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Query(func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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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jQuery(e.target).closest('#rSocialShareLayerContainer').length === 0 && laye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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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ainer.h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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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x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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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r KAKAO_LINK_CUSTOM_DATA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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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jQuery("meta[property='og:title']").attr('content'),
'${description}': jQuery("meta[property='og:description']").attr('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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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Url}': 'http://cafe.daum.net/simdook2965/9mqi/3?svc=cafeapi',
'${mobileWebUrl}': 'https://m.cafe.daum.net/simdook2965/9mqi/3?svc=cafeapi',
'${EncodingUrl}': encodeURIComponent('https://m.cafe.daum.net/simdook2965/9mqi/3?svc=cafeapi')
}
}
};
// https://kakao.agit.in/g/300010501/wall 관련 서비스 아지트
// https://wiki.daumkakao.com/pages/viewpage.action?pageId=451027880 관련 문서
var scrapUrl = 'http://scrap.cafe.daum.net/_dss_/scrap?location_id=1YjdJ&folder_id=9mqi&data_id=3';
if(CAFEAPP.FLDTYPE === "V") scrapUrl = 'http://scrap.cafe.daum.net/_dss_/scrap?location_id=&folder_id=&data_id=';
var layerBtn = document.getElementById('rSocialShareButton');
new socialshareRenewal.Main(layerBtn, {
moreViewContainer: document.getElementById('rSocialShareLayerContainer'),
action: 'click',
link: 'http://cafe.daum.net/simdook2965/9mqi/3?svc=cafeapi',
prefix: jQuery("meta[property='og:title']").attr('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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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 scrapUrl, //카페 스크랩용 url http://wiki.daumkakao.com/pages/viewpage.action?pageId=319097174 참고.
kakaoAP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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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LinkData: KAKAO_LINK_CUSTOM_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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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Query(function () {
bookmarkController.in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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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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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연 - (당신의 마음)(1973)
방주연 - (당신의 마음)(1973) (김지평 作詞 / 김지평 作曲)
바닷가 모래밭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당신을 그립니다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에 미소까지 그렸지만은 아아아 아아아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코와 입 그리고 눈과 귀 턱 밑에 점 하나 입가에 미소까지 그렸지만은 아아아 아아아 마지막 한 가지 못 그린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는 당신의 마음,
본명이 방일매인 방주연은 1951년 1월 25일 상업을 했던 집안의 2남1녀 중 장녀로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친의 사업 때문에 부산 해운대로 이사를 해 성장했다. 해운대 초등 학교 시절 학교 육상 선수였던 그녀는 활동적인 아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또다시 서울 청량리로 이사를 했다.
그녀는 '꽃과 나비' 등 수백 곡의 노래 말을 남긴 작사가 이기도 하다. 특히 이수미와는 불꽃 튀는 라이벌로 70년대 초, 중반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여가수다.
휘경 초등 학교로 전학을 오자 억센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까투리'란 별명으로 놀림을 받자 한동안 풀이 죽어 지냈다. 덕화 여중에 진학할 무렵, 말투가 교정이 되었다. 활발함을 되찾자 응원 단장으로 맹활약하며 학교의 명물이 되었다. 2학년 때 덕화 여상으로 월반을 했다. 여고 2학년이 되자 부모 몰래 음악 학원에 다니며 드럼 배우기에 정신을 빼앗겼다.
몇 달 후 “드럼을 제법 잘 치는 여고생"이라는 소문이 나자 그룹 결성 제안이 들어오기도 했다. 당시 그녀는 드럼 외에도 노래 가사를 틈틈이 써 67년 7월 엔 한국 음악 저작권 협회의 창작 분과 위원회 작사가 회원으로 가요계에 첫발을 디뎠다.
노래 실력도 만만치 않았던 그녀는 고3이 되자 가수가 되기로 작정, 부모님 몰래 '김부해 가요 학원'에서 정식 노래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공부는 관심 밖으로 밀려 났다. 그래서 시험 때 커닝을 하다 적발이 되어 '2개월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류 학자가 되길 바라는 부모님의 희망에 따라 서라벌 예대 문예 창작과에 입학을 했다. 1학년 2학기 등록금 미납 사건. 가수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그녀는 2학기 등록금으로 학원 레슨비와 음반 제작비로 사용한 것이 들통 나 집안의 반대에 부닥쳤다. 두문불출 4일간의 단식 투쟁을 벌였다. 급기야 방에서 목을 매달고 자살하려는 딸의 완강한 모습에 그녀의 부모는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 부친은 '주연'이라는 예명을 지어주는 적극적인 협조자가 되었다.
대학을 중퇴하고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하면서 69년엔 재일동포 위문 공연단으로 일본에 갔다. 이때 평론가 서경술의 눈에 들어 데뷔 앨범 <민해송/방주연-신세기.70년>을 발표하며 정식 가수로 데뷔했다. 데뷔 초기 가수로는 예명인 방주연을, 작사가로는 본명인 방일매를 사용했다.
데뷔 곡 '슬픈 연가'등 5곡을 발표하며 트로트 가수로 출발한 방주연은 활달한 성격에 시원한 창법으로 가창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오아시스에 전속되어 '밤비가',' 알고 싶어요' 등을 발표하고 70년 12월 자신이 작사한 '꽃과 나비'를 처음으로 히트시켰다. 71년 9월, 당시는 양희은, 은희 등 포크 가수들이 기세를 올리던 시기. 트로트 가수 방주연은 작곡가 김영광과 손을 잡고 포크 계열의 가수로 변신해 첫 독집에서 타이틀 곡 '그대 변치 않는다면'과 은희의 '꽃반지 끼고'와 제목만 다른 '오솔길'을 발표했다. 이 음반은 젊은 층에 크게 어필하며 빅히트를 기록했다. 이후 방주연은 포크 팝 계열과 트로트를 병행하는 활동을 했다. 72년 초 김영광의 신곡 '여고 시절'을 놓고 방주연과 이수미는 신경전을 벌이면서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2월에 이수미가 '여고시절'로 4월에는 방주연이 '당신의 마음'으로 대히트를 기록하며 팽팽한 접 전을 벌였다. '당신의 마음'은 동화처럼 아름답고 애틋한 가사와 멜로디로 대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그녀의 대표 곡이 되었다. 7월에 발표한 세 번째 독집에서는 '자주색 가방',' 기다리게 해놓고', '연화' 등 3곡이 동반히트를 터트리며 방주연은 1회 한라 문화제에서 10대 가수상을 받고, 난영가요제는 2회 3회 연속 수상하며 인기 퍼레이드를 벌였다. 하지만 73년 이후 별다른 히트곡을 내지 못하고 김민기의 '아침 이슬', 황규현의 '애원', 김세환의 '토요일 밤'등 포크, 팝 계열의 히트곡들을 리메이크하며 절치부심 했지만 점차 내리막 길로 접어들었다. 77년 사업가 강현모씨와 결혼을 하면서 가요계를 떠났던 그녀는 양장점 '센스 패션'을 경영하다 82년 6월 트로트 곡 '공항 대합실'을 발표하며 6년 만에 컴백을 했다. 이후 이산 가족 주제가인 '한 맺힌 정'을 발표했지만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인기가수가 되어 팬들의 환호를 받았다.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그를 향한 팬들의 환호와 함께 엄청나게 쏟아져 들어오는 돈,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 가수로서는 최고의 인기를 누렸으며, 1970년대 한국 가요계에 우뚝 선 진정한 스타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의 몸은 병마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당시 자의 반 타의 반 덕망 있는 의사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그리고 1979년 어느 날 덜컹 임파선 암 선고를 받았다. 엄청난 병마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몸서리를 쳤다. "의사이셨던 시아버지는 50대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슬픔도 겪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년 뒤 자신마저 암을 선고 받았을 때는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했다.
결혼 초기에 자신이 왜 이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나 억울하고 분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특히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음악을 결국에는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냉정하게 현실에 타협을 시도한다. 자신의 병마를 자연요법으로 이겨내고 암흑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인생을 펼쳐나가길 결심한다.
세상을 아름답게 산다는 의미로 이름도 <방세미>로 바꿨다. 이것은 <방주연>이 가수 이외로서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암에 걸렸을 때 자신의 몸을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 같았다고 한다. 그것을 알고 싶어서 그녀는 1천 권 이상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는 몸이 나아갔다. 몸이 나으니까 자신이 터득한 첨단파동 요법을 전파해야겠다는 사명감에 의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현재 그는 의리학(醫理學) 박사로 경희대 교수를 맡고 있다. 매주 화요일 4시간 동안 경희대학교 본관에서 강의 한다. 그리고 목요일에는 명지대에서 2시간 동안 강의하고 학점제 운용을 한다.
가수에서 교수로 변신해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방세미>, 그의 노래 대부분이 영원히 깜박거린 그리움을, 그림 그리듯 섬세한 감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소녀와 성숙한 여인의 중간쯤의 분위기에서 보여준 그녀의 독특한 감각의 노래들..., 전성기때 모델을 능가하는 매력적인 외모에 가수로서의 화려함과 쇼적인 감각도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가수로 <방주연>은 영원히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