가 깊은 것은 1845년 8월 17일 김대건 부제가 페레올 고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2001년 3월 30일 상해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철거되었는데 철거 직전 은이 성지는 추후 성당 복원을 위한 정밀 실측조사를 완료하고 철거된 성당 기둥과 보, 이음새, 벽돌, 기와 등의 부재 일부를 들여와 보관해왔다.
2016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70주년을 맞아 은이 성지는 김가항 성당의 복원을 마치고 5월 15일 새 성당 입당 미사에 이어 9월 24일 봉헌식을 거행했다. 새 성당은 건축면적 540㎡, 지상 1층 규모로 220여 명이 함께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규모로, 복원의 의미를 담아 기둥 4개와 대들보 2개, 동자주(童子柱) 1개는 진자항 성당 철거 당시 수습해 보관해 오던 부재(部材)를 재활용했다.
성당 내부는 옛날 중국식 성당임에도 내부는 우리의 건축물과 다름이 없다. 서까래가 드러난 목조 천정에 벽은 시멘트이다. 전면 고상 좌우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성심상이 배치되어 있고, 제단 좌우에는 루르드의 성모상과 ‘교우들 보아라‘라는 구절과 십자가를 양손에 든 김대건 신부상이 있다. 그 오른쪽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봉안되어 있다. 벽면에 전통 창문과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다.
성당 바로 오른쪽엔 김대건 기념관이 있다.
김대건 신부 기념관
성전 옆에 전통 한옥 형태로 건립한 기념관에는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와 은이 공소 신앙 선조들이 사용했던 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다. 곧 김대건 신부의 탄생과 성장, 세례성사와 신학생 선발, 사제 수품, 사목 활동, 순교에 이르는 생애 전반을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는 전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성 김대건 신부상 - 가톨릭의과대에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토대로 복원한 상임
▲김대건 신부 초상화들- 오른쪽 맨 밑의 초상화가 공인 표준 1호 영정임
▲김대건 신부 가계도
▲ 성 모방 신부 및 페레올 주교상(조선교구 3대 교구장)
▲소년 김대건의 세례 및 신학생 선발 - 은이공소를 방문한 모방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마카오 파리외방선교회 극동 대표부에 유학하였다.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 - 박해와 밀고의 눈을 피하여 밤에 험한 산길을 걸어 성사를 베풀고 사목활동을 전개, 선교사의 입국 루트를 개척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했다.
▲다양한 김가항 성당에서 가져온 목재
■다양한 성구들
▲서울 주교에게 제의(祭衣)를 청하는 교우들의 서한
▲당시의 제의들
▲사제의 각모(각모) - 신부, 주교, 추기경등 신분에 따라 색깔이 달랐음
▲강도영(미리내 성당 초대주임) 신부의 장례식 (1929)
▲각종 도서
김대건 기념각
김대건 기념각은 원래 1947년 남곡리 성당의 2대 주임 에밀리오 포(包)신부가 교우들의 뜻에 따라 지은 김대건 신부의 경당이다. 포 신부는 처음 김 신부의 고향마을인 골배마실 유적지에 짓기로 했으나 신자들의 요청으로 벌터 본당(남곡리 성당) 옆 공터에 지었다. 이후 6 25와 양지 본당으로 옮기는 과정 중 허물어 없어지고 사진만 남아 있었다. 김대건 신부 기념각은 2023년 6월 이를 복원한 것이다. 기념각 앞에는 김대건 신부상도 세웠다.
바로 옆에 부근에 김대건 신부가 세례를 받은 은이 공소터 조형물이 서 있다. 성지 개발 전은 작은 공장이 있었던 곳이다.
기념각 부근에 사제관 겸 순례자의 집이 있다.
건물지 성지를 다 돌아 나가면 도보길 순례인 청년 김대건 길의 홍보판이 있고 바로 건너편 숲으로 가면 십자가의 길을 통해 야외 제대로 갈 수 있다.
십자가의 길와 야외 무대
들머리에는 기도의 숲이라는 표지판이 있고 숲길로 이어진다. 언덕배기에 예수성심상이 환영해 주신다. 이어서 십자가의 길이다. 중간에 성모상도 있으며 마지막에는 야외제대에 이른다.
십자가의 길
주 예수님 저희를 위하여 온갖 수난을 겪으신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성모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고자 하나이다. 저희에게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 수난을 함께 나눌 마음을 주시어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며 성직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모든 죄인이 회개하도록 은혜를 내려주소서. (비치된 기도문)
사랑하올 예수님!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으로 당시의 진리를 가르쳐 주신 나의 예수님 십자가의 삶을 깊이 사셨던 성모님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보시어 악을 멀리할 수 있는 힘과 당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저희에게 주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십자가를 피로써 증거 한 순교자들의 후예답게 온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나이다. (비치된 기도문)
이제 김대건 신부가 유년기를 보낸 골배마실 터로 가야한다. 그런데 이곳은 민간 리조트 사유지 경내에 있어 사유지라 자유롭게 드나들 수가 없다. 그래서 순례를 할려면 은이 공소 사무실에 시간과 인원을 기재하여 신청을 하면 사무실에서는 자물쇠 비밀 번호 숫자를 가르쳐 준다. 12시 반이 다 되어가는 시간 출발을 했다.
골배마실 성지 - 김대건 안드레아가 여기서 사제의 꿈을 키우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810(양지파인리조트 내)
골배마실의 성지적 의의
골매마실은 김대건 신부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이다. 이 마을에 살면서 소년 김대건의 신앙은 영글어 갔고, 나아가 사제의 꿈을 키웠다.
김대건 신부의 집안에 천주교 신앙이 스며든 것은 그의 증조부 김진후(비오)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에 전념한다. 하지만 1791년 진산 사건으로 그는 옥에 갇히고 1801년 신유박해 때는 유배를 가기도 한다. 1805년 다시 붙잡힌 그는 결국 10년의 옥고 끝에 순교한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것은 1821년 8월 21일, 증조부가 순교한지 7년이 지난 때였다. 그는 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곧 솔뫼 마을에서 부친 김제준 이내시오와 모친 고(高) 우르술라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김제준은 조부 김택현의 4형제 중 둘째였다.
하지만 가세가 기울어 더 이상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워지자 조부인 김택현은 가족들을 이끌고 솔뫼를 떠나 서울 청파동을 거쳐 용인 땅에 정착하였다. 이때는 대략 1827년경, 김대건 신부가 7살 무렵이었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집과 땅을 떠나야 했던 이들의 유랑길에는 설움과 눈물로 가득 찼지만 이는 신앙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바로 골배마실에 온 것이 아니라 골배마실 남쪽 산너머에 있는 한덕골 교우촌(寒德洞,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묵4리)이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최경환의 형 최영겸도 1832년 무렵에 이곳 한덕골로 이주해 왔으며, 1839년 이후에는 최양업 신부의 넷째 아우인 최신정(델레신포로)이 마을에서 성장하였다.
가족들을 이끌고 한덕골에서 이곳 골배마실로 이주한 것은 그의 아버지 김재준 이냐시오였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배마실이라는 동네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즉 배마실(현 양지성당 소재지)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실, 곧 ‘배마실’이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김대건의 가족이 거주하던 동네가 배마실까지 이어지는 골짜기 안에 있어 ‘골배마실’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골배마실 서쪽 가까운 곳에 조금 큰 교우촌인 은이 마을이 있었다. 소년 김대건이 15살 되던 1836년 프랑스 선교사로서 처음 입국한 모방 신부가 이 마을을 방문했다. 모방 신부와의 이 만남이 김대건 신부의 운명의 방향을 결정되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당시는 한국교회에 성직자 영입 운동이 무르익어 결실을 앞두고 있던 때였기에 소년 김대건은 자연스럽게 교회에 입문하고 성직자가 되려는 꿈을 갖게 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골배마실 성지는 김대건의 소년 시절의 향취가 남아 있는 곳이요,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여기서 그는 신부님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교리를 익히고, 조선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한 몸을 바치고자 하는 포부를 가슴에 담고 살았으며, 세례성사와 첫 영성체를 준비하면서 설레는 마음을 남몰래 간직했으리라.
김대건 신부가 유학을 떠난 사이 1839년 기해박해 때 이 마을에서 아버지 김재준 이냐시오가 체포되어 순교했다. 따라서 골배마실은 김제준 이냐시오가 묻힌 곳이요(묘는 미상), 사제가 되어 와서 어머니 우르술라와 첫 상봉을 한 곳이요,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후 유해가 미리내로 가면서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린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동면의 한덕골, 내사면의 골배마실과 은이 공소는 김대건과 최양업 두 신부 집안과 관계가 깊은 곳이었다. 또 한덕골에는 김대건 신부의 조부인 김택현과 숙부인 김제철의 무덤과 최양업 신부의 중백부인 최영겸의 무덤이 있었고, 1839년에 체포되어 순교한 김제준 성인의 무덤도 골배마실 어딘가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의 무덤을 찾을 길은 없다.
앞으로의 과제 - 성지의 개발과 보존
그동안 골배마실은 옛날부터 양지 본당 교우들 사이에 김대건 신부의 가족들이 살던 집터가 있는 곳으로 구전되어 왔었다. 따라서 이곳을 발굴하게 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골배마실 성지는 1961년 양지 본당 5대 주임이었던 정원진 루카 신부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어 돌절구와 갖가지 생활 도구, 즉 맷돌, 우물터, 구들장 등을 발견하면서 성지 개발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리고 1997년에는 40년 가까이 옛 모습 그대로 있던 성지를 새롭게 단장하게 되었는데, 새로이 2미터나 되는 청동 김대건 상을 모셔 7월 5일 대축일을 맞아 축성하였고 처음 골배마실 성지에 모셔졌던 성 김대건 신부 성상은 양지 성당 정원에 모셔 지금에 이르고 있다.
물론 지금도 골배마실은 그 흔적이 없다. 다만 김 신부가 살던 생가 터만이 사유지인 골프장(양지파인리조트) 한 쪽에 보존돼 그의 동상과 야외제대 그리고 생가터 기념비만이 지키고 서 있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김대건이 어릴 적 손길이 닿았다는 늙은 고욤나무 한 그루가 다른 나무들 사이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앞으로 양지 본당 차원이 아니라 교구 차원에서 적극 개발하고 보존하여 순례자들의 신앙을 살찌우고 영성을 고양시킬 과제가 남아 있다.
찾기도 쉽지 않았다. 승용차로 네비게이션에 찍어 오는 도중 길을 잘못 들어 리조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묻기도 하는 등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지척 간임에도 12시 반에 은이 성지를 출발하여 거의 30분을 소요하여 성지 입구에 이르렀다. 마침 일군의 50-60대 여자들 6-7명이 이곳을 방문하려다가 문을 열지 못하여 되돌아가려는 것을 함께 가기로 했다. 이중 양지 본당 교우가 있어 친구끼리 유년 시절의 추억을 찾아 온 것 같다. 우리를 만나지 못했으면 돌아갈 뻔했는데 다행이다.
성지래야 넓은 잔디밭에 성지 표지석과 생가터 비, 그리고 제대와 김대건 신부 청동상뿐이다.
비로소 하늘에서는 (골배마실에서)
한 처음에 말씀 있어
그 사랑을 달리던 소년 하나
목말라 가슴 뛰는 노래로
지금도 이곳 골짜기 밝힙니다.
멀리로 떠나는 날개 큰 새들은
흰 구름 끌며 지평선을 날고
소년은 달리고 달려
마침내 새남터의 부활에 닿습니다.
세상에는 나 때문에 서러워진 이웃 있어
아픈 추억으로 소년 따라 달릴 때
비로소 하늘에서는
나를 용서하는 폭설 내리는 것입니까?
나는 언제 허둥대지 않고
고요한 눈빛으로 소년에 닿을까요.
뜨거운 기도로 청년에 닿을까요.
그리고
영원한 숨결로 하늘에 닿을까요 (김영수)
이제 오후 1시 반이 돼가는 시간, 점심 시간도 이미 지났지만 일단 다음 행선지인 남양 성모성지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