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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 경내 건물로는 3 칸 건물 숭의사 ( 崇義祠 ) 와 신문 ( 神門 ), 4 칸 건물 강당 ( 講堂 ), 4 칸 건물 흥학재 ( 興學齋 ), 3 칸 건물 서재 ( 西齋 ) 와 외문 ( 外門 ), 3 칸 건물 고사 ( 庫舍 ) 등을 갖추고 있다 .
건물 규모로서는 어떤 서원에도 조금도 뒤지지 않지만 , 전주최씨 한 가문 선현 ( 先賢 ) 만 배향하고 있어서 서원으로서 요건을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
대개 이런 경우 사위나 외손을 함께 배향하여 두 성씨 이상 선현을 모신 것으로 만들어서 요건을 충족시키는 것이 통례인데 , 현재 도산서원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지만 철폐되기 이전 조선시대에는 전주최씨와 홍주이씨 두 성씨를 배향하고 있었다 .
이달 ( 李達 )
1592 년 ( 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 의병장 곽재우 ( 郭再祐 ), 최강 ( 崔堈 ) 등과 포위된 진주성 방어전에 참가하여 전공을 세워 훈련원정에 특임되었다 .
곧이어 권무과 ( 勸武科 ) 에 급제하고 , 1614 년 ( 광해군 6) 양산군수로 재임 중 선전관에 임명되어 상경하던 도중 , 폐모론의 소식을 듣고 일부러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음을 핑계 삼아 고향으로 돌아갔다 .
이해 가을 삼도통제우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1615 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
도산서원에 제향 되었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도산서원에 외손 이달이 함께 배향되어 성씨가 다른 두 가문 이상 선현을 배향해야 하는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에서도 이달에 관해 기록한 곳에서는 도산서원에 배향되었다고 했으나 , 도산서원에 관해 기록한 곳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이달에 관하여 인용한 참고문헌으로 < 선조실록 >, < 간송집 >, < 연려실기술 >, < 청선고 > 를 제시하고 있으나 거기까지는 검증하지는 못하였다 .
서원이 철폐되었다가 다시 복원되는 과정에서 이달이 제외된 것으로 추정된다 .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지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데 , 혹시 성균관이나 향교에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원래 서원제는 집안에서 비용을 대고 , 유림이 주관하여 제사를 모신다 .
도산서원제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해 과연 유림이 주관하여 제사를 모시는지 모르겠다 .
유림에 제사를 주관한다면 서원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 아니면 서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소천정은 조선 중기 장군인 최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정자이다 .
최강은 선조 18 년 (1585) 무과에 급제한 뒤 1592 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 형 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성 , 진해 사이에서 많은 공을 세웠으며 임진왜란 뒤에는 경상도좌수사 , 충청도수군절도사를 지냈다 .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소천정은 이름이 정자이고 또 이 곳에서 의숙공이 무예를 연마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라고 전해오고 있지만 , 사실 건물 형태로 보나 용도로 보나 제각 ( 祭閣 ) 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
문화재청 홈페이지에는 소천정이 건립된 시기를 기록하지 않고 있다 .
당연히 밝혀야 할 문화재 제작 연대마저 누락시킨 것을 보면 문화재청도 얼마나 허술하게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
소천정 기 ( 蘇川亭記 ) 진산 하겸진 ( 河謙鎭 )
우리 선조께서는 옛날 도산서원에 배향되셨는데 , 서원이 철폐되자 동쪽에 서당 흥학재를 중건하였다 .
생각건대 구만 곤계봉 아래 소대는 우리 선조께서 태어나신 곳인데 소중한 그 자리를 황폐한 채 방치하지 않는 것은 우리 후손의 책임이다 .
하고 마침내 1929 년 봄에 소천정을 짓기 시작하여 겨울에 이르러 완성하였다 .
吾先子舊享道山祠自祠廢而爲書堂又重建惟是九巒昆季峰下蘇臺者吾先子降生之地重其地不可以其地使荒吾輩責任也迺於己巳之春經始爲蘇川亭至冬而落焉
의숙공이 도산서원에 배향되었으나 , 서원철폐령으로 도산서원이 철폐되자 따로 의숙공 생가 터에 사당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소천정을 지어서 배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소천정 설립을 추진한 사람은 고성종회 의숙공 ( 강 ) 파 22 세 최영렬 ( 崔永烈 ) 과 23 세 최정규 ( 崔正奎 ) 두 사람이다 .
< 소천정기 > 를 지은 하겸진은 진주에서 유명한 유학자이다 .
이를 통하여 소천정은 1929 년에 설립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 쌍충록 > 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을 전개한 소계 ( 蘇溪 ) 최강 ( 崔堈 , 1559~1614) 과 그의 형 소호 ( 蘇湖 ) 최균 ( 崔均 , 1537~1616) 의 행적과 그들에 대하여 국가에서 포장 ( 襃獎 )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 < 난중잡록 ( 亂中雜錄 )> 이나 < 선묘중흥지 ( 宣廟中興誌 )> 등 여러 자료에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
쌍충록책판은 1823 년 ( 순조 23) 목판으로 새겨서 만든 것으로 180 여 년 전의 인쇄술 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소호는 의민공 그리고 소계는 의숙공의 호인데 , 쌍충록책판을 보관하고 있는 소천정이 의숙공을 기리는 건물 이다보니 동생인데도 불구하고 의숙공을 먼저 기록하고 있다 .
의민공과 의숙공이 시호를 받은 것은 쌍충록이 만들어진 이후이기 때문에 당연히 쌍충록에는 기록될 수 없었다 .
의민공 소호 최선생 신도비 및 의숙공 소계 최선생 신도비 (1984 년 3 월 세움 )
경남 고성군 구만면 효락리
두 분은 조선후기까지 소호공 , 소계공으로 불리었으나 , 1871 년 ( 고종 8) 의민공 , 의숙공으로 시호가 내려진 다음부터는 시호를 사용하여 부르고 있다 .
따라서 여타 문헌에서 소호공은 의민공 , 소계공은 의숙공이라고 보면 된다 .
쌍충록책판은 1823 년 ( 순조 23) 의민공의 8 세손 안렴사공파 고성종회 찰방공 ( 진호 ) 파 20 세 구헌공 ( 懼軒公 ) 최상갑 ( 崔祥甲 ) 이 4 권 2 책으로 발행한 목판본 < 쌍충록 ( 雙忠錄 )> 을 인쇄한 목판이다 .
< 쌍충록 > 은 도산서원에서 간행하였는데 규장각과 연세대학교도서관 등에도 소장되어 있다 .
문화재에 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고 의민공과 의숙공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겠다 .
휘 : 균 ( 均 ) 자 : 여평 ( 汝平 ) 호 : 소호 ( 蘇湖 ) 시호 : 의민 ( 義敏 )
1537 년 ( 중종 32) 생 . 1616 년 ( 광해 8) 9 월 16 일 졸 .
휘 : 강 ( 堈 ) 자 : 여견 ( 汝堅 ) 호 : 소계 ( 蘇溪 ) 시호 : 의숙 ( 義肅 )
1559 년 ( 명종 14) 생 . 1614 년 ( 광해 6) 졸 .
두 분은 나이가 22 살이나 차이 나고 또 의민공은 임진왜란 때 나이가 56 세인 노인이었으므로 몸을 움직여 싸우는 것은 의숙공이 하고 의민공은 본부에 앉아서 지휘를 했기 때문에 전투 기록에서 의숙공의 휘는 찾을 수 있으나 , 의민공의 휘는 찾을 수 없다 .
의민공은 동생 의숙공 , 종생질 ( 從甥姪 , 5 촌 ) 이달 ( 李達 ), 생질 안신갑 ( 安信甲 ) 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
첫댓글 좋은공부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도산서원제는 과거에는 고성향교 유림들이 제를 지내다가 지금은 안렴사종회에서 주관하여 지내고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