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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이사야 30:15~18
우리는 오늘 저녁에 지난 주일 저녁에 한번 살펴본 이사야 30장 15절 말씀과 그 이후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차근차근 살펴보고자 합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이 패역한 자식과 같이 말을 잘 듣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하여 권면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15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구원을 얻을 방도와 힘을 얻을 방도를 말씀해주셨습니다. 회개하여 조용하고 잠잠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께 자기의 나라와 가정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생사화복을 맡기면 고난과 역경 중에서 구원을 얻고 힘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정신 못 차리다가도 나라에 환난이 생기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돌이켜서 회개하며 성전에 모여 금식하며 매달리면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셔서 국난에서 그들을 구원해주시고 적은 군사력을 가지고도 많은 적군을 물리친 예가 허다했습니다. 사사 시대에도 그러하였고 사울과 다윗과 그 후 아사 왕, 여호사밧 왕, 아마샤 왕 등의 시대에 이런 일을 늘 반복되어 일어났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자기 백성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불쌍히 여겨주시고 조용하고 잠잠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친히 일어나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사야 선지자 당시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해주셨어도 그들이 그 말씀을 들었습니까?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라는 말씀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께 도움받는 것 자체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줄 수 있다고 믿지 않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을 역사를 통하여 알고 있었지만 원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믿었고, 하나님이 영광받기를 싫어하고 무엇인가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을 들을 때 역겨워하며 싫어해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면 도리어 저렇게 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참으로 부모의 말을 거역하는 패역한 자식과 같았습니다.
자, 그러면 그 패역한 유다 백성들이 이렇게 친절하고 자상하며 간절하게 설득하려고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16절에 그들의 반응이 나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또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가 빠르리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에게 돌이키라고, 조용히 있으라고, 잠잠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그렇게 간절하게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는 말 타고 도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말합니다.
“우리는 빠른 짐승을 탈 것입니다.”
원문에 보면, 15절에는 “하나님이 말하시길”로 시작하는데, 16절에는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일종의 대조적 강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돕기 위하여 말을 하십니다. 그런데 악한 자, 불신앙자, 패역한 자들은 가만히 듣고만 있지 않습니다. 순종하기는커녕 그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도리어 자기 말을 막 늘어놓습니다. 자기들의 계획을 말합니다. 호기롭게 자기 생각을 선지자 앞에서, 곧 하나님 앞에서 말로써 무서운 것 없이 말을 줄줄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는 자의 행태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렇게 행한 자들은 반드시 큰 고난과 패가망신합니다. 아사 왕의 말년이 그러하였고 아마샤 왕이 그러했고 아합 왕이 그러했고, 여호야김 왕이 그러했습니다. 반면에 평소에 말이 많다가도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엄중한 책망의 말씀을 하시면, 즉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자기 입을 꼭 다물고 그 말씀을 다 듣고는 조용히 자기를 반성하고 근신하면서 영적으로 부흥되어 주님의 그 말씀대로 사는 실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 왕도 그러했고 여호사밧 왕도 그러했고 히스기야 왕도 그러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잘못도 범하고 실수도 있었지만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운 도우심을 입고 문제들을 잘 해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렸습니다.
전도서 5:1~2 말씀에 이르기를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늘에 계신 지존자임을 기억하면서, 그가 땅에 거하다가 티끌로 돌아가는 비천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겸손히 귀 담아 듣기를 힘쓰고 함부로 입을 열지 말고 급한 마음으로 말하는 자가 되지 맙시다. 가까이 하여 그의 말씀을 듣는 제사가 우매한 자가 많은 기름진 제물을 들는 것보다 낫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차분하게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얼마든지 말씀하시도록 발언권을 내어드리고 우리는 겸손히 그 말씀을 경청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늘 간절히 바랍시다. 그것이 우리가 마땅히 취할 자세요 복을 받을 자세인 줄 믿습니다.
16절에 보면, 하나님은 그 유다 백성들이 거역하는 마음으로 불쑥 입으로 내뱉은 말들을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그 입술로 낸 말대로 되게 하시되, 부정적인 그 말대로 거두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도망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고 말하였으니, 그들이 빠른 말을 타고 도망을 치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탄 빠른 말보다 더 빠른 말을 탄 침략자들이 도망치는 그들을 쫓아가서 따라 잡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 보면 이렇게까지 다 사람들이 패망하게 되겠다고까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꾸짖은즉 천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다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그야말로 적군 한 사람이 꾸짖으니까 유다 백성들 천 명이 도망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적군 다섯 명이 겁주니까 다 도망치는 신세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남은 자의 수가 산꼭대기의 깃대, 곧 원문의 의미로는 산 위에 ‘봉화 불 올리는 곳’이라는 뜻도 있는데 그것처럼 외롭게 남을 것입니다. 산 마루 위의 기치처럼 될 것이라고 했는데, ‘산 마루의 기치’란 곧 당시 유다의 무당들이 점치는 산당 위에 깃발을 올려놓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깃발 같이 처량하게 바람에 흩날리는 고적한 신세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천안 다가동에도 고가도로를 운전하다 보면 무당집을 알리는 대나무 깃대 위에 매달린 낡은 태극기가 바람에 찢겨져서 보잘것 없이 휘날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보잘것없고 외롭고 희귀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시 유다의 고위 관리들이 전쟁의 위협에 맞서 애굽에 사절단으로 가서 말과 병거들을 대거 수입하고 많은 말들로 무장하여 앗수르 군대와 맞서 싸울 수 있는 군사력을 증강하려고 하지만, 결국은 이렇게 나라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에 져서 최후가 오면 그렇게 애굽에서 확복하여 얻어온 말들을 타고 애굽으로 도망치고 후방인 에돔과 드단 지역으로 도망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허사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애초부터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당시의 최첨단 병기였던 기병대, 마병대, 철병거로 무장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력을 의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원하셔서, 일찍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게 되면 그 왕은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신명기 17:16 말씀에,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다윗은 그대로 순종하였으니, 그가 이스라엘 전역을 통합하여 왕이 되어 이방 나라들과 싸울 때에 저 북쪽 시리아 지역의 강대국이었던 소바 왕 하닷에셀의 군대와 맞서 싸워 승리한 후에 많은 마병과 병거들을 얻었지만,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습니다. 발의 힘줄을 끊은 말은 더 이상 전쟁터에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당시 말은 최고의 전쟁 무기였는데도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노획한 발들을 자기의 군대에 군사력으로 바꿔 쓰지 않고 그렇게 힘줄을 끊어 쓰지 않는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 솔로몬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아랑곳하지 않고, 말과 마병을 애굽으로부터 많이 수입하여 보유하였으니, 무려 병거의 말 외양간만 사만이요 마병이 만 이천 명이나 되었습니다(왕하 4:26). 이외에도 솔로몬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후궁 칠백과 첩 삼백 명, 도합 천 명이나 되는 아내를 얻었으며, 은금을 많이 쌓지 말라고 명하셨으나 솔로몬은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았으니, 그의 마음에 말씀을 듣지 않는 거역의 정신이 점점 자라나 나중에 우상 숭배의 깊은 나락으로까지 떨어지고 말게 된 것입니다. 무릇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두려워 지키려고 힘을 다합시다. 하나라도 무시하지 말고, 모든 계명과 성령의 책망과 교훈을 마음에 두고 항상 다 지키려고 몸부림칩시다.
이처럼 나라를 위한 방어력을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전쟁 무기와 군사의 수를 증강하는 데 두고, 그래도 안 되면 그 수입해온 말들을 타고 도망치자고 말하는 그들의 불신앙은 훗날에 그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히스기야 왕 때는 그일을 간신히 면했지만 훗날에 유다 시드기야 왕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와서 오랫동안 포위공격하다가 마침내 성벽이 무너졌을 때입니다. 성안에 있던 시드기야 왕과 신하들이 말을 타고 여리고 평원까지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느부갓네살 군대의 빠른 말이 쫓아오니 피하지 못하고 다 체포되어 끌려갔습니다. 느부갓네살 왕 앞에 끌려간 시드기야 왕은 그 눈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죽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시드기야 왕도 그 눈이 뽑혀서 소경이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참 선지자 예레미야가 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또 바벨론과 싸우지 말고 항복하라고, 그러면 그와 그 가족이 멸망당하지 않으리라고 권면했으나 그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 신하들의 교만하고 헛된 말만 듣더니 결국 그런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사람 바라보고 환경 바라보고 흔들리고 정신없이 부정적이고 두려움에 가득찬 말을 쏟아내는 자가 되지 맙시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같이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말고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애굽의 바로와 그 병거들을 바다에 수장시키는 용사 아닙니까? 그가 일어나시면 순식간에 얼마든지 말과 병거들을 망하게 하실 수 있는 분 아닙니까? 사울 왕이 다윗을 찾아 수색할 때에 다윗이 자기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하여 자기를 찾으러 나온 사울의 수백 수천 명의 수대 부대가 머무는 야영지에 자기 부하 한 사람과 몰래 들어가서 사울 왕의 창과 물명을 훔쳐 나올 때 그렇게 많은 병사들이 그 곁에 있었지만 그들은 다 쿨쿨 잠을 자서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잠들게도 하시고 깨게도 하시고, 일시에 군대를 망하게도 하시고 적은 군대로서 대군과 맞서 싸워 이기게도 하시는, 전쟁에 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여러 전쟁의 위협 속에 살고 있지만 주변 열강의 강한 군사력의 틈바귀 사이에서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맙시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신뢰하는 자가 됩시다. 우리 죄를 고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내 믿음을 두지 아니함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을 우리의 방패와 산성으로 삼고 마음에 담대함을 얻고 평안함을 누리는 자가 됩시다. 그리고 부정적인 말, 도망치겠다는 말, 이런 말을 하지 맙시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녀들을 지켜주실 것을 담대히 구합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술의 말과 고백을 들으시고 그 들은 말씀 그대로 복을 주시고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18절은 하나님께서 다시 그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믿음을 격려해주시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앞 부분에서 그들의 패역하고 부정적인 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말한 대로 심판하시고 그들이 적군 앞에서 형편없이 패하고 깨어져서 나라가 망하고 그 많던 백성들이 다 도망치고 죽어서 겨우 산꼭대기 깃대와 산마루의 깃발처럼 소수가 되어 외롭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엄혹한 징계를 예고하시지만 하나님은 지금 이사야 시대 백성들을 향하여 다시금 위로와 소망과 믿음의 말을 주시면서 회개하여 지금이라도 하나님게 돌아와서 은혜와 긍휼을 받도록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여기서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라고 하였는데, ‘기다린다’는 이 히브리어 단어는 ‘하카’로서 ‘지체한다, 체류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뜻도 있지만 ‘시간적으로 당장 시행하지 않고 우물쭈물 기다리면서 기회를 준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악한 유대 백성들을 당장 심판해도 시원치 않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당장 심판하지 않고 또 시간을 지체하면서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금 기다리면 그 사이에 다시금 은혜를 받을 만한 회개와 순종과 믿음으로 다시 돌아설 수 있을까 하고 기다리며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신앙을 저버리고 믿음이 식어지고 세상 길로 나아가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인이 악을 행하여도 당장 심판하지 않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기회를 그들에게 계속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을 지체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8,9, 말씀에서도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서두리지 않고 지체하시는 까닭은 악한 자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택한 자들에게도 죄를 버리고 온전한 성화에 이르도록 기회를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6~9 말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심판하기를 미루시며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 신자들에게 열매 맺을 기회를 주십니다. 이와 같이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지체하시곤 합니다. 그 기회를 선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 말씀에,
“또 하나님이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는 일은 주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백성의 원수들을 대적하시고 자기 백성은 불쌍히 여기시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 시대에 언약궤가 옮겨질 때에 언제나 하나님께 모세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민수기 10:35,36 말씀에 보면,
“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궤가 쉴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주의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며 주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구원해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02:13 말씀에서도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고 하셨으니, 이 말씀을 기억하며 고난 중에 소망 가지고 인내합시다.
또한 오늘 본문 18절 말씀에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정의’라는 히브리 단어는 ‘미쉬파트’입니다. ‘미쉬파트’의 뜻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사법적 심판을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일의 작정과 계획과 시행을 가리킵니다. 잠언 16:33 말씀에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는 말씀에 ‘작정’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그러나 셋째로 ‘미쉬파트’의 더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통치, 주권, 권세, 다스림’을 뜻하는 의미입니다. 즉 단순한 사법적 판단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전적인 통치와 그 섭리적 다스림을 가리킵니다.
시편 36:6 말씀에,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주의 ‘심판’이 바로 이 단어인데, 여기서의 뜻은 하나님의 다스리는 통치의 섭리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다스리는 통치의 섭리는 큰 바다와 같아서 그 속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의 깊이를 알 수 있습니까? 그의 섭리는 깊고 넓은 바다처럼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1:33 말씀에 보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라고 사도 바울이 탄성을 지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놀라거나 두려워하거나 성급하게 앞지르지 맙시다. 묵묵히 기도하면서 그 섭리의 통치 아래 겸손하게 기다리는 자가 됩시다.
또한 그의 섭리적 통치는 큰 바다 같아서, 아무리 많은 흙탕물 강물이 흘러들어가도 얼마 있다가는 그 바다의 맑은 물에 다 정화되고 맙니다. 이처럼 아무리 악의 강물이 세상을 다 삼켜버릴 듯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의 통치의 바다로 들어가면 다 합력하여 선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는 계기가 되어버립니다. 바로 그러한 뜻이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시라”는 말씀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이 혼란스럽고 불의가 창궐한 것 같고 불의한 세상 힘이 영원할 것 같지만, 정의의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분이 다스리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의 깊은 섭리는 다 알 수 없지만 분명 하나님이 다스리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난리와 악인의 압제와 불의의 흙탕물을 주께서 다 받아들이고 심판하시어 결국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바른 질서를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아무리 세상이 뒤숭숭해도 그를 믿고 신뢰하합시다. 이제 하나님은 이렇게 선지자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권면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마지막 문장을 우리 함께 읽읍시다.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끝까지 기다립시다. 내가 먼저 무엇인가 성급하게 행하려고 나서지 맙시다. 좌절하고 낙심하고 분노하지 맙시다. 그가 지금 다 지켜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다만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때가 되면 그가 일어나실 것이요 그가 세상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기다리는 자가 참으로 복된 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