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저城에 묻힌 이디오피아 왕자 유해, 영국 왕실이 반환 거부하는 이유
묘비명엔 “나그네 된 나를 영접했다”...그러나 실제 삶은 고국 그리며 슬픔 가득
영국군이 승리 후 데려와 ‘英왕실의 피후견인’ 삼아...이디오피아에선 “인질”일 뿐
이철민 국제 전문기자 입력 2023.05.24. 12:41 조선일보
영국 BBC 방송은 23일 영국 왕실인 버킹엄 궁이 19세기에 윈저 성에 묻힌 이디오피아 왕세자의 유해를 반환해 달라는 이디오피아 정부의 요청을 또다시 거부했다고 보도했다. 버킹엄 궁 대변인은 BBC방송에 “그가 묻힌 윈저 성의 성(聖)조지 채플 지하 묘소엔 다른 사람들도 묻혀 있어서, 그의 무덤 곁에 있는 많은 이의 안식처를 건드리지 않고 그의 유해를 발굴하기는 가능할 것 같지 않다”고 거부했다.
이디오피아 왕자 데자즈마치 알레마예후는 1868년 일곱 살의 나이에 영국에 왔다. 영국에 오는 길에 엄마는 숨졌고, 영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고아였다.
영국군이 이디오피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영국으로 데려온 왕세자 알레마예후 사진./위키피디아 커먼스
빅토리아 당시 영국 여왕은 그의 처지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그의 후견인이 돼 생활비와 학비를 댔다. 알레마예후 왕자는 나중에 영국의 왕족, 귀족 출신 아이들이 가는 명문 사립학교과 샌허스트 왕립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지만 18세에 폐렴으로 숨졌다.
◇묘비엔 “나그네 됐을 때, 나를 대접했다”고 씌어 있지만
윈저 성의 성(聖)조지 채플에 묻힌 그의 묘비 명은 이렇다.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는 나를 영접하였다(I was a stranger and ye took me in).” 신약성경 마태복음 24장 35절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적 ‘온정(溫情)’이 물씬 배어나는 이 글귀와는 달리, 알레마예후가 영국에서 보낸 짧은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가 영국에 온 것부터가 식민ㆍ제국주의 정책의 결과였다.
1862년 이디오피아 황제 테워드로스 2세는 권력을 강화하려고 영국과 동맹을 원한다는 서한들을 보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응답하지 않았다. 침묵에 분노한 황제는 영국 영사를 비롯한 몇몇 유럽인들을 인질로 잡았고, 영국군과 인도군 1만3000명이 그들을 구출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다.
1868년 영국ㆍ인도 원정군은 황제가 있는 산악 지대의 요새인 마그달라(현재 암바 마리암)를 공격했다. 테워드로스 2세는 영국군의 포로가 되길 원치 않았고, 자결했다. 많은 이디오피아인은 그를 ‘영웅’으로 여긴다.
승리한 영국군은 수천 점에 달하는 이디오피아의 문화ㆍ종교적 예술품을 악탈했다. 역사가들은 훔친 예술품을 옮기는 데만 코끼리 수십 마리와 노새 수백 마리가 동원됐다고 말한다. 이 약탈품은 현재 브리티시뮤지엄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때 영국군은 왕세자인 알레마예후와 그의 어머니 티루워크 우브도 영국으로 데려갔다. 영국 역사가들은 이를 황제가 있었던 마그달라 인근의 정적(政敵)들로부터 모자를 ‘보호’하려는 ‘호의’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디오피아인들은 영국이 왕세자를 ‘훔쳐간’ 것으로 본다.
1868년 6월 영국에 도착한 일곱 살짜리 왕자는 고아였다. 이는 빅토리아 여왕의 동정(同情)을 불러일으켰고, 여왕은 자신의 휴일 별장이 있는 잉글랜드의 와이트 섬에서 알레마예후를 만났다.
여왕은 그의 후견인이 되기로 했고, 이디오피아에서 오는 여정부터 함께 있었던 한 대위에게 왕자를 맡겼다. 대위는 왕자를 인도를 비롯한 세계 곳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공식 교육을 위해 유명한 기숙학교인 럭비 스쿨로 보냈지만, 왕자는 행복하지 않았다. 나중에 육군사관학교인 샌드허스트에서도, 왕자는 인종차별과 따돌림을 당했다. 왕자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이런 뜻을 담은 서한들은 무시됐다.
알레마예후 왕자는 샌드허스트의 왕따를 견디지 못했고, 개인 가정교육을 받던 중에 폐렴에 걸렸다. 그러나 독살(毒殺)을 두려워해 치료도 한때 거부했고, 18세가 되던 1879년에 사망했다.
◇빅토리아 여왕, 그의 죽음에 “모두가 정말 미안하다”
그의 죽음에, 빅토리아 여왕도 큰 충격을 받은 듯하다. 그는 일기에 “착한 알레마예후가 오늘 아침 숨졌다는 전보를 받고, 매우 슬프고 충격을 받았다. 참 슬프다. 이 낯선 나라에서 단 한 명의 친척도 없이 혼자 있었느니. 결코 행복하지 못했다. 온갖 어려움으로 가득한 곳에서, 피부색 때문에 모두가 그를 쳐다본다고 생각하니 얼마나 민감했을까. 모두가 정말 미안하다”고 썼다. 여왕은 알레마예후의 장례를 윈저 성에서 치르게 했다. 윈저 성은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디오피아 정부와 왕실 후손은 과거에도 계속 왕자의 유해와 약탈해간 예술품을 반환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영국 정부와 왕실은 이를 번번히 거부했다. 영국 왕실은 알레마예후의 신분이 ‘왕실의 피후견인’이라는 것이지만, 이디오피아인들에게 그는 포로로 끌려간 ‘인질’이다.
이디오피아의 왕족 출신인 파실 미나스는 “그가 묻힌 곳은 태어난 곳이 아니다. 우리는 가족이자 이디오피아인으로서 유해가 돌아오기를 원한다”고 BBC에 말했다. 또 다른 왕실 후손인 아베베크 카사는 “그는 흑인들의 나라,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에서 떨어져 나가, 조국도 없는 것처럼 그곳에 남았다”며 “그는 슬픈 삶을 살았다.
유해를 보내준다면, 그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여기겠다”고 말했다.
◇”죽은 자의 존엄성 보존해야” vs. “소장품일 뿐”
그러나 버킹엄 궁은 “성 조지 채플은 알레마예후 왕자를 기리고 싶어하는 (이디오피아 정부의) 요청에 민감하지만, 동시에 숨진 사람의 존엄성을 보존할 책임도 있다”며 “왕실은 지금까지도 이디오피아 대표단이 채플을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을 수용했다”고 밝혔다.
이디오피아와의 관계를 연구하는 영국의 사학자ㆍ인류학자인 알룰라 팽크허스트는 “유해 반환은 영국이 피식민 국가와 화해하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디오피아 출신 미국인 작가인 마아자 멩기스트는 워싱턴포스트에 “납치한 왕자의 유해는 이제 영국 미술관과 도서관에 있는 귀중품들과 같이, 하나의 소장품이 됐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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