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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송아지 상 : 탈출 32,1-6
직역하면 수송아지 상이라는 내용입니다.
탈출 32,1 직역
그리고 그 백성은 보았다. 모세가 지연함을
그 산에서 내려오는 것을
지연한다는 것은 늦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탈출 32,1 직역
그리고 그 백성은 모였다. 아론 주위에
그리고 그들은 그에게 말했다.
탈출 32, 1 직역
"자, 우리를 위해 만드시오.
엘로힘을( 신들을) 우리 앞에 걸어갈"
엘로힘을, 신들이라고 번역하여합니다. 복수형이라서, 그리고 '걸어갈' 이라는 동사가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으로 쓰였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위해 우리 앞에 걸어갈 신들을 만드시오. ⇒ 이 표현은 텍스트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도발적인 것입니다. 우리 앞에 걸어갈 신을 하나를 만드든 것이 아니라 신들을 만드시오. 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이 유일신이 아닌 다신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 신들을 만듦 : 이스라엘의 다신적 신관
나중에 이 문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자기를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조금 있습니다. 숫송아지를 만든 것에 대해서 하느님이 그들을 벌줄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학적으로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아 ! 우리가 숫송아지를 만들긴 만들었지만 그게 다른신의 신상을 만든 게 아니라 야훼 하느님 신상을 만든겁니다. 라고 자기들을 변호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텍스트를 쓴 사람은 그 여지마저도 없어버린 겁니다. 뭐라고 얘기하는 것이냐면 아! 우리에게 "야훼 하느님의 신상을 만들어 주십시오." 라고 얘기하지 않고 "우리에게 신들을 만들어 주십시오. 앞으로 이끌어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탈출 32,1 직역
"왜냐하면 이 모세
우리를 올라오게 한 그 남자
이 표현에서 냉소적인 느낌을 보셔야 합니다. 이 모세, 그 남자
탈출 32,1 직역
이집트 땅으로부터 우리는 알지 못한다.
무엇이 그에게 있었는지"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모세라는 사람한테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는지 우리는 모르겠으니까, 건 모르겠고 아무튼 이제부터 우리가 어디론가 가야하니까, 이집트로 못 돌아가니까( 야훼 존재자체를 긍정하는 거 같지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끌고 어디론가 갈 신들을, 아론 당신이 지도자니까, 만들어 주시오. 라고 명령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말로는 그 어감이 잘 안살아나는데 여기서 보면
탈출 32,1 직역
그 백성은 모였다. 아론 주위에
이것은 조금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미 원로들이란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원로들을 통해서 아론에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아론 주위에 모여왔다는 건데 , 이것이 히브리말 어감으로는 아론이 조금은 위협감을 느낄수 있는 상황
▶ 백성이 아론 주위에 모임 : 위협의 어감
실제로 뒤따르는 내용을 보면, 백성들의 과격한 요구를 우리가 만날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계약을 맺었습니다. '예, 하느님이 말씀하신대로 따르겠습니다.' 라는 백성들의 응답을 우리는 세번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미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의적으로 제사도 지냈고, 모세는 그들에게 피도 뿌렸고 그리고 나서 그들은 제의적으로 마지막에 그것이 완성되는 식사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 계약에 관해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한게 아니라 본인들이 계약에 관해서 충분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결정을 한겁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내용입니다. 자신들의 의지로 그 결정을 했느냐? 그렇지 않느냐?
오늘날 교회 안에서 혼배 성사를 했을 때 혼배는 풀수 없습니다. 그런데 혼배를 무효화 할수 있는 경우가 생깁니다. 신부님이 본당에 계실 때 신자분이 오셔서 '제가 사회적으로 이혼을 했는데 이게 교회적으로도 혼인 무효가 될 수 있는지 생각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 신부님이 교회법원에 그 내용을 들고갑니다. 그랬을 때 본당 신부님이 이것이 혼인 무효의 사유가 되는지 안되는지를 알기 위해서 첫번째로 판단하는 게 신랑과 신부가 혼배 성사의 그 시점에서 충분히 누군가의 강요나 그런것 없이 동의하에 혼인했는가? 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강요했다는지, 아니면 채무 채권 관계가 있었다던지, 아니면은 어떤 이유로든 간에 신랑과 신부가 ‘아! 나는 이사람이랑 혼인했어야하니까…’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혼인에 대해서는 무효화 될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 성사 안에서도 그런것이 반영되어 있듯이, 교회 안 성사 안에서 자리 잡은 것처럼 이미 그것은 성경 안에서도 굉장히 주요하게 이루어 지는데 그것이 바로 하느님과의 어떤 계약을 맺던지 어떤 신과 인간사이에 있어서 어떤 약속이 있을때, 제일 중요한 것은 충분히 그 내용에 관한 인식이 있었고 거기에 대해서 동의 하는가? 라는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교회법 안에 본인이 동의하지 않으면은 세례를 주어서는 안 된다. 라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가끔씩 내 딸이랑 결혼하려면 세례를 받아야 돼네, 라는 말로 세례를 받는 경우에, 교회법이랑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게 옳은가? 교회 정신에 부합하는가? 에 관해서 '우리 집안이랑 혼인하려면 천주교 신자여야 합니다.' 이라는 것이 교회의 정신에 맞는가? 그 사람은 세례를 받지만 본인의 의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좀 이상합니다. 아론한테 백성들이 와서 우리 앞에 걸어갈 우리 앞을 인도할 신들을 만들어 주십시오. 인간이 신들을 만들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좀 이상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엘로힘을 만들 수 있을까?
탈출기가 전제하는 구약의 세계에서는 신과 신상이 동일시 됩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백성의 요구는 다른 신이 아니라 야훼의 신상을 만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토라는 그 조차도 엄격하게 금지했습니다.
이미 그들이 맺은 계약의 내용들입니다.
신상
º 레위 19,4 : 너희는 몸을 돌려 우상들에게 가서는 안된다.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º 레위 26,1 : 너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거나 신상이나 기념 기둥을 세워서는 안 된다. 또 조각한 돌을 너희 땅에 놓고 그것에 절해서도 안 된다.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신상 자체를 만들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예언서에 가서도,
신상
º 호세 14,4 : 아시리아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저희가 다시는 군마를 타지 않으렵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우리 하느님!" 이라 말하지 않으렵니다. 고아를 가엾이 여기시는 분은 당신뿐이십니다.
º 예레 16,20 : 사람이 스스로 신들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까? 그런 것들은 신이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상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대목들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신앙 생활에 대해서 성찰해 볼 필요는 있을것 같습니다.
우리의 몇몇분들이 얘기하는 그와 같은 우리들의 믿음들, 그런것들을 보면서 그런 심볼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지시하는 그것을 보아야 하는데 성모님의 마음을 닮는다는 것, 하느님께서 성모님에게 그와 같은 요청을 했을 때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십시오.' 라는 그 기도가 나의 기도가 되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성모상을 만들어 놓은 건데, 그런데 사람들은 그 앞에서 혹시 천주교 신자들 중에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지는 않을까? '백일 기도를 했더니 우리 아들이 좋은 대학을 갔어요.' 이런 것들,
신부님이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묵주를 백미러에 걸어놓고 있는겁니다. '아! 한편으로는 성모신심이 강한 분이시구나.' 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게 왜 저기에 걸려있을까?' 묵주는 기도하는 도구인데 기도하는데 쓰이지 않고 왜? 부적처럼 쓰이는 것은 아닐까? 라는 것들.
그래서 천주교에서부터 갈려나간 개신교를 가보면은 십자가에 예수님이 없습니다. 그것이 우상이 될수 있다. 그런것들을 애기해 놓는, 또 갈려나간 종교 개혁의 역사를 보면 그것을 우상처럼 혹시 섬기는 그와같은 문화가 우리 안에 있지는 않았는지 그런것들에 관해서 우리들이 성찰해 볼수 있습니다.
반대로 개신교에서는,
신부님이 독일에 계실 때 독일 개신교 신학자분들과 얘기를 해보면 독일 개신교는 그런면에서 철저합니다. 그렇다 보니까 독일 개신교에서는 자꾸 '우리가 사실은 인간의 종교적인 심성때문에 그런 심볼이 필요한데 그 심볼들을 다 없애버렸기 때문에 참 난감하다.' 라고 이야기하는 개신교 신학자들을 만나신 경험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 개신교에 교류가 있으셔서 예배당에 가셨는데 십자가에는 예수님이 없지만 스테인드글라스에서는 그런 심볼들을 많이 만들어 놓은거 같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도발적이라서 그런 얘기는 못하지만, 나오시면서 '어, 저건 개신교 신학에 위배되는데...' 라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개신교 신학이건 천주교 신학이건, 구약에 정신을 우리가 이어받은 그리스도교라면은 우리들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어떤 형상에 잘못된 권위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물신주의 세상에서는 그런 형상에다 권위를 부여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이 돈 에다가 숫자적어 놓고 그것을 섬기는 좀 이상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어디까지 우상의 범위를 애기할 것이냐? 관해서는 굉장히 많은 신학적인 토론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신들은 우리 앞에 걸어갈, 복수형이 쓰였습니다.
탈출 23,20절을 기억한다면 야훼는 이미 백성을 인도할 천사를 약속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신들, 즉 복수형태로 엘로힘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엘로힘이 그들을 어떻게 또 어디로? 인도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 텍스트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앞서 말씀하신 대로 '이 모세' 이집트 땅에서 우리를 올하오게 한 '그 남자' 이와 같은 표현 안에는 약간의 조롱의 어조가 담겨 있습니다.
▶ 이 모세, 그 남자 : 조롱의 어조
이와 같은 조롱의 어조를 텍스트가 어떻게 이어받고 있는지 조금 있다가 함께 볼수 있습니다.
탈출 32,2 직역
그리고 아론이 그들에게 말했다.
"금의 고리들을 떼어 내시오.
너희들의 여인들의 두 귀에 있는
그리고 너희들의 아들들과 딸들의
그리고 그들을 내게 오게 하시오."
여기서 좀 이상합니다. '너희들의 여인들과 아들들과 딸들에 금으로 만든 고리들을 가지고 오라고 하는데 정작 '너희들 한테 달려있는 금의 고리들을 가려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잘모르겠다. 라고 하는 해석과
이스라엘의 풍습에서는 남자들은 귀걸이를 귀나 코에 걸지 않았습니다. 여자들과 애들만 걸었다. 라는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가지는 남자들한테 다 가져오라는 것보다 이렇게 다 가져오라고 하면서, 유다 랍비들의 해석입니다만, 아론이 좀 시간을 끌려고 했을 거다. 라는 그와 같은 표현입니다.
여기서 아론이 왜 다양한 장신구나 패물중에 꼭 금으로 만든 귀걸이을 만지는지에 대해서 텍스트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텍스트를 문학적으로 본다기 보다는 영적으로 묵상하고 있는 그런 분들은 교부들의 강론이라던지 이럴때는 이부분을 어떻게 설명하냐하면 왜? 고리가 코에 거는 것도 있는데 귀에 거는 것만 얘기했느냐? 라고 하면,
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기관이라서 귀에 거는 고리만을 텍스트은 여기에서 애기하고 있다. 귀라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라는 신학적인 묵상의 해설을 우리는 만나기도 합니다.
탈출 32,3 직역
그리고 모든 백성은 떼어냈다.
금의 고리들을
여기서도 모든 백성입니다.
탈출 32,3 직역
그들의 두 귀에 있는
그리고 그들을 오게 했다. 아론에게
따라서 백성은 아론의 명령을 상당히 충실하게 준수합니다.
탈출 32,4 직역
그리고 그는 받았다. 그들의 손으로부터
그리고 그는 주조했다.거푸집으로
거푸집이라는 것이 금을 녹여서 부어만든 틀 같은것 입니다.
탈출 32,4 직역
그리고 그는 그것을 만들었다. 수송아지
상으로 그리고 그들은 말했다.
"이들이 너희 엘로힘이다. 이스라엘
너를 올라오게 한 이집트 땅으로부터"
여기 나온 단어들이 조금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여기서 '그는 주조했다. 거푸집으로' 이것을 그는 만들었다. 또는 빚었다. 끌로
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금을 녹여가지고 어떤 틀에다가 부어서 이 형상을 만들었다. 라고 볼수도 있고 금을 한덩어리로 만든 다음에 그것을 조각하듯이 부셔내서 이 상을 만들었다. 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는 수십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물처럼 만들었다.' 와 '조각가처럼 만들었다.' 라는 두 가지 해석이 다 가능하겠다. 라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2열왕 5,23에서
엘리사가 나하만을 떠나면서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하만이 그렇다면 할수 없죠. 그 다음에 흙을 가지고 가고 있는데 엘리사의 하인이 자기 욕심때문이었는지 아니면은 자신이 섬기는 예언자를 위해서 선물을 좀 받았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기때문인지 모르지만 나하만을 쫒아갑니다. 그래서 '그것을 나한테 주시오.'라고 하니까 나하만이....
판관 8,25 은 기드온 이야기입니다. 기드온이 이스마엘 사람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거기서 얻은 전리품들 중에서 귀고리를 얻는 부분이고 거기서 '이스마엘인들은 남자들도 귀고리를 하였기때문에.' 이와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것은 바꿔 얘기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자들이 귀고리를 하지 않았다. 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그는 주조했다. 거푸집으로
① 주물처럼 만듦 ② 조각처럼 만듦 ③ 금을 자루에 묶음
라는 표현으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수송아지의 상? 사람들이 고개를 가우뚱합니다. 왜냐? 고대 근동은 굉장히 많은 땅을 이미 파냈습니다. 벽화도 보고 신상들고 발굴이 되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수송아지의 모습은 발견이 안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거 수송아지라고 생각을 했는데 여기에는 약간 폄훼의 의도가 있지 않겠느냐? 우리가 누군가와 심하게 싸우면서 비속어를 쓸때 ** 개야! 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와 비슷한 개의 아들이나 딸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따라서 여기서도 사실은 뿔이난 건강한 젊은 황소일텐데, 그것을 부를 때 '야 이 수송아지야!' 라고 부르는 내용으로 이것을 이해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수송아지 상?
º 시편 106,19-20 : 그들은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쇠를 부어 만든 상에 경배하였다. 그들의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와 바꾸었다.
송아지라는 말은 나오지만 사실 실제의 소의 모습은 젊은 황소의 모습이 아닐까? 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그 황소의 모습은 자주 바알과 동일시 되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든 수송아지 상은 야훼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그의 사자를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은 고대 이집트의 벽화같은 것을 보면 형상은 사람의 형상인데 머리만 동물의 형상일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집트학 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조금 갈리기 시작하는게 옛날에는 그걸 이집트의 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 이집트학 하는 사람들이 '아, 그것들은 이집트의 신의 모습이 아니라 이집트의 신들이 보낸 천사의 형상이다.' 라고 하면서 그것은 신은 아니고 그 신을 섬기는 천사들이 심부름 온 모습을 그렇게 형상화 한거다. 라는 주장과 함께 여기서 수송아지상을 만들었대도 그건 야훼를 직접 애기한 것이 아니라 야훼의 명령을 받고 야훼와 이스라엘 사이에서 소통하는 그 천사를 형상화 한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석하는 주석학자들도 있습니다.
탈출 32,5 직역
그리고 아론은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 앞에 제단을 지었다.
그리고 아론은 외쳤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내일은 야훼의 축제이다."
여기서 히브리 말로 '본다' 라는 동사와 '두려워 한다' 라는 동사가 발음이 좀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어떤 사람들은 텍스트를 약간 점을 다르게 찍어서
그리고 아론은 두려워 했다 ⇒ 백성들이 그렇게 수송아지 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그래서 그는 제단을 짓고 내일은 야훼의 축제날이다. 라고 외친것이다고 유다 전통은 아론을 좀 보호하는 의미에서 랍비들이 다르게 읽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보면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아론이 신상을 만들고 사람들이 신상에 절을 하니까, 이 신상은 야훼의 신상이고 이 신상은 야훼를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이제 축제를 보내자! 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당장이 아니라 내일이라고 했을까? 그것도 랍비들은 계속 아론을 보호하고 싶어합니다. 그렇다 보니까 오늘 하는 것보다 조금더 시간을 가지려고 그렇게 얘기한 것이 아니냐? 라고 이 부분을 해석하기도 합니다.
재밌는것은 ?
이런 축제의 내용, 수송아지의 내용이 1열왕12,25 -28 에서 등장을 합니다.
스켐이라는 곳에 수도를 정했다가 프누엘로 수도를 옮겼다가 그러면서
예로보암은 마음속으로 '어쩌면 나라가 다윗 집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님의 집에 희생 제물을 바치러 올라갔다가, 자기들의 주군인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마음이 돌아가면, 나를 죽이고 유다 임금 르하브암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궁리 끝에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다.
따라서 어떤 주석학자들은 왜 앞에서 복수를 썼느냐? 금송아지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서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1열왕 12,28
그리고 백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
지금 탈출기 32장에서 우리가 만나는 텍스트와 1열왕 12,25-28에서 만나는 텍스트가 거의 똑같습니다.
1열왕 12,29
그러고 나서 금송아지 하나는 베텔에 놓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다.
1열왕 12,32
예로보암은 여덟째 달 열닷샛날을 유다에서 지내는 축제일로 정하고, 제단 위에서 제물을 바쳤다. 이렇게 그는 베텔에서 자기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자기가 만든 산당의 사제들을 베텔에 세웠다.
1열왕 12장을 쓴 이 저자는 신명기계 역사서입니다. 신명기계 저자는 이것때문에 나중에 북이스라엘이 망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명기적인 관심은 이 금송아지 이야기를 탈출기 까지 역으로 투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본래의 탈출기의 역사에서 자기 백성이 하느님을 조금 의심했거나 그런 이야기 일수도 있을텐데, 그 이야기 안에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어. 옛날에도 한번 그랬는데 나중에 또 그렇게 된거야. 그러니까 그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런식의 메세지가 거기 담겨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아무튼 여기에서도 보면,
아론이 축제를 지내자고 하는데 1열왕12장에서 보면 여덟째 달 열닷샛날에 베텔에서 예로보암이 이와 같은 제사와 축제를 지냈다는 기록을 만나게 됩니다.
이 텍스트는 탈출 32,5절은 1열왕12장과 대응관계에 있다. 라고 주석가들은 이 대목을 서로 연결해서 이해합니다.
탈출 34,6 직역
그리고 그들은 기상했다. 다음날에
그리고 그들은 오름 제물을 올렸다.
오름 제물을 우리 성경에서는 번제물 이라고 하는데, 히브리 말에서는 올라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제물을 태워서 연기가 올라가니까,
탈출 34,6 직역
그리고 그들은 친교 제물을 가져왔다.
여기서 말하는 친교 제물은 샬롬이라는 단어를 갖고 옵니다. 그런데 '친교'라는 의미가 우리가 알고 있는 평화에 반대말인 '전쟁'과 관련해서,
A라는 나라와 B라는 나라가 전쟁에 상황에 있는데, A라는 나라가 항복하는 겁니다. '샬롬' 이라는 말에는 항복이라는 의미가 그 안에 숨어있습니다.
▶ 샬롬(shalom) 항복함으로써 평화가 맺어진다는 의미
그러면서 평화가 맺어지는 겁니다. A 라는 나라가 B라는 나라에게 곡물을 주면서 그런 곡물과 함께 평화가 맺어지는 것,
또 이 샬롬이라는 말이 이슬람이라는 말에도 등장합니다. '이슬람(Islam)' 이라는 말 안에는 어원적으로 '나는 신에게 항복합니다.' 라는 말이 숨어있습니다.
따라서 친교 제물은 친구끼리 친교를 이루어요. 라는 낭만적인 의미가 아니라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를 하는 또 그 안에서는 그 두 관계가 동등하지 않은 하나가 다른하나에게 항복한다는 그런 어감도 함께 담겨있다. 라는 것을 기억합니다.
탈출 32,6 직역
그리고 그 백성은 앉았다.
먹고 마시기 위해
여기까지 보면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때와 비슷합니다. 축제를 하고 제사를 지내고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시나이 산에서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해서 백성이 야훼를 두려워 했다. 라는 이야길 합니다.
반대로 이 6절에서는,
신상인 거죠?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에 어떤 구름? 하느님의 불? 하느님의 소리? 이런거는 두려워 하면서도 정작 신상으로 보이게 하자,
탈출 32,6 직역
그리고 그들은 섰다.
놀기위해
두려움이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신부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십니다만, 괴기영화는 괴물이 등장하기 전까지가 무섭습니다. 괴물이 등장하면 그때부터는 우리가 싸우던지, 극복하던지 해결점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경외도 우리가 마찬가지 입니다.
하느님에 관해서 다 알수 있다. 아니면 상을 만들수 있다. 속속들이 하느님에 관해서 얘기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를 올바른 신앙으로 이끌지 못하는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리스도교를 얘기할 때, 우리들의 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다 알고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서 전혀 모르는 거야! 라는 불가지론을 말하면 그것도 교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서 다 알지도 못하고 전혀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 중간 어디에 있습니다. 어느만큼 알고 있느냐?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알려주시는 만큼 조금더 폼나게 신학적으로 얘기하자면?
하느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만큼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디까지 자신을 계시하셨느냐?
스스로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그리고 우리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시고 하지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만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스스로 사람이 되셨지만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우리는 하느님에 관해서 다 알지 못할뿐만 아니라 우리들에 관해서도 다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나 자신에 관해서도 다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가지 생각해 볼것들 입니다
첫째 여기서 '고리' 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요 고리라는 단어들이 구약에서 상당히 자주 등장하는 겁니다. 그런데 고리 그러면서 '금고리' 또는 '고리와 팔찌' 또는 '귀고리' '귀고리와 코고리'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코고리가 있었습니까? 왜 우리 말에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그런데 우리 전통중에 코걸이가 있었다는 말에는 장신구로 못들어 본것 같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귀고리, 코고리 다 발견됩니다. 그리고 구약에서도 역시 발견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전리품이고 그리고 여러가지 귀걸이. 팔찌, 브로치, 반지등이 구약에 있는 사람들이 주고 사용한 장신구였습니다.
특히 여기서 말하는 금고리는?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돌반지나 혼인 반지와 비슷합니다.
금반지라는 것은 실용적으로 비상금입니다. 나중에 살아가면서 정말 돈이 필요하면 이것을 팔아서 써라. 라는 의미입니다.
즉, 인간으로 살아가는 기본적인 부와 재산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고대 근동에 문화적인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그 당시에도 상당히 많은 신상들이 발견되는데 '금으로 주물을 한 경우' 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무나 흙으로 신상을 만들어서 돈이 많은 임금이나 부자인 경우 거기에다가 금을 입힙니다. 그런 경우는 발견이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아까 사람들이 금을 가져오니까 아론이 그것을 자루에 묶었다. 고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지않겠느냐? 그리고 나서 금으로 만든 숫송아지 상을 만들때도 사실은 흙이나 그런걸로 만든 다음에 그 위에 금을 입혔는데 그 과정은 텍스트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는건 아니냐? 라고 전체를 해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이해하면서 우리들이 함께 읽어볼 수 있는 텍스트는?
1열왕12장, 25-33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축제' 라는 단어를 유심히 봐야합니다.
축제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항상 함께 묶여 있습니다.
① 하느님 앞에서의 엄숙한 시간 ② 기쁨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쁨의 시간이라기 보다는,
축제는 '신과 인간이 만나는 시간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일상을 떠나 초월해야하는 시간입니다. 그 방법에는 술을 마셨을때, 춤을 출때, 그런 음악과 춤, 이런것들을 통해서,
우리 교회의 신학적 용어로는 초월 이고 무속의 언어로는 탈혼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이, 놀다 라는 동사가 히브리말로 짜학 입니다. 이 짜학(צחק) 동사가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사악(이츠하크)에서 발견이 됩니다.
▶ 아브라함의 아들 ; 이사악(Isaak), יצחק
▶ 이츠하크, יצחק : 놀다, 술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춘다. 웃는다는 의미
그래서 이츠학이 태어날 때 사라가 웃었디. 아브라함이 웃었다. 이런 표현들이 동시에 등장하는 바로 그 단어가 여기에 나왔습니다.
조금 다른의미도 함께 갖고는 있는데, 놀았다. 라는 의미가 단순히 인간적인 쾌락을 했다는 게 아니라,
축제의 시간의 쾌락은 신적인 존재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신적 조우가 가능한 상태로 가기위해 술을 먹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 천주교 안에서도 그와 비슷한 것으로 성령기도회에 가보면 노래하면서 찬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덧붙여 성찰할것은 우리가 고백하는 그 하느님이 인간이 만든 그 종교적 심볼 안에 갇혀 있게 된다면 그것은 올바른 신앙의 길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이렇게 성경 공부를 하던지 어떤 신앙 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에 관해서 알려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끝임없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분에 대해서 즉, 신비
하느님을 신비로운 분으로, 하는님을 내 신앙의 깨달음, 내 지식을 통해서 가까이 가고는 있지만,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알수 없는 분이라는 하느님의 신비에 영역을 우리들이 남겨놓아야 하고 그리고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돕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신앙의 심볼 안에 하느님을 가두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묵상과 이 텍스트의 이해가 연결되어 있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아멘~!! 고맙습니다~^^
아멘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