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07. 대동 운강석굴 ①
푸른 구름 피는 곳에 조성된 ‘환상적 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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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강석불 대불> |
사진설명: 북위 문성제 화평 원년(460)부터 본격적으로 개착된 운강석굴엔 5만1000여 위나 되는 불.보살님이 봉안돼 있다. 사진은 제20굴 대불. |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불교석굴이 조영됐다. 무수한 석굴 가운데 대동의 운강석굴, 낙양의 용문석굴, 돈황의 막고굴을 흔히 중국 3대 석굴로 꼽는다. 세 석굴 모두 ‘위진남북조시대(220~589)’부터 개착되기 시작했다. 위진남북조시대 크게 일어난 석굴 개착의 역사는 당나라 중기에 일어난 ‘안사의 난(755~763)’ 이후 쇠퇴한다.
“불상 조성은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386~534) 말에서 시작돼 당 중엽에 끝났다”고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같은 중국이지만 석굴 조영은 양자강 이남보다 이북이 성했다. 황하 유역에는 석굴이 많고, 양자강 근방에는 마애불이 많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한제교수에 의하면 “‘불상을 만드는 것은 곧 불도를 구하는 것’이라는 〈묘법연화경〉 구절을 근거로 북방인들이 현세의 이득과 사후의 안락을 구하기 위해 석굴을 조영했다면, 남방인들은 ‘청담풍조’ 등 현실을 초월하려는 경향이 강했기에 암반 표면에 부처님 새기는 데 만족했다”고 한다.
물론 석굴은 석질(石質)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바위가 너무 딱딱해도 안되고, 너무 연해도 곤란하다. 대개의 석굴은 대개 강 주변에 조성됐다. 석질이 연하고 조각하기 쉬운 사암으로 돼 있기 때문이다. 낙양의 용문석굴이 이수(伊水) 변에 만들어진 것도, 운강석굴이 무주천(武州川) 가에 조성된 것도 같은 이치다.
주지하다시피 운강석굴은 용문석굴과 함께 북위시대를 대표하는 석굴이다. 당시 사람들은 운강을 북석굴사, 용문을 남석굴사로 불렀다. 운강석굴은 현재 산서성 대동시 서쪽 16km 지점에 위치한 무주산(武州山) 남쪽 산기슭, 동서 약 1km거리에 걸쳐 조성돼 있다.
현존 주요 석굴은 53개(번호가 붙은 것은 43개), 총1100여 개의 작은 감실로 이뤄져 있다. 석굴 안엔 크고 작은 조상(彫像) 5만1000여 위(位)가 봉안돼 있으며, 석조(石彫) 면적만도 1800㎡나 된다. 운강석굴은 편의상 동구(東區. 1~4굴).중구(中區. 5~13굴).서구(西區. 14~53굴) 세 지역으로 나뉘는데, 개착 시기는 문성제 화평 초년(460)설이 유력하다.
북위 왕조가 평성(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494년 이전에 대부분의 석굴 조영이 이뤄졌다. 북위시대엔 이곳을 ‘무주산 석굴사’ 혹은 ‘영암 석굴사’로 불렀다. 그러던 이곳이 운강석굴로 명명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명나라 시기 북방 민족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장성을 쌓고 석굴이 있는 곳에 군보(軍堡)를 설치했다.
당시 병사들이 무주천 남안(南岸)의 산에서 멀리 북쪽을 바라보니, 무주산이 면면이 이어져있는 것이 마치 ‘파란 하늘에 뭉게뭉게 구름이 피어나는 듯한 모습’이었다. 자연스레, ‘구름이 피어나는 언덕’ 이란 뜻의 ‘운강(雲岡)’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지금의 무주천은 말라버렸고, 무주산은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으로 변했다. 게다가 대동은 메케한 석탄 가루가 사시사철 돌아다니는 공해도시. “푸른 구름이 피어 난다”는 ‘운강’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지경이다.
무주산 남쪽 기슭 위치…1km에 걸쳐 조성
오대산을 떠나 응현 목탑(불궁사 석가탑)을 보고 대동 경원영(京原迎)빈관 3003호에 도착한 것이 2002년 10월12일 오전 12시경. 점심을 먹고 곧바로 운강석굴로 달려갔다. 책과 사진에서만 보던 석굴. 용문석굴에 대한 ‘꿈같은 환상’을 가진 것처럼 운강석굴에 대해서도 환상을 갖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비로소 환상이 현실화된다 생각하니 가슴 속엔 만감(萬感)이 교차했다. 메케한 석탄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차창 밖으로 보니 거리를 다니는 모든 사람이 마스크 를 입에 대고 있다. 탄광에서 날아오는 석탄 가루를 막느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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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운강석굴의 이불병좌상. 다보여래와 석가여래가 함께 앉아 있는 이 모습은 운강석굴에 특히 많다. |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며 대동의 역사를 떠올렸다. 평성에서 대동으로 지명(地名)이 변한 시기는 요나라(916~1125).금나라(1115~1234) 때. 그전 북위가 화북지방의 패자로 군림할 땐 평성으로 불렸다. 398년부터 494년까지 약 100년간 북위의 수도로 화북지방 전체를 총괄한 도시였다.
북위가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도 평성은 옛 수도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던 평성이 요.금나라 때 서경대동부(西京大同府)가 됐는데, 오늘날 이름은 바로 이 ‘대동’에서 유래됐다. 생각하는 사이 차는 달렸고, 30분 만에 운강석굴에 도착했다. 심히 감격스러웠다.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는 순간에도 꿈인 것 같았다. 들어가자마자 나오는 첫 석굴(5굴)의 부처님께 크게 삼배 드렸다. 가슴 속엔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머나 먼 이국을 돌고 돌아 마침내 당신 앞에 섰다는 자부심과 설렘이 복합된 묘한 기분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석굴 안을 관찰했다. 높이 16m나 되는 금빛 찬란한 거구의 불상이 중앙 돌기둥(石柱) 남쪽에 조각된 채 우람하게 서 있다. 좌우에 2불2협시보살을 거느린 대군단의 주인이었다. 다보.석가불이 함께 조각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도 돌기둥 감실에 보였다.
시계방향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세 바퀴 돌았다. 지극한 존경의 뜻을 표현할 길 없어 ‘우요삼잡’을 했다. 결코 떠나고 쉽지 않은 발걸음을 옮겨 옆 굴로 갔다. “다른 굴도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안내인의 지적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 ‘짧은 만남, 긴 이별’을 아쉬워하며 간신히 옆 굴로 걸어갔다. 6굴에서도, 이어진 7.8.9.10굴에서도 5굴과 똑같은 감동과 전율을 느꼈다.
진한 감동을 가슴에 안은 채 ‘북위불교의 특징’을 되새겼다. “사문은 왕자에게 경례하지 않는다(沙門不敬王者)”는 것에서 보듯 위진남북조시대 ‘귀족연합제 국가’였던 남조에선 불교가 권력에 굴복하지 않았다. 반면 철저히 왕권 중심적이던 북조에선 불교가 권력으로부터 자유스럽지 못했다.
특히 북위왕조는 불교의 효용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북위시대 불교는 영과 욕을 함께 누렸다. ‘삼무일종 법란’의 -북위 무제(재위 423~451. 법란은 446~452), 북주 무제(재위 560~578. 법란은 574~579), 당의 무종(재위 841~846), 후주 세종(재위 954~958) 때 행해진 불교탄압 - 단초를 열었을 뿐 아니라, 중국의 정사 24사 가운데 유일하게 도교와 함께 불교에 대한 전란(專欄)인 〈석노지〉가 마련된 시기도 북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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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대동 서쪽 16㎞ 지점, 무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운강석굴의 여러 부처님들. |
불교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를 완벽하게 장악한 시기도 바로 북위 때였다. 남북조를 통틀어 불교는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있었다. 물론 성격은 달랐다. 남조불교가 귀족불교였다면, 북조불교는 국가불교였다. 오호십육국시대 여러 군주들 사이에선 학식이 깊거나 신이(神異)를 보이는 스님을 참모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후조의 석륵.석호왕과 불도징스님 등이 대표적인 예다.
선비족 탁발부가 세운 북위도 마찬가지로 불교를 중시했다. 북위가 중국 역사상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386년 탁발규가 대왕에 즉위하던 때부터다. 중원 진출을 분명히 한 그는 398년 후연의 수도 중산을 공략하고 황하 이북의 여러 지방을 지배했다.
같은 해 도읍을 평성(대동)으로 옮기고, 이듬해 황제에 오르니 그가 바로 북위 태조 도무제(재위 386~409)다. 도무제가 친히 정복한 지역은 불도징스님 이래 불교 교화의 중심지로, 도무제는 새로운 정복지에서 법과(法果)스님이라는 명승을 알게 됐다.
“당시 하북지방은 불교가 널리 보급됐고, 유력한 스님이 수십.수백의 문하를 거느린 데다 일부 호족은 일족을 이끌고 스님에게 귀의했기에, 불교도들의 향배가 그 지역 민심을 좌우하고 있었다(서울대 박한제 교수).”
북위 왕조는 이들을 하루 속히 왕조 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됐다. 불교에 대한 보호는 당연한 조치였다. 결국 북위 조정은 불교교단을 감독하는 1대 도인통(道人統)에 법과스님을 임명했다. 교단이 군주에 예속되는 형태가 된 것. 법과스님은 “천자는 당금의 여래”라며 군주에 예속되는 것이 정당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교단을 통제할 승관제(僧官制)와 관사제(官寺制)가 시행됐고, 지방 불교조직도 급속히 재편됐다. 중앙의 도인통 아래 사무관인 도유나(都維那), 지방 주군에 두어진 통(統)과 유나(維那)가 승관제 구성의 대강이었다. 사원은 중앙집권과 민심 안정 및 교화정책을 담당하는 곳이 됐으며, 지방 문화의 중심지로 변했다.
북위불교, 중국 사로잡았으나 국가불교로 예속
승관제와 관사제를 통해 북위조정은 교단을 통제하고자 했지만, 교단은 역으로 이를 통해 북위라는 나라를 정신적으로 지배했다. 다른 종교인들과 귀족의 반발이 자연스레 생겼다.
도교를 이용해 북위 왕조를 한인(漢人) 귀족이 영도하는 귀족제 국가로 변혁시키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최호(崔浩)였다. 명문 귀족이며 한인 최고의 관료였던 그는 도사 구겸지(寇謙之)와 결탁, 불교를 누르고 ‘도교적 풍모의 유교 체제’로 북위를 다스리고자 했다.
구겸지가 내세운 불교배척의 이론적 근거는 그가 확립한 “황제가 바로 태평진군”이라는 주장. 4세기경부터 유행한 일종의 메시아사상으로 진군(眞君)이 난세에 나타나 도사(道士)의 도움을 받아 태평세를 이룬다는 것이 주된 내용. 이로써 태무제는 구세주인 태평진군으로 절대적 권위를 부여받았고, 불교는 냉대 받기 시작했다.
450년 일어난 소위 ‘국사사건(國史事件)’으로 최호와 그 일당이 처형되고, 정평 원년(451) 태무제가 사망하고, 이듬해 문성제가 등극할 때까지, 불교탄압은 무자비하게 진행됐다. (다음 호에 계속)
중국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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