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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회 마카베오기 상권 9-16장
1마카 9,1-22 유다 마카베오가 베렛에서 전사
데메트리오스는 니카노르의 죽음에 대응하여 그의 군사 지휘관인 바키데스를 유다인 대사제 알키모스와 함께 다시 유다 땅으로 파견한다. “데메트리오스는 니카노르와 그의 군사들이 전장에서 쓰러졌다는 보고를 받고, 우익군과 더불어 바키데스와 알키모스를 다시 유다 땅으로 보냈다. 그들은 길갈로 가는 길로 행군하여 아르벨라의 매살롯을 향하여 진을 치고, 그곳을 점령하여 많은 사람을 죽였다”(1-2).
시리아 군대와 맞서 싸우기에 유다 군대는 역부족이었다. 유다 마카베오는 수적으로 턱없이 부족한 상황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싸우는 길을 선택한다. “그러나 유다는 그러나 유다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들 앞에서 달아나다니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죽어야 할 때가 닥쳤다면, 동포들을 위해서 용감하게 죽어 우리의 명예에 오점을 남기지 말자’”(10)라고 독려하며 흩어지는 군사들을 말렸다. 유다 군대는 많은 병사의 진지 이탈로 사기를 잃는다. “이스라엘을 구한 분”(9,21)인 유다는 용감하게 싸웠지만 역부족으로 엘라사 전투에서 전사하고 병사들은 도망친다. 기원전 160년 봄에 일어난 일이다. “요나탄과 시몬은 자기들의 형제 유다의 주검을 거두어, 모데인에 있는 조상들의 무덤에 묻고,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온 이스라엘도 크게 통곡하고 여러 날을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19-20). 죽은 유다 마카베오의 뒤를 이은 요나탄과 시몬의 강력한 영도력은 기원전 142년에 이르러 정치적 독립을 실현시킨다.
1마카 9,23-73 요나탄이 지도자가 되다
이스라엘 영토는 시리아 군대와 “무도한 자들”(9,23)로 간주되는 친시리아파 유다인들에게 시달리던 상태로 되돌아간다. 유다의 장교들(“유다의 벗들”)은 유다의 동생 요나탄에게 독립 투쟁의 지휘권을 맡아달라고 청한다. “당신의 형 유다가 죽은 뒤로는, 적들과 바키데스와 우리 민족을 미워하는 자들에게 유다처럼 맞설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의 후계자로 당신을 뽑아 우리의 지도자로 삼고 우리의 전쟁을 지휘하게 하였습니다”(28-30). 그때부터 요나탄은 자기 형 유다 마카베오의 후계자가 되었다. 요나탄(기원전 160-143년)은 유다 마카베오의 아우이며 그의 계승자였다. 그는 계속해서 용감하고 영리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바키데스가 이 사실을 알고 요나탄을 죽이려 하자 요나탄과 그의 부대는 트코아 광야로 물러난다. “바키데스는 이 사실을 알고 요나탄을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요나탄과 그의 형 시몬과 그의 모든 군사는 그것을 알고, 트코아 광야로 달아나 아스파르 못 가에 진을 쳤다. 바키데스도 안식일에 그 사실을 알고서 전군을 이끌고 요르단을 건넜다”(32-34). 바키데스는 안식일에 요르단 강가에서 요나탄의 군사들과 전투를 벌렸다. 안식일이지만 요나탄 부대는 목숨을 다해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바키데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비키데스는 요나탄과의 전투를 벳 바시에서 벌렸지만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요나탄과 그의 형 시몬은 트코아 마을 바로 북쪽에 있는 벳 바시를 요새화함으로써 거주 지역 안에 발판을 마련한다. 두 형제는 계속해서 치명적인 공격을 감행하며 바카데스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마침내 화친 조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 비키데스는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기로 작정하였다. “요나탄은 그 사실을 알고 그에게 사절을 보내어, 화친을 맺고 포로들을 넘겨 달라고 하였다. 바키데스는 이를 받아들여 그의 말대로 하였다. 그는 일생 동안 내내 요나탄을 해치려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전에 유다 땅에서 잡아간 포로들을 요나탄에게 넘겨주었다. 그 뒤에 바키데스는 자기 나라에 돌아가서 다시는 유다인들의 땅에 들어오지 않았다”(70-72).
이제 요나탄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미크마스에 근거지를 두고 유다 산악지방을 다스리는 권한을 얻는다.
1마카 10,1-89 요나탄이 대사제가 되다(기원전 160-143년)
쫓겨났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전 왕 안티오코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에피파네스는 반란을 일으켜 프톨레마이스에 상륙해 그곳을 점령한다. “백육십년에 안티오코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에피파네스가 프톨레마이스에 상륙하여 그곳을 점령하였다. 사람들이 그를 환영하자 그는 그곳에서 왕위에 올랐다”(1). 이 사건은 기원전 153년 9월에서 152년 10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자 데메트리오스는 군대를 보내고 요나탄이 알렉산드로스와 화친을 맺기 전에 먼저 화친을 맺자는 작전을 세웠다. 먼저 데메트리오스 임금은 요나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데메트리오스는 요나탄에게, 자기의 동맹자가 되어 군대를 모으고 무장시키는 권한을 주었다. 그리고 성채에 가둔 인질들을 요나탄에게 넘겨주라고 명령하였다”(6). 요나탄의 권력은 특히 셀레우코스 제국을 붕괴시킨 권력 투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며 강해지기 시작한다.
서로 요나탄을 데려가기 위해 벌인 경쟁이 알렉산드로스는 요나탄에게 대사제직을 제안한다. “‘알렉산드로스 임금이 요나탄 형제에게 인사합니다. 우리는 귀하가 대단히 강력한 인물로서 우리의 벗이 될 만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귀하를 귀 민족의 대사제로 임명하고, 임금의 벗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편이 되어 우리와 우정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스는 그에게 자주색 옷과 금관을 보냈다. 이렇게 하여 요나탄은 백육십년 일곱째 달 초막절에 거룩한 사제 옷을 입었다. 그리고 그는 군대를 모으고 많은 무기를 마련하였다”(18-21). 마타티아스가 사제 가문의 사제였음은 분명하나 합법성을 인정받는 대사제가 될 수 있는 가문은 오니아스 가문뿐이었다. 요나탄이 기원전 152년에 알렉산드로스를 통해 대사제가 된다. 이렇게 시작된 하스모네아 가문의 대사제직은 기원전 37년까지 유지된다. 알렉산드로스는 요나탄에게 대사제직뿐 아니라 유다의 사령관과 통치자의 자리까지 줌으로써 그에게 보답하였다.
데메트리오스(10,25-45)는 알렉산드로가 요나탄에게 해준 대우를 보고 더 좋은 조건으로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데메트리오스는 유대 민족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기까지 하였다. 그는 요나탄에게 대사제직 직분과 세금에 대한 면세, 유다인들 3만명의 대한 군대 편승하여 일자리 창출을 마련토록 해준다고 약속하였다. 데메트리오스는 성소 건물 보수와 예루살렘 성벽 보수도 약속하였다. 요나탄은 데메트리오스가 이스라엘에서 저지른 악행으로 그의 협약을 맺지는 않았다. 그때에 데메트리오스는 알렉산드로스와 전투 중 전사하였다. 따라서 알렉산드로스는 왕위에 올라 이집트의 파라오 프톨레미오스에게 서신을 보내 딸 클레오파트라와 혼인을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이집트 임금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러한 말을 전하였다. ‘내가 이제 나의 왕국으로 돌아와서, 조상들의 왕좌에 오르고 통치권을 잡았습니다. 데메트리오스를 무찌르고 우리 영토를 되찾은 것입니다. 나는 그와 전쟁을 벌였는데, 그와 그의 군대가 우리에게 패배하여, 우리가 그의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서로 우호 관계를 맺읍시다. 따님을 내 아내로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사위가 되어, 임금님의 품위에 맞는 선물을 임금님과 따님에게 드리겠습니다’”(51-54). 이처럼 알렉산드로스는 요나탄과 맹약을 맺었다.
한편 기원전 147년에 데메트리오스의 아들인 데메트리오스 니카토르는 크레타 섬에서 나와 아폴로니우스를 코일레 시리아의 총독으로 보낸다. 자신의 영토를 지나게 해달라는 아폴로니우스의 서신을 받은 요나탄은 분노해 시몬과 함께 군사 1만 명을 뽑아 예루살렘에서 나와 아스돗에서 결전을 벌였다. 아폴로니우스는 크게 패했으며 알렉산드로스 왕은 그 소식을 듣고 요나탄을 더욱 영예롭게 하고 많은 선물을 보낸다.
1마카 11,1-74 셀레우코스 왕가의 세력 다툼
아폴로니우스가 패배하자 데메트리오스 니카토르는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자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와 프톨레마이오스는 킬리키아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고 알렉산드로스는 전사했으며 프톨레마이오스도 3일 뒤 요새에서 사망한다. 그의 부하 장수들도 그곳 주민들에게 살해당하면서 데메트리오스 니카토르가 데메트리오스 2세로 즉위한다. 이제 정치적인 사건들은 요나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신속하게 전개된다. 따라서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6세 필로메토르는 팔레스티나의 해안 도성과 시리아를 점령하고 마침내 안티오키아를 손에 넣는다(11,1-13).
요나탄은 계속 알렉산드로스 편에 있으면서 아폴로니우스에 맞서 전투를 벌이고, 알렉산드로스는 더 많은 권력으로 요나탄에게 보답한다. 알렉산드로스는 프톨레마이오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죽는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도 죽자 데메트리오스 2세가 기원전 145년에 왕위를 이어받는다.(11,14-19)
그러자 요나탄은 외교를 통해 데메트리오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11,23-37), 심지어는 그의 국내 문제에까지 군사를 보내 그를 지원한다. “그래서 요나탄은 용맹한 병사 삼천 명을 안티오키아로 그에게 보냈다. 그들이 오자 임금은 그들의 도착을 반겼다”(44). 이렇게 하여 데메트리우스는 자기 왕좌에 다시 앉게 되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스는 모든 약속을 저버리고 요나탄에게 등을 돌린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한 모든 약속을 어겨 요나탄과 사이가 나빠졌다. 데메트리오스는 요나탄이 자기에게 베푼 호의에 보답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몹시 괴롭혔다”(53).
이런 정치적인 기만행위는 요나탄이 데메크리오스의 적인 트리폰에게 접근하게 했다. 트리폰은 알렉산드로스 발라스의 어린 아들 안티오코스 6세를 이용해서 임금이 되려고 기회를 넘보고 있었다(11,54-59). 마침내 요나탄은 기도의 힘으로 기원전 144년 하초르 전투에서 데메트리오스 2세의 군대를 물리친다(11,63-74). “요나탄은 자기 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뿌리며 기도하였다. 그러고 나서 적군과 싸우러 돌아가 그들을 무찌르자 그들이 달아났다”(71-72).
1마카 12,1-53 요나탄의 행적과 죽음
“요나탄은 좋은 때가 온 것을 보고, 로마인들과 우호 관계를 다지고 새롭게 하려고 사람들을 뽑아 로마로 보냈다”(1). 요나탄은 로마와 맺은 동맹을 강화하고 스파르타인들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요나탄과 시몬은 하맛 지방에서 다시 한번 데메트리오스의 장수들을 무찌르고 승리한다. “적군은 요나탄과 그의 군사들이 싸울 준비를 갖추었다는 보고를 듣고, 겁에 질려 마음이 졸아들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영에 불을 피워 놓고 후퇴하였다”(28). 이때 트리폰이 데메트리오스의 아들 안티오코스를 죽이고 왕이 되려 하자 요나탄은 이를 용납하지 않고 트리폰을 공격한다. “트리폰은 아시아의 임금이 되어 왕관을 쓰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안티오코스 임금까지 없애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는 요나탄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자기를 공격하리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그를 잡아 죽일 방도를 찾으며 벳 스안으로 떠나갔다”(39-40).
요나탄은 군사 4만명을 데리고 트리폰과 맞서 싸우려고 벳 스안으로 갔다. 그러자 트리폰은 요나탄을 후히 대접하고 군사를 돌려보내게 한다. 요나탄은 트리폰을 믿고 군사 대부분을 돌려보내고 단지 천명만을 데리고 프톨레마이스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트리폰의 흉계였고 요나탄은 그곳 주민들에게 붙잡혔고 그의 부하 장수들과 군사들이 살해당한다. “요나탄이 프톨레마이스에 들어가자 그곳 주민들이 성문을 잠그고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들어온 모든 군사를 칼로 찔러 죽였다”(48). 트리폰은 요나탄을 속여 이제 그들이 동맹이라고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고 나서 프톨레마이스(아코)로 그를 유인하여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그의 호위병들을 죽인다. 이때가 기원전 143년이다. 트리폰은 일 년 후에 요나탄을 처형했을 것이다. 이때는 모든 유다인이 죽음의 위협을 느끼던 시기였는데, 주변 국가들이 유다인들을 말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12,53).
1마카 13,1-53 시몬 마타니아스가 지도자가 되다(기원전 143-134년)
백성은 마타티아스의 둘째 아들 시몬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는 겸허하게 지도자 직분을 받아들여 예루살렘을 요새화하고 해안에 있는 야포를 점령하며 전쟁을 준비한다. 시몬은 주변국과 친교를 도모하는 정책을 통해, 여러 특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화평 정책 덕분에 유다는 드디어 하나의 독립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13,41-53).
트리폰이 침략한 후 시몬은 이전의 적 데메트리오스 2세와 화친 협상을 한다. 그는 시몬을 대사제로 인정하고 시몬이 세운 요새들도 그대로 놔두며 모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스라엘은 이민족들의 멍에에서 벗어났다.”(13,41)고 기록한다. “백칠십년에 이스라엘은 이민족들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백성은 모든 문서와 계약서에 ‘유다인들의 총독이며 지도자인 시몬 대사제 제일년’이라고 쓰기 시작하였다”(41-42). 기원전 142년에 일어난 일이다. 시몬은 ‘대사제, 총독이며 지도자’(1마카 13,42)가 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기원전 141년 예루살렘 서쪽에 있는 가자라(게제르)와 예루살렘 성채를 손에 넣은 것은 시몬이 성취한 중요한 군사적 업적이다.
1마카 14,1-49 시몬에 대한 찬미
시몬은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았다. 그는 예루살렘에 중앙 집권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방대한 영토를 확보하였다. “유다 땅은 시몬이 다스리는 동안 내내 평온하였다. 그는 자기 민족의 행복을 추구하였고 그의 권위와 영광은 언제나 그들의 마음에 들었다”(4). 시몬이 평화롭고 순조로운 통치를 하게 된 것은 서방 강국인 로마와 스파르타와 맺은 조약과 관련된다. “그 뒤에 시몬은 로마인들과 맺은 동맹을 재확인하려고, 무게가 천 미나 되는 큰 금 방패와 함께 누메니오스를 로마로 보냈다.”(24).
유다 백성들은 기원전 140년 9월 13일에 시몬의 가문에 대한 공덕비를 성전 뜰에다 동판으로 세워 놓았다. “이 나라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는데, 요야립의 자손인 마타티아스의 아들 시몬과 그 형제들은 성소와 율법을 지키려고 위험을 무릅쓰며 민족의 적들에게 맞서 싸워, 이 민족을 대단히 영광스럽게 하였다”(29). 시몬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도성의 안전을 위해 예루살렘 성벽을 높이 쌓아 올렸다. “이러한 일로 데메트리오스 임금은 시몬을 대사제로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그를 임금의 벗들 가운데 하나로 삼고 대단히 영광스럽게 해 주었다. 임금은 로마인들이 유다인들을 자기들의 벗이고 동맹자며 형제라고 부른다는 사실과 시몬의 사절들을 성대히 맞아들였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38-40). 로마인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민족과 ‘형제’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시몬에게 형제라고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시몬도 이를 받아들여 대사제가 되고 유다인들과 사제들의 총독과 영주가 되어 온 백성의 영도자가 되기로 하였다”(47). 시몬의 칭호는 그가 지닌 권력의 바탕으로 드러낸다. “대사제”는 유다의 전통, “총독”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인정, “영주”는 민족을 각각 제시한다. 사제들에 대한 시몬의 권위가 강조되는 것은 그들이 계속 오니아스 가문에 충성을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마카 15,1-41 안티오코스와 시몬의 갈등
기원전 137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3년 전 데메트리오스 2세가 페르시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히자(14,1-3참조) 데메트리오스의 형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가 왕위에 올라 먼저 시몬의 권력을 인정한다(15,2-9). “나는 귀하가 화폐를 주조하여 귀하의 지방에서 사용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예루살렘과 그 성소는 자유 구역입니다. 귀하가 마련한 모든 무기와 귀하가 세워 지금 차지하고 있는 요새들은 그대로 귀하의 것입니다”(6-7).
그러나 안티오코스는 트리폰을 제거한 후 예루살렘 성채뿐 아니라 야포와 가자라 성읍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시몬에게 점점 적대적인 태도를 취한다. 시몬은 이 요구를 거절한다(15,25-36). “그러니 이제 당신들이 점령한 성읍들을 돌려주시오. 또 유다 영토를 빼고, 당신들이 차지한 지역에서 거둔 세금을 내놓으시오. 아니면 그 대신에 당신들이 저지른 파괴의 대가로 은 오백 탈렌트를 바치고, 성읍들의 세금으로 오백 탈렌트를 더 내시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가 가서 당신들과 싸우겠소”(30-31). 시몬은 안티오코스에게 500달란트 대신 100 탈란트를 바친다고 하였다. “화를 내며 임금에게 돌아갔다. 그가 시몬의 말을 전하고 시몬의 영화와 자기가 본 모든 것을 보고하니, 임금은 크게 분노하였다. ”(36). 그리하여 시리아 군대가 켄데배오스의 지휘 아래 유다를 공격하기 위해 진격한다. “켄데배오스는 얌니아로 와서 백성을 괴롭히고, 유다 땅에 침입하여 백성을 사로잡고 살해하기 시작하였다”(40). 켄데배오스는 얌니아로 가 물건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괴롭혔다.
1마카 16,1-24 시몬의 아들의 승리와 시몬과 아들들의 죽음
시몬은 이제 나이가 들어 직접 전투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몬은 켄데베오스의 만행에 대해 아들이 유다와 요한에게 전투에 임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늙고 너희는 자비를 입어 어른이 되었다. 그러니 너희는 나와 내 동생의 뒤를 이어, 나가서 우리 민족을 위하여 싸워라. 하늘이 너희를 도와주시기를 빈다”(3). 시몬의 아들들인 유다와 요한은 해안 근처의 키드론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켄데배오스를 물리친다. “그때에 요한의 동기 유다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요한은 계속 적들을 뒤쫓았다. 켄데배오스는 마침내 자기가 요새로 세운 키드론까지 쫓겨 갔다”(9).
‘마카베오인들’의 이야기는 시몬과 그의 아들들인 유다와 마타티아스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시몬의 사위이자 아부보스의 아들이며 “예리코 평야의 장수”(16,11)인 프톨레마이오스의 예리코 근처의 요새 독에서 잔치를 열고 그들을 초대한 후 살해한다. 기원전 134년에 일어난 일이다.
“아부보스의 아들은 흉계를 써서, 자기가 세운 독이라는 작은 요새로 그들을 맞아들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그는 그곳에 병사들을 숨겨 두었다. 시몬과 그의 아들들이 술에 취하자, 프톨레마이오스와 그의 군사들이 일어나 무기를 들고, 연회장에 있는 시몬을 덮쳐 그와 그의 아들들과 종 몇 사람을 죽였다. 그는 이렇게 큰 반역을 저질러 선을 악으로 갚았다”(15-17).
그 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 사실을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 안티오코스 7세에게 알려 군사를 보내달라고 했다. 그리고 시몬의 남은 아들 요한을 죽이려고 가자라로 군대를 보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요한도 죽이고 유다 전체를 지배하려고 했지만 요한은 도피해 요한 히르카노스라는 이름으로 그의 아버지를 계승한다. 이제 하스몬 왕조가 시작된다. 요한은 이에 깜짝 놀라 자기들을 죽이러 온 병사들을 미리 알고 그들을 죽였다. 이를 끝으로 마카베오기 상권의 기록은 마무리된다. “요한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이끈 전쟁과 그가 보여 준 용맹, 그리고 그가 성벽을 복구한 일이며 그 밖의 업적들은,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사제가 되었을 때부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23-24).
마카베오기 상권의 신학적 주제들
① 율법에 대한 성실성 : 마카베오기 상권은 주로 전쟁과 국제 정치에 대한 세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오늘날의 신앙인 독자를 당황스럽게 하는데, 성경책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내용들이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 이름이 언급되지 않으며, 하느님 개입을 증명하는 어떤 기적도 나오지 않는다. 어떤 예언자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도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신앙을 표현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인들도 찾아 볼 수 없다. 이 책은 후대의 이스라엘 독자에게 나라의 정체성에 대한 의식을 심어주는 소중한 이야기 모음으로 형성되어 있어 오늘날 이스라엘 군대를 위해 사용된다. 그러면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신앙인 독자는 오늘날 이 책 안에서 어떻게 종교적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가?
하느님과 율법에 대한 절대적 공경은 마카베오기 상권이 가장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박해 중에도 유다인들은 하느님과의 계약에 성실하기 위해 사투를 벌렸다. 저자는 마카베오 가문의 노력이 하느님과의 계약에 성실하기 위한 것이었음을 강조한다. 특히 마타티아스의 유언에서는 이러한 측면을 잘 제시하고 있다(2,50.64).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공경은 ‘하느님’이라는 호칭 대신, ‘하늘’(3,19) 혹은 ‘그분’(2,61), ‘당신’(7,37)이라고 하는 데에서 두드러진다. 특별히 ‘하늘’은 하느님을 경외하여 이리는 간접 표현으로서, 구약 성경의 일반적인 통념과는 구별된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 전반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주변에 늘 존재하시는 분이다. ‘야훼’라는 이름 자체가 ‘존재하시는 분’을 의미하고, ‘임마누엘’ 역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특별히 성소와 성전에 현존하시는 분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카베오기에서는 ‘하늘에 계신 분’이라는 신약 성경적 표현이 이미 발견되고 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정의와 율법 준수는 서로 구체적으로 상응하며, 하느님께서는 율법에 성실한 이들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러한 측변에서 마카베오기 상권은 마카베오 가문이 이룩한 승리를 그들 군사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으로 고백한다.
② 새 예언자의 등장에 대한 희망: 예언의 부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4,46). 이 부재는 불행의 요소 가운데 하나다(9,27). 따라서 이는 에언자들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예언자가 나올 때까지”(14,41) 기다리는 태도다.
참된 예언자가 나올 때가지 유다인들과 사제들은 시몬을 지도자와 대사제로 받아들인다(14,41). 이 백성은 하느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은 사람들의 개입 대신 종교 제도를 선택한다. 역대기계 역사서안에서처럼 초기에는 성전과 대사제 직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율법과 계약에 대한 충실을 강조한다. 하느님이 어떤 극적인 방법으로 당신 백성에게 접근하기를 바라시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는 제도적인 종교가 하느님께 접근하는 방식이 된다.
마카베오기 상권 4장 46절과 14장 41절에 의하면 유다인들은 하느님의 뜻을 물어야 할 때 이를 알려 줄 새 예언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예언자가 와서 말해 줄 때까지, 그 돌들을 성전 산 적당한 곳에 쌓아 두기로 하였다”(4,46). “또한 유다인들과 사제들은 이러한 내용에 동의하였다. ′참된 예언자가 나올 때까지 시몬이 계속 그들의 지도자와 대사제가 된다”(14,41). 이는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 줄 미래의 예언자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준다. 동시에 하느님의 뜻이 명백하기 전에는 아무리 지혜로운 판단이라고 해도 인간의 판단만으로는 사소한 일조차 처리하지 않았던 신학적 자세를 가르쳐 준다.
③ 역사 안에서 실재하는 하느님: 마카베오기 상권에서 하느님은 직접 개입하지도 등장하지도 않으시며, 구체적으로 거론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유다와 그의 형제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 구원 역사는 늘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는 하느님뿐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4,30). “그는 적군이 강한 것을 보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이스라엘의 구원자께서는 찬미받으소서. 당신께서는 당신 종 다윗의 손으로 거인의 공격을 물리치시고, 사울의 아들 요나탄과 그 무기 당번의 손에 필리스티아인들의 진영을 넘기셨습니다”(4,30).
이 책에서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노력은 성공을 거두고 만족스러운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저자는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기 위해 어두운 심연을 응시하지 않는다. 마침내 하스몬 왕조가 설립되고 이스라엘은 ‘이민족의 멍에’에서 풀려난다.
이러한 만족스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투쟁 중에는 어떤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기원전 1세기로 접어들 즈음 과거를 돌이며 보면서 저자는 “하늘에서 오는 힘”(3,19)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마카베오기 상권에서 기적적인 구원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과 역사의 자연스런 사건 안에서 하느님의 도움을 볼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하느님의 통제 아래 있을 때 역사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성찰할 때만 알 수 있다. 그러나 미래는 알려지지 않고 궁극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 이는 하느님 부재의 표징이 아니다. 하느님은 신비로서 현존하신다. 치열한 투쟁의 시기에는 유다와 그의 형제처럼 신앙과 용기로 이 신비에 직면해야 한다. 이들은 현재의 순간에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올바른 것인지를 보았다. 궁극적으로 하느님은 그의 백성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신다. 그러나 상황을 나쁘게 하는 패배와 죽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유다가 승리를 바라며 하느님께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도움에 대한 신뢰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흥미롭게 결합되는 것을 본다. “하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3,60). 하느님을 통한 승리를 희망하면서도 유다는 끊임없이 전쟁에서 자신의 죽음을 준비한다(9,8-10). 하느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기도는 승리를 가져다주는 마법 정식이 아니다. 하느님은 기도로 조종되지 않는다. 기도와 신뢰는 성공을 가져오는 마법 정식이 아니다. 사실 마카베오기 상권은 몇 가지 패배를 평온하게 이야기한다. 유다도 마지막에 그의 형제들과 함께 적들의 손에 살해당한다.
저자는 마카베오기 상권의 이야기 곳곳에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의 율법에 충실해야 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분을 섬겨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내세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초기 하스몬 가문 사람들의 죽음과 성전의 영광에 대한 열정 때문에 싸우다 죽은 사람들의 죽음은 거룩한 신비로서 하느님에 대한 신앙의 완벽한 본보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