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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 미켈란젤로의 스승 이야기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1475~1564년)는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로도비코 부오나로티"와 어머니 "프란체스카 부오나로티"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병약해서 그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어렸을 때 시골에 있는 유모의 집에 맡겨졌는데, 유모의 남편은 세티냐노의 석수장이였다. 이 사실은, 그가 후에 조각가로서의 재능이 가장 두드러지게 되는 데에 분명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 본인도 후에 자신의 글에서 "어렸을 때부터 조각용 끌과 망치를 갖고 노는 게 가장 즐거웠다"고
불행히도 그의 소년 시절은 생각 외로 그렇게 순탄치 못했다. 피렌체에서 공부하던 때에는 마을 행정관인 아버지 로도비코 디 레오나르도 디 부오나로티 시모니는 미켈란젤로를 예술가로 키우는 걸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피렌체에는 상업이 매우 발달하고 있어서 상업거래에 따른 계약서의 공증업무가 많았는데, 미켈란젤로의 아버지는 바로 그 공증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의 젊은 시절에는 유럽의 예술가들도 취급이 딱히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몰락 귀족이라도 귀족이라는 자존심이 있던 아버지는 미켈란젤로가 공부로 할 수 있는 직업을 갖길 원했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에 굉장히 분노했다. 삼촌들 역시 그런 미켈란젤로를 못마땅하게 여겨 그런 거 하지 말라고 했었다.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두들겨 맞고 여러 차례 혼나고도,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예술혼이 불타오르는 걸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버지와 삼촌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후일 아버지에게 쓴 편지들을 보면 ‘아버지는 제가 번 돈으로 군주와 같은 생활을 하실 수 있다’ 라고 쓸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공한다. 아버지 뿐 아니라 그의 형제들 또한 미켈란젤로의 덕을 톡톡히 본다. 그의 형제에게 쓴 편지에서도 본인이 가게를 차려 줄 테니 다른 짓하지 말라고 쓴 내용도 있다.
결국 그는 아버지의 허락으로 13세에 당시에는 굉장히 유명했던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제자로 들어가지만, 1년 만에 나오게 된다. 이유는 스승의 능력이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기를란다요의 능력이 떨어졌다기보다 미켈란젤로가 너무 뛰어났던 거다. 또 알다시피 미켈란젤로 본인이 회화보다 조각에 더 흥미를 가졌던 것도 있다.
기를란다요는 예술 역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를 잠깐이나마 제자로 둔 덕분에 자신의 작품이 미켈란젤로와 철저히 비교당하는 굴욕을 두고있다. 그래도 1년이나마 스승이었기 때문에 미켈란젤로의 회화가 기를란다요에게 영향을 받은 게 조금 보인다. 미켈란젤로와 비교당해서 그렇지 기를란다요 역시 세련되고 뛰어난 화가다.
그렇게 기를란다요의 화방을 나오지만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본 메디치 가문의, 정확히는 당시 메디치 가문의 수장 로렌초 데 메디치의 초빙에 의해 미켈란젤로는 15살에 팔라초 메디치에서 공부하게 된다.
폭군에 독재자라는 시각도 있지만 로렌초 메디치는 예술을 사랑했고 젊은 예술가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는 걸로 유명했다. 그는 자기 저택 정원에 '대리석 정원'이라는 걸 갖추어 놓고, 젊은 조각가들이 맘껏 공짜로 대리석에 솜씨를 뽐내도록 해주었다. 현재의 대리석 가격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한 대인이다. 다만 몇몇 역사가들은 이런 씀씀이 때문에 메디치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기도 한다.
여기서 미켈란젤로는 연습작들을 몇 개 만드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판의 얼굴과 큐피드(혹은 에로스)이다. 이 2가지 작품은 모두 유실된 상태이다. 하지만 기록에 남겨진 묘사를 보면 어린 미켈란젤로의 담대함과 미숙하지만 재능있는 실력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었다고 한다. 판의 얼굴조각은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의 눈에 들게 되는 가장 큰 계기인데, 로렌초가 이 작품을 보고 미켈란젤로를 크게 칭찬하면서 "판은 나이가 들어서 이가 성하지 않을 텐데"라고 중얼거리자 미켈란젤로는 기뻐하면서 다시 한 번 끌로 뭔가를 조각했다. 로렌초가 "무얼 또 수정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바로 판의 이에 충치를 조각해서 마무리지었다고 한다. 큐피드 작품의 경우, 미켈란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 중 하나였다. 작품을 나의 자식, 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본 로렌초의 배려로 메디치 가에서 몇 년 동안 지내게 된 소년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식사를 할 정도로 파격적인 우대를 받았다. 로렌초의 아들들을 가르치기 위해 초빙된 당대의 유명인사들과 학자들을 만나 플라톤 철학을 배우고, 그들에게서 수준 높은 토론을 경청했으며, 라틴어·문학에 대해서도 굉장히 수준 높은 소양을 갖추게 된다. 특히 그는 단테의 신곡을 좋아한 것으로 보이는데, 훗날 조각과 회화뿐만이 아니라 (사실 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도 굉장한 거지만) 건축, 시 등 그의 예술 작품 전반에 걸쳐 자신의 예술작품에 고통과 순교, 그리고 구원의 주제를 늘 나타냈다.
그러나 로렌초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했고, 미켈란젤로는 직감적으로 떠나야 할 때임을 알았다.
사실 미켈란젤로는 어릴 때 회화를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그런 기억때문에 스스로 회화를 꺼리는 것은 물론, 조각의 불완전한 버전이 회화라고 깎아내리는 등 자신을 화가가 아닌 조각가로 여겼다. 하지만, 교황 율리오 2세의 협박에 가까운 의뢰 때문에 강제로 천장화를 맡긴 후 아래 2개의 불세출의 걸작을 만들어내게 된다.
아담의 창조를 포함한 것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대해 저명한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부리치 교수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회화작품이라 칭찬했다.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을 다 덮은 이 거대한 회화를 경이적인 속도로 마쳤다. 보통 화가들은 그 10분의 1의 크기인 벽화도 3년 동안 그렸지만 이 못생기고 왜소한 예술가가 시스티나 소성당의 천장을 4년, 다비드 상을 3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그것도 남들을 훨씬 능가하는 자질을 보이며 끝내니 주변의 반응은 놀라움을 넘어선 경악. 거기에 벽화와 달리 미켈란젤로는 천장화였다. 더군다나 그는 스스로를 조각가로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는 걸 계속 거부했었다. 교황의 계속된 협박과 달램 끝에 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시스티나 소성당 천장화 작업을 끝낸 것이다.
하지만 이 시스티나 천장화 작업 때가 미켈란젤로 입장에서 가장 우울한 때였을 거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일단 그가 회화라는 장르 자체를 싫어하는 데다가 하필 천장화. 조금만 잘못 하면 회반죽이 얼굴로 떨어지기 일쑤고, 이런 과정으로 이런 천장화을 그려내려면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려야하기에 매우 하드코어 중에 하드코어이다. 거기에 그림을 그리려고 자세를 잡는 것 자체가 힘들고 전체적인 구도를 살피는 것도 어렵다. 그리고 설치해야 할 장비들도 많고, 결정적으로 매우 위험하다.
작품의 제작 과정에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1508년 작업에 착수하고 처음 1년 동안 제법 빠르게 진도를 나가 1년 만에 50%를 완성하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보였지만, 교황청이 제대로 봉급을 지불하지 않아 조수들이 몽땅 피렌체로 떠나버렸다. 이 때문에 미켈란젤로도 본의 아니게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교황청이 다시 급료 지불을 시작한 1511년 10월에야 새로운 조수들을 고용해 작업을 재개, 1512년 9월까지 약 11개월에 걸쳐 나머지 절반을 완성해 천장화 전체를 완성시켰다. 그러니 실제 작업 기간은 약 2년인 셈. 게다가 후반기의 약 1년 동안은 새로 고용한 조수들이 영 상태가 좋지 않아 결국 미켈란젤로 혼자서 거의 다 작업을 맡아 했다고 한다.
그가 예술가로 사는 것을 반대하던 아버지도 돈은 언제 들어오냐며 화를 돋구었으니 혈압이 치솟을 만하다. 거기에 미켈란젤로에게는 3명의 남동생이 있었는데 그중 1명은 아버지 못지 않은 망나니여서 돈을 요구하며 형의 속을 긁었고, 그가 가장 아꼈던 동생은 이때 건강이 안 좋아서 앓으며 다른 방향으로 형의 속을 태웠다.
이처럼 하드코어하다 못해 지옥 같은 상황에서 작업을 끝내니 나타난 것은 인류의 유산. 본인은 정말 하기 싫어했던 작품이 후대에는 그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남았다. 다비드, 피에타가 있긴 하지만 역시 미켈란젤로라 하면 시스티나 천장화를 떠올리게 되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당시의 작업이 그와 사이가 안 좋았던 건축가 브라만테의 함정이라는 주장도 있다. 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미켈란젤로이기에 회화를 맡기면 망신만 당하고 말 거라는 계산에 브라만테가 교황을 부추겨 최고의 '조각가'인 그에게 회화 작품을 맡겼다는 것. 비록 물적 증거가 없는 정황 증거만을 놓고 한 추측이긴 하지만, 저런 추측이 별로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의 사이는 안 좋았고, 브라만테의 성격 역시 소인배스럽고 음흉하기까지 했다. 그런주제에 브라만테의 건축능력은 미켈란젤로와 같이 당대 최고의 전문가였으며 심지어 사이 나쁜 두 사람조차 건축능력만큼은 확실히 서로 인정했다고 한다.
정황을 첨언하자면, 당시 브라만테는 시스타나 소성당을 개축하는 일을 맡았었는데, 그만 천장이 쩍 하니 갈라지고 만다. 그 결과 대충 은하수 그림으로 가려놓고 외부벽에 축대를 대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막았지만, 교황의 분노를 산건 당연지사. 이를 떠넘기기 위해 미켈란젤로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회화를 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조각가로서 이름을 날렸다. 그래서 대충 미켈란젤로에게 덮어씌워 그가 잘 처리해도 좋고, 만약 잘 처리하지 못해도 죽는 건 미켈란젤로가 될테니. 브라만테가 미켈란젤로를 싫어한 이유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향 출신에 천재로 이름 높았던 라파엘로를 밀어주기 위해서 라고도 한다. 다만, 브라만테가 라파엘로를 단순히 동향 출신이라서 밀어준건만은 아니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를 봐도 알 수 있듯이, 당대 예술가들은 한 가지 분야가 아니라 여러 분야를 넘나들면서 활동했는데,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는 건축분야에서 라이벌이었다. 즉, 정적을 쳐내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는 것. 라파엘로도 건축가로서 활동했지만, 브라만테와는 연배가 40년이나 차이가 나고, 그에따라 자연스레 활동시기에도 차이가 났기 때문에 경쟁관계가 아니라 후계자로서 밀어줬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라파엘로는 브라만테 사후 성 베드로 성당의 최종책임자가 된다. 결국엔 71세의 미켈란젤로가 맡게 되지만.
미켈란젤로의 다른 작업들처럼, 이 작업도 하는 내내 장화를 벗지 않아 장화 속 내피가 피부에 붙어버려 벗어낼 때 살점하고 같이 뜯어져 나갔다고 한다.
미켈란젤로의 스승 이야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켈란젤로( 1475 ~ 1564)의 이름은 모두 기억하고 있지만, 보톨도 지오바니 (Botildo di Gioranni) 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보톨도 지오바니는 유명한 미켈란젤로의 스승이다. 미켈란젤로가 14살이 되었을 때, 미켈란젤로는 보톨도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 그를 찾아왔다. 그 때 그는 스승으로서 미켈란젤로를 테스트 해 보았다. 그의 놀라운 재능을 본 보톨도는 그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위대한 조각가가 되고 싶으냐?” “네, 그렇습니다. 스승님.” “그렇다면 넌 위대한 조각가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 “전 제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기술을 더 닦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네 기술만으로는 안 된다. 너는 네 기술로써 무엇을 위하여 쓸 것인가 먼저 분명한 결정을 해야 된다.” 그리고 자기의 문하생이 된 그날, 이 스승은 어린 미켈란젤로를 데리고 나가서 두 군데를 구경시켜 주었다. 처음으로 구경시켜준 곳은 바로 술집이다. “스승님, 술집 입구에 아름다운 조각이 있어요.” “이 조각은 아름답지만 조각가는 술집을 위해서 이 조각을 사용했단다.” 이 스승은 다시 어린 미켈란젤로의 손을 잡고서 아주 거대한 성당으로 갔다. 그리고 성당의 입구에 세워진 아름다운 조각상을 보여주었다. “너는 이 아름다운 천사의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아니면 저 술집 입구에 있는 조각상이 마음에 드느냐? 똑같은 조각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졌고, 또 하나는 술 마시는 흥행과 쾌락을 위해서 세워졌단다. 너는 네 기술과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쓰기를 원하느냐?” 스승의 물음에 어린 미켈란젤로는 세 번씩 대답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쓰겠습니다.” “그래,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네 재능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네 재능을 하나님을 위하여 쓴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 시간, 기회 등을 무엇을 위해서 쓰고 있는가? 그것은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6:20
미켈란젤로의 또 한명의 스승은 도메니코 길란다이오( Domenico Ghirlandaio 1848~1894)다. 길란다이오는 주로 프레스코에서 일했고, 많은 중요한 작품들이 템페라에서 실행되었다.바사리는 기를란다이오가 그의 그림에서 금으로 만들어진 어떤 물건도 그려냄으로써 금을 사용하는 것을 가장 먼저 포기했다고 말한다.예를 들어, 목동 숭배의 제단 조각( 피렌체 아카데미)이 금박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이것은 그의 작품 전체에 적용되지 않는다.
성모 마리아 탄생(1485~90)은 현대 피렌체 귀족들의 생활에서 가정적인 장면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William Michael Rossetti에 따르면, "Girlandaio"의 구성 계획은 웅장하고 장식적이다; 그의 키아로스쿠로는 훌륭하고, 특히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매우 정교한 스케일로 디자인할 것이다; 그의 색상은 비판에 더 개방적이지만, 이 말은 프레스코에 훨씬 덜 적용됩니다.e는 때때로 너무 넓고 조잡하게 밝다.바사리에 따르면, 그의 원근감은 매우 예리해서 그가 전적으로 눈으로 작업한 콜로세움과 같은 고대 로마의 기념물들을 그렸고,나중에 측정했을 때 수학적으로 정확한 비율과 직선적인 원근법을 가졌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기를란다이오는 미켈란젤로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프란체스코 그라나치도 그의 제자 중 한 명이다.바사리에 따르면, 이 두 사람은 로렌조 데 메디치가 그의 두 명의 가장 좋은 제자를 요청했을 때 기란다이오가 메디치 아카데미에 보냈다고 한다.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주로 조각가로 여겼지만, 16세기에 그는 프레스코화의 화가로서 그의 주인을 따라 시스티나 성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길란다이오는 바사리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길란다이오는 그의 재능과 위대함 그리고 방대한 작품들로 인해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하고 훌륭한 거장 중 한 명으로 불릴 수 있다." 19세기의 제이크 버크하트와 다른 사람들은 그의 구성, 기술력, 그리고 아치발드 조셉 크로와 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발카셀이 지오토의 작품만큼이나 혁신적이라고 본 그의 인물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그의 작품에 대한 감상은 시들해졌고, 1994년 작가 사망 500주년이 되어서야 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붙었다.이때 심포지엄이 열렸고 이후 작가들에 대한 심층적인 논문이 발표됐다.로젠나우어는 역사학자를 위한 그림 기록으로서 기란다이오의 그림의 유용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플로렌스 우피치 성 제노비우스와 성 쥐스투스가 사랑한 마돈나와 아이(1483년경)
오스페달레 델리 인노첸티, 플로렌스 마기 인노첸티 숭배(1488-89)
뮌헨 알테 피나코텍 팔라 토르나부니 (1490년경)
프레스코스
성 제롬, (1480), 오그니샨티, 피렌체
시스티나 성당에 의뢰된 그리스도의 생애 시리즈 중 하나인 사도들의 소명(1481년)
최후의 만찬, (1486) 산 마르코, 피렌체
그의 연구에서 성 제롬의 세부사항, 정물에는 추기경의 모자, 안경, 모래시계, 도장 등이 있다.
성 프란시스의 성화상에서의 풍경 상세
산마르코 식당에서의 최후의 만찬 세부 사항으로 인물 묘사와 병, 체리, 은염 저장고 등의 물체에 대한 기란다이오의 기술을 보여준다.
박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