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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어녕의 에세이 詩畵展
김영랑-「모란이피기까지는」
꽃을 뜻하는 한자의 花 는 풀초 밑에「변화한다」는 化 자를 붙여놓은 글자이다. 민주화니 정보화니
딱딱한 말에 따라 다니는 그 글자가 왜 하필 꽃처럼 아름다운 것에 붙어있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원래 化 자는 사람이 서 있는 것과 구부리고 있는 것의 모양을 나타낸 상형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자세처럼 수시로 변화(變化)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꽃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드물다. 어제까지 비어있던 풀잎이나 나뭇가지에 갑자기
티눈같이 작은 봉오리가 틔어난다. 그것이 몽우리지고 부풀어 오르고 터지면서 형형색색의 꽃잎과
향내가 피어난다. 그러다가 어느새 시들어 흔적도 없이 져버리고 그 빈자리에 열매가 열린다.
이렇게 트고 부풀고 터지고 피고 시들고 지고 열리는 것―그「동사(動詞)로서의 꽃」이 바로「花」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꽃을 동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읽어 온 경우가 많았다. 아름답다.
향기롭다와 같이 시화(詩畵) 속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꽃들은 영화(榮華), 가인(佳人)을 수식하는
「형용사로서의 꽃」이었다.
영화(榮華)란 말 자체가 그에 속하는 글자다. 榮 은 벚꽃처럼 꽃잎이 자잘하면서 부리져 피어있는 꽃을
나타낸 것이고, 華 는 송이가 크고 그 꽃잎이 화려한 꽃을 가리키는 글자다. 특히 이「형용사로서의 꽃」을
대표해 온 것이 모란이다. 그 색이 화려하고 모양이 탐스러워 신라 때 설총의 글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귀공명을 상징해 온「花中王」이다. 그래서 베갯모나 수연(壽宴)의 병풍 속에서 모란꽃은
영원히 질 줄 모르는 꽃으로 수놓여져 왔다.
그러나「형용사」에서「동사」로,「공간」에서「시간」으로 새롭게 바꿔놓은 것이 바로 김영랑의 시
「모란이 핏기까지는」이다. 우리가 그 시의 첫행에서 만나게 되는 말도 모란의 색깔이나 그 화려한
꽃잎에 대한 수식어가 아니라「피다」라고 하는 그 동사이다.「…까지는」,「아직…」과 같이 시간의
한계와 유예를 나타내는 말을 덧붙여「피다」라는 동사를 더욱 강렬하게 못질해 놓았다.
그래서「모란이 핏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테요」라는 독백 속에서 우리는
모란만이 아니라 꽃이 핀다는 그 동태성과 봄이라는 계절의 지속성을 읽을 수가 있다.
「피다」로 시작된 이 시는 당연히「지다」라는 거기에서「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나는 비로소
봄을 여윈 서름에 잠길테요」라는 시행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모란은「피다」보다도 오히려「지다」 쪽이
더 강조되어 있어서「뚝뚝 떨어져버린」이라는 묘사까지 등장한다.
(「뚝뚝」은 벚꽃처럼 일시에 폈다지거나 그 꽃잎이 자잘한 것에는 쓰일 수 없는 의태어이다.)
이렇게 피다와 지다의 시간축(時間軸)으로 펼쳐지고 있는 영랑의 그 꽃은 이미「목단(牧丹)」이라는
한자말보다는「모란」이라는 보다 부드럽고 약간은 나약하기까지 한 토박이말에 더 잘 어울리는
꽃으로 변신한다. 그 이름만이 아니라 꽃의 형태도 색채도, 심지어 그 피는 시기마저도 다른
의미를 띠게 된다.
엄격하게 말해서 모란꽃은 화투에서도 육(六) 목단으로 나와있듯이 여름 꽃에 속한다. 하지만 영랑은
봄을 극한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모란을 봄과 여름의 경계선인 오월에 설정한다.
그래서「지다」와「피다」의 그 시간차는 한 계절차이 만큼 벌어지게 된다. 필 때는 봄꽃이고 질 때는
여름꽃으로 말이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로 무덥든 날/떨어져 누운 꽃닢마저 시들어버리고는」에서도 필 때보다 질 때의
모습이 더 강조된다. 꽃을 의인화한 표현은 많지만 떨어진 꽃잎을 보고「누웠다」라고 한 것은 영랑이
처음일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진 꽃이 아니라 꽃의 시체이며 흙에 묻는 매장이다. 비극이나 아이러니의
효과는 그 대조가 크면 클수록 커지는 법이다. 꽃모양이 크고 화려할수록 그것이 져서 사라지는
허무의 자리도 크다.
「피다」와「지다」는 생성과 소멸을 낳는 시간의 모든 비극이고 갈등이며 그 모순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축을 타고 전개되는 영랑의「모란」에서는 모든 삶의 의미와 정서 역시 그와 같은
대립과 모순의 언어로 양분되어 진다.「기다림」은「여윔」으로, 「뻗쳐오르는 보람」은
「서운케 무너졌느니」로, 그리고「찬란함」은「슬픔」으로 화한다.
그러나 영랑은 대부분의 한국문화가 그런 것처럼 시간을 처음과 끝으로 이어진 직선으로서가 아니라
둥근 순환의 고리로 생각한다. 봄은 다시 오고 모란은 계절의 모서리 위에서 다시 피어난다. 소망이
좌절로 이어졌듯이, 좌절은 다시 소망으로 이어진다. 피다와 지다의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이 순환의 고리 속으로, 어쩌면 영원 회귀의 반복 속으로 뛰어드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이 돌로 나타난 것이 까뮈의 「시지푸스의 신화」라고 한다면, 그것이 꽃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영랑의「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고 할 수 있다.
「삼백예순날 한양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봄까지 합쳐서 일년 내내
통틀어 운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까「뻗쳐오르는 보람」과 그 기다림의 찬란했던 시간가지도
소급해서 모두 뻬버린 시간이다. 하지만 이 시의 끝행은「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테요」라는 첫행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 다시 모란이 필 때까지 기다리는 찬란한 시간들이
삼백예순 날의 슬픔위에 오버랩 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시간의 모순 감정을 통합한 것이 바로「찬란한 슬픔의 봄」이고, 그것을 가시화한 것이 바로
영랑의「모란꽃」이다. 영랑은 모란꽃을 통해서 봄의 보람을 극한까지 떠받치는 튼튼한 버팀목과 동시에
그 봄의 죽음을 장례하는 가장 화려한 상복을 마련해 준 것이다. 그래서 귀족적이고 화려하고
중화적(中華的)이었던「목단」이 김영랑의 시에 이르러 비로소 서민적이고 진솔하고 향토적인
「모란」의 이미지로 바뀌게 된 것이다. 청요리집 같은 모란꽃의 찬란한 빛 속에 슬픔의 깊은 그림자를
드리움으로써 평면적인 꽃의 이미지를 입체화한 것은 한국의 시인 영랑이었다.
「미녀를 맨 처음 장미에 비유한 사람은 천재다 그러나 그 똑같은 비유를 두 번째 사용한 사람은 바보다」
라는 말이 있다. 영랑은 천년을 두고 부귀영화를 상징해온 중국 문화의 모란 패러다임을 대담하게 바꿨다.
「형용사로서의 목단꽃」을「동사로서의 모란꽃」으로 돌렸다. 그리고「공간 속에 수놓여진 꽃」을
「시간 속에서 피고 지는 꽃」으로 끌어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매화의 의미밖에 몰랐던
사람들에게 영랑은 봄과 여름 사이에서 피어나는 경계의 꽃, 모란을 노래하는 즐거움을 보여 준 것이다.
강진북쪽으로는 월출산을 사이에 두고 영암이 있고, 동쪽 장흥에서부터 흘러온 탐진강은
강진땅으로 와서 강진만으로 들어간다.
이 강진만은 탐진강의 하구이기도 하고 그밖에도 많은 하천이 흘러들기 때문에
아홉 고을의 물길이 흘러든다는 뜻으로 구강포라고도 불린다. 강진 땅 서쪽은 해남이다.
조선 태종 17년 이전까지 강진이라는 고을은 없었다.
강진은 그 전까지 영암군에 속하던 도강현과 탐진현을 합친 후,두현의 이름을 한자씩 따서 만든 지명이다.
그때 도강현 소재지에는 전라도 병마 도절세사영이 설치되었고 바닷가 마량에는 수군만호진이 두어졌다.
육군과 수군이 주둔했던 당시의 흔적은 오늘날 옛 도강현이 있던 자리에 병영이라는 지명으로 남아있다.
구강포와 바다 거기에 늘 푸른 섬들과 갯벌 그리고 산과 하천, 평야를 고루 담은 강진의 풍광은
유쾌하고 즐겁게 춤추는 햇살을 담고 있다.
1930년대에 활동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김영랑의 서정도 그가운데서 익었다.
영랑생가 는 강진읍 남성리, 군청 옆길로 들어가면 그 영랑이 태어난 집이 나온다
그가 떠난후 몇 차례 집주인이 갈리면서 일부 원래 모습이 바뀌기도 했지만
1985년에 강진군이 사들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여 관리하고 있다.
동백나무 몇그루가 집안으로 쏟아져 내릴 듯 둘러선 그의 생가에는 복원된 초가 안채와
마루 가장자리에 나지막한 난간을 두른 사랑채가 있고 그 사이에 튼튼한 시비가 하나
그리고 사랑채 앞에 자연석으로 만든 화단과 연못이 있다.
초여름이 되면 그를 상기시키듯 시비 주변과 마당 구석에서 모란도 피어난다.
영랑 김윤식은 1903년 1월 16일, 이곳에서 대지주 집의 5남매중 맏이로 태어났다.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후 1917년에 서울 휘문의숙에 들어갔는데 당시 휘문의숙에는
그의 선배로 홍사용,안석주,박종화가 있었고 또 후배로는 정지용,이태준 등이 있었다.
3학년때 3.1운동이 일어나자 영랑은 고향으로 내려와 강진 장날에 만세운동을 일으키려다 발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6개월 동안 복역했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중학부에 다니며
용아 박용철 시인과 사귀었다. 1921년에 잠시 귀국했다가 1922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에 들어갔으나 관동대지진이 나자 그만두고 귀국했다.
1930년에 박용철,정지용, 이하윤,정인보, 변형윤 등과 『시문학』지를 창간하고
그 지면에「모란이 피기까지는」「동백잎에 빛나는 마음」등 시를 발표하면서
영랑은 본격적인 시작 활동에 들어갔고 여러 잡지에 작품을 발표했다. 1935년에 『영랑시집』이 나왔다.
그후에도 시편들을 내놓았으나 영랑의 시 세계는 주로 1930년대의 작품들로 대변된다.
광복 후에는 강진에서 대한청년회 단장을 맡는 등 우익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에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도 하는등 강진의 자연처럼 따사로운 시를 통해서만
그를 알았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의외로 느껴지는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48년에 서울로 이시했고 이듬해에는 이승만 정권 밑에서 공보처 출판국장으로 일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숨어 있었는데 9.28수복 때 포탄 파편을 맞고 이?날 돌아갔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북도에 소월이라면 남도에 영랑”이라는 말도 있듯이 영랑은 우리나라 순수시. 서정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힌다.
193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순수’시의 대표주자였다는 말은 물론‘순수’한 찬사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매끄러운 운율과 세련된 시어로써 개척한 시 세계가 독보적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될 것이다.
영랑이 태어난 집 마루에 슬쩍 걸터앉아 그런저런 여러 가지 생각과 더불어
그의 시 한편 되새겨보는 것도 좋겠다.
영랑은 우리 음악과 서양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고 뛰어난 고수이기도 했다고 한다.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도쳐오르는 아침 날빛이 뻔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 모란동백 /조영남 ♬
1.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꾹이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 속에 찾아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2. 동백은 벌써 지고 없는데 들녁에 눈이 내리면
상냥한 얼굴 동백 아가씨 꿈 속에 웃고 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바다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모랫벌에
외로이 외로이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동백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분홍색 모란 꽃
모란 [ 牡丹 ]
미나리아재비목 미나리아재비과 낙엽관목.
목단(牧丹)이라고도 한다. 높이 2m이며 각처에서 재배하고 있다. 가지는 굵고 털이 없다. 잎은 3겹으로 되어 있고 작은 잎은 달걀모양이며 2∼5개로 갈라진다. 잎 표면은 털이 없고 뒷면은 잔털이 있으며 흔히 흰빛이 돈다.
꽃은 양성으로 5월에 홍색으로 피고 지름 15cm 이상이며 꽃턱이 주머니처럼 되어 씨방을 둘러싼다. 꽃받침조각은 5개이고 꽃잎은 8개 이상이며 크기와 형태가 같지 않고 달걀을 거꾸로 세운 모양으로서 가장자리에 불규칙하게 깊이 패어 있는 모양이 있다.
수술은 많고 암술은 2∼6개로서 털이 있다. 열매는 9월에 익고 내봉선(內縫線)에서 터져 종자가 나오며, 종자는 둥글고 흑색이다. 많은 재배품종이 있으며 뿌리껍질을 소염·두통·요통·건위·지혈 등에 쓴다.
모란을 심는 적기는 10월 상순∼11월 상순이며 토양은 메마르지 않은 양토(壤土)가 적당하다. 번식은 실생(實生)·포기나누기·접붙이기의 3가지 방법이 있다. 모란의 종류는 발달 과정에 따라 중국종·일본종·프랑스종의 3계통으로 구분하고, 개화기에 따라 보통종과 겨울모란으로 나눈다. 꽃말은 ‘부귀’이다.
(두산백과)
모란은 꽃이 화려하고 풍염(豊艶)하여 위엄과 품위를 갖추고 있는 꽃이다. 그래서 부귀화(富貴花)라고 하기도 하고, 또 화중왕(花中王)이라고 하기도 한다.
모란은 장미와 함께 인간이 긴 세월에 걸쳐 만들어 낸 최고의 예술품이다. 그것도 살아 있는 예술품인 것이다. 호화현란(豪華絢爛)한 아름다움과 기품에 있어서는 서로 비견되지만 풍려(豊麗)함으로는 모란이 단연 돋보인다. 모란은 장미에 비해 그 꽃모양이 장려(壯麗)하고 소담스러우면서 여유와 품위를 지니고 있다.
모란은 백화의 왕이라고 할 만큼 그 아름다움을 진중(珍重)하고 있는 나머지 이명(異名)도 대단히 많다. 목작약(木芍藥)을 비롯해서 화왕(花王)· 백화왕(百花王)· 부귀화(富貴花)· 부귀초(富貴草)· 천향국색(天香國色)· 낙양화(洛陽花)· 상객(賞客)· 귀객(貴客)· 화신(花神)· 화사(花師)· 화사부(花師傅) 등 극히 귀한 이름들이 눈에 띈다. 또 모란의 품종 이름이면서 모란의 이명처럼 알려져 있는 것으로 요황(姚黃)· 위자(魏紫)· 일녑홍(一捻紅) 등이 있다.
그러면 여기에서 먼저 모란의 이명(異名)에 관한 설명과 함께 모란의 중국에서의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모란은 가장 중국적인 꽃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란 문화는 그대로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우리의 꽃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모란의 이명인 목작약은 작약과 비슷한 목본이란 뜻이다. 모란과 작약은 다 같이 그 꽃모양이 장려하고 잎모양이 단정하여 모든 꽃 가운데 뛰어나다고 일컬어져 왔다. 그래서 "앉으면 모란, 서면 작약"이란 말도 생겨났다. 중국사람은 이 두 가지 꽃을 다 같이 사랑하여 나무에 속하는 모란과 풀에 속하는 작약을 접목·교배 등을 해서 친족관계에서 혈족관계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모란을 목작약이라 하고 작약을 초목단(草牧丹)이라고 하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목경해고(木經解故)》에는 "옛날 목작약이라고 하는 것은 모란을 지칭한 것이다. 모란은 처음에는 따로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작약을 빌어 모란의 이름에 사용하였다"라고 하고 있다. 또 《본초강목》에는 모란에서 "당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목작약이라고 불렀다. 꽃은 작약과 비슷한데 몇 년을 지난 그 줄기는 나무를 닮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다. 목작약이라는 이름도 당나라에서 나왔는데 궁중에서는 현종의 개원(開元, 713~741년) 이전부터 모란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나 천보(天寶, 742~756년) 이후에 민간에서도 모란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종전처럼 목작약으로 부르지 않고 모란으로 부르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에 대해서는 수·당(隋唐)시대에 히말라야의 부탄지방에서 들어왔기 때문에 서방의 나라 부탄과 발음이 비슷한 모란(중국에서는 '무탄'으로 발음한다)이란 말을 선정해서 이름을 붙이게 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확인된 것은 아니다. 모란의 원산지는 중국이라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또 이수동(李樹桐)은 〈당인희애모란고(唐人喜愛牧丹考)〉라는 글에서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9세기 전반 서원흥(舒元興)의 〈모란부(牧丹賦)〉 서(序)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모란을 고향인 서하(西河, 산서성)에서 궁중의 어원에 이식하여 점차 장안에 퍼지게 되었다고 하고 있으므로 모란이란 이름은 무후의 황후시대인 고종조(高宗朝, 649~683년)에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러나 남자인 고종은 꽃이름을 고치는 것과 같은 소소한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무후는 그녀와 대립하고 있던 왕황후(王皇后)와 소양제(蕭良娣, 양제는 황후 아래에 있는 여관의 관명)를 죽이고는 왕씨의 성을 망(蟒, 구렁이)씨, 소씨의 성을 효(梟, 올빼미)씨로 고쳤다. 또 황제가 되고나서 거란(契丹)의 이진충(李盡忠)·손만영(孫萬榮)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의 이름을 이진멸(李盡滅)·손만점(孫萬漸)으로 고쳐 버렸다. 이로 미루어 목작약을 모란으로 이름을 바꾼 것도 무후일 것이라는 짐작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모란의 한자 글자를 보면 모(牡, 중국발음 mŭ)는 목(木, mū)와 음이 가깝고 단(丹)은 당나라 황제가 즐겨 복용한 선약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작약의 약을 단(丹)으로 바꾸고 목을 대신한 모(牡)를 합해서 모란(牡丹)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 더구나 모(牡)는 남성을 의미하고 단(丹)에는 단심(丹心)·단성(丹誠)의 뜻이 있으므로 술어로서의 모란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는 천하의 남자가 그녀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모란의 자의(字義)를 직접 해석한 당대(唐代)의 사료가 없는 이상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다음 화왕과 백화왕은 말할 것도 없이 모든 꽃 가운데 가장 호화롭고 아름다운 꽃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작약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둘 필요가 생겼다. 그리하여 이 두 가지 꽃을 비교해서 풍염농후한 모란에 비해서 약간 순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작약과의 관계를 화왕(花王)과 화상(花相)으로 구별했다. 모란이 백화 가운데 왕이라면 작약은 재상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란이 제1위, 이어서 작약이 제2위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화암수록》 〈화품평론〉에서는 "작약은 충실하고 화려함이 화왕(모란)보다 못하지 않으므로 아마도 화왕에게 머리를 숙이고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다음 부귀화·부귀초인데, 부귀란 중국에서는 '재산이 많고 신분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으로 모란은 그러한 성격을 가진 명화(名花)라는 뜻이다. 그것은 꽃이 풍기는 화려함과 덕스럽고 부귀로운 분위기를 나타내는 품격 때문이다. 상객·귀객·화신·화사·화사부 등도 이에 준해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천향국색(天香國色)은 문헌에 따라서는 국색천향이라고 하고 있는 곳도 있다. 국색은 나라 가운데서 가장 미인이란 뜻이고 천향은 하늘에서 내려진 향기라는 것인데 대단히 좋은 향기라는 뜻이다. 즉 하늘에서 내려진 것과 같은 향기로움을 지니고 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미인과 같이 아름다움을 지닌 꽃이라는 뜻이다.
당나라 현종이 모란꽃을 감상하며 즐기다가 "모란을 읊은 시 가운데 누구의 것이 가장 훌륭한가"라고 물으니 정수사(程脩巳)가 이정봉(李正封)의 다음 두 구절을 일러 드렸다.
“나라에서 으뜸 미인의 얼굴엔 아침에도 술기운이 돌고 國色朝酣酒
천계의 맑은 향기가 밤에 옷에 스며드네 天香夜染衣“
이 시를 본 현종은 뜻밖의 생각에 미쳐 곧 귀비에게 거울 앞에서 황금의 술잔을 들고 시의 뜻에 맞는 포즈를 취하게 하고는 만열(滿悅)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모란의 짙고 아름다운 자태를 '국색천향'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다만 이 시의 작자 이정봉은 현종보다 뒤의 인물이다).
《모란보(牧丹譜)》에는 양비취구(楊妃醉毬)·취옥환(醉玉環, 옥환은 귀비의 어릴 때의 이름)· 양비심취(楊妃深醉)· 태진만장(太眞晩妝, 태진은 귀비가 여도사로 있을 때의 이름)· 태진관(太眞冠)· 일녑홍(一捻紅) 등 양귀비와 연유한 품종의 이름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그만큼 모란과 양귀비와의 인연이 깊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녑홍이란 꽃은 양면(楊勉)이 현종에게 헌상한 모란으로 뒤에 양귀비에게 주어졌는데 화장을 하던 그녀가 무심코 지분이 묻은 손으로 꽃잎을 만졌는데 그후 이 모란은 홍색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종은 이 모란을 일녑홍이라 이름지었다는 것이다.
낙양화(洛陽花)는 낙양의 꽃이라는 뜻이다. 낙양은 동주(東周)·후한(後漢)·위(魏)·서진(西晋) 등이 도읍한 중국의 역사상 가장 유서깊은 도시이다. 이곳에는 옛부터 모란 재배가 성행하였다.
또 요황(姚黃)과 위자(魏紫)라는 꽃이름이 문학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요황은 요가(姚家)에 황색의 아름다운 모란꽃이 있어 그렇게 불렀고 또 위자는 위가(魏家)에 붉은색의 아름다운 모란꽃이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데 그 꽃이 너무 아름다워 후대에 내려오면서 모란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었다. 《화암수록》에도 모란의 이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림경제》(진고사책)에서는 모란의 천엽자(千葉者)를 경화(京花)라고 하는데 이는 낙양화의 일종이고 단엽자(單葉者)를 천화(川花)·산화(山花)·산단(山丹)이라 부른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심거나 접을 붙이는 것은 추사(秋社) 전후가 좋다고 하고 중추(中秋)를 이 꽃의 생일이라 하는데 이때 이식을 하면 반드시 무성하게 자란다고 하였다.
모란은 중국이 원산지이다. 그리하여 중국에서 많이 개량되었으며 중국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아온 꽃이다. 그래서 가장 중국적인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란은 수나라 때(6세기)에 그 아름다움이 드러나서 재배식물로 재배하게 되었는데 그후 당대(7~8세기)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였다.
《오잡조(五雜俎)》에는 당나라 고종과 무후(武后)시대에 모란이 처음으로 후원에 심어져서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었고, 현종의 개원(開元) 연간에는 궁중을 비롯해서 민간에서도 다투어 배양하여 진중(珍重)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안에서는 5월이 되면 온 도시가 모란꽃으로 가득차고 곳곳에서 품평회나 원유회가 열리고 꽃구경하는 사람이 넘쳤다고 한다. 그 모습을 "장안 사람들은 성을 비우고 나와서 취한 듯 미친 듯 하였다(長安人傾城而出如醉似狂)"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모란이 문학작품에 오르게 된 것은 현종의 개원(開元, 713~741년) 연간 말기에 배사엄(裵士淹)이 분주(汾州, 산서성 근처)에서 백모란을 한 포기 장안에 이식한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 새로운 재배 화목이 그렇게도 짧은 기간 내에 최고의 꽃의 지위까지 뛰어오르게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물론 모란꽃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려함, 부귀의 품격, 조형적 아름다움이 자연히 관상자를 압복(壓服)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당 현종이 모란을 편애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현종은 또 모란 이외에 풍만염려한 양귀비를 편애했다. 현종은 장안의 흥경궁(興慶宮)에 양귀비를 데리고 나아가 주연을 베풀었다. 흥경궁 정원에는 황제의 권력으로 수집한 수많은 모란이 식재되어 있었다. 현종은 시인 이백으로 하여금 꽃과 미인을 읊은 시를 짓게 하였다. 이 시에서 이백은 명화인 모란과 경국(傾國)의 미인과의 무비(無比)한 풍려(豊麗)를 상찬했다.
이렇게 해서 모란은 드디어 화왕의 지위에 오르게 되고 또 최고의 미인의 상징으로 일반 세인의 진상애완(珍賞愛翫)하는 바가 되었다. 이후 모란은 송나라 때까지 그 왕위를 물려주지 아니하였다.
그런 가운데 모란을 또 유명하게 만든 것은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이름 높은 구양수(歐陽脩)가 쓴 〈낙양모란기(洛陽牡丹記)〉이다. 그는 이 글 가운데서 "모란에 이르러서는 굳이 꽃 이름을 말하지 아니하고 바로 꽃이라고 한다. 그 뜻은 천하의 진정한 꽃은 오로지 모란 뿐이라는 것이다(至牡丹則不名 直曰花 其意謂天下眞花獨牡丹)"라는 최상의 예찬을 헌사하고 있다.
중국인은 모란을 사랑하여 모란꽃 아래에서 죽는 것을 일종의 풍류로 생각할 정도였다. 명대(明代)에 탕현조(湯顯祖)의 희곡 〈모란정환혼기(牡丹亭還魂記)〉는 두보(杜甫)의 딸 여랑이 유종원(柳宗元)의 28대손 유춘경과 모란정에서 환생하여 사랑한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 "모란꽃 아래에서 죽어 풍류로운 귀신이 되고지고(牡丹花下死做 渾世風流)"라는 시구절이 나온다. 이것은 그러한 생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사람들의 모란 애호는 대단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모란 재배가 대단해서 양자강 이북 지방에서는 훌륭한 모란원이 많다고 한다.
이리하여 중국에서 모란은 온 국민의 꽃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중국민족 전체의 번영을 상징하는 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이유로 한때 모란은 당대 이래 중국의 국화였다는 설이 있다. 명대(明代) 북경의 모란 명소로 알려진 극락사(極樂寺) 한쪽에는 국화당(國花堂)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황제가 좋아했던 꽃이라는 의미였고 모란이 정식으로 국화로 선정된 사실(史實)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란이 구미(歐美)에 건너간 것은 화란의 동인도회사가 1656년에 중국에서 도입한 것이 최초이다. 그후 영국·불란서 등에도 중국에서 모란이 건너갔고 특히 불란서에서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모란과 작약은 우리나라나 중국·일본에서는 구별해서 취급하고 있지만 구미에서는 양자를 다 같이 피오니(peony)라고 부르고 있다. 구태여 구별할 때는 목성(木性) 피오니, 초성(草性) 피오니라고 한다.
모란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것은 신라 진평왕 때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진평왕 때 "당 태종(太宗)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빛깔의 모란을 그린 그림과 그 씨 석 되를 보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라 말엽의 최치원(崔致遠)이 각 사찰과 석대(石臺)를 돌아다니면서 모란을 심었다는 고사도 있다.
고려시대에 내려와서도 모란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문헌에 자주 나타난다. 현종 때에는 대궐 안 사루(紗樓) 앞에 손수 모란을 심었으며 예종은 이 사루에서 모란 시를 짓고 유신들에게 명령하여 화답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 이전 덕종으로부터 숙종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모란꽃을 읊고 신하들은 이에 화답하는 행사가 되풀이되었다고 한다. 의종 때 임춘(林春)의 《서하집(西河集)》에 실린 〈양국준가정홍모란(梁國俊家紅牡丹)〉이란 시에서는 "벼슬하는 집들은 다투어 모란을 심는다"는 구절을 볼 수 있다.
그후 충숙왕 때에는 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여 본국으로 돌아올 때 원나라 천자가 진귀한 화초를 많이 주었는데 그 중에 황·백·적·홍색의 모란이 들어 있었다고 하므로 모란은 그때 이미 여러 가지 색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고려 중기 이후에는 궁중은 물론 권문세가들이 서로 다투어 진귀한 품종을 집안의 정원에 심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는데 그것이 너무 호화롭고 사치스럽다 하여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던 것 같다. 《고려사》 〈열전〉에는 기홍수(奇洪壽)와 차약송(車若松)이 어느날 관청에 앉아 모란 기르는 법을 논했는데 사람들이 호화사치를 숭상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고분에서 발굴된 부장품인 화운개(花雲蓋) 등에서는 모란꽃 문양이 발견되고 있다. 이로 보면 고려시대의 귀족들은 사후에도 모란꽃을 좋아하고 부귀를 누리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고려시대에 그렇게도 대단했던 모란에 대한 애상 열기는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유교사회에서 아취와 고절을 숭상하는 선비들의 꽃에 대한 애상의 열의가 모란에서 매화나 국화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크고 넉넉하며 화려하고 농염한 모란에 대한 애호 열기가 쉽사리 가라앉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일반민중의 생활 속에 침투되어 애호의 정도가 더욱 깊어진 면도 없지 않다.
강희안의 《양화소록》에서는 모란은 설명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 그러나 《화암수록》에 실려 있는 그의 〈화목구품(花木九品)〉에서는 1품의 송(松)·죽(竹)·매(梅)·연(蓮)·국(菊)에 이어 2품으로 모란 하나만을 올려 놓았다.
또 《화암수록》의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에서는 모란을 작약·왜홍(倭紅)·해류(海柳)·파초와 함께 부귀를 취하여 2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리고 모란의 품종에 정황색·대홍색·도홍색·분홍색·자색·백색·청색의 여섯 가지 색깔에 120종이 있다고 하였다. 또 모란을 심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특이하게 "모든 꽃은 대체로 봄철에 심는 것이 보통인데 오직 모란만은 입추(立秋) 뒤 다섯 번 째 무일(戊日)을 전후하여 심고 또 접붙이는 것이 좋다"고 하고 있다.
또 같은 《화암수록》의 〈화목이십팔우(花木二十八友)〉에서는 모란을 열우(熱友), 작약은 귀우(貴友)라고 하고 있다.
끝으로 만생모란(蔓生牧丹)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에 적는다. 원래 모란은 덩굴이 지는 식물이 아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덩굴모란도 볼 수 없다. 그런데 《지봉유설》과 《대동야승(大東野乘)》에는 덩굴모란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대동야승》의 기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모란은)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심고 있으나 아직까지 덩굴로 나는 것은 없다. 함경도 경흥(慶興) 땅에 바로 덩굴로 난 모란이 있는데, 식자들은 생각하기를 여기를 금(金)나라 황룡부(黃龍府)의 땅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부(府)에서 6~7일의 일정밖에 안 걸리기 때문이다. 금나라 사람이 송나라 간악(艮岳)의 화목을 다 옮겨다 황룡부에 심었다는데 이것은 그 종자다.
또 고찰해 보면 송경(松京, 지금의 개성)에 진봉산(振鳳山)이 있는데, 도성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몇 리 안 가서 옛 절터가 있는데, 돌틈에 덩굴로 된 모란이 있다. 붉은것과 흰것이 서로 섞여 나와 돌 위에 뻗었는데, 사람들이 옮겨다 심으려고 해도 그 뿌리가 돌 사이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캐어 내지 못한다. 산불이 나서 매양 타 버리지만 죽지도 아니한다.
위의 기록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실제로 그러한 식물이 존재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그런데 우리나라 도자기의 무늬 가운데는 모란꽃이 덩굴과 함께 그려져 모란당초문(牡牧丹唐草紋)이라 불려지는 문양이 많다. 그러나 이것을 실재로 있는 덩굴모양을 본따서 만든 문양으로 보기는 어렵고 아마 모란문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또 부귀의 연속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것으로 생각된다.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
모란이라는 이름은 꽃색이 붉기 때문에 란[丹]이라 하였고, 종자를 생산하지만 굵은 뿌리 위에서 새싹이 돋아나므로 수컷의 형상이라고 모(牡)자를 붙였다. 학명은 Paeonia suffruticosa ANDR.이다.
중국 원산으로서 신라 진평왕 때에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원에서 가꾸고 있으나 때로 약용식물로 재배하기도 한다.
높이는 2m 정도 자라며 가지가 굵고 털이 없다. 잎은 어긋나고 2회 우상복엽이며, 소엽은 다시 두세 개로 갈라지기도 하고 표면에는 털이 없다. 꽃은 5월에 피고 양성이며 지름은 15㎝ 이상이고, 홍자색이지만 백색·홍색·담홍색·주홍색·농홍색·자색 및 황색이 있다.
꽃잎은 5∼7개인데 많은 꽃잎이 달리는 품종이 개발되어 있다. 꽃이 피는 기간은 2∼3일이지만 꽃잎이 많은 종류는 7∼10일간 피기도 한다. 꽃은 아침부터 피기 시작하여 정오에 절정에 달한다.
뿌리의 껍질은 해열·진통·진경(鎭痙)·구어혈(驅瘀血)·통경(通經)·양혈(凉血)·소염(消炎)의 효능이 있어 약재로 이용한다. 약성은 양(凉)하고 신고(辛苦)하다. 각종 열성병의 항진기(亢進期), 골증노열(骨蒸勞熱)·경간(驚癇)이나 각종 혈행장애·월경불순·폐경·질타손상(跌打損傷)·옹종(癰腫) 등에 탕(湯)·환(丸) 또는 산제(散劑)로 하여 복용한다.
또, 모란은 예로부터 부귀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설총(薛聰)의 「화왕계(花王戒)」에서도 모란은 꽃들의 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강희안(姜希顔)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화목 9등품론이라 하여 꽃을 9품으로 나누고 그 품성을 논할 때, 모란은 부귀를 취하여 2품에 두었다.
이와 같은 상징성에 따라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이 수놓아졌고, 선비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염원하는 모란꽃이 그려졌다. 왕비나 공주와 같은 귀한 신분의 여인들의 옷에는 모란무늬가 들어갔으며, 가정집의 수병풍에도 모란은 빠질 수 없었다. 또, 미인을 평함에 있어서도 복스럽고 덕 있는 미인을 활짝 핀 모란꽃과 같다고 평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꽃을 즐기기 위하여 주변에서 가꾸는 키 작은 낙엽활엽수이다.
크게 자라나면 2m 정도의 높이에 이르면서 여러 개의 굵은 가지를 친다.
잎은 깃털 꼴로 갈라지고 갈라진 잎 조각은 다시 3~5개로 얕게 갈라진다. 잎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뒷면은 흰빛을 띠면서 약간의 잔털이 생겨나 있다. 잎 조각의 생김새는 계란 꼴 또는 피침 꼴이다.
가지 끝마다 지름이 15cm를 넘는 큰 꽃이 1송이씩 피어난다. 꽃은 15~16장의 꽃잎으로 이루어진 겹꽃이며 한가운데에 자리한 큰 씨방을 많은 수술이 둘러싼다. 꽃잎의 크기는 고르지 않으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결각이 생겨나 있다. 꽃의 빛깔은 보랏빛을 띤 붉은빛이 많고 그밖에 흰빛이나 분홍빛 꽃이 피는 개체도 있다.
꽃이 지고 난 뒤에는 세 갈래로 갈라진 열매를 맺게 된다.
중국이 원산지인 꽃나무로 전국 각지에 널리 심어지고 있다.
생약명은 목단피(牧丹皮). 단피(丹皮)라고도 한다.
봄 또는 가을에 뿌리껍질을 굴취하여 속의 딱딱한 부분을 제거한 다음 햇볕에 말린다. 쓰기에 앞서서 잘게 썬다. 경우에 따라서는 썬 것을 볶아서 쓰기도 한다.
패오놀(Paeonol), 패오놀라이드(Paeonolide), 벤조익산(Benzoic acid) 등이 함유되어 있다.
해열, 진통, 소염, 진경, 통경 등의 효능이 있으며 어혈을 풀어주기도 한다. 적용질환으로는 각종 열병, 어린아이들의 간질병, 혈행장애, 월경불순, 월경이 막히는 증세 등이다.
말린 약재를 1회에 2~4g씩 200cc의 물로 뭉근하게 달이거나 가루로 빻아 복용한다.
(몸에 좋은 산야초)
모란화주
두통이나 요통에 마시는 술로 알려져 있다. 특히 혈액을 맑게 해주는 효능으로 잘 알려져 있고, 여성들의 월경불순과 자궁질환, 산후에 오는 여러 가지 질병과 증세를 치료하는데도 효과가 뛰어난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모란꽃은 ‘목단화’ 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부귀와 아름다움 또는 화려함을 상징하는 꽃으로 알려져, 동양화에서 화조도와 군방도에 빠지지 않을 만큼 많은 선비들로부터 사랑받았다. 또 ‘탐화봉접(探花蜂蝶)’이라고 하여 꽃에는 으레 벌과 나비가 찾아드는데 ‘모란에는 향기가 없어 벌과 나비가 깃들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꽃이다.
만주의 목단강(牧丹江)이 원산지라 하여 목단(牧丹)으로 불리며, ‘꽃 중의 왕’이라 해서 사찰이나 부잣집에서 정원수로 가꾸었다. 5월 이전부터 5월 중순에 걸쳐 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꽃이 만개하기 전에 꽃봉오리째 채취하도록 한다.
꽃을 갈무리하는 방법으로 흐르는 물에 깨끗하게 헹궈서 건져낸 다음, 고운 망사주머니에 넣고 탈수기에 넣어 탈수를 시키면 꽃봉오리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할 수가 있어 좋다. 물기를 뺀 꽃은 채반이나 소쿠리에 담아 서늘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두고 건조시킨다. 이때 완전한 건조를 위해 자주 뒤집어 주다보면 꽃술의 노란 화분이 떨어지면서 꽃잎에 달라붙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가능하다면 따뜻한 장판이나 온돌 위에서 단기간에 걸쳐 건조시키도록 하는 것이 좋다. 또한 꽃의 탈색을 막기 위해서는 검은 면보를 이용하여 덮어주는 것도 요령이다.
모란화주를 빚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예를 들어 꽃을 먼저 안치고 술밑을 그 위에 덮어 안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 경우 발효가 활발해지면서 꽃잎이 수면으로 다 떠올라 표면이 오염되는 일이 발생한다.
다른 방법은 꽃을 술밑과 직접 버무리는 것으로 앞의 방법에 비해 효과적이었다. 그리고 생화를 이용해 본 결과 그 빛깔이나 맛, 향기가 썩 좋지를 못하여 건조시킨 모란꽃을 사용하였는데, 꽃 속의 화분이 많은 관계로 발효가 순탄하질 못했고, 주면 위에 엷은 막이 생성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이는 화분 속 남아 있는 정유성분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어 자주 걷어주면서 발효를 진행시켰는데, 여느 가향주와 비교해 발효기간이 7일이나 더 소요되었다.
따라서 모란꽃을 채취할 때에는 꽃술을 제거한 후 건조시키는 방법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며, 꽃을 송이째 채취하여 건조시킨 것이라면 꽃가루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을 것이므로, 덧술의 양조용수에 꽃을 넣고 오랫동안 끓여서 수면으로 떠오른 지방과 꽃가루 등을 바가지를 띄워 제거하는 방법이 좋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꽃을 술밑과 함께 버무려 술독에 담아 안치는 방법으로 빚어 본 모란화주의 향기는 은은하여 거부감 없이 좋았으나, 약간 쓴맛과 함께 떫은맛도 느껴졌다. 이는 꽃가루로 인한 발효지연 또는 약성으로 인한 효모 활동의 억제와 무관하지 않으며, 술이 숙성되기까지 전체적인 발효기간이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발효가 끝나는 대로 채주하는 것이 술의 변질을 막을 수 있다. 채주하여 냉장고에 넣어 둔지 10여일 경과한 후에는 부드럽게 되었다.
(한국의 전통명주 5 - 꽃으로 빚는 가향주)
모란과 선덕여왕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선덕여왕의 공주시절 일화가 전한다. 당나라에서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보고 선덕여왕이 "꽃은 비록 고우나 그림에 나비가 없으니 반드시 향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씨앗을 심어 본즉 과연 향기가 없었다. 이에 선덕여왕의 영민함을 모두가 탄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은 선덕여왕이 배우자가 없음을 당 태종이 조롱한 것이라 하여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모란 그림에 벌·나비가 없는 것은 모란꽃이 향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시에 있어서도 간혹 모란에는 향기가 없음을 읊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선덕여왕의 〈모란도〉에 관한 일화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란꽃에는 분명히 향기가 있고 벌·나비도 날아든다. 당나라 위장(韋莊)은 백모란을 읊은 시에서 "뜰에 들어서자 그윽한 향기 풍겨오네(入門唯覺一庭香)"라고 하여 모란의 향기를 상찬하고 있다. 또 고려시대 이인로(李仁老)는 〈미개모란(未開牧丹)〉이란 시에서 "봄 추위가 동산에 꽃 피는 것을 억제하니(春寒勒却小園花) 춤추는 나비와 노니는 벌이 그리워한들 무엇하리(舞蝶遊蜂欲戀何)"라고 하여 모란꽃에도 벌·나비가 날아들 수 있음을 읊고 있다. 그리고 시에서는 일반적으로 매화의 향기를 암향(暗香)이라 하고 난초의 향기를 유향(幽香)이라고 한 데 대해 모란의 향기는 이향(異香)이라고 했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데 모란꽃에는 분명히 향기가 있으나 다만 꿀벌이 오지 않는 것은 냄새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하고 물리학에 밝은 사람이 한번 상고해 볼 만한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지은 영봉시(詠蜂詩)에서 곱게 핀 모란꽃에 벌이 가지 않는 것은 부귀화라는 이름을 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읊고 있다.
그러면 당나라에서 보낸 〈모란도〉에는 왜 벌·나비가 그려져 있지 않았을까?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부터 모란꽃에는 나비를 같이 그리지 않는 법식이 있었다. 그것은 모란 그림에 나비를 그려 넣게 되면 모란꽃은 부귀를 뜻하고 나비는 질수(耋壽, 80세)를 뜻하기 때문에 부귀질수, 즉 80세가 되도록 부귀를 누리기를 기원한다는 뜻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즉 나비를 그려 넣는 것이 오히려 영원히 부귀를 누리라는 의미를 제한하는 것으로 되어 그리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선덕여왕은 아마 이러한 독화법(讀畵法)의 원리를 몰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모란의 씨를 심었더니 정말 향기가 없더라는 말은 호사가들이 꾸며낸 말일 수도 있다. 또는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내기 위한 육종과정에서 꽃은 크고 색깔은 화려하면서도 향기까지 좋은 것은 배합하지 못해서 향기없는 꽃이 핀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 3)
ㅁ뻐꾹새소리(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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